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더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1968. 5. 29 ) 

 

 

 

 

 

 

 

 작고하던 해 5월 29일, 수영의 마지막 작품이다. 바람이 몹시 불던 날이었다. 뜰 안 무성한 풀이 바람에 이리저리 나부끼듯 흔들렸다. 그즈음 수영은 하이데거 전집을 한창 읽고 있었다. 한 권을 읽고 나면 몇 번씩이나 그 감명을 내 귓전에 이야기하면서 아이처럼 신나했다. 특히 [시와 언어]를 읽을 때는 자기가 그렇게 하고 있다고 자신만만하게 힘주어 말하기도 하였다. 이 '진짜 시인'이 바로 당신의 남편이라면서.... .

 이제 분명한 것은 수영이 자처했던 '그 '진짜 시인'은 가고 없을지 모르나 '진짜 시'가 영원히 남겨졌다는 것이다. 그것만이 내 남은 생의 유일한 위로가 될 수 있다.

 시 [풀] 역시 수식 없이 그의 온 몸에서 울려 나온 듯한 소리로 꽉 차 있다. 풀이 척박한 땅을 탓하지 않듯 수영의 시는 과잉도 부족도 없이 그의 몸 안으로 흐르고 있는 것 같다. 탈고를 하고는 수영은 매우 만족스러워 했다.

 늘 작품을 한 편 완성하면 개선장군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 봄날 같이 평온한 날들이 달포쯤 지나면 여지없이 다시 폭풍우가 몰아쳤다. 다시 새로운 시를 쓰느라 꼭 몸부림 같은 진통을 겪는 것이었다. 일 년에 열두 편에서 열세 편의 시를, 수영은 자신만의 주기를 갖고 있었다.

 시에 대한 시인으로서의 자세와 수영의 시 정신의 끝은 존재에 대한 사랑에 꽂혀 있었다. 개인으로서 시인의 행복이란 있을 수 없는 것으로 여기고 안일과 무위(無爲)를 극도로 거부한 그였다. 오직 존재의 참되고 아름다운 정신의 지표를 바랐다. 자학까지 하면서 그는 그 길을 가고 있었다. 그 길가에서 자라나던 무성한 풀잎들, 내 가슴 속에는 언제나 그의 싱싱한 풀들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다.  (P.133~135 )

 

 

 

                                                                  -김현경 에세이, <김수영의 연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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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3-19 19: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3-20 05: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3-19 22: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3-20 05: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파란놀 2013-03-20 07:36   좋아요 0 | URL
마음속으로 풀 한 포기 심으면서
삶이 푸르게 빛나도록 하면
늘 시를 쓰리라 느껴요

appletreeje 2013-03-21 09:36   좋아요 0 | URL
예~삶이라는 푸른 시를 쓰고 싶어요.
함께살기님! 오늘도 좋은 날 되세요.^^

드림모노로그 2013-03-20 13:22   좋아요 0 | URL
제가 가끔 심심하면 들춰보는 시집이 김수영시집이랑
기형도 전집인데 ㅎㅎㅎ
아 이 책은 정말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김수영시집 자체가 워낙 애절해서요
아내분이 보여주시는 김수영의 모습도 그러할 듯 합니다 ^^
풀은 정말 ~ !!
좋은 하루 보내세요 ^^

appletreeje 2013-03-21 09:34   좋아요 0 | URL
가장 곁에서 시인의 시를 지켜 본 분의 글이라 한층 와닿는 책이었어요.
드림님께서도 즐거이 읽으실 책 같아요.^^
오늘도 좋은 하루 되세요.`*^^*

착한시경 2013-03-21 01:16   좋아요 0 | URL
참 오랫만에 보는 시예요^^풀잎은 민중을 상징하고...바람은 민중을 억압하는 세력이다..국어시간에 배운 내용들이 생각나요...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문학을 어떻게 이렇게 배웠을까 싶어요..틀에 가둬놓고 개인의 감정을 무시하고 주입식으로 외웠던 방법들이~ 하여튼 참 좋아했던 시예요^^

appletreeje 2013-03-21 09:36   좋아요 0 | URL
정말이지요. 어떻게 그렇게 배웠을까요..
착한시경님! 좋은 날 되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