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홀한 국수
반죽을 누르면 국수틀에서 국수가 빠져나와
받쳐놓은 끓는 솥으로
가만히 들어가
국수가 익듯,
익은 국수를 커다란 소쿠리째 건져
철썩철썩, 찬물에 담갔다가
건져내듯,
손 큰 어머니가 한 손씩 국수를 동그랗게 말아
그릇에 얌전히 앉히고
뜨거운 국물을 붓듯,
고명을 얹듯,
쫄깃쫄깃, 말랑말랑
그 매끄러운 국숫발을
허기진 누군가가
후르륵 빨아들이듯,
이마의 젖은 땀을 문지르고
허, 허 감탄사를 연발하며 국물을 다 들이키고 나서는
빈 그릇을 가만히 내려놓은
검은 손등으로
입가를 닦듯,
살다 갔으면 좋겠다 (P.30 )
책의 등
책꽂이에 책들이 꽂혀 있다
빽빽이 등을 보인 채 돌아서 있다
등뼈가 보인다
등을 보여주는 것은
읽을거리가 있다
아버지가 그랬고
어머니가 그랬다
절교를 선언하고 뛰어가던
애인이,
한 시대와 역사가 그랬다
등을 보이는 것은 지는 것이 아니다
잠깐 다른 곳을 보는 것이다
옷을 갈아입는 네가
부끄러울까봐
멋쩍게 돌아서주는 것이다 (P.57 )
-고영민 詩集,<공손한 손>-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