掌篇 2
김종삼 (1921~1984)
조선총독부가 있을 때
청계천변 10전 균일 상밥집 문턱엔
거지 소녀가 거지 장님 어버이를
이끌고 와 서 있었다
주인 영감이 소리를 질렀으나
태연하였다
어린 소녀는 어버이의 생일이라고
10전짜리 두 개를 보였다 (P.54 )
이사
서수찬 (1963~)
전에 살던 사람이 버리고 간
헌 장판지를 들추어내자
만원 한 장이 나왔다
어떤 엉덩이들이 깔고 앉았을 돈인지는 모르지만
아내에겐 잠깐 동안
위안이 되었다
조그만 위안으로 생소한
집 전체가 살 만한 집이 되었다
우리 가족도 웬만큼 살다가
다음 가족을 위해
조그만 위안거리를 남겨 두는 일이
숟가락 하나라도 빠트리는 것 없이
잘 싸는 것보다
중요한 일인걸 알았다
아내는
목련나무에 긁힌
장롱에서 목련향이 난다고 할 때처럼
웃었다 (P.58 )
아침
문태준 (1970~ )
새떼가 우르르 내려앉았다
키가 작은 나무였다
열매를 쪼고 똥을 누기도 하였다
새떼가 몇 발짝 떨어진 나무에게로 옮겨가자
나무상자로밖에 여겨지지 않던 나무가
누군가 들고 가는 양동이의 물처럼
한 번 또 한 번 출렁했다
서 있던 나도 네 모서리가 한 번 출렁했다
출렁출렁하는 한 양동이의 물
아직은 이 좋은 징조를 갖고 있다 (P. 86 )
가슴에 묻은 김칫국물
손택수 (1970~ )
점심으로 라면을 먹다
모처럼 만에 입은
흰 와이셔츠
가슴팍에
김칫국물이 묻었다
난처하게 그걸 잠시
들여다보고 있노라니
평소에 소원하던 사람이
꾸벅, 인사를 하고 간다.
김칫국물을 보느라
숙인 고개를
인사로 알았던 모양
살다 보면 김칫국물이 다
가슴을 들여다보게 하는구나
오만하게 곧추선 머리를
푹 숙이게 하는구나
사람이 좀 허술해 보이면 어떠냐
가끔은 민망한 김칫국물 한두 방울쯤
가슴에 슬쩍 묻혀나 볼 일이다 (P.140 )
-<선천성 그리움>, 손택수 엮음-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