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그림 김미진


명명희 선생은 여전히 건강상의 문제로 일본에 체류 중이었다. 최희숙 관장은 전시 기획이 예상 밖으로 난항을 겪자, 평소답지 않게 당혹스러운 기색을 드러내며 직원들을 닦달했다. 리온 갤러리의 입지를 굳건히 하기 위해서는 명명희 선생처럼 높은 인지도와 경쟁력을 겸비한 작가의 전시가 절실했다. 그나마 서윤이 김순자와 약속을 잡았다는 소식에, 관장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거듭 당부했다. 반드시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오라는 말은 거의 명령에 가까웠다.


-최희숙 관장님은 잘 계시죠?

-네, 여전하세요. 매일 갤러리에 출근하셔서 모든 일을 직접 챙기시니까요.

-그 연세에도 꾸준히 활동하시고, 그런 열정으로 오랫동안 한국 화단을 견인해 오셨잖아요. 참 존경할 만한 어른이세요.

-내년 초에는 꼭 명명희 선생님의 초대전을 열고 싶어 하세요. 우리 갤러리만큼 선생님 작품을 잘 담아낼 수 있는 공간은 없다면서 강한 의지를 보이셔요.

-글쎄요. 우선은 저희 어머님 뜻이 먼저라서요.


김순자는 흰 도자기 찻잔에 차를 따르더니 서윤에게 먼저 건넸다.


-다즐링 향이 참 좋네요. 오늘 같은 날엔 특히 더요.

-마음에 드신다니 다행이에요.

-히말라야 산자락에 있는 다즐링에서 나는 홍차라면서요. 어머님이 네팔 여행 중에 사 오신 차가 있어서 한동안 이것만 마신 기억이 있어요.

-아, 선생님도 네팔에 다녀오신 적이 있군요. 저도 언젠가 꼭 가보고 싶어요.


서윤은 따끈한 찻물을 한 모금 머금었다. 은은한 꽃 향이 입안 가득 퍼지며, 비에 젖은 마음결까지 천천히 데워 주었다. 그 향기는 기억의 문을 여는 열쇠처럼, 지난봄 횡계의 목요일 오후를 소환했다.


–히말라야처럼 높은 산에 오를 때는 장비가 워낙 많아서, 물까지 지고 갈 수는 없습니다.


숨어 있던 복병처럼, 내면 깊숙이 눌려 있던 감정의 파편이 불현듯 고개를 들었다.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 촉촉이 젖은 검은 눈동자. 초원의 끝에서 한 걸음씩 다가오던 그의 모습이 하나둘 떠올랐다. 다즐링의 섬세한 향기를 음미하는 동안, 그녀 앞에는 어느새 그가 서 있었다. 현실 너머에서 스며든 환영처럼 그윽한 눈빛으로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머님은 ‘여인의 초상’ 위작 논란 이후 큰 충격을 받으셨어요. 그 일로 건강도 많이 안 좋아지셨어요. 어머니 작품이라며 전시된 그림이 사실은 오래전에 제자가 그린 습작을 본떠 만든 모작이었어요. 그림을 가르치면서 어머니가 직접 몇 군데 손을 봐주셨던 그림이죠. 예전 연희동 작업실에 있던 그걸 누군가 몰래 가져다가, 마치 어머니의 완성작인 것처럼 다시 그려 은밀히 거래한 거예요. 그림을 산 사람이 있으면, 판 사람도 있는 법이죠. 마지막 소장자는 위작 판정으로 그림의 가치가 떨어지는 걸 원치 않았겠죠. 결국 어머니가 늙어서 자기가 그린 그림도 못 알아본다는 누명을 씌운 거예요. 자신의 예술적 진실을 의심받는 화가라니, 그보다 더 잔혹한 상처가 있을까요. 그때부터 어머님은 작품 공개를 멈추셨죠. 벌써 6년 세월이 흘렀네요.


김순자의 목소리가 쓸쓸한 파장이 되어 번져갔다. 그 말에 배어든 아픔과 상실감이 고스란히 전해져왔다.


-리온에서 전시를 열게 되면, 정말 많은 사람이 몰려들 거예요. 명명희 선생님의 작품을 좋아하고 그리워하는 팬들이 기다리고 있잖아요.

-좋은 기회가 될 수도 있겠지만… 어머님은 아직 아무 말씀도 안 하셨어요. 마음에 맺힌 응어리가 덜 풀리신 거겠죠. 아마, 그럴 거예요.


김순자는 잠시 말을 멈추고, 두 개의 잔을 채웠다. 서윤은 다시 찻잔을 들어 그리움의 향기를 음미하며, 고요 속에 어른거리는 희미한 그림자를 바라보았다. 마음에 뜨거운 불씨 하나를 품고 산다는 건, 그만큼의 번뇌와 동거하는 일인지도 몰랐다. 그런 고통은 영영 아물지 않는 옹이가 되어 의식의 수면 아래 각인되는 것은 아닐까.


-혹시, 또 위작이 발견된 건 아니죠?


서윤의 조심스러운 목소리에는 불안이 묻어 있었다.


-그건… 아무도 알 수 없어요. 어쩌면 어느 집 벽 한쪽에, 어머니 그림을 흉내 낸 또 다른 모작이 걸려 있을지도요. 직접 눈으로 확인하지 않는 이상, 누구도 알 수 없는 일이죠.


김순자의 목소리는 잔잔했지만, 그 안에는 꺼지지 않은 분노와 어쩔 수 없는 번민이 스며 있었다. 그녀는 예술이 작품 자체보다 ‘값’으로만 환산되는 오늘의 세태를 안타까워하며 유감을 토로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글·그림 김미진


6월의 어느 날, 여름 초입을 알리는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오전 근무를 마친 서윤은 한낮의 빗줄기를 헤치며 북한산 기슭에 들어섰다. 차도를 벗어난 숲길 안쪽에는 초록으로 짙게 물든 풍경이 소음을 씻어낸 일상의 여백처럼 펼쳐져 있었다. 엷은 개나리색 트렌치코트에 레인 부츠 차림의 그녀는 큼지막한 암청색 장우산을 받쳐 들고 있었다.


저택 앞 철문을 지나 비탈진 언덕길을 오르자, 작은 아트 갤러리를 닮은 3층 건물이 나타났다. 절제된 선과 단순한 구조로 이루어진 건축물은 산속 깊숙이 마련된 누군가의 은밀한 아지트를 떠올리게 했다. 바로 그곳이 명명희 선생이 오랫동안 은거해 온 거처이자 작업실이었다.


서윤이 건물 앞 층계를 올라 초인종을 누르려는 순간, 현관문이 불쑥 열리며 선생의 양녀 김순자가 나타났다. 마흔을 훌쩍 넘긴 그녀는 옆트임이 있는 베이지색 치마에, 마흔을 훌쩍 넘긴 그녀는 옆트임이 있는 베이지색 치마에 검은 블라우스 차림이었다. 그동안 명 선생 안부를 묻는 전화를 주고받고, 인사동에서 몇 차례 마주친 적은 있었지만, 직접 집까지 찾아온 것은 그날이 처음이었다.


-어서 오세요. 하필이면 오늘 비가 오네요.

-오히려 좋았는걸요. 모처럼 ‘비 오는 날의 수채화’ 같은 풍경을 즐겼거든요.

-오시는 길은 불편하지 않았나요?

-일러주신 대로 걷다 보니 금방 여기네요.


김순자는 사소한 것 하나까지 신경 쓰는 꼼꼼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버스 정류장에서 북한산 방향으로 오르는 길목, 표지판의 위치와 주변 건물의 형태, 오래전에 폐쇄된 방범 초소와 버섯 모양의 길쭉한 바위를 지나 서른여섯 걸음쯤 가면, 왼쪽 경사진 찻길 위로 검은 철문이 나타난다는 설명까지, 한 치도 어긋나지 않았다. 마치 미리 그려둔 지도 위를 손끝으로 더듬으며 걷는 듯, 서윤은 어느새 현실 세계에서 벗어나 낯선 세계의 문턱에 발을 디디고 있었다.


-자, 들어오세요.

-감사합니다.


서윤은 우산에 맺힌 빗방울을 탁탁 털어낸 뒤, 문 옆에 세워두고 집 안으로 들어섰다. 현관문이 닫히자 눅눅한 한기가 물러나며, 따스한 향기가 온몸을 감쌌다. 그녀는 레인 부츠를 얌전히 벗어 두고 준비된 실내화로 갈아 신었다.


거실처럼 보이는 넓은 실내는 이상하리만치 비어 있었다. 갓 이사를 마친 집처럼 휑했고, 침묵의 결을 따라 서늘한 정적이 흘렀다. 홀 중앙에는 소파와 커피 테이블만이 무대 위 소품처럼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벽에는 그림 한 점 걸려 있지 않았고, 집기를 대신할 만한 소품도 거의 없었다. 


화가의 자취를 연상시키는 물감이나 화구, 이젤 같은 것들도 전혀 보이지 않았다. 이 공간은 속세를 등진 고승의 선방 같기도 했고, 현대 무용가의 개인 연습실 같기도 했다.


-명 선생님은 어디서 작업하시나요?

-작업실은 2층에 있어요. 여기는 손님을 맞거나 잠시 쉬는 응접실이고요.

-굉장히 깨끗하고 넓어요. 목소리가 울릴 정도네요.

-어머니는 주변이 어질러진 걸 아주 싫어하세요.


그녀는 잠시 주위를 살핀 뒤, 낮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살다 보면 빈 벽과 빈 자리들이 더 절실할 때가 있잖아요. 여기는 그런 비움을 위한 공간이죠. 자, 이쪽으로 와서 앉으세요.

-네. 이건… 마음에 드실지 모르겠네요.


서윤은 손에 들고 있던 자그마한 쇼핑백을 내밀었다. 여기 오는 길에 준비한 다즐링 티와 수제 마카롱 세트가 그 안에 들어 있었다.


-어머, 고마워요. 빈손으로 오셔도 되는데…


김순자는 미소를 지으며 쇼핑백을 받았다.


-다즐링이군요. 제가 좋아하는 거예요. 잠깐만요. 제가 차를 준비해 올게요.


곧 복도 끝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후 그녀는 검은 옻칠이 곱게 입혀진 쟁반을 들고 돌아왔다. 그 위에는 티팟과 다도 세트가 정갈하게 놓여 있었다.


차를 우려내는 동안, 서윤은 거실 통유리창 너머 숲 비탈을 바라보았다. 암녹색으로 짙어진 녹음 위로, 희뿌연 빗줄기가 흩날리듯 내리고 있었다. 그곳은 세상과 격리된 듯, 시간조차 다른 호흡으로 이어지는 세계였다. 한 겹의 꿈속 장면 같기도, 오래된 기억 저편에서 되살아난 순간 같기도 한, 비현실적인 고요가 실내에 감돌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글·그림 김미진

 

‘로체 남벽’이라는 이름은 오래된 상처를 불러왔다. 1989년 가을, 모두의 심장에 새겨진 그날의 기억. 민혁은 그곳에서 추락해 영영 돌아오지 못했다.


도준은 조용히 미소 지었다. 무언의 언어로, 그가 견뎌온 시간의 무게를 드러냈다. 민혁을 떠나보낸 슬픔은 사라지지 않으리라. 하지만 이번만큼은 그 상실을 넘어서리라 다짐했다. 다시 마주할 그 벽을 향해, 어느 때보다 단단한 결심이 서 있었다.


노르부는 에베레스트 길목, 쿰중 마을에서 태어난 셰르파였다. 산과 더불어 성장하며 날씨와 지형, 고소에 대한 감각을 몸으로 익혔고, 청소년기에는 라마 사원에서 수행하며 심신을 단련했다.

 

이후 네팔 산악협회에서 정식 훈련을 받고, 수많은 원정대와 함께 히말라야를 누비며 실전 경험을 쌓았다. 에베레스트만 해도 열 번을 넘게 오른, 베테랑 중의 베테랑이었다. 고산 환경에 적합한 유전적 특성과 반복된 8천 미터급 등반 경험으로, 일반 등반가보다 훨씬 빠르게 고도에 적응하고 극심한 저산소 환경에서도 오래 버틸 수 있는 몸이었다.


지금은 파트너와 함께 여행사를 운영하지만, 기회가 닿으면 늘 고산으로 향했다. 산은 여전히 그에게 끝나지 않은 과업이었다. 그는 숨을 깊게 들이쉬며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로체 남벽은 악마의 벽이야. 왜 또 거길 오르겠다는 거지?

-혼자 해볼 거야.

-혼자서? …미쳤군.


도준은 고개를 돌렸다. 짧은 침묵이 흘렀다.


-돌았어? 죽으려고 작정한 거야? 안 돼, 절대로!


노르부는 도준 앞에 놓여 있던 맥주잔을 빼앗듯 자기 앞으로 옮겼다.


-노말 루트라면 모르지. 히말라야의 전통적 원정 방식, 셰르파, 쿡, 닥터, 원정대… 함께라면 기적처럼 가능할지도 몰라. 하지만 그 남벽은, 혼자라면 절대 안 돼.

-내년 봄이야. 작년 K2 하산 후 관광성 들어가 등반 허가 받았어.

-너희 같은 사람들, 난 도무지 이해할 수 없어.


노르부는 질책하듯 목소리를 높였다.


-왜 자꾸 위험하고 자극적인 것만 골라서 하려는 거야? 히말라야가 무슨 서바이벌 게임장인 줄 알아?

-그건 아니지. 그저…

-작년 에베레스트 참사, 기억나지? 하산길에 내 눈으로 똑똑히 봤어. 시신들이 눈 속에, 길가에,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어. 아무도 건드리지 못했지. 아, 왜들 기어이 여기까지 와서 죽는 건데?

-노르부, 나도 알아. 객기와 오만이 통하지 않는 곳이라는 걸.

-그런데?

-나도 눈의 거처에 사는 시바 신이 두렵지. 거긴 아무에게나 허락되지 않는 허공의 끝이니까. 그래서 더 정직한 마음으로 그곳에 서려는 거야.

-무산소에 혼자라니, 백 퍼센트 자살 행위야. 그렇게 죽고 싶으면 차라리 높은 건물에서 뛰어내려. 돈도 안 들고, 고통도 덜해. 그게 훨씬 경제적이지.

-오랫동안 준비해 온 일이야. 스폰서도 일부러 찾지 않았어. 처음부터 끝까지, 나 혼자 감당할 거야.

-뭐, 후원자도 없어? 등반 자금은 어디서 구할 건데?

-그동안 가진 것들, 이것저것 다 팔았어.


도준은 노르부 앞에 있던 자신의 술잔을 다시 가져와 맥주를 가득 채웠다. 그때, 주인 여자가 달밧을 담은 식판 두 개를 그들 앞에 내려놓았다. 노르부는 이미 식욕을 잃은 듯, 음식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민혁 때문이지? 그걸 못 잊고 미안해서, 마음에 맺혀서 그러는 거지? 그럼 그만둬. 부질없는 짓이야.

-오해 마. 아직 아무도 오르지 못했으니까, 내가 한번 오르려는 거야. 로체가 거기 있으니까, 그게 전부야.


도준은 맥주를 들이켜고 손등으로 거품을 닦았다. 알전구를 향해 달려드는 하루살이 떼가 소란스럽게 윙윙거렸다. 뜨거움을 좇는 그들의 본능처럼, 그도 불빛을 향해, 죽음을 향해 겁 없이 돌진할 수밖에 없는 존재였다. 그것이 스스로 택한 길이었고, 피할 수 없는 숙명이었다.


도준은 어두운 허공을 향해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친구여, 내가 거의 다 왔다. 거기 너무 춥지는 않은가?’


하얗게 솟은 히말라야 능선을 배경으로, 민혁의 환한 미소가 바람에 흔들리는 환영처럼 어른거렸다. 두 번째 도전은 처음과 다를 것이다. 죽음이 가까이 있음을 알기에, 그래서 더욱 걸음을 멈출 수 없다. 빛과 어둠, 생과 사가 뒤엉킨 순간에서도, 도준은 그 길이 끝나는 곳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든 피하지 않으리라 결심했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2026-09-18 14: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김미진 2026-09-18 16: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맞습니다. 《모짜르트가 살아 있다면》을 기억해 주시다니 정말 반갑네요. 감사합니다.^^

yamoo 2026-09-21 13:40   좋아요 0 | URL
아주 오래 전에 모짜르트가 살이있다면을 매우 인상깊게 읽었습니다. 당시 작가분이 외국에 거주하신 걸로 아는데...여전히 외국이신가요? 알라딘 서재에서 뵙다니 정말 반갑습니다! 그 이후에 <자전거를 타는 여자>까지 봤습니다. 20년대 이후로도 꾸준히 책을 내셨네요. 주로 미술책 위주로 내셨던데, 소설가 김미진 작가님이라는 건 꿈에도 몰랐네요. 미술 전공하신 게 기억이 나긴 합니다만..^^;;

어쨌든 서재에서 작가님의 글을 다시 볼 수 있다뉘, 감개가 무량입니다..^^

김미진 2026-09-22 0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래전에 읽으신 《모짜르트가 살아 있다면》뿐 아니라 《자전거를 타는 여자》까지 기억하고 계시다니 정말 반갑습니다. 이렇게 오랜 시간이 지나 다시 만나 뵙게 되니 저도 감회가 새롭네요. 지금은 한국에 있습니다.
알라딘 서재에 연재하고 있는 《달의 몰락》은 《자전거를 타는 여자》를 오랜 시간이 흐른 뒤 전면적으로 다시 쓴 작품입니다. 원작의 남자 주인공과 이야기의 일부 골격은 남아 있지만, 여자 주인공은 완전히 다른 인물로 설정했고 여러 인물과 이야기를 더하면서 전체 서사도 크게 확장했습니다.
2부와 3부부터는 원작과 상당히 다른 방향으로 전개될 예정입니다. 《자전거를 타는 여자》를 읽으셨다면 낯익은 흔적과 전혀 새로운 이야기를 함께 발견하실 수도 있을 거예요.
오래전 제 소설을 기억해주시고 다시 찾아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글·그림 김미진


타멜 거리. 도준은 낯선 이방인처럼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스쳐 지나는 사람들을 바라보다 다시 발길을 옮기기 시작했다. 오토바이 경적과 관광객들의 소란스러운 행렬, 향신료 냄새가 뒤엉킨 복잡한 골목 한복판에서 누군가 불현듯 그의 어깨를 툭 치며 외쳤다.


-와, 이게 누구신가?


도준이 고개를 돌리자, 익숙한 얼굴이 환한 미소를 건네왔다. 훤칠한 키에 부드러우면서도 단단한 체격, 웃을 때마다 양쪽 뺨에 깊이 파인 볼우물이 인상적인 노르부였다.


-마이 프렌드, 바이!


네팔어로 ‘바이’. 형제를 뜻하는 친근한 호칭이었다. 노르부가 도준을 그렇게 부를 때는 조금 특별한 의미가 담겨 있었다.


그는 티베트계 셰르파족으로 네팔에서 나고 자란 서른여섯 살의 남자였다. ‘히말라야 트레킹’이라는 여행사를 직접 운영했는데, 산악인들 사이에서는 오랜 경력의 고소등반가로도 널리 알려져 있었다.


둘은 과거 에베레스트 북서쪽 초오유를 함께 오르며 굳건한 신뢰와 깊은 우정을 쌓았다. 당시 노르부는 아홉 명의 셰르파를 이끄는 대장이었고, 등반 루트 결정부터 고정 로프 설치, 피톤 작업까지 진두지휘했다. 정상까지는 무사히 올랐지만, 하산 도중 뜻밖의 눈사태에 휘말렸다. 그때 크게 부상을 입고 쓰러진 노르부를 끝까지 업고 내려온 이가 바로 도준이었다.


그날 이후 두 사람 사이에는 목숨의 무게를 함께 짊어진 자들만이 나눌 수 있는, 말로 다할 수 없는 끈끈한 유대가 자리 잡았다.


-내 생명의 은인! 연락도 없이 카트만두엔 언제 온 거야?

-오늘 도착했지. 그동안 잘 지냈어?


도준이 현지어로 짧게 인사를 건네자, 노르부는 활짝 웃으며 그의 어깨를 힘껏 끌어안았다.


-나야 잘 지냈지. 도준, 정말 반갑다.

-나도 마찬가지야. 지금 어디 가는 길이야?

-스와니가 호텔에 잠깐 다녀오는 길이야. 클라이언트 몇 명이 거기 묵고 있거든. 내일 아침 일찍 포카라행 버스를 타야 해서 전달할 게 좀 있었어.

-나는 사흘쯤 파노라마 포인트에 머물다가 루크라로 갈 생각이야. 그런데 저녁은 먹었어?

-마침 나도 출출하던 참이야.

-그럼 맥주 한잔하면서 같이 먹자. 모처럼 이 동네 로컬 푸드가 당기네.

-좋아! 잘됐다.


좁고 어두운 골목길을 한참 따라 걷다가 왼편으로 꺾어 들자 허름한 식당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천막 아래 듬성듬성 놓인 테이블 위로 낮게 매달린 알전구가 바람에 흔들리며, 낡았지만 묘하게 따스한 정취를 풍겼다. 쌀밥에 렌틸콩 수프와 야채 커리를 곁들인 달밧(Dal Bhat), 그리고 버팔로 고기와 야채가 들어간 모모(Momo)가 이 집의 대표 메뉴였다.


삐걱거리는 의자에 앉자마자 주인 여자가 마른행주로 테이블을 재빨리 훑듯 닦아주었다. 그들은 네팔 맥주 ‘뚜벅’ 세 병과 달밧 두 개를 주문했다. 주인 여자가 맥주를 먼저 가져다 놓고는 커다란 호박처럼 생긴 오이를 도톰하게 썰어 바구니에 담아 내왔다.


노르부는 맥주잔을 가득 채우며 존중과 환대의 뜻을 드러냈다. 그 단순한 손놀림에서 도준은 오래전 눈보라 속에서 맺은 인연을 떠올렸다.


-요즘 비즈니스는 어때?

-정신없어. 가이드만 여든 명, 포터가 백쉰 명이야.

-그 정도면 돈 좀 벌었겠는데?

-젠장, 네팔에 돈 쓰러 오는 사람 봤냐? 다들 다른 나라에선 펑펑 쓰고, 여긴 마지막 코스로 배낭 하나 달랑 메고 와선 싸구려만 찾아다닌다니까. 얼마 전엔 일본 애들이 이십 년도 더 된 여행 책자 들고 와서, 왜 이렇게 비싸졌냐고 따지더라. 질렸지, 완전히. 두 손, 팔다리 다 들었어.

-힘들겠네. 그래도 얼굴은 훤해 보이는데.


도준이 오이를 우걱우걱 씹으며 말했다. 노르부는 픽 웃으며 맥주잔을 다시 채웠다.


-루크라는 왜 가는 거야? 이번엔 또 어디로 올라갈 생각이지?

-올해는 시등만 할 거야. 추쿵 쪽으로 빠져 로체샬 중턱쯤까지. 그때 컨디션 봐서 임자체도 다녀올지 몰라. 혼자라서 편해. 마음 내키는 대로 움직일 수 있으니까.

-혼자 정찰 등반을 왔다, 그런 말인가? 진짜 노리는 봉우리는 어디지?

-로체 남벽.

-뭐라고?


노르부는 웃음기가 싹 가신 얼굴로 도준을 바라봤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글·그림 김미진


일본으로 떠나기 전, 도준은 오랜만에 사촌 형 집에 머물고 계신 고모부를 찾아뵈었다. 고모부는 환자용 침대에 누운 채 텔레비전에서 흘러나오는 드라마 『전원일기』 재방송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퇴원 전보다 표정은 훨씬 부드러워졌고, 건강도 눈에 띄게 회복되고 있었다. 평생 농사일에 그을린 얼굴은 서울에 온 후로 많이 밝아졌는데, 덕분에 세월의 자국처럼 도드라진 검버섯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났다.


-서울 물이 좋긴 한가 보다. 그새 시골 땟국물이 쑥 빠진 것 같지 않니?


고모부는 리모컨으로 TV 볼륨을 낮추며 미소 지었다. 목소리엔 여전히 병치레의 흔적이 남아 있었지만, 그 눈빛에는 오래 묵은 삶의 여유가 배어 있었다.


도준은 어깨에 메고 온 가방에서 서윤이 전달해 달라고 부탁한 종합비타민제와 홍삼 캔디를 꺼내놓았다.


-이게 웬 거냐?

-윗집 살던 아주머니 아시죠? 그분 손녀가 고모부께 드리라며 가져왔어요.

-윗집 손녀가? 아이고, 고맙구먼.


고모부는 약병을 쥔 손끝을 미세하게 떨면서도, 오랫동안 눈길을 거두지 못했다. 그 떨림은 단순한 고마움을 넘어선, 말로 다 전할 수 없는 어떤 감정이었다. 그 순간 도준은 오래전 윗집 마당에서 목격했던 장면 하나를 떠올렸다.


열세 살의 어느 날, 그는 용천 계곡에서 주운 분홍신 한 짝을 들고 윗집을 찾았었다. 그날, 이해할 수 없는 장면 하나가 그의 삶에 깊은 균열을 남겼다. 당시에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 못했다. 다만, 말해선 안 될 비밀이라는 감각만이 몸에 먼저 새겨졌을 뿐이었다.


전쟁 과부였던 윗집 아줌마는 고모와도 오랜 이웃이었다. 두 사람은 언니와 동생처럼 친하게 지내며 반찬 하나도 나누던 사이였다. 그런 이웃집 아줌마와 고모부의 관계는 소년에게 도무지 믿기 어려운 비밀이었다.


그는 차마 누구에게도 그날 일을 발설하지 못했다. 고모가 알게 되면 큰 상처를 받을 것 같아 걱정스러웠고, 그 은폐된 사건이 결국 비극으로 이어질까 몹시 불안했다. 그런 상황 속에서, 그 비밀을 외면한 탓에 하루라도 빨리 기숙학교로 떠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이제 고모는 세상에 없고, 도준도 더는 어린 소년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마지막까지 숨겨온 고모부의 불편한 진실을 한 번쯤 살짝 건드려보고 싶은 치기 어린 마음이 불쑥 일었다. 무덤까지 지고 갈 비밀이 아니라면, 고모를 대신해 그 진실을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다.


-고모부,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어요.

-뭔데?

-그동안 비밀로 간직했던 거예요.

-비밀이라니? 그래서?

-옛날에, 윗집 아주머니 젊었을 때, 고모부가 그 집에서 나오는 걸 봤어요. 그 방에 두 분만 있었죠. 오랫동안.


순간 고모부의 이마에 굵은 주름이 꿈틀거렸다. 무거운 침묵 속에서 고모부는 충격과 고뇌가 뒤섞인 눈빛으로 도준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고모도 그걸 알았니?

-아셨을까요?

-글쎄다.

-저는 아무 말 안 했어요. 곧바로 기숙학교로 들어갔잖아요.

-왜 숨겼니?

-고모가 슬퍼할까 봐서요.

-그랬구나. 고맙다.


고모부의 ‘고맙다’에는 여러 겹의 의미가 담겨 있었다. 비밀을 지키느라 힘들었던 도준의 침묵일까, 자신의 불륜이 고모에게 드러나지 않았다는 안도일까. 도준은 쉽게 헤아릴 수 없었다.


-고모에게 미안한 생각은 없으세요?


도준은 담담한 어조로 물었다.


-그분은 단순한 이웃이 아니었지. 전의 심방리 뱀골. 거기가 우리 고향이야. 그분은 부잣집 셋째 딸, 나는 그 집안 소작농의 아들이었어. 그분이 시집을 갔고, 전쟁통에 홀몸이 되었지. 내가 횡계로 온 건 그분이 여기서 혼자 살고 있었기 때문이야. 고모를 만난 건 그 이후였지. 두 여자 모두에게 최선을 다하려 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는 걸 안다. 더 잘해주지 못한 게 늘 마음에 걸렸지.


고모부가 오래 묻어두었던 진실이 마침내 수면 위로 떠오른 순간이었다. 한 남자의 노쇠한 목소리에는 사랑과 죄책, 회한과 체념이 얽혀 있었다. 도준은 그것을 단순한 도덕의 잣대로만 가를 수 없음을 직감했다. 평생 두 여자 사이에서 갈등하며 살아온 고모부의 고백은, 그의 삶을 관통한 불가피한 굴레였는지도 모른다.


-두 여자 모두를 사랑했나요? 아니면, 고모는 껍데기 사랑만 받은 건가요?

-이제 와 이런 말 하는 게 좀 그렇지만, 그분을 보쌈해서 멀리 달아날까 욕심을 낸 적도 있었지. 기차표까지 끊었는데, 네 고모가 마음에 걸려 결국 떠나지 못했어... 고모한테는 미안해서 더 잘해줬고, 윗집 그분은 안타까움에 더 많은 걸 베풀려고 했지. 그러면서도 늘 두 여자 모두에게 미안했어.


고모를 두고 멀리 떠날 생각까지 했었다니. 도준은 정신이 아뜩해졌다. 고모부는 평생 한 여자를 놓지 못하고 그 주위를 맴돌며 살아왔다. 윗집 그분이 세상을 떠난 뒤에도 과거에 머물며 그 집을 돌보았다. 도준은 한때 그와 거리를 두고 지냈다. 고모 몰래 저지른 부도덕한 행위를 원망했고, 오로지 고모부만 바라보며 살아온 고모가 안쓰러워 가슴이 저렸다.


하지만 지금, 서윤에 대한 갈망 속에서 그 마음이 어렴풋이 이해되었다. 그녀를 향한 벗어날 수 없는 열망이 고모부가 한 여자를 놓지 못한 이유와 묘하게 닮아 있었다. 두 집안에 얽힌 아픈 사랑의 흔적이 비밀스러운 유산처럼 자신에게도 이어지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 사랑이 결국 고모부의 삶을 옭아매고 정의했듯, 언젠가 자신의 삶 또한 같은 방식으로 규정될 것만 같은 예감.


‘나는 그녀를 잊을 수 있을까? 그녀를 놓아주는 것이 옳은 일일까?’


도준은 그 질문을 곱씹으며 생각에 잠겼다. 고모부와의 대화는 그리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얼마 후, 사촌 형 집을 나서는 그의 머릿속에 ‘사랑인가, 히말라야인가’라는 생각만이 어렴풋이 맴돌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