화투(花鬪)
하루종일 비온다
삼월 사꾸라 삼광으로 홍단 때리다
밖을 보면 비오고
비띠로 비광 때리며
밖을 보면 비가 오고
열끗짜리 팔월공산을 피로 때리며
밖을 보면 공산에 비가 온다.
비 온다.
처마 밑에 낙숫물 소리
영산가락 느린 삼채 중중모리
궁굴체 열채 휘모리로
당 다다다 따르르르 따,
눈 떴다 감았다.
하루종일 비 온다.
푸르딩딩 물오른 장독 뒤에
파랑새 앉은 이월 매조 꽃가지에
꽃 피겠다.
정 이월 지나
일월이 코앞이다.
따뜻하면 꽃도 기어나온다.
에라, 모르겠다. 뛰는 놈 때리라더라.
죽을 놈이 먼 짓을 못하겄냐.
쌀라면 싸라, 먼저 먹는 놈이 장땡이다.
포르릉 새 날겠다. (P.24 )
키스를 원하지 않는 입술
내 입술은 식었다.
키스를 원하지 않는 입술,
내가 사라진 너의 텅빈 눈동자를
내 손등을 떠난 너의 손길을
다시 데려올 수 없다.
달 아래 누우면
너를 찾아 먼 길을 가는
발소리를 나는 들었다.
초저녁을 걷는 발소리를 따라
새벽까지
푸른 달빛 아래 개구리가 울고,
이슬 젖은 풀잎 위에서 작은 여치가 젖은 날개를 비비며
울어도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길이 있다.
미련 없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 그러나 마음은 떠났다.
봄이다.
봄이 온다.
새 풀잎이 돋아나기 전
따뜻한 양지쪽
마른 풀잎들이
일어날 수 없는 몸을 햇살 위에 누이고
노란 햇살로 얼굴을 덮을 때
아직도 어머니의 식은 젖꼭지를 물고 징징거리는 구차한
문학적 가난이,
자라다 만 시대적 응석이 나는 싫다.
이별을 모르니 사랑을 알리 없다.
보수(補修)와 수선(修繕)은 보수(保守)를 낳고
철없는 아집과 미숙은 타락한 수구가 된다.
시인의 꿈은 욕이다.
사랑이 떠난 불쌍한 어머니의 젖꼭지를 놓아라.
키스를 원하지 않는 너의 입술을,
내가 떠난 너의 눈동자를.
나는
이제 싫다. 네가, 뜻없는 네 슬픈 구도가 싫다.
새 풀잎이 돋아나기 전
나는 경남 거창 가조를 지나고 있다.
빈 논과 밭을 끌고 날아오르는 독수리 같은 가조읍 뒷산
아래
하늘을 보고
반듯하게 눕는 풀잎처럼
햇살을 품고 바스락 소리도 없이 말라 죽고 싶다.
바람이 나를 가져가리라
햇살이 나를 나누어 가리라
봄비가 나를 데리고 가리라
아니면 또 어떤가.
키스를 원하지 않는 입술,
돌아앉아버린 식은 사랑의 얼굴을 보았기에
나는 더 나아가지 않으련다.
오오, 사랑이여! 이제 나를 끌어안아다오. (P.35 )
-김용택 詩集, <키스를 원하지 않는 입술>-에서
화투(花鬪)를 못 친다.
할매들도 신나게 치는 그 정다운 유희,를 못 노는 빙충이다.
한때는 배워보려고 나름 학습을 한 적도 있었지만, 머리가 나빠서
인지 처음에 각인이 안된 것은 끝까지 인식을 못하는 자폐적인
성향때문인지 어쨌든, 화투는 내가 함께 놀지 못하는 애석한 동무.
김용택 시인의 '화투(花鬪)'를 읽으며, 오늘 비도 오신다 하니
그 어여쁜 꽃들의 전쟁을...중중모리 휘모리,로 신나게 즐길 작정이
다. 화투를, 詩로 배웠습니다..
김용택 시인의 이 <키스를 원하지 않는 입술>은, 여전히 변모의
지속이다. 처음처럼 수줍다-는 시인의 말처럼.
詩集의 題目이기도 한 '키스를 부르지 않는 입술'의 '너'는,
내게 오늘 많은 意味로 다가온다.
든든하고 아름다운 詩集 덕분에, 오늘도 또 좋은 날이로구나,
어느날
나는
어느날이라는 말이 좋다.
어느날 나는 태어났고
어느날 당신도 만났으니까.
그리고
오늘도 어느날이니까.
나의 시는
어느날의 일이고
어느날에 썼다. (P.10 )
유일한 계획
이사를 가면
개를 키우겠다.
큰물이 나가면
물가에 나란히 앉아
물구경하다가
아내가 마당에 서서
밥 먹자고 부르면
귀를 쫑긋 세우고
나보다 먼저 일어서는
개를 한마리 키우겠다. (P.14 )
낭만주의 시대
외상으로 책을 샀다.
책을 외상으로 사들고
서점 문을 나서는
나는 가난하였다.
가난이 달았다.
책을 외상으로 사들고
서점 문을 나서서
한시간 오십분 동안 완행버스를 타고
책을 보다가
차에서 내려 삼십분 동안
밤길을 걸어 집으로 왔다.
어떤날은 헌책을 샀다.
지게로 한짐이었다.
책을 짊어진 나는
밤나락을 짊어진 농부처럼
성큼성큼 들길을 걸어
집으로 왔다. (P. 26 )
울고 들어온 너에게
따뜻한 아랫목에 앉아 엉덩이 밑으로 두 손 넣고 엉덩이
를 들었다 놨다 되작거리다보면 손도 마음도 따뜻해진다.
그러면 나는 꽝꽝 언 들을 헤매다 들어온 네 얼굴을 두 손
으로 감싼다. (P.42 )
쉬는 날
사느라고 애들 쓴다.
오늘은 시도 읽지 말고 모두 그냥 쉬어라.
맑은 하늘가에 서서
시드는 햇볕이나 발로 톡톡 차며 놀아라. (P.60 )
처음
새 길 없다.
생각해보면
어제도 갔던 길이다.
다만,
이 생각이 처음이다.
말하자면,
피해가던 진실을
만났을 뿐이다. (P.72 )
포의(布衣)
바람 같은 것들이 사립문 근처에다가 마른 감잎이나 끌
어다 놓고
인사도 없이 간다.
마당에 떨어져 얽힌 감나무 실가지 그림자들을
풀어주고
내 방에
반듯하게 앉아
시를 쓰다. (P.74 )
산문(散文)
닭들이 장태로 들어가면 나는 닭을 세고 장태 문울 닫
았다.
우리들은 마당을 쓸어놓고 아버지가 돌아오실 때까지
놀았다.
아버지는 지게 위에서 칡잎에 싼 산딸기를 뜰방에 내려
놓으며
땀에 젖은 소매로 얼굴을 닦았다.
아버지를 본 소가 여물을 먹다가 고개를 크게 흔들었다.
강에서는 물고기들이 개밥바라기별을 향해 별빛 속으로
뛰어들고
우리들은 마루에 둘러앉아
밥을 먹었다.
어떤 날은 거지가 우리 밥상에 앉아 같이 밥을 먹었다. (P.75 )
나무
나는 창을
등지고 앉아
책을 보고
글을 쓴다.
책을 보다가,
글을 쓰다가.
문득 뒤돌아보면
날이 밝아 있다.
나무들이 서 있다. (P.77 )
-김용택 詩集, <울고 들어온 너에게>-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