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의 그 집
빗자루병에 걸린 대추나무 수십 그루가
어느날 일시에 죽어 자빠진 그 집
십오 년을 살았다
빈 창고같이 횡덩그레한 큰 집에
밤이 오면 소쩍새와 쑥꾹새가 울었고
연못의 맹꽁이는 목이 터져라 소리 지르던
이른 봄
그 집에서 나는 혼자 살았다
다행히 뜰은 넓어서
배추 심고 고추 심고 상추 심고 파 심고
고양이들과 함께
정붙이고 살았다
달빛이 스며드는 차거운 밤에는
이 세상 끝의 끝으로 온 것 같이
무섭기도 했지만
책상 하나 원고지, 펜 하나가
나를 지탱해 주었고
사마천을 생각하며 살았다
그 세월, 옛날의 그 집
나를 지켜 주는 것은
오로지 적막뿐이었다
그랬지 그랬었지
대문 밖에서는
늘
짐승들이 으르렁거렸다
늑대도 있었고 여우도 있었고
까치독사 하이에나도 있었지
모진 세월 가고
아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리 편안한 것을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P.15 )
이야기꾼
고담 마니아였던 나의 친 할머니는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구두쇠였지만
조웅전, 대봉전, 충렬전, 옥루몽, 숙영낭자전
웬만한 고담 책은
돈 아끼지 않고 사서 소장하고 있었다
글을 깨치지 못했던 할머니는
이따금
유식한 이웃의 곰보 아저씨 불러다 놓고
집안 식구들 모조리 방에 들라 하여
소위 낭독회를 열곤 했다
책 읽는 소리는 낭랑했고 물 흐르듯
듣는 사람들은 모두 숨을 죽인 채
그리하여 밤은 깊어만 갔다
내 어머니도 글 모르는 까막눈이었지만
고담 마니아였을 뿐만 아니라
책 내용을 줄줄 외는 녹음기였다
어느 여름날인가 지금도 생생한 기억
동네 사람들이 모여 물맞이하러 가던 날
점심은 물론이고 참외며 수박
기타 음식을 바리바리 장만하여
마메다쿠시를 여러 대 불러서 타고 떠났다
어머니는 택시비도 내지 않았고
아무 준비 없이 나만 데리고 동행했다
그러니까
이야기꾼으로 모셔 간 셈이다
구성진 입담에다가 비상한 암기력
그것이 어머니에게는
사교적 밑천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사람들과 어우러져도
노래 한 자리 할 줄 몰랐고
춤을 추며 신명 낼줄도 몰랐고
술은 입에 대지도 않았다
심지어 농담 한마디 못하는 숙맥이었다
아마 그러한 점을
조금은 내가 닮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P.83 )
-박경리 유고시집,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에서
춥고 서늘한 토요일 아침, 말(言)들의 群舞가 어지러워
박경리 선생님께서 마지막 순간까지 펜을 놓지 않고
남아있는 모든 기운을 사르면서 남기신 39편의 詩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를 읽는다.
그다지 고치시지도 않고 물 흐르듯 써 내셨다는, 시들을 읽으니
고요하다. 그러면 된 것이다. 고요한 토요일 아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