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작업실에서 5분정도 떨어진 해장국집을 찾아가곤 하는데, 며칠 전엔 그곳에서 색이 바랜 하얀 와이셔츠를 입은 청년을 만났었다. 청년은 양손에 파인애플과 칼을 든 채, 이 자리 저 자리 돌아다니고 있었다.
"일단 한번 드셔보시구요, 그때 결정하세요."
청년은 해장국집 한 귀퉁이를 차지하고 있던 네 명의 취객들에게 파인애플 조각을 썰어주며 말했다. 파인애플 두 개에 만 원. 취객들은 청년과 비싸네 싸네, 잔류농약이 많네 적네, 캘리포니아 산이네 중국산이네, 실랑이를 하다가 파인애플을 구입했다. 나는 그 모습을 바라보면서, 청년이 내쪽으로 다가올까 봐, 고개를 푹 숙인 채 열심히 콩나물 해장국을 퍼먹었다. 나는 운동복 바람이었고, 달랑 만원짜리 한 장만 들고 나온 상태였다. 다행히 총각은 발길을 돌려 나갔다.
이런, 또 다른 파인애플 장사꾼 한 명이 해장국집으로 들어섰다. 이번엔 40대 중반의, 머리가 반쯤 벗겨진 까무잡잡한 남자였다. 남자는 두툼한 패딩 점퍼와 귀마개까지 하고 있었는데, 그 때문에 그는 더 왜소해 보였다.
한 발 늦은 남자는 취객들의 짜증을 고스란히 받아내야만 했다.
"아, 진짜 술맛 떨어지게."
남자는 영문도 모른 채 괜스레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해장국집 사장은 그를 말리지 않고 가만히 카운터 위 컴퓨터 모니터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도 남자는 해장국집 밖으로 나가지 않고, 이번엔 천천히 나에게 다가와 파인애플 한 조각을 내밀었다. 깍두기 모양으로, 작게 썬 파인애플 조각이었다. 어찌해야 하나 망설이고 있는데, 남자가 아무 말 없이 조용히 자리를 떴다. 나는 그제야 고개를 들어 남자의 뒷모습을 훔쳐보았다. 허리가 구부장하게 앞으로 휜, 작고 여린 등이었다. 해장국 사장은 괜스레 여러 번 헛기침을 해댔다. 내 상위엔 남자가 놓고 간 노란 파인애플 한 조각이 남아 있었다. 나는 그것을 입안으로 넣어보았다. 달콤했지만, 짜르르한 통증이 명치께 남았다.
그날 밤, 나는 해장국집에서 나와 작업실로 돌아가지 않고 곧장 집으로 들어왔다. 소리죽여 안방 문을 열자, 어둠 속에서 아내가 칭얼대는 막내의 등을 무의식중에 토닥거리는 것이 보였다. 잠든 아내는 피곤해 보였고, 아이들은 그런 아내의 곁을 계속 파고들려 애쓰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다가 나는 잠깐 울컥하고 말았는데, 좀전 해장국집에서 만난 40대 중반의 남자가 왜, 취객들의 짜증을 받으면서도 밖으로 나가지 않았는지, 그걸 비로소 깨달았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는 누군가의 아버지였을 것이고, 또 누군가의 남편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밖으로 나가지 못했을 것이다. 잠든 아이와, 또 잠든 아내가 기다리고 있었을 테니까.
모두 힘든 시절을 보내느라 애쓰고들 있다. 살아간다는 게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닐 테지만, 이런 말이 작은 위로라도 되길 바라본다. '우린 모두 보이지 않는 작은 끈으로 이어진 존재들이지요. 그걸 믿습니다.' 모두 힘들 내시길. (P.127~131) 소설가, 이기호.
-그림이 있는 에세이, <사람은 사람을 부른다>-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