없다고 생각하는 쪽이다. 모든 우연은 필연이 몸을 감추는 방식이며 또한 몸을 드러내는 방식이다. 우리가 기억하지 못하는 까마득한 시간 여행을 통과해, 기나긴 인과의 여정을 거쳐 우리는 지구라는 이 별에 다다른 것이 아닐까.

 내가 당신과 만나거나 혹은 스쳐갈 때, 하나의 사물이 다른 사물의 옆에 가지런히 놓이게 되거나 혹은 포개질 때, 그 모든 순간들 속에서 생의 지도가 들숨과 날숨을 쉬며 그 어딘가를 향해 조금씩 뿌리를 뻗고 있는 중인 것이다. 매일 매 순간 조금씩 변하면서 아주 오래전부터 그려져온 몸의 지도, 마음의 지도, 영혼의 지도, 계절의 지도, 인생의 지도, 우주의 지도..... . 우주를 이루는 모든 질료들이 당신과 내 몸에서 그대로 발견되는, 어느날 문득 발견한 내 몸의 점 하나가 별을 부르고 풀씨 하나가 우주를 떠받치며 당신의 몸이 우주가 되는 지극한 비밀을 갖지 못한다면 생은 얼마나 밋밋하고 팍팍하겠는가. (P.194 )

 

 더 빨리 어떤 목적지에 닿기 위한 길을 찾기 위해 지도를 펴 들게 된다면 서둘러 그 지도를 버려야 한다. 자기 앞의 생을 찾아가는 그 모든 과정들이 얼마나 애틋한지를 보여주는 징표로서의 지도는 '거기'를 꿈꾸게 할 뿐만 아니라 '여기'를 돌아보게 하는 아주 느린 흔적들의 집이기 때문이다. (P.198 ) / <지도, 시간과 공간이 함께 잠드는 뜨락>.   

 

 

 

 새로운 세계로 가는 배내옷

 

  수의는 이 별에 처음 올 때 벌거벗은 맨몸이었던 우리가 지상에서 걸치게 되는 마지막 옷이다. 그것은 마지막 옷이면서 동시에, 또 다른 저편 세계에서 막 태어나기 시작한 이의 최초의 옷이다. 죽음을 통해 순환의 새로운 마디에 들어선 이의 배내옷, 마지막이면서 처음인 옷, 그리하여 수의는 나를 향해 웃고 있는 또 다른 나-'나들'사이의 혼례복이다. (P.206 ) /<수의, 어둠과 빛 사이의 찬란한 배내옷>

 

 

 

  낮은 무릎이 필요하다

 

  고독도 과하면 병이 되고 관계도 과하면 병이 된다. 그저 즐길만한 수준이면 좋다. 즐길 수 있기 위해서는 적당한 거리와 침묵이 필요하다. '적당한'이란 어느 만큼일까. 어린 시절 종이컵 두 개를 실로 연결하여 만들었던 전화기 같은 것, 방문 이쪽과 저쪽에서 한 쪽은 귀에 한쪽은 입에 대고 무어라 소곤소곤 말하고 듣던 그 거리만큼이면 좋을 듯싶다. 무슨 말이 내게로 건너오는지를 듣기 위해 참으로 진지하게 귀를 쫑긋하던 그 설렘과 떨림의 거리. 그만큼이 전화기라는 사물이 구현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거리가 아닐까 생각하곤 한다. 그 쫑긋거림, 저 편의 숨결까지 감지하고자 온 몸을 기울이는 극진함이 살아있는 세계. 문 저편이 침묵 중이라면 침묵의 언어를 극진한 마음으로 헤아릴 수 있었으면 좋겠고, 사람의 말뿐만 아니라 갖가지 사물과 동식물과 흙과 물의 말 앞에서도 좀 더 극진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내 몸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는 것처럼 나무둥치 속에서도 물이 순환하는 소리가 들린다는 것을, 그것이 나무의 말이며 나무 한 그루 꽃 한 송이 갖가지 사물들이 실은 너무도 풍성한 말을 거느린 언어의 마법사들이라는 것을 날마다 새롭게 깨달아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러기 위해서는 잘 극진하게 들을 수 있는 낮은 무릎이 필요하다. (P.237~238 )   / <휴대폰,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김선우의 사물들>-에서

 

 

 

 

 

 이 책은, 공선옥 작가의 추천글처럼 많은 시간을 들여 또박또박 천천히 읽어야 되는  그런 책이다. 스마트폰의 모든 편리한 기능들, 앱으로도 할 수 없는 그런 사물事物들의 고요하고 정지된, 그러나 지도를 펼치고 또 다른 세계로 이동할 수 있게 해주는 아득한 체화의 경험을  다시금 일깨워 주는 '공간'의 책이다.   알고 있었거나, 잊혀졌던 사물의 말들이 나비처럼 날아올라 삶이라는, 공간( 空間)속을 춤춘다.

 작가의 말처럼 - 할수만 있다면, 나도 프로스트가 사랑한 마들렌 과자 맛의 신비처럼, 저 얄쌍하고 세련된 디자인의 휴대폰을 맛있는 커피 한잔과 함께 먹어치웠으면 좋겠다. 그래서 이 납작하고 얄쌍한 휴대폰 조각을 커피에 적셔 맛있게 먹어치우고 빈손으로 문 밖을 나서는 순간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가는 먼 길의 첫 번째 문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댓글(10) 먼댓글(0) 좋아요(2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프레이야 2013-02-03 14:05   좋아요 0 | URL
님의 글이 더 좋으네요.^^
휴대폰이 없으면 시간이 더 남을까요? 아마도 그럴 것 같아요.
맛있는 그 시간에 무얼해도 좋겠지요.^^
집에 있는 이 책 예전 것을 펼쳐봐야겠어요.

appletreeje 2013-02-03 14:45   좋아요 0 | URL
앗, 프레이야님! 반가워요~^^
여행 잘 다녀 오셨어요~?
좋은 얘기 많이 들려주세요.^^
이 책은 우창헌 화백의 그림이 더해졌지요~~

오늘도 좋은 날 되세요.*^^*

보슬비 2013-02-03 18:02   좋아요 0 | URL
프레이야님의 댓글에 동감합니다.
나무늘보님의 글을 읽으니 처음 몇페이지 읽고 덮었던 '읽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어봐야지..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사실 그 책 때문에 파리에 갔을때 한개에 1유로 하던 마들렌 한개 사서 먹었는데, 저는 추억이 없어서인지 좀 아까웠어요. ㅎㅎ

appletreeje 2013-02-04 09:32   좋아요 0 | URL
색깔 고운 마들렌은 정말 '상상속의 맛'인 것 같아요.
제게도 마들렌의 맛은 달기만 했어요.^^
언젠가인가 신민아가 나온 '마들렌'이란 영화를 본 기억이 나는데
그 영화 역시 추억에 관한 영화였던듯..

2013-02-03 18: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2-04 09: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수이 2013-02-03 20:53   좋아요 0 | URL
스맛폰을 없애면 좋겠지만 그건 불가능하고,
그래서 에스엔에스 어플을 모두 삭제했어요.
언젠가부터 계속 페북이나 트윗 알림에 그때그때 댓글 다는 제 자신을 보고
이건 아니다 싶어서 과감하게 삭제했어요.
김선우 시인의 시만 읽었는데 산문도 좋을 거 같아요.

appletreeje 2013-02-04 09:37   좋아요 0 | URL
은근 중독이 되는 것 같아요. 요즘 세상에서 소통의 방식들이요.
돌아서면 뭔가 허탈하지만요.
이 산문집은 정말 오랜만에 또박또박 읽었던 책이였어요.^^
앤님! 오늘도 행복한 날 되세요.*^^*

수이 2013-02-04 12:59   좋아요 0 | URL
나무늘보님이 오늘도 행복한 날 되라는 인사해주셔서 그런가 요즘 매일매일 행복해요. 나무늘보님과 소통하게 되어 전 좋아요. 사물과 인생의 밝은 면을 보라고 자꾸 이끌어주시는 거 같아서.

appletreeje 2013-02-04 20:35   좋아요 0 | URL
제가 더 좋아요~~~앤님과의 소통이요.^^
근데..사실은..저..'어둠의 아줌마'..이지요.(앗, 지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