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그림 김미진
부엌에서는 토마토수프가 보글보글 끓고 있었다. 제이는 냄비에 월계수 잎 한 장을 더 넣고, 파슬리 통을 집어 들어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이런 밤엔 수프가 제격이지.
오늘도 늦도록 출판사에서 일하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어두운 밤길을 홀로 걸어왔다. 연희동 언덕길의 방 세 칸짜리 빌라에는 그녀만의 무해한 삶이 기다리고 있었다. 늦은 시간, 앞치마까지 두르고 부엌에 선 것은 허공에 떠 있는 외딴섬처럼 적막한 집 안에 사람의 체온 같은 무언가를 불러들이고 싶어서였다.
혼자 살아가는 삶은 가끔 안쪽으로부터 서늘한 기척을 불러왔다. 그 빈틈을 가능한 한 보이지 않게 덮어 놓으려는 본능이 그녀를 냄비의 증기와 조리도구의 온기 속으로 이끌었다. 모두가 떠나고 조명만 남은 간이역 대합실처럼, 그저 밝기만 한 부엌은 하루치의 외로움을 어루만지는 그녀만의 작은 제단이었다.
FM 라디오에서는 마침 쳇 베이커의 ‘Almost Blue’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따뜻한 수프 냄새 위로 얹히는 피아노와 트럼펫의 섬세한 울림이 한밤의 애수와도 닮은, 아득한 몽환의 기운을 자아냈다. 제이는 낮게 멜로디를 따라 흥얼거리며 바게트 마늘빵을 오븐 안으로 밀어 넣었다.
그때, 초인종이 울렸다. 순간 실내 공기가 흔들리며 낯선 긴장감이 차올랐다.
제이는 눈을 크게 뜨고 현관 중문을 바라보았다. 밤 11시가 훌쩍 넘은 시각이었다. 예고도 없이 남의 집 초인종을 누른다는 건, 결코 예사로운 일이 아니었다. 혹시 같은 건물에 사는 누군가가 주차장에 세워둔 차를 빼달라며 급히 4층까지 올라온 건 아닐까.
그녀는 얼른 가스레인지 불을 줄이고, 거실로 나가 영상 인터폰을 들여다보았다. 모니터에 비친 얼굴은 뜻밖에도 서윤이었다.
어젯밤에는 기이한 남자 이야기로 남의 속을 시끄럽게 만들더니, 오늘은 또, 야심한 시각에 아무런 연락도 없이 문 앞에 서 있었다. 그녀의 웃는 모습은 평소와 달랐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표정에 생소한 빛이 스며 있었고, 그 밑에 감춰진 무언가가 제이의 마음을 어지럽혔다. 인터폰 너머로 들려오는 ‘안녕.’이라는 평범한 인사조차 왠지 모르게 신경을 건드릴 만큼 산만하게 느껴졌다.
제이가 조심스레 현관문을 열자, 서윤은 손을 모은 채 배시시 웃었다.
-뭐야? 사람 놀라게.
-저기… 실례가 안 된다면, 안으로 좀 들어가도 될까요?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던지는 말투와 몸에서 풍기는 익숙지 않은 기운이, 허공을 스치는 작은 날갯짓처럼 불안한 잔상을 남겼다. 문을 막아선 채 잠시 머뭇대던 제이는, 이내 한 발 옆으로 비켜 길을 내주었다. 서윤은 밤 소풍 나온 아이처럼 두 팔을 활짝 벌리며 집 안으로 들어왔다.
-뭐야, 이 맛있는 냄새는?
-토마토수프 끓였어. 근데 핸드백은 어디에 두고 온 거야?
-무슨 일이 좀 있었어. 신경 쓰지 마.
-미친… 저녁은 먹었어?
-그냥… 조금.
-마침, 잘됐네. 어서 앉아.
제이는 그녀에게 식탁 의자를 당겨주었다. 자정이 가까워진 시간, 두 사람은 마주 앉아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수프와 갓 오븐에서 꺼낸 마늘빵을 나누기 시작했다.
-왜 이렇게 맛있어? 상큼하면서도 감칠맛이 나.
-포동포동 살찌기 싫으면, 적당히 먹어두는 게 좋을 텐데.
-오늘은 괜찮아. 뭐든 다 허용되는 날이야.
서윤이 연달아 수프를 떠 넣으며 말을 이어갔다.
-어제도 갑자기 출판사 앞으로 찾아오더니, 오늘은 또 무슨 바람이 나서 우리 집까지 왕림하셨을까.
-그렇지? 나 좀 이상하지? 나도 내가 좀 이상해.
-왜, 또 태일 씨가 뭐래? 반말은 정말 안 된다던?
-아냐, 그게 아니야.
-근데, 혹시 술 마셨니? 말하는 게 좀…
제이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코를 킁킁거렸다. 서윤에게서 알코올 냄새는 전혀 감지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의 몸짓과 말투는 어딘가 홀린 사람처럼 허공을 더듬는 듯했고, 그 모습에 제이는 명치 아래로 불편한 감각이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이상하다… 애가 도대체 왜 그러지?’
제이는 이마를 긁적이며 속으로 되뇌었다.
서윤은 가상의 염탐꾼이라도 의식하듯 주변을 한 번 훑고는, 심각한 비밀을 털어놓을 때처럼 낮게 속삭였다.
-오늘, 그 사람이 나타났어. 저번에 횡계에서 만난 그 남자.
-누구?
-자전거 바퀴 수리해 준 그 사람 있잖아.
서윤이 손바닥으로 가슴을 문지르며 말했다.
-아… 수레바퀴랑 상관없다고 했던 그 남자?
-응. 오늘 나를 찾아왔어.
-세상에… 갤러리로 직접 온 거야?
서윤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수줍은 미소에는 설렘과 혼란이 섞여 있었다.
-정신 나갔네. 미쳤나 봐.
-뭐가?
-진짜 조심해야 해. 네 앞에 누가 나타났든, 달라진 건 하나도 없어. 얼른 날짜 잡고 시집이나 갈 생각해, 이년아.
제이의 입에서 불쑥 튀어나온 욕은 친한 사이에서만 허용되는 장난스러운 어조였지만, 그 안에는 선을 넘지 말라는 단호한 경고가 들어 있었다.
-태일 씨 말이야, 내가 관상 좀 본다니까. 너 바람 난 거 알면 죽일지도 몰라!
-날 죽여?
-태어날 때부터 자기 것만 아는 남자야. 자기 여자 뺏기면 절대 못 견디는 스타일이지.
-아이참, 내 말 좀 들어봐. 아직 다 말 안 했잖아.
서윤은 제이의 충고를 귓등으로 흘려보낸 채, 오늘 낮에 벌어진 일들을 풀어놓기 시작했다. 그녀의 들뜬 목소리는 방 안 공기를 살짝 달구며, 포근했던 밤의 정적을 은근히 흔들어 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