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그림 김미진

 

주말을 맞아 운동을 나온 사람들로 탈의실은 다소 북적였다. 격렬한 운동은 심신을 지치게 하면서도 근육마다 상쾌한 기운을 남겼다. 간단히 샤워를 마친 도준이 수건으로 물기를 훔치며 샤워장에서 나오자, 검은색 트레이닝복 차림의 매니저가 다가왔다. 그는 올림픽 수영장의 관리 책임자이자 전직 국가대표 선수로, 도준과도 안면이 있었다.


-꼭 수영에 미친 사람 같아요. 누가 보면 국제시합이라도 앞둔 선수인 줄 알겠어요.

-웬걸요. 이제 스퍼트도 다 죽었어요. 그래도 몸 좀 풀고 나니 가뿐하긴 하네요.

-도대체 어디서 그런 힘이 나오는 거예요? 정말 대단해요.

-감사합니다. 요즘 여기 분위기는 어때요?

-뭐, 매일 똑같죠. 그런데 요새 어떻게 지내세요? 많이 바쁘세요?

-글쎄요, 운동하고… 저도 늘 비슷해요.

-혹시 여기서 수영 강좌 하나 맡아보실 생각 없으세요? 수강생들 반응이 아주 좋을 것 같아서요. 아까 보니까 벌써 응원하는 팬 분들이 생긴 것 같던데요.

-그런 말씀 마세요. 수영 강좌 같은 건 저랑은 안 맞습니다. 능력도 없고요.


매니저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혹시 또 다른 등반 계획 있으신가 봐요? 그쵸?

-아… 내년에요.

-오, 그렇군요. 저도 산에 대해 궁금한 게 많아요.

-아, 네에.

-히말라야 저도 꼭 가보고 싶어요. 요즘은 네팔에 트레킹하러 가는 사람들도 많다면서요?

-네, 꽤 되죠. 등산 좋아하세요?

-그럼요. 제 별명이 날다람쥐잖아요. 허허허.


매니저는 로커에 등을 기댄 채 한바탕 이야기를 풀어놓을 기세였다. 하지만 도준은 그다지 잡담을 나누고 싶은 기분이 아니었다. 말없이 옷을 챙겨 입으며 그는 시선을 다른 곳으로 피했다. 온통 머릿속은 서윤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했다. 오늘은 그녀와 함께 낚시터에 가는 날. 약속을 하고, 손가락을 꼽으며 열흘이나 기다려 온 그 토요일이었다.


도준은 그녀를 향한 애틋한 감정에 떠밀리듯, 네팔에서 돌아온 즉시 리온 갤러리를 찾아갔다. 처음엔 어떤 부담도 주지 말고, 먼발치에서 그저 얼굴이나 한 번 보고 오겠노라 작정했다. 그러나 아이들에게 둘러싸여 피노키오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는 그녀를 보자, 그 결심은 한순간에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그녀와 눈이 마주친 순간, 속에서 뜨거운 뭔가가 폭발하는 듯했다. 눈가에 물기가 돌 만큼 반가운 마음이 샘솟았고, 끝내는 백기를 들 듯 먼저 손을 들어 인사를 하고야 말았다.


설렘과 기대에 부푼 마음, 그리운 이의 얼굴. 그녀는 언제나 그의 내면에 불을 밝히는 촛불이었고, 생명수처럼 거듭 그를 정화하며 숨 쉬게 하는 존재였다. 어린 시절, 용천 계곡에서 물에 빠져 거의 의식을 잃은 일곱 살 소녀를 품에 안았던 그날도, 스물두 해의 세월을 돌아 고모부 집 앞마당에서 다시 마주했을 때도, 그리고 지난 수요일, 종로 거리의 빗속에서 어린아이처럼 울고 있던 그녀를 보았을 때조차도, 그녀는 단 한순간도 그의 마음속에서 빛을 잃거나 흐트러진 적이 없었다. 그녀와 함께 있는 동안 그는 늘 손바닥에 땀이 배일 만큼 긴장했고, 시간은 언제나 꿈결처럼 흘러갔다.


그녀는 오늘 어떤 모습으로 약속 장소에 나타날까. 이미 결혼을 약속한 사람이 있다는 불편한 진실이 가슴에 얹힌 체증처럼 무겁게 느껴졌지만, 그럼에도 그녀와의 인연만큼은 놓치고 싶지 않았다. 모든 복잡한 생각을 잠시 내려놓고, 그때 용천 계곡에서 처음 마주했던 소년의 마음으로 그녀를 기다리고 싶었다. 오래전에 돌려주지 못한 자그마한 분홍신 한 짝. 마침내 긴 기다림 끝에, 그것을 건넬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왜 이토록 시간은 더디게 흐르는 걸까.’


도준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무심히 벽시계를 올려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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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그림 김미진


토요일 아침이었다. 안전 요원의 호각 소리가 맑고 날카롭게 수면 위를 갈랐다. 물안경을 쓴 아이들이 킥보드를 두 손으로 잡고 발차기를 하며 줄지어 나아갔다. 반대편에서는 꽃무늬 천수모를 맞춰 쓴 중장년 여성들이 아쿠아로빅 강습을 앞두고 샤워장에서 걸어 나왔다. 그들은 풀 가장자리에 걸터앉아 잠시 발장구를 치다가 이내 익숙한 동작으로 풍덩, 물속으로 들어갔다.


지하 2층에 자리한 이곳은 1988년 서울올림픽을 위해 지어진 실내 수영장이었다. 50미터 길이의 푸른 수면은 여덟 개의 레인으로 나뉘어 있었다. 그날 오전, 자유 수영을 위한 두 레인을 제외한 나머지 구역은 아쿠아로빅 강습을 위해 줄을 걷어낸 채 활짝 열린 상태였다.


도준은 오전 8시 무렵, 수영장이 포함된 복합 체육시설에 도착했다. 피트니스센터에서 한 시간 남짓 근력 운동과 유산소 트레이닝을 마친 그는 곧장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로 내려갔다. 숨을 가다듬듯 짧은 샤워를 마치고 수영장 안으로 들어섰을 때, 아쿠아로빅 강습은 한창 열기를 더하고 있었다.


마흔 명이 훌쩍 넘는 회원들이 물속에서 서로 간격을 둔 채, 빠른 템포의 음악에 맞춰 몸을 움직이며 체조를 이어갔다. 풀 가장자리에는 까무잡잡하고 다부진 체격의 여성 강사가 서 있었다. 귀에 마이크를 걸고 쉴 새 없이 힘찬 구령을 외쳤다.


-하나둘셋, 둘둘셋! 하나둘셋, 둘둘셋!


강사의 걸걸한 음성이 출렁이는 수면 위를 가르며 울려 퍼졌고, 그 여운은 천장에 부딪혀 되돌아온 메아리처럼 물속에 잔물결을 일으켰다.


도준은 입수 준비를 마친 뒤 우측 두 번째 레인으로 들어갔다. 가볍게 몸을 적시며 심호흡을 한 뒤, 느긋하게 물살을 가르기 시작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움직임이 돌변했다. 온몸을 수면에 던지듯 튕겨 나가며 연속된 돌핀킥으로 물을 밀어내자, 파장이 길게 뒤로 뻗어나갔다.


이미 풀 안에는 제법 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는 주저함 없이 흐름을 타며 날렵하게 앞사람을 추월했다. 빠른 스트로크가 계속 이어졌다. 수면 아래 그의 팔은 정확한 궤적을 그리며 물을 끌어당겼다. 손바닥이 가슴 아래를 지나 허벅지 곁으로 빠져나가는 익숙한 동작. 한 번 리듬을 타자, 그의 몸은 물결과 나란히 움직이며 유려하게 나아갔다. 그 유영은 돌고래처럼, 지극히 본능적이고 매끄러웠다. 호흡 역시 일정한 리듬을 유지하며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물속에서 홀로 치르는 철인 3종 경기는 단순한 근력 싸움이 아니었다. 수면 위와 아래를 오가며 감각을 조율하고, 거센 물살에 맞서면서도 흐름 속으로 몸을 맡겨야 했다. 도준은 그 안에서 스스로를 시험하며 담금질하고 있었다. 50m 자유형 기록은 25초대. 남자 선수들과 견주어도 손색없는 속도였지만, 그는 결코 한 가지 방식에 머무르지 않았다. 자유형에 접영과 배영을 섞어 가며, 몸의 움직임을 유기적인 패턴으로 엮어 갔다. 경쟁자가 없어도 상대는 늘 자기 자신이었다. 혼자만의 싸움은 장소를 가리지 않았다. 산에서 암벽을 오를 때처럼, 여기서는 물과 하나 되는 법을 익히고 있었다.


그가 물살을 가르며 날렵하게 레인을 왕복할 때마다, 시선을 빼앗긴 수강생들이 하나둘 박자를 놓치기 시작했다. 30대 중반의 강사 또한 구령을 붙이다 말고, 도준의 움직임을 물끄러미 지켜보았다.


어느새 서른 번째 왕복을 마친 그는 마지막 스트로크를 부드럽게 마무리하고, 가볍게 몸을 끌어올려 풀 밖으로 나왔다. 반짝이는 물방울이 몸의 윤곽을 따라 미끄러지듯 흘러내렸다. 물속에 있던 몇몇이 아쿠아로빅 동작을 잊은 채 그를 바라보았다.


젖은 머리칼을 손으로 쓸어 넘기며 그는 무심히 시선을 돌렸다. 적당히 그을린 피부 위로 단단한 어깨선과 잘 발달한 근육이 물빛을 받아 선명하게 드러났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실루엣은 탄력 있는 곡선을 그렸고, 힘과 균형이 어우러진 하나의 완벽한 형상이 되었다.


-저 정도면 국가대표급 아니겠어요?

-현역으로 뛰기엔 나이가 좀 있어 보이잖아요.

-아까부터 쉬지도 않고 계속 턴만 하던데요…

-보통 사람은 아닌 것 같아요.


아쿠아로빅 회원들은 아쉬운 눈길로 그의 뒷모습을 좇으며 수군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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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그림 김미진

 

그날 오후, 서윤은 미로처럼 얽힌 뒷골목에서 겨우 빠져나왔다. 차들이 오가는 인사동길을 중심으로 서북쪽에는 육백 년 역사를 품은 경복궁이, 동쪽에는 음악인들의 성지라 불리는 낙원상가와 고종의 잠저였던 운현궁이 자리하고 있었다. 서쪽으로는 크고 작은 화랑과 식당가 사이로 골목들이 그물처럼 뻗어 있었고, 남쪽으로는 차량과 인파가 뒤섞인 왕복 8차선의 종로 거리가 길게 이어져 있었다.


리온 갤러리 근방을 벗어나자마자, 서윤은 어느 쪽으로든 방향을 정해 내달려야 했다. 그러나 아무리 둘러봐도 도준이 향한 곳은 전혀 짐작할 수 없었다. 그녀는 한동안 갈피를 잡지 못한 채 인사동길 남쪽 입구 부근을 서성였다. 이번에도 그를 놓친다면, 그건 평생 지워지지 않을 후회로 남을 것이다. 숨이 막힐 듯한 절박함이 온몸을 조여왔다. 갤러리에 남겨두고 온 복잡한 사연들은 어느새 머릿속에서 희미해졌다. 지금 그녀의 의식 한가운데 있는 것은 오직 한 사람, 도준이었다.


처음엔 무작정 안국역을 향해 달렸다. 왜 그쪽이었는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그저 도준이 지하철을 타러 갔을 거라는 근거 없는 확신이 그녀를 이끌었다. 무심한 사람들 사이를 헤치며, 그가 스쳐 간 흔적을 찾으려 애썼지만, 사방 어디에도 그의 존재를 짐작할 만한 단서 하나 보이지 않았다.


-어디든 떠돌아다니길 좋아하는 녀석이죠.


병문안을 갔을 때 김 씨 할아버지가 했던 말이 문득 귓가에 되살아났다. 그녀가 지금껏 상상 속에 그려본 도준의 모습은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여행자이자, 거침없는 모험을 마음에 담고 사는 사람이었다. 가끔 고요한 물가에 앉아 강태공 낚시를 즐기고, 진한 커피 향을 좋아하며, 히말라야의 험준한 고산에도 몇 번이나 올랐다고 했다. 그런 특별한 이력과 개인적인 취향을 고려할 때, 분명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장소보다는 한적한 풍경을 택했을 확률이 높았다. 경복궁, 아마 그쪽일까. 서윤은 곧장 방향을 틀었다.


그날은 마침 전통문화 행사가 열리는 날이었다. 인사동길에 인파가 몰려들고 있었다. 다양한 복식 차림의 행위예술가들이 퍼포먼스를 펼치고, 귀청을 찢을 듯한 꽹과리 소리가 거리 전체에 울려 퍼졌다. 길목마다 빼곡히 들어선 구경꾼들 때문에 그녀의 발걸음은 자꾸 늦춰졌다. 그러나 그 순간, 그녀의 귀에는 어떤 소리도 또렷이 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그 공간 안에 있었으나, 그 사람들 속에는 없었다. 화려한 몸짓과 북소리, 흥에 겨운 웃음소리가 겹겹이 쌓여도 그녀의 시야는 오직 한 사람만을 좇고 있었다. 도준. 그가 저 어디쯤, 상심한 얼굴로 점점 멀어지고 있으리라는 슬픈 예감… 희미하게 스며드는 그 감각 하나만을 움켜쥔 채, 그녀는 한 걸음씩 나아가고 있었다.


-어머, 리온 갤러리 큐레이터 님 아니세요?


누군가 갑작스레 서윤의 손목을 붙잡았다. 사람들 틈에 갇힌 그녀는 순간 얼어붙은 듯 멍해졌다. 환히 웃는 얼굴이 낯설지 않았지만, 지금만큼은 모르는 사람처럼 지나치고 싶었다.


-바쁘신가 봐요. 어디 가시는 거예요?

-저기요, 저기…


서윤은 얼떨결에 손을 들어 한쪽을 가리켰다. 정작 어디를 향한 것인지 아무도 알 수 없었지만, 두 사람은 무의식적으로 같은 방향을 바라보았다.


-뭔가 급하신가 본데, 다음에 찾아뵐게요.

-네, 네…


급히 몸을 빼내며, 그녀는 뒤늦게 그가 누군지 기억해 냈다. 매년 인사동에서 개인전을 여는 지방 중학교 미술 교사. 화가 경력 한 줄을 보태기 위해 어렵사리 전시회를 이어가는 그가, 평일인 오늘 또 무슨 까닭으로 이 거리를 배회하고 있는지 아리송했다. 서윤은 현실의 벽, 그리고 그 위로 드리워진 수수께끼를 떨쳐내며 탐색 범위를 인사동길 남쪽, 종로 거리 방면으로 넓혀갔다.


걸음을 재촉하며 길 양옆을 살폈지만, 그건 한여름 백사장에서 귀걸이 한 짝을 찾아내려는 시도만큼이나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도준을 다시 만날 가능성은 저물어가는 별빛처럼 희미해지는 듯했다. 그러나 그녀는 포기할 수 없었다. 잃어버린 반쪽을 찾아 헤매던 동그라미처럼, 도로변의 카페와 상점들을 하나하나 훑어보았다. 이미 인사동 일대를 벗어나 멀리 떠났을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이 서서히 마음을 잠식해 갔다.


그때, 갑자기 하늘이 어두워지며 바람의 결이 바뀌었다. 늦은 오후의 청명한 빛은 사라지고, 회색으로 흐려진 하늘 아래 빗방울이 하나둘 떨어지더니 이내 소낙비처럼 퍼붓기 시작했다. 예기치 않은 날씨의 변덕 속에서 사람들의 발걸음이 급해지고, 주변은 더욱 소란스러워졌다. 서윤은 낯선 나라 어딘가에 홀로 버려진 듯한 고립감을 느꼈다. 발밑의 포장도로에서 타고 올라오는 섬뜩한 이질감이 그녀를 움츠러들게 했다.


여기는 어디인가.


나는 무엇을 쫓고 있는가.


그것은 파랑새인가, 아니면 현실 도피인가.


길 한복판에 멈춰 서서 주위를 둘러보던 그녀는 억눌러왔던 감정과 함께 터져 나온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무작정 거리로 나섰던 탓에 핸드백도, 지갑도, 전화를 걸 동전 한 푼조차 없었다. 다시 갤러리로 돌아가야 할까, 태일이 기다리는 현실 속으로, 끝이 보이지 않는 그 세계로… 이제 정말 그를 다시는 볼 수 없겠지. 어쩌면 그것이 처음부터 내 운명이었을지도 몰라.


비 내리는 거리 한가운데, 세계의 끝에서 절망에 잠겨 있을 때 누군가 다가와 조용히 우산을 씌워주었다. 서윤은 본능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차가운 빗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시야가 일순 흐려지며 환영을 본 듯 아득해졌다.


-어린애처럼 왜 여기서 혼자 비를 맞고 있어요?


문득 들려온 귀에 익은 나지막한 그 음성은 오래된 기억의 틈새에서 흘러나온 듯 그녀 마음 깊은 곳을 흔들어 깨웠다.


어느새 빗방울이 가려지고, 세상은 우산 아래 작은 원 안에서 숨을 고르는 듯했다. 어깨가 듬직하게 넓고, 그녀보다 키가 한참이나 큰 남자. 그리고 그 따스한 목소리. 맙소사. 그렇게 말한 사람은 도준이었다.


-아니, 어떻게 여기…?


그녀가 놀란 숨을 토하듯 말했다. 다시는 마주할 수 없으리라 여겼던 바로 그 순간, 그는 말없이 그녀 곁으로 다가왔다. 언제부터 지켜보고 있었는지, 어디서부터 따라온 것인지, 그는 끝내 말하지 않았다.


‘이제… 이제 놓치지 않을 거야.’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조금 가까이 그에게 몸을 기대었다. 우산 안에서 서로의 온기가 비로소 맞닿았다. 세상이 잿빛으로 짙게 물들어도 그 순간만큼은 빗줄기조차 부드러운 가림막이 되어 주위를 감쌌다. 시간이 멈춘 듯, 둘만의 작은 비밀이 생겨났다. 침묵 속에서 그녀의 마음은 처음으로 알았다. 다시는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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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그림 김미진

 

부엌에서는 토마토수프가 보글보글 끓고 있었다. 제이는 냄비에 월계수 잎 한 장을 더 넣고, 파슬리 통을 집어 들어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이런 밤엔 수프가 제격이지.


오늘도 늦도록 출판사에서 일하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어두운 밤길을 홀로 걸어왔다. 연희동 언덕길의 방 세 칸짜리 빌라에는 그녀만의 무해한 삶이 기다리고 있었다. 늦은 시간, 앞치마까지 두르고 부엌에 선 것은 허공에 떠 있는 외딴섬처럼 적막한 집 안에 사람의 체온 같은 무언가를 불러들이고 싶어서였다.


혼자 살아가는 삶은 가끔 안쪽으로부터 서늘한 기척을 불러왔다. 그 빈틈을 가능한 한 보이지 않게 덮어 놓으려는 본능이 그녀를 냄비의 증기와 조리도구의 온기 속으로 이끌었다. 모두가 떠나고 조명만 남은 간이역 대합실처럼, 그저 밝기만 한 부엌은 하루치의 외로움을 어루만지는 그녀만의 작은 제단이었다.


FM 라디오에서는 마침 쳇 베이커의 ‘Almost Blue’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따뜻한 수프 냄새 위로 얹히는 피아노와 트럼펫의 섬세한 울림이 한밤의 애수와도 닮은, 아득한 몽환의 기운을 자아냈다. 제이는 낮게 멜로디를 따라 흥얼거리며 바게트 마늘빵을 오븐 안으로 밀어 넣었다.

 

그때, 초인종이 울렸다. 순간 실내 공기가 흔들리며 낯선 긴장감이 차올랐다.

 

제이는 눈을 크게 뜨고 현관 중문을 바라보았다. 밤 11시가 훌쩍 넘은 시각이었다. 예고도 없이 남의 집 초인종을 누른다는 건, 결코 예사로운 일이 아니었다. 혹시 같은 건물에 사는 누군가가 주차장에 세워둔 차를 빼달라며 급히 4층까지 올라온 건 아닐까. 


그녀는 얼른 가스레인지 불을 줄이고, 거실로 나가 영상 인터폰을 들여다보았다. 모니터에 비친 얼굴은 뜻밖에도 서윤이었다.

 

어젯밤에는 기이한 남자 이야기로 남의 속을 시끄럽게 만들더니, 오늘은 또, 야심한 시각에 아무런 연락도 없이 문 앞에 서 있었다. 그녀의 웃는 모습은 평소와 달랐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표정에 생소한 빛이 스며 있었고, 그 밑에 감춰진 무언가가 제이의 마음을 어지럽혔다. 인터폰 너머로 들려오는 ‘안녕.’이라는 평범한 인사조차 왠지 모르게 신경을 건드릴 만큼 산만하게 느껴졌다. 


제이가 조심스레 현관문을 열자, 서윤은 손을 모은 채 배시시 웃었다.


-뭐야? 사람 놀라게.

-저기… 실례가 안 된다면, 안으로 좀 들어가도 될까요?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던지는 말투와 몸에서 풍기는 익숙지 않은 기운이, 허공을 스치는 작은 날갯짓처럼 불안한 잔상을 남겼다. 문을 막아선 채 잠시 머뭇대던 제이는, 이내 한 발 옆으로 비켜 길을 내주었다. 서윤은 밤 소풍 나온 아이처럼 두 팔을 활짝 벌리며 집 안으로 들어왔다.


-뭐야, 이 맛있는 냄새는?

-토마토수프 끓였어. 근데 핸드백은 어디에 두고 온 거야?

-무슨 일이 좀 있었어. 신경 쓰지 마.

-미친… 저녁은 먹었어?

-그냥… 조금.

-마침, 잘됐네. 어서 앉아.


제이는 그녀에게 식탁 의자를 당겨주었다. 자정이 가까워진 시간, 두 사람은 마주 앉아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수프와 갓 오븐에서 꺼낸 마늘빵을 나누기 시작했다.


-왜 이렇게 맛있어? 상큼하면서도 감칠맛이 나.

-포동포동 살찌기 싫으면, 적당히 먹어두는 게 좋을 텐데.

-오늘은 괜찮아. 뭐든 다 허용되는 날이야.


서윤이 연달아 수프를 떠 넣으며 말을 이어갔다.


-어제도 갑자기 출판사 앞으로 찾아오더니, 오늘은 또 무슨 바람이 나서 우리 집까지 왕림하셨을까.

-그렇지? 나 좀 이상하지? 나도 내가 좀 이상해.

-왜, 또 태일 씨가 뭐래? 반말은 정말 안 된다던?

-아냐, 그게 아니야.

-근데, 혹시 술 마셨니? 말하는 게 좀…


제이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코를 킁킁거렸다. 서윤에게서 알코올 냄새는 전혀 감지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의 몸짓과 말투는 어딘가 홀린 사람처럼 허공을 더듬는 듯했고, 그 모습에 제이는 명치 아래로 불편한 감각이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이상하다… 애가 도대체 왜 그러지?’


제이는 이마를 긁적이며 속으로 되뇌었다.


서윤은 가상의 염탐꾼이라도 의식하듯 주변을 한 번 훑고는, 심각한 비밀을 털어놓을 때처럼 낮게 속삭였다.


-오늘, 그 사람이 나타났어. 저번에 횡계에서 만난 그 남자.

-누구?

-자전거 바퀴 수리해 준 그 사람 있잖아.


서윤이 손바닥으로 가슴을 문지르며 말했다.


-아… 수레바퀴랑 상관없다고 했던 그 남자?

-응. 오늘 나를 찾아왔어.

-세상에… 갤러리로 직접 온 거야?


서윤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수줍은 미소에는 설렘과 혼란이 섞여 있었다.


-정신 나갔네. 미쳤나 봐.

-뭐가?

-진짜 조심해야 해. 네 앞에 누가 나타났든, 달라진 건 하나도 없어. 얼른 날짜 잡고 시집이나 갈 생각해, 이년아.


제이의 입에서 불쑥 튀어나온 욕은 친한 사이에서만 허용되는 장난스러운 어조였지만, 그 안에는 선을 넘지 말라는 단호한 경고가 들어 있었다.


-태일 씨 말이야, 내가 관상 좀 본다니까. 너 바람 난 거 알면 죽일지도 몰라!

-날 죽여?

-태어날 때부터 자기 것만 아는 남자야. 자기 여자 뺏기면 절대 못 견디는 스타일이지.

-아이참, 내 말 좀 들어봐. 아직 다 말 안 했잖아.


서윤은 제이의 충고를 귓등으로 흘려보낸 채, 오늘 낮에 벌어진 일들을 풀어놓기 시작했다. 그녀의 들뜬 목소리는 방 안 공기를 살짝 달구며, 포근했던 밤의 정적을 은근히 흔들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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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그림 김미진

 

-난 또 뭐라고.


수경은 난간을 짚고 계단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남편은 십여 년 전 미국으로 떠난 뒤, 돌아올 줄을 몰랐다. 그러니까 두 사람은 오래전부터 사실상 별거 중인 부부였다. 수경의 남자 애인이 주기적으로 바뀐다는 소문은, 이곳 사람들 사이에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근데, 아까 그 남자. 꽤 괜찮지 않았어?

-네? 그게 무슨…


서윤은 작게 헛기침하며 어깨를 움츠렸다. 수경는 미묘한 표정으로 서윤의 몸을 훑어내렸다. 젊고 단정한 얼굴, 고운 머리칼, 날렵한 몸매. 수경의 시선에는 얄궂은 호기심과, 은근한 질투가 뒤섞여 있었다.


-꽁지머리 그 남자. 뭔가 느낌이 다르잖아?

-아, 전 잘 못 봤어요.


수경이 작품 감상을 하다 말고 여기로 온 것은 서윤 때문이 아니었다. 훤칠하고 이국적인 외모, 묘하게 낭만을 풍기는 분위기. 그 낯선 남자를 본 순간, 수경은 어쩔 수 없는 충동에 이끌려 이곳까지 따라 나온 듯했다.


-그런데, 뭐 도와드릴까요?

-아참, 태일이 온다고 했잖아. 근데 벌써 왔나 봐. 어머, 저기 꽁지머리도 있네.


수경이 건물 현관에서 주차장 쪽으로 길게 뻗어 내려간 층계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투명한 유리창 너머, 층계를 내려오는 도준과 그를 향해 맞서 올라오는 태일의 모습이 보였다.


값비싼 올무를 손에 쥔 채 그녀를 옭아매러 오는 남자와, 순수한 열정으로 그녀 곁을 찾았던 한 남자가 하나의 프레임 안에서 겹쳐졌다. 그 장면은 두 세계의 충돌을 상징하는 듯했고, 늘 불행한 패만 골라 들었던 피노키오의 손끝을 떠올리게도 했다. 마치 시간과 선택의 틈 사이에서, 운명의 여신이 잔혹하게 그녀의 등을 떠미는 것 같았다.


‘도준을 이대로 떠나보낼 것인가. 아니면 기꺼이 태일의 치명적인 덫에 나를 내어줄 것인가.’


수경은 층계를 올라오는 태일을 보며 리온과의 또 한 번의 은밀한 미술품 거래를 떠올렸고, 서윤은 층계를 내려가는 도준을 바라보며, 자신이 갈망하던 생의 열정이 점점 스러지는 것을 느꼈다.


두 남자가 같은 층계 위에서 스치듯 엇갈렸다. 찰나의 눈 맞춤이 오간 그 순간, 무심한 듯 서로를 확인하는 시선 속에 알 수 없는 긴장감이 서려 있었다. 태일이 못마땅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며 먼저 고개를 돌렸다.


-뭘 그렇게 열심히 보는 거예요?


그때, 최희숙 관장이 다가와 두 여자가 시선을 모으고 있는 층계를 함께 내려다보았다.


-제 동생이에요. 강 실장이 도착했어요. 저기 보이시죠?


수경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환하게 웃었다.


-어머, 그러네요. 강태일 실장님이 리온 갤러리를 다시 찾아주시고, 황송할 따름이에요.

-약혼녀가 다니는 직장이잖아요.

-맞아요. 저희 갤러리의 인재를 뉴욕에서 돌아오자마자 강태일 실장님이 싹 낚아채신 거죠. 호호호... 안 그래요, 서윤 씨?


관장이 옆을 돌아보며 자랑스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그 자리에 있어야 할 서윤은 보이지 않았다.

‘띵’ 하는 신호음과 함께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서윤은 주저하지 않고, 재빨리 그 안으로 올라탔다. 지난봄, 횡계의 숲길. 그때 갈아타지 못한 운명의 마차에 뛰어오르듯, 또 다른 미지의 세계를 향해 한 발을 내딛듯.


-어머, 서윤 씨! 어디 가는 거야?


수경의 목소리가 호들갑스럽게 공기 중에 부서졌다.


-저기, 잠깐만요.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겼어요.


서윤이 소리치듯 말했다.


그때 화장실에서 나온 아이가 식수대 쪽으로 걸어가며 서윤의 얼굴을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서윤은 그 시선에 반응하지 않으려 애쓰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나도 철부지 피노키오처럼, 어디로 튈지 모르는 모험의 길을 떠날 수 있을까…’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자, 수경과 관장은 당황한 눈빛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급한 일이라뇨? 무슨 일이죠?

-저도 모르겠어요… 갑자기 이게 무슨 황당한 일이람.


관장은 입을 앙다물며 그녀가 사라진 방향을 응시했다.


서윤을 태운 엘리베이터는 멈춤 없이 곧장 지하 주차장으로 향했다. 층 번호가 한 칸씩 내려갈수록 심장이 미친 듯이 두근거렸고, 손바닥에 전류가 흐르는 듯 짜릿한 긴장감이 스며들었다.


태일이 다른 엘리베이터를 타고 4층 피노키오 전시관 로비에 도착했을 때, 서윤은 이미 지하 1층 비상구를 통해 연기처럼 건물을 빠져나간 뒤였다.


-조금만 기다려요. 이번엔 내가 찾아갈게요.


서윤은 건물 사이 좁은 골목길을 내달리며, 자신을 격려하듯 그 말을 몇 번이고 반복했다. 시간을 조종할 수 있는 마법의 주문처럼, 그 간절한 염원이 그녀의 숨결 속에 녹아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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