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그림 김미진
주말을 맞아 운동을 나온 사람들로 탈의실은 다소 북적였다. 격렬한 운동은 심신을 지치게 하면서도 근육마다 상쾌한 기운을 남겼다. 간단히 샤워를 마친 도준이 수건으로 물기를 훔치며 샤워장에서 나오자, 검은색 트레이닝복 차림의 매니저가 다가왔다. 그는 올림픽 수영장의 관리 책임자이자 전직 국가대표 선수로, 도준과도 안면이 있었다.
-꼭 수영에 미친 사람 같아요. 누가 보면 국제시합이라도 앞둔 선수인 줄 알겠어요.
-웬걸요. 이제 스퍼트도 다 죽었어요. 그래도 몸 좀 풀고 나니 가뿐하긴 하네요.
-도대체 어디서 그런 힘이 나오는 거예요? 정말 대단해요.
-감사합니다. 요즘 여기 분위기는 어때요?
-뭐, 매일 똑같죠. 그런데 요새 어떻게 지내세요? 많이 바쁘세요?
-글쎄요, 운동하고… 저도 늘 비슷해요.
-혹시 여기서 수영 강좌 하나 맡아보실 생각 없으세요? 수강생들 반응이 아주 좋을 것 같아서요. 아까 보니까 벌써 응원하는 팬 분들이 생긴 것 같던데요.
-그런 말씀 마세요. 수영 강좌 같은 건 저랑은 안 맞습니다. 능력도 없고요.
매니저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혹시 또 다른 등반 계획 있으신가 봐요? 그쵸?
-아… 내년에요.
-오, 그렇군요. 저도 산에 대해 궁금한 게 많아요.
-아, 네에.
-히말라야 저도 꼭 가보고 싶어요. 요즘은 네팔에 트레킹하러 가는 사람들도 많다면서요?
-네, 꽤 되죠. 등산 좋아하세요?
-그럼요. 제 별명이 날다람쥐잖아요. 허허허.
매니저는 로커에 등을 기댄 채 한바탕 이야기를 풀어놓을 기세였다. 하지만 도준은 그다지 잡담을 나누고 싶은 기분이 아니었다. 말없이 옷을 챙겨 입으며 그는 시선을 다른 곳으로 피했다. 온통 머릿속은 서윤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했다. 오늘은 그녀와 함께 낚시터에 가는 날. 약속을 하고, 손가락을 꼽으며 열흘이나 기다려 온 그 토요일이었다.
도준은 그녀를 향한 애틋한 감정에 떠밀리듯, 네팔에서 돌아온 즉시 리온 갤러리를 찾아갔다. 처음엔 어떤 부담도 주지 말고, 먼발치에서 그저 얼굴이나 한 번 보고 오겠노라 작정했다. 그러나 아이들에게 둘러싸여 피노키오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는 그녀를 보자, 그 결심은 한순간에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그녀와 눈이 마주친 순간, 속에서 뜨거운 뭔가가 폭발하는 듯했다. 눈가에 물기가 돌 만큼 반가운 마음이 샘솟았고, 끝내는 백기를 들 듯 먼저 손을 들어 인사를 하고야 말았다.
설렘과 기대에 부푼 마음, 그리운 이의 얼굴. 그녀는 언제나 그의 내면에 불을 밝히는 촛불이었고, 생명수처럼 거듭 그를 정화하며 숨 쉬게 하는 존재였다. 어린 시절, 용천 계곡에서 물에 빠져 거의 의식을 잃은 일곱 살 소녀를 품에 안았던 그날도, 스물두 해의 세월을 돌아 고모부 집 앞마당에서 다시 마주했을 때도, 그리고 지난 수요일, 종로 거리의 빗속에서 어린아이처럼 울고 있던 그녀를 보았을 때조차도, 그녀는 단 한순간도 그의 마음속에서 빛을 잃거나 흐트러진 적이 없었다. 그녀와 함께 있는 동안 그는 늘 손바닥에 땀이 배일 만큼 긴장했고, 시간은 언제나 꿈결처럼 흘러갔다.
그녀는 오늘 어떤 모습으로 약속 장소에 나타날까. 이미 결혼을 약속한 사람이 있다는 불편한 진실이 가슴에 얹힌 체증처럼 무겁게 느껴졌지만, 그럼에도 그녀와의 인연만큼은 놓치고 싶지 않았다. 모든 복잡한 생각을 잠시 내려놓고, 그때 용천 계곡에서 처음 마주했던 소년의 마음으로 그녀를 기다리고 싶었다. 오래전에 돌려주지 못한 자그마한 분홍신 한 짝. 마침내 긴 기다림 끝에, 그것을 건넬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왜 이토록 시간은 더디게 흐르는 걸까.’
도준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무심히 벽시계를 올려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