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방견문록
돈과 힘을 가진 자들이 금을 좋아하지 않았더라면
부(富)의 분배는 이뤄지지 않았으리
케이남 바닷가에서 사금(砂金)캐는 사람아
이 누렇고 빛나는 덩어리는 돈과 힘 있는 자들에게 줘
버리고
잽싸게 쌀과 옷감으로 바꿔 오자
뙤약볕에 온몸이 그을린들 우리야 무슨 상관이랴
튼튼한 계집에게서 자식을 얻고
크거든 마을의 전설을 밤새 읇어줄 뿐이다. (P.13 )
나이
강의실의 두 풍경이 목덜미를 붙잡는다
수업시간에 젊은 것들은 여기저기
간밤에 뭘 했는지 졸거나
옛날 빨간 책처럼 노트북으로 무선 인터넷을 보거나
그렇게 선생의 속을 뒤집어놓는다
고얀 것들.....
지역의 도서관이나 박물관에서 특강이라 부를 때가
있다
더러 나보다 연배가 위인 참석자들
초롱초롱한 눈으로 뚫어지게 쳐다보면서
서늘한 농담이나 따라 웃는다
아름다운 분들.....
나는 고얀 것들에 분노하고 아름다운 분들께 감읍한다
수업이 끝나고
골탕 한번 먹어봐라 고얀 것들한테 질문하는데
언제 들었는지 잘도 대답한다
아름다운 분들은
언제 그런 말씀 하셨냐는 얼굴
그래, 참 잘났다.... , 나이. (P.20 )
새물이 들때마다*
그리운 만큼의 시간을
나는 사랑한다
떠난 사람도 돌아간 사람도 있다
그들이 생각나는 저물 무렵
골목을 돌아 모퉁이의 담쟁이 넝쿨이 벽에 붙은 계단
과 함께 올라가는
오랜 찻집에 홀로 앉아 있다가
비슷한 나이를 살아온
전혀 다른 하늘 아래였건만
마치 한세상 함께 엮은 것처럼 여겨지는 어떤 사람에게
나는 천연덕스럽게 지난날을 털어놓겠다
밀물은 얼마나 많이
들어오고 나갔던가
그래도 또 무슨 그리움을 만들어줄 것처럼 이 저녁 새
물이 들고 있다. ( P. 68 )
* 이숙희가 부른 <부산 블루스>에서.
-고운기 詩集, <구름의 이동속도>-에서
시인의 말
단속사 터에서 고개 넘어 가면 산청읍에 닿는다. 지리
산 아래 이 소읍은 이름만큼이나 참 깔끔했다.
단속사(斷俗寺). 속세와 절연한다는 단호한 이름.
절터에서 나와 고개를 넘다 작은 카페에 들렸다. 저수
지가 눈앞에 펼쳐지고, 펜션이 붙어 있는 집이었다.
구름그늘 - .
문득 가방에 넣어온 이번 시집의 교정지가 생각났다.
구름의 이동속도- .
사실 세 번째 시집에 실렸던 시의 제목인데, 궁리 끝에
이번 시집으로 빌려왔다.
내 이름의 '운(雲)'은 구름이다. 왠만해선 이름에 넣지
않는 글자지만, 아버지는 무슨 생각으로 이것을 쓰셨
을까. 더러 내게 출가자냐고 물어오는 이도 있다. 구름의
이동속도. 그러니 이 제목은 나의 이동속도를 말하는 것
이기도 하다. 등단 30년에 다섯 번째 시집. 참 천천히 움
직였다.
구름그늘에 앉아 구름은 자신을 위해 맥주 한 병 시켰다.
2012년 가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