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림 <샤갈작품 모사화, 나무와 추락하는 천사가 등장하는 부분>Oil on canvas, 2001
70년대만 해도 민둥산은 우리나라 어디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었다. 오죽했으면 식목일을 국가 기념일로 정해 나무 심기를 권장했겠는가. 초등학교 4학년 때였을 것이다. 우리 담임선생은 멋쟁이 총각 선생님이었는데(아침 조회 시간마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나씩 들려주었는데, 그 이야기들 대부분이 톨스토이 단편소설집에 실린 내용이라는 사실을 나중에 알았다), 그날은 거두절미 심각한 표정으로 우리나라의 산과 나무 이야기를 꺼냈다.
“대머리처럼 헐벗은 산들을 보면 정말 마음이 아프단다. 가까운 나라 일본만 해도 산에 나무가 얼마나 빽빽한지 집 뒤에 있는 동산조차 사람들이 함부로 들어갈 수 없을 정도란다. 그런데 우리나라 산들은 죄다 벌거숭이잖아. 그런데도 아직 산에 가서 나무를 꺾어 오는 사람들이 있으니 창피할 노릇이지. 너희들은 나무를 소중히 생각해야 한다. 함부로 베거나 꺾어서는 절대로 안 되는 거야. 알았지?”
일본 이야기만 나오면 괜히 기가 죽던 시절이었다. 선생님은 한동안 일본 숲의 우거진 모습이며 그것을 보살피는 시민 정신, 일본 민가에 출몰하는 야생동물과 뱀 이야기까지 해주더니 지난 주말 식목일에 나무를 심은 사람이 있으면 손을 들어보라고 했다. 우리는 멀뚱한 눈으로 교실 안을 두리번거렸다. 손을 드는 학생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없어? 단 한 명도? 어허, 이거 참. 그럼 화단에 꽃씨라도 뿌린 사람 있으면 어디 손 좀 들어 보거라.”
이번에도 아이들은 묵묵부답이었다. 서로 눈치만 살필 뿐이었다.
“식목일에 나무 심은 사람 있으면 교장 선생님이 표창장을 준다고 했는데…”
선생님은 난감한 표정으로 우리를 지켜보다가 결국 반장을 불렀다.
“너 지금 교무주임 선생님께 가서 우리 반에는 나무를 심은 사람이 한 명도 없다고 말씀드려라.”
선생님의 명을 받은 반장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교무실로 달려 나갔다. 그해 식목일에 어느 반의 누가 표창장을 받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방과 후 학급 대표들을 모아 학교 안에서 나무 심기 행사를 했던 일만큼은 어렴풋이 기억난다.
그 후로 40년쯤 시간이 흘렀다. 오늘날에는 다행히도 우리나라 어디를 가나 울창한 숲을 쉽게 볼 수 있게 되었다. 한국이 그동안 많이 개발되고 발전했지만, 그런 자연 경관이야말로 우리 앞에 펼쳐진 가장 큰 긍정적 변화가 아닐까 싶다.

그림<샤갈을 추억하며. 모사화> Oil on canvas, 91.0×72.7cm, 1998-2013
지난 식목일에는 라디오에서 나무 심기에 관한 사연이 연이어 소개되었다. 지금도 초등학교에서 나무 심기 행사를 계속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무 사랑에 대한 열의만큼은 여전히 줄지 않은 모양이다.
나도 그날 식목일을 맞아 모처럼 화분 몇 개를 분갈이했다. 내 집에는 화분이 꽤 많은 편이다. 어린 묘목을 사다가 공들여 키운 것도 있고, 직접 뿌리를 내려 화분에 심은 것도 있으며, 어느 정도 자란 것을 사다가 물만 주며 키운 것도 있다.
젊었을 때는 화분과의 관계가 별로 좋지 않았다. 키우는 화분마다 말라 죽기 일쑤였다. 어느 영화에서 이런 대사를 들은 적이 있다. 결혼을 하고 싶다면 먼저 애완견을 키워보고, 애완견을 키우고 싶다면 우선 화초부터 키워보라고. 그런데 나는 그 첫 번째 관문조차 통과하지 못한 셈이었다.
화분 하나 제대로 키우지 못하는 인생의 각박함이라니.
근처에 화분을 잘 키우는 지인이 있어 더욱 내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인가 상황이 달라졌다. 식물들이 나를 잘 봐주기 시작한 것인지, 아니면 내 몸에서 흐르는 기의 흐름이 좋아진 것인지 모르겠다. 아무튼 우리들 관계가 우호적으로 바뀌었다. 키우는 족족 내 손끝에서 죽어버리던 식물의 암흑기가 흘러가고 이제는 녹색의 풍요로운 성수기, 평화의 시대가 찾아온 것이다.
내 손만 닿아도 무럭무럭 커버리는 화초들, 그 무성한 우거짐.
내 마음이 편해졌다거나 집안의 채광 환경이 좋아졌다거나, 그런 일반적인 설명만 가지고는 결코 해석할 수 없는 부분이다. 내 손만 닿아도 무럭무럭 커버리는 화초들. 그 무성한 우거짐.
아마도 그것은 사랑일 것이다. 모든 생명체는 사랑을 먹고 자란다. 사람도 강아지도 야생의 풀도 모두 마찬가지다.
사랑이 지나치면 집착이 된다. 화분 중독에는 약도 없다. 일단 화분에 빠지면 어딜 가나 화초들만 눈에 들어온다. 그러다 보니 하나둘 늘어난 화분들로 어느새 집안이 가득해졌다. 새로 이사를 하던 날 부동산 아저씨가 집 안을 둘러보며 말했다.
“웬 집에 화분이 그렇게 많아요? 온실 차려도 되겠네.”
괜히 내 얼굴이 벌게졌다. 뭐든 적당한 것이 좋은데 수위 조절이 쉽지 않다. 그렇다고 애써 키운 화분들을 포기할 수도 없다. 실내 공기 정화에도 좋잖아, 하며 그냥저냥 함께 지내는 중이다.
초록빛 자연은 사람 마음을 순하고 맑고 곧게 만든다. 영혼의 청정 효과라고나 할까. 그렇다고 모든 사람이 자연을 경외하고 화분 이파리를 좋아하는 것은 아닌 모양이다. 언젠가 할리우드 여배우가 텔레비전 토크쇼에 나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나는 집 안에서 화분을 키우지 않아요. 절대로. 작은 꽃 화분조차도 싫어요. 그게 얼마나 더러운데요. 이상한 벌레들도 살고… 으으윽.”
과장된 제스처로 온몸을 떠는 그녀. 식물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는 것인지, 아니면 미생물에 대한 알레르기 때문인지 알 수 없다. 다만 지금도 화분에 물을 주다 보면 문득 그 여배우의 말이 떠오른다.
“얼마나 더러운데… 이상한 벌레도 살고…”
살아 있는 생명체는 어떤 방식으로든 고난의 역사를 지니게 마련이다. 내가 10년 넘게 키우고 있는 벤자민 화분도 몇 년 전 진드기 피해를 입은 적이 있다. 그 후로 약을 꾸준히 쳐주었는데도 여전히 끈끈한 기운이 남아 속을 썩인다. 게다가 이제는 화초 단계를 넘어 거의 나무가 되었다. 이삼 년에 한 번씩 대대적인 가지치기를 해주어야 겨우 모양새를 유지할 수 있다.
그 벤자민은 아마도 남성일 것 같다. 이름에서 풍기는 느낌 때문인지 모르겠다. F. 스콧 피츠제럴드의 『거꾸로 사는 벤자민 버튼』도 있지 않은가. 물론 브래드 피트까지 바라지는 않지만. 그런데 장갑을 끼고 전지가위로 가지를 잘라낼 때의 느낌이란 참 묘하다. 누군가의 비명 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듯하다. 마치 내 신체의 일부가 절단되는 것처럼 고통스럽다.
거친 가위질에 잘려나간 나뭇가지에서는 연녹색의 투명한 진액이 흐른다. 집 안에 갇혀 살아온 식물 특유의 슬픈 초록빛 눈물처럼. 약간 비릿하면서도 눅진한 비극의 체취 같은 것.
그래서 벤자민 화분에 물을 줄 때마다 늘 당부하게 된다.
제발 살살 좀 커다오.
천장까지 닿지만 말아다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