캔맥주를 마시며
맹인들도 맥주를 마시는구나 겨우 생각했네
캔맥주 입구에
돋을새김해 놓은 점자를 만지며
맹인은 만져만 보고도 아는 그것을
만져보고 눈으로 보고도 알지 못하네
살아야 할 이유를 모르고 살며
마셔야 할 이유도 모르는 체 마시는 나를
청맹과니라 이르는 듯하네
그렇지 눈 뜬 봉사란 말 있잖은가
사십을 훨씬 넘어서도
철없기는 아직 사춘기라
지나온 길 깜깜하고
길 아득하여
술이나 마셔야 턱없는 힘이 솟네
솟는 힘 쓸 곳을 안다면야
사춘기보다 윗길이겠지만
겨우 빈 캔을 세워놓고 뒤꿈치로 찌그러뜨리는 정도라니
그만 하릴없이 눈 감아볼밖에
눈 감아 그려볼 유토피아라도 있다면
이대로 더 어려져서
어두워진 세상 점자처럼 더듬으며
다시 한번 살고 싶네 (P.98 )
직립
취기가 덜 풀린 내 출근길
앞 차, 트럭에 실려
황소 한 마리
굽이굽이 여원재 넘고 있다
차가 커브를 돌 때마다
아차, 균형을 놓치고 무릎을 끓는가 싶더니
애써 일어서 버팅긴다
평소 풀밭에서 그러하듯이 차라리
네 무릎 꺾고 앉으면 편할 텐데
한사코 일어서 버팅긴다
때론 긴장을 놓아버리려 술을 마시고
마신 김에 균형마저 놓아버리려
함부로 무릎을 꺾던 내 중년에게
보라는 듯 일어서
살아있음의 위의威儀를 묻는다
저승이 가까워오면 사람이 그렇듯이
항문이 열려 된똥 한무더기 쏟고
큰 눈망울에 물기 흥그렁한 걸 보니
이 길 끝에 무릎을 놓는 그곳이
저승임을 아는 모양이다
다만 실려가긴 하지만
제 한 몸은 제가 끌고 가겠다는 듯
더운 김 푹 푹 뿜는 동안은 고깃덩이는 아니지 않느냐고
곧은 뿔 앞세우고
소는 버틴다 (P.56 )
-복효근 詩集, <마늘촛불>-에서
늦은 저녁으로 알이 통통한 새우볶음밥과 , 레몬 파인애플 드레싱을 뿌린 샐러드를 먹으며 이 시를 읽다가, 나의 청맹과니와.. 살아있음의 '위의威儀'를 생각했다.
할 말이 없다.
냉장고에서 캔맥주를 한 캔 꺼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