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김미진


한국 등반사는 1950년대 북한산 개척 등반에서 시작되어, 1960~70년대 본격적인 산악 문화의 활성기를 거쳐 고산 원정으로 발전해 왔다. 1977, 한국 원정대가 히말라야 8,000미터급 안나푸르나 등정에 성공하며 세계 산악계에 본격적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기술적 등반과 스포츠 클라이밍이 확산되었고, 한국 등반의 기반은 더욱 단단해졌다. 그 흐름 속에서 도준은 단연 돋보이는 인물이었다.


그는 히말라야 14좌 중 9개를 등정한 산악인이며, 최근 그의 서바이벌 키트가 로체봉 정상에서 발견되면서 세계 최초로 로체 남벽을 단독 등정한 인물로 보도되었다. 비록 생환에는 실패했지만, 그의 발걸음은 누구도 넘지 못한 남벽의 한계를 넘어섰고, 이 소식은 세계 등반사에 중대한 이정표로 기록되었다. 도준의 업적은 당분간 깨지기 어려운 전설로 남을 것이다. 그의 삶은 산에서 시작되어, 결국 산에서 조용히 마침표를 찍었다.


지상에서 살다 간 한 인간의 인생은 장편 대하소설처럼 구구절절 기록될 수도, 혹은 단 몇 줄의 문장으로 축약될 수도 있다. 인호는 그 삶을 글로 남겨야 한다는 책임을 안고, 도준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한성일보에 실릴 특집기사를 위해 여러 증언과 이를 뒷받침할 물증이나 기록이 필요했다.

가장 먼저 연락이 닿은 사람은, 그의 고등학교 동창이자 이번 원정대의 대장이었던 우태길이었다. 그는 당시 네팔의 한 의료 시설에서 치료를 받고 있었다. 귀국을 기다리던 그와 어렵사리 전화 연결이 닿은 뒤, 간략하나마 도준의 삶 전반에 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도준과 함께 등반했던 동료들로부터도 단편적인 일화들이 조금씩 흘러나왔다. 한 인물을 둘러싼 기록과 기억의 조각들이 여기저기서 모여들기 시작한 것이다. 도준의 고모부 자택에서는 그의 유품 일부를 확인할 수 있었고, 운 좋게도 등반 일지 몇 권이 발견되었다. 사고 직후, 가장 가까운 일가친척이었던 고모부 식구들에게 전달된 것들이었다.


그러나 진짜 난관은 ‘SY’ 이니셜로만 남겨진 여인을 찾는 일이었다. 그녀는 도준의 기록 어디에도, 누구의 증언 속에도 나타나지 않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베일에 싸인 채, 철저히 지워진 이름, 실체 없는 존재로 남았다. 도준의 오랜 선배 문형근은 그때 카트만두에 머물고 있었다. 그 역시 SY 정체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다며 당혹스러워했다.


-기자님, 이렇게 국제전화까지 하셨는데... 죄송합니다. 도준 곁에 여자가 있었다니, 저로선 금시초문입니다.

-전혀 여자와 관련된 얘기를 들은 적이 없으셨나요?

-아직 젊고 생긴 것도 멀쩡한데, 여자가 아예 없었겠어요? 하지만 누구를 진지하게 사귀는 모습은 한 번도 본 적 없습니다.

-그럼, 로체에서 발견된 그 편지는요?

-저도 그게 궁금합니다. 훈에게는 산이 인생의 전부였죠. 주말이면 늘 산으로 사라지는 연습벌레였으니, 그런 녀석을 감당할 여자가 과연 있었을까 싶네요. 혹시 누군가를 마음에 품었다 해도, 오래가진 못했을 겁니다.

-여자 이야기를 한 적이 없다는 거죠?

-허허. 다 지난 일 아닙니까. 생전에 연애를 했건, 아니건, 이제 와서 그걸 따지는 게 무슨 의미인지...


사람이 죽고 나면 흔적은 쉽게 잊히고, 미담은 지나치게 포장되기 마련이다. 문형근은 후배의 명성에 더는 손상을 끼치고 싶지 않았고, 그래서 더 이상의 질문에는 단호히 선을 그었다.


인호는 아쉬운 마음을 억누르며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편집국 안은 매일 반복되는 일상의 번잡함이 가득했다. 창밖으로 찌뿌듯하게 흐린 광화문 거리가 아득히 내려다보였다. 뒤엉킨 심경이 천천히 가라앉을 때까지, 말없이 그 회색 풍경 속에 자신을 내맡겼다.

 

누구에게나, 한 시절을 추억하게 만드는 그리운 얼굴이 있다. 세월의 풍화 속에 각인된, 인생의 또 다른 자화상처럼. 도준이 로체에서 실종되기 직전까지 마음속 깊이 품었던 ‘SY’, 그녀는 과연 누구였을까. 그녀가 이 세상에 존재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의 마지막이 조금은 따뜻했으리라 믿고 싶었다.


이후, 한성일보는 도준에 대한 특집 기사를 세 차례에 걸쳐 연재했다. 다각적인 면모를 취재한 결과, 걸출한 산악인 도준의 생애와 학창 시절, 성격과 등반 스타일, 가족과 지인들에게서 들은 일화들까지 체계적으로 정리되었다. 그러나 ‘SY’ 그 여인의 존재는 끝내 미스터리로 남았고, 기사는 조심스러운 여운을 남긴 채 어정쩡하게 마무리되었다. 마지막까지 풀리지 않은 그 퍼즐 하나가 인호의 마음 한편에 묘한 허기를 남겼다.


-김 기자, 빨리 기사 넘겨.

-잠깐만요, 확인할 게 좀 있어서요.


한성일보 편집국은 오늘도 분주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도준 특집기사가 마지막으로 나간 지도 어느새 사흘째였다. 편집회의를 마치고 자리로 돌아온 인호는 한 통의 낯선 전화를 받았다.


수화기 너머, 차분한 목소리의 여자가 자신이 ‘SY’를 알고 있다고 말했다. 그동안 비슷한 제보 전화를 몇 차례 받아왔기에 인호는 담담하게 대응하려 했지만, 이번은 뭔가 달랐다. 그녀는 도준과 SY 그녀와 함께 찍은 사진도 여러 장 가지고 있다고 덧붙였다.


-그 사진들을 제게 보여주실 수 있습니까?

-물론이에요. 하지만 한 가지 조건이 있어요.

-조건이요?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죠?

-그 서바이벌 키트에서 나온 편지요. 그걸 저에게 주세요.


인호는 어처구니없다는 듯 짧게 코웃음을 쳤다. 정신이 온전한 사람의 말이라고는 도무지 믿기 어려웠다. 그대로 전화를 끊으려는 순간, 수화기에서 그녀의 목소리가 다시 흘러나왔다.


-그 편지를 주시면, 두 사람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드릴게요.

-그런데... 도준 씨와는 어떤 관계예요?

-저는 그 편지에 나오는 여자의, 가장 가까운 친구입니다. 그 편지를, 제 주인에게 돌려줘야 마땅하죠.


그녀는 담담한 어조로 차분히 말을 이어갔다. 그 편지가 로체봉 정상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면, 그걸로 충분했을 거라고. 하지만 이제 그 편지는 산에서 내려왔고,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이상, 그 진짜 주인은 오직 한 사람뿐이라는 것이다.


-그 편지의 수신인은 바로 제 친구예요.


인호는 수화기를 든 채 상체를 길게 뻗어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가슴이 서서히 뛰기 시작했다.


분명히 무언가 있군.’


지금 이 여자의 말이 사실이라면, 도준에 관한 진정한 완결편을 쓸 수 있을지도 모른다. 설령 기사화할 수 없는 이야기라 해도, 도준과 SY에 얽힌 미스터리는 더 이상 그를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았다. 무엇보다 사진까지 갖고 있다는 제보자를 직접 만나 본다고 해서 손해 볼 일도 없었다.


-좋습니다. 우리 한번 만나 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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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김미진

 

지상에서 쓴 마지막 편지.


한성일보의 1면을 장식한 굵은 활자가 한국 사회를 뒤흔들었다. 2년 전 로체 남벽에서 사라진 도준이, 마침내 죽음 너머에서 말을 걸어온 순간이었다. 다른 일간지들도 앞다투어 이 사연을 특종으로 다뤘지만, 도준이 로체봉 정상에 남긴 편지의 전문을 공개한 곳은 한성일보뿐이었다.


그날, 문화부 기자 김인호는 출근 시간이 한참이나 지난 뒤에야 신문사에 모습을 드러냈다. 몇 년째 줄곧 입고 다니던 트렌치코트는 후줄근했고, 입에서는 아직도 술 냄새가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전날 밤, 한성 문예지 수상 작가인 시인 모 씨와 함께 신촌에서 새벽까지 술을 마신 터라 머릿속은 여전히 안개에 잠긴 듯 뿌옇게 흐려 있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뒤 긴 복도를 지나 편집국 안으로 들어선 순간이었다. 오늘따라 유독 들썩이는 실내 분위기에 그의 눈빛이 잠시 굳어졌다.


-왜 이렇게 시끌벅적한 거야....


편집국은 본사 건물 3층 전체를 통으로 사용하고 있었고, 천장 아래 허공에는 부서별 팻말이 하나씩 매달려 있었다. 인호는 가급적 고개를 숙인 채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문화부에 있는 자신의 데스크를 향해 걸어갔다.


지각을 하루 걸러 한 번씩 밥 먹듯이 하는 부하 직원을 좋아할 상관은 거의 없을 것이다. 다행히도 그의 직속 상사인 권 부장의 자리는 비어 있었다. 나중에 면전에서 크게 꾸지람을 듣게 되겠지만, 우선은 한시름 놓으며 의자에 앉았다. 그때까지도 사방에서 울려 퍼지는 전화벨 소리에 귀가 따가울 지경이었다. 무슨 일로 이렇게 소란스러운지 알고 싶었으나, 옆자리에 앉은 선임 기자 역시 통화 중이어서 그가 전화를 끊을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때, 편집국장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평소 문화부에는 좀처럼 얼굴을 비치지 않던 인물이라, 인호는 본능적으로 몸을 꼿꼿하게 바로 세웠다.


-김인호 기자.

-, .


인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절도 있게 고개를 숙였다.


-이번에 제대로 한 방 날렸던데. 축하해.

-?

-그 기사 말이야. 오늘 1면 탑으로 뽑았잖아. 하하하.


편집국장의 큰 웃음소리에 주변 사람들이 흥미 어린 표정으로 돌아보았다. 인호는 회사 내에서 인정받았다는 만족감이나 자긍심보다, 전에 없이 펼쳐진 이런 상황이 왠지 어색하게 느껴져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그날 오전 내내 편집국 전화벨이 멈추지 않았던 건, 도준에 대한 관심이 아직 세상에서 지워지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증거였다. 전화를 걸어온 사람들의 면면도 다양했다. 해외 독립영화제 수상 감독, 발표가 지지부진하던 시나리오 작가와 소설가, 출판 편집자, 방송국 간부들까지 줄을 이었다. 기사에 감동했다는 일반 독자들의 전화도 끊이지 않았다. 사람들은 하나같이 김인호 기자를 찾았다. 도준 특집 기사를 쓴 장본인이 바로 그였기 때문이다.


편집국장은 다른 경쟁지들을 제쳤다는 승리감에 얼굴이 잔뜩 상기돼 있었다. 반면 인호는 숙취로 인한 후유증 탓에 머리가 지끈거렸고, 참기 힘들 만큼 하품이 자꾸 새어 나왔다.


-이번에 로체에 올라간 등반대장이 네 친구라며?

-. 등반대장 우태길이 남체에서 팩스를 보냈어요.

-하여튼 대단해. 우리가 크게 한 건 했어. 위에서도 칭찬이 자자하더라고.


편집국장은 인호의 팔뚝을 한 번 꾹 잡아본 뒤, 흡족한 표정을 남기고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잠시 조용해진 전화기는 이내 다시 요란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맞은편 자리에 앉아 있던 홍 기자가 눈을 찡긋하며 양손 엄지를 번쩍 들어 올렸다.


-, 신난다. 브라보!

-, 그런 걸 가지고... 촌스럽게.


인호가 멋쩍게 웃으며 자리에 앉으려는데, 언제 나타났는지 문화부장이 자리에 앉아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그를 불렀다. 인호의 미간이 순간 움찔했다. 이번 주에만 벌써 세 번째 지각이었다. 기사 반응이 좋으니 큰 날벼락은 없겠지만, 마음이 편치 않은 건 마찬가지였다.


-왜요.


그는 부장 앞 접대용 의자에 털썩 앉으며 일부러 퉁명스럽게 말했다. 입안이 껄끄럽고 입술은 바짝 말라 있었다. 부장은 신문 지면을 손끝으로 툭 가리켰다.


-여기, 편지에 나오는 ‘SY’라는 사람.


인호는 고개를 들었다. ‘그 이름이, 거기 있었나?’ 기억의 지면을 되감듯 머릿속에서 활자를 더듬었다.


-부인이나 여자친구라면 굳이 이니셜로 남기진 않았겠지.


부장의 말꼬리가 길게 늘어졌다.


-도준은 결혼 안 했어요. 자식도 없고...

-그럼 혹시 불륜 관계 아니었을까? 연상녀라든지, 유부녀라든지.

-? 그게 무슨...

-편지 말투, 좀 닭살 돋지 않아? 너무 감상적이잖아. 어이, 손 기자, 이리 좀 와봐.


손 기자는 결혼 15년 차를 맞은 문화부의 유일한 기혼 여성이자, 부서 순환 대상에서 제외된 연륜 깊은 전문 기자였다. 그녀는 재킷 뒷자락을 가볍게 정리하며 다가와 지면을 힐끗 내려다봤다.


-왜요, 이번엔 또 뭐가 문젠데요?

-여기 도준. 왜 편지에 존댓말을 썼을까?


손 기자는 피식 웃었다.


-저도 여행 가서 남편한테 엽서 쓸 땐 그래요. 평소엔 반말인데, 그럴 땐 존댓말 써요.

-?

-말실수 줄이려고도 하고... 단정하고 품위 있어 보이잖아요.


그녀는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말을 덧붙였다.


-둘만 아는 언어 문법 같은 거죠. 겉으론 존댓말인데, 속에는 훨씬 진한 감정이 들어 있어요. 일종의 이중 어법이랄까요. 그 미묘한 거리감이 오히려 더 끈끈하게 느껴질 때도 있고요.


손 기자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웃으며 자리로 돌아갔다. 부장은 턱을 쓰다듬으며 인호를 다시 바라봤다. 뭔가 꼼수를 떠올릴 때마다 짓던, 그 불편하고도 느끼한 표정이었다.


-이중 어법이라... 흥미롭군.

-? , ...

-후속 기사 써야지뭐하고 있어?


부장은 휴먼 다큐 형식으로 서너 차례 연재도 가능하겠다며 입맛을 다셨다. 그 눈빛은 사냥감을 포착한 포식자의 그것과 닮아 있었다.


인호는 손에 쥐고 있던 크리넥스를 눈가에 갖다 대고 문질렀다. 자신이 쓴 기사가 이렇게까지 큰 반향을 일으킨 것은 기자로서 분명 뿌듯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 떠들썩한 반응은 여전히 낯설고, 어딘가 부담스러웠다. 그가 적어 내려간 단어와 문장들, 그 행간의 의미들이 누군가의 오랜 침묵을 건드린 듯해 마음이 편치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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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김미진

 

베이스캠프 주변에는 거센 돌풍이 몰아치고, 굵은 눈발이 사방으로 매섭게 흩날렸다. 며칠 전 라마제 때 매달아 둔 초르파의 오색 천 조각들이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바람 속에서 허공을 휘저었지만, 식당 텐트 안은 분주한 움직임과 떠들썩한 목소리로 활기가 넘쳤다.

 

중앙에는 저녁 식사가 차려진 길쭉한 플라스틱 테이블이 놓여 있었고, 스무 명쯤 되는 대원들이 그 주위에 둘러앉아 시끌벅적한 분위기 속에서 밥을 먹는 중이었다. 몇몇은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깔끔한 차림의 도시 직장인이었지만, 이제는 하나같이 게릴라 전투에 나선 산적을 닮았다. 한낮의 맹렬한 햇볕을 피할 길 없는 히말라야 고산에서, 그들의 피부는 까무잡잡하게 그을리고 얼굴은 검붉게 타 있었다.

 

며칠째 제대로 씻지 못해 꾀죄죄한 사내들은 음식을 푹푹 떠 입에 넣으며 왁자하게 웃고 떠들었다. 식탁 위는 화려하지는 않았으나, 어쩐지 잔칫날처럼 풍성함이 느껴졌다. 하얀 쌀밥과 닭볶음탕, 김치와 조미김, 몇 가지 네팔식 반찬과 렌틸콩 수프가 전부였지만, 등줄기까지 텅 빈 듯 허기진 대원들에게는 무엇보다 위로가 되는 정성스러운 한 끼였다. 해발 5,200미터에 자리한 베이스캠프에서는 아무리 먹어도 배가 금세 꺼지고, 계속해서 뭔가 속이 허전했다. 조리팀은 식탁 중앙의 큰 접시와 냄비가 바닥을 드러낼 때마다 말없이 음식을 다시 채워 올리며 그런 대원들의 식사를 챙겼다.

 

오늘 화제의 중심은 단연코 한국 원정대가 로체봉 정상에서 거둔 쾌거였다. 마침내 첫발을 내디딘 등정의 순간을 자축하듯 분위기는 한껏 고조되었다. 이성호는 치료 중인 우태길 대장을 대신해 위태로웠던 순간들의 조마조마한 뒷이야기를 들려주었고, 다른 대원들의 입에서는 절로 탄성과 웃음이 터져 나왔다. ‘로체라는 단어만으로도 모두의 얼굴에 긍지와 자부심이 깃든 미소가 번졌다.

 

그러는 동안 바깥 날씨는 점점 험악해졌고, 얼기설기 엮어 세운 식당 텐트는 모진 풍랑 속에서 표류하는 작은 배처럼 요동쳤다. 그 출렁이는 소리는 단순한 자연의 바람이 아니라, 거대하고 초자연적인 존재가 이 세계의 경계를 헤집으며 낮게 으르렁대는 경고의 울림처럼 들려왔다.


-오늘 조금만 늦게 내려왔으면 큰일 날 뻔했어요.

-그러게나 말이야


대원들은 순간 말을 멈추고, 투명한 비닐창 너머로 매섭게 휘몰아치는 눈발을 바라보았다. 텐트 천은 거세게 흔들리며 금방이라도 찢어질 듯했고, 몇몇은 혹시 쓰러질까 두 손으로 기둥을 움켜쥔 채 숨을 죽였다.

 

식사가 끝난 후, 문형근과 청송은 다리가 흔들거리는 간이 식탁 앞에 앉아 주방장이 특별히 준비한 야크 버터 티를 마셨다. 청송은 손에 들고 있던 서바이벌 키트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찌그러진 알루미늄 통은 본체와 뚜껑이 단단히 맞물린 채 무슨 중요한 비밀이라도 품은 듯 쉽게 열릴 것 같지 않았다.


-안에 뭐가 들었는지 궁금해요.

-그래, 조심해서 한번 꺼내봐라.


청송은 알루미늄 통의 상단과 하단을 고무줄로 감은 후 얼굴이 벌게지도록 힘껏 비틀었지만 뚜껑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화끈거리는 손바닥을 주무르며 밖으로 뛰어나간 그는 담당 주치의에게서 수술용 고무장갑을 얻어왔다. 또 다른 시도와 몇 번의 좌절 끝에, 조그만 캡슐의 뚜껑이 마침내 딸칵 소리를 내며 열렸다. 주위에 있던 대원들 모두 입맛을 다시며 호기심 어린 눈길로 지켜보았다.


-뭔데 로체 정상에 묻어뒀을까?

-신상정보, 그런 거겠지.


키트 안을 살피던 청송의 입에서 갑작스레 흥분 섞인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있어요. 뭐가 있어요. 종이 같아요.


문형근이 긴장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종이라고? 이리 줘봐라.


청송은 아쉬운 기색을 감추지 못한 채 서바이벌 키트를 통째로 문형근에게 건넸다. 내 손으로 직접 꺼내서 도준의 숨결을 제일 먼저 맡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까마득한 후배 처지에 대선배의 지시를 감히 거스를 수는 없었다.


문형근은 손마디 두 개가 잘려 나간 뭉툭한 손으로 작게 또르르 말린 종이를 조심스럽게 펼쳤다. 어른 손바닥 한 개 반쯤 되는 불투명한 습자지였고, 네 겹으로 접힌 종이에는 한 글자 한 글자 정성을 들여 쓴 깨알 같은 글씨들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었다. 그는 돋보기안경을 끼고 잠시 숨을 고른 뒤, 그 글을 조용히 읽어 내려갔다.

 

사랑하는 SY.


이틀 전부터 눈보라가 거세게 몰아치더니 결국 이곳에 갇히고 말았소. 이대로 움직이는 건 위험해서 계속 텐트 안에서 버티고 있소. 몸은 점점 쇠약해지고, 정신은 흐려져 가오. 체온이 떨어지지 않도록 조금씩이라도 몸을 움직이고, 연료가 넉넉지 않아도 하루에 열 잔 넘게 차를 마셔야 하오. 탈수가 오면 모든 게 끝장이요. 날씨가 개이길 기다리며, 침묵 속에서 체력을 아끼고 있소. 고독이란 녀석은 말없이 나를 집어삼키려 하고, 나는 그 무서운 적과 끝없이 싸우고 있소. 오늘 아침에도 스치듯 아주 잠깐, 이 산에서 내려가고 싶다는 강렬한 유혹을 느꼈다오. 다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 그러나 여기서 멈출 수는 없소. 나는 이 공포의 벽을 넘어설 것이오. 늘 그래왔듯, 그 어딘가에 길이 있을 거라 믿는다오.


언젠가 당신은 왜 나였어요?’라고 물었소. 그땐 대답하지 못했지만, 지금은 말할 수 있소. 이유 같은 건 없었소. 처음 만난 순간, 나도 모르게 마음이 움직였으니까. 설명이 불가한 힘, 방향성, 혹은 숙명 같은 것. 그저, 당신에게 가기 위한 오랜 여정이 끝났다는 것을 알았을 뿐이오. 전에도 말했듯, 당신을 만나 나는 새롭게 태어났소. 그 외엔 어떤 단어도 떠오르지 않소. 사랑이란, 그 사람의 꿈을 막지 않는 거라 했던 당신의 그 말이 내겐 참으로 뼈아프게 남았소. 혹시 지금도 내가 떠난 것을 슬퍼하고 있소? 그 생각을 하면, 이 고도에서도 견디기 힘들다오. 미안하오, 정말... 미안하오.


당신을 떠올릴 때마다 이 조그만 텐트 안이 환해진다오. 낮에도 밤에도 당신의 이름이 내 마음속을 조용히 맴돌고 있소. 우리는 떨어져 있지만 늘 함께 있소. 처음부터... 아니, 태어나기도 전부터 우리는 하나였소. 지금도 당신은 내 곁에서, 함께 이 남벽을 오르고 있소. 약속한 대로, 이 편지를 정상에 남겨두려 하오. 만약, 올라갈 수 있다면.


삶이란 결국 출생과 죽음 사이에 놓인 수많은 선택의 연속이라오. 나는 오래전에 이 산을 선택했고, 그리고 당신을 사랑했소. 죽음을 마주하는 등반과, 영원을 꿈꾸는 사랑... 그 둘 모두 내게 주어진 거스를 수 없는 특별한 운명이었소. 당신을, 나의 유일한 사랑, 영원히 사랑하오. 이곳의 라리그라스 향기를 실어 보내오. 부디 내게 행운을 빌어주오. LOVE, 도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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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김미진


늦은 오후, 베이스캠프 주변에 걸린 크고 작은 오색 깃발들이 차가운 그림자 속에 나부꼈다. 두꺼운 털모자를 눌러쓴 늙은 셰르파가 식당 앞에서, 마니차를 닮은 낡은 놋쇠 그릇을 천천히 두드렸다.


, , ......


그 소리는 회색빛 고원과 오래된 사원의 저녁 종처럼, 허기와 고독에 잠긴 이들의 가슴 깊숙이 스며들었다. 한날의 일과에 지친 대원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낼 때마다, 늙은 셰르파는 두 손을 모아 나마스테인사하며 그들의 무탈한 밤과 내일의 건승을 조용히 축원했다. 고산 지대에서, 생사를 넘나드는 베이스캠프의 한 끼 식사는 단순한 끼니가 아니라, 기도이자 의례의 일부처럼 느껴졌다.


희망한 대로 이루어지기를, 기원한 대로 무사하기를......


문형근은 식당 텐트를 향해 천천히 걸어가고 있었다. 그때 뒤에서 누군가 숨을 헐떡이며 다가왔다. 생애 첫 해외 원정에 오른 어린 대원, 청송이었다. 보송보송한 얼굴에는 긴장과 기대가 섞여 있었고, 목소리에는 밝으면서도 어딘가 조심스러운 기색이 감돌았다.


-대선배님, 그것 저도 잠깐 만져봐도 될까요?


깊은 생각에 잠겨 있던 문형근은 그제야 정신을 가다듬고 청송을 바라보았다. 그는 단순한 선배가 아니라, 거의 큰아버지뻘로 보였다.


-도준 선생님은 제가 정말 존경하는 분이에요.


스물두세 살쯤 되었을까. 청송의 얼굴에는 아침 햇살 같은 순수함과 원시 자연을 향한 뜨거운 열정이 어른거렸다. 그 젊음의 눈부심이 오늘따라 유난히 어여뻐 보였다.


문형근은 오랫동안 전문 산악인들과 동행하며 살아왔지만, 이제는 뒷방 늙은이나 다름없는 신세가 되었다. 벌써 아홉 해째, 그는 카트만두에 터를 잡고 여행자 숙소를 운영하며 지내고 있었다. 히말라야에 반해 드나들다 보니 어느덧 고향처럼 정든 땅이 되어버린 셈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고산의 위험을 온몸으로 감당할 만큼 몸도 나이도 예전 같지 않았다. 오랜 세월 산을 오르며 얻은 크고 작은 부상들이, 그의 한계를 무엇보다 분명하게 알려주고 있었다.


이번에 바쁜 숙소 일을 잠시 접어둔 채 한국 원정대를 따라 베이스캠프까지 오른 것은, 아마도 젊은 시절, 오직 산을 사랑한 이들만이 느낄 수 있는 격렬하고 벅찬 감각을 다시 한번 가슴 깊이 되새기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히말라야에 도전했던 수많은 선후배들처럼, 그도 한때는 집착에 가까운 열망으로 산을 품었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바람이 머물다 간 옛 자리를 조용히 다음 세대에게 내어줄 때가 되었다.


-이거, 도준의 것 말이냐? 그래, 만져보아라.


문형근은 손에 들고 있던 서바이벌 키트를, 오래된 유산을 전하듯 조심스레 청송에게 건넸다. 히말라야를 꿈꾸는 이 젊은 산악인 역시 언젠가 저 설벽 어딘가를 오르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미 전설 속 주인공이 된 도준의 유품은 도전의 가치를 증명하는 가장 깊고도 분명한 실체였다. 부재의 기록을 품은 작은 캡슐 하나가, 저 먼 신들의 영역을 향한 오래된 동경을 다시 불러왔다. 청송은 그 상실의 흔적을 두 손에 받쳐 든 채 한동안 말없이, 감회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렇게 좋으냐?


문형근이 물었다.


-그럼요. 믿어지지 않아요.


청송의 대답은 맑고 또렷했다. 어릴 적부터 도준은 그에게 동경의 대상이었다. 신문 한 귀퉁이에 실린 짤막한 기사에도 가슴이 뛰었고, ‘히말라야라는 단어 하나만으로도 마음이 출렁였다. 청송이 산을 향한 열망을 키우고 대학 진학 후 본격적인 등반길에 나선 것도, 모두 그 존재의 이름으로부터 비롯된 일이었다. 한때 무지개처럼 아득히 아른거리던 환영이, 이제는 손에 쥔 유품 하나로 명료하게 되살아나, 짙은 감동으로 그의 가슴 깊은 곳을 두드렸다.


그때 문형근의 두 눈은 청송이라는 한 청년의 영혼을 관통해, 저 너머 오래전 푸른 느티나무 같았던 도준을 응시하고 있었다.


-선배님, 이렇게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제 이름은 도준입니다.


그날도 도준은 조용히 말을 건넸다말보다 눈이 먼저 말을 거는 청년이었다세월은 강물처럼 흐르고상실의 흔적은 강기슭 어딘가로 스며든다언젠가 다시 피어오를 전설을 기다리며그는 청송을 향해 가만히 미소 지었다.


이 젊은이도 언젠가 저 설산의 능선을 훨훨 날 수 있기를. 바람처럼 가볍고, 무한히 자유롭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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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김미진

 

베이스캠프에는 한국에서 함께 떠나온 원정대가 두 사람의 무사 귀환을 애타게 기다리며 숨을 죽이고 있었다. 저 멀리,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비틀거리며 걸어오는 두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저기요! 저기 와요!


본부 텐트 앞에서 망을 보던 대원 하나가 흥분한 목소리로 외쳤다. 몇몇 발 빠른 대원들이 달려 나가, 정상 공격을 마치고 돌아온 두 남자를 조심스레 맞아들였다.


원정대 대장 우태길은 깊은 숨을 내쉬며 몸을 휘청거렸다탈수로 갈라진 입술과 까맣게 변해가는 손가락 마디는 그의 위태로운 상태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동상이 심한 오른손은 미세한 자극에도 극심한 통증을 불러왔다. 절단을 피하려면 혈관을 확장하는 응급 주사가 무엇보다 시급했다. 이성호 역시 극도로 탈진한 상태였지만, 그 눈빛만큼은 여전히 강인한 젊음을 간직하고 있었다험난한 하산을 무사히 마친 자부심과 동료들과 다시 만난 안도감이 그의 마음 깊숙이 차올랐다.


-이성호, 축하해. 우리 원정대 대표로 로체를 등정한 기분이 어때?

-형님이 저 대신 올라가셨어야 했는데요.

-무슨 소리야. 네가 잘 서포트해줬으니까, 대장도 마음 든든했을 거야.

-고마워요. 그런데, 도준 형... 지난번 단독 등정, 정말 성공하신 거 같아요. 로체 남벽을, 그것도 산소통 없이 혼자서요.

-그게 무슨 씻나락 까먹는 소리야?


이성호는 품속에서 알루미늄 캡슐을 꺼냈다.


-정상에서 이 서바이벌 키트를 발견했어요. 준이 형 것 같아요. 2년 전에 여기서 실종된, 도준 선배님이요.



그 순간, 주위는 숨소리 하나 없이 조용해졌다. ‘도준이라는 이름이 지닌 무게 앞에서, 누구도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캠프 내에서 최연장자인 문형근이 앞으로 나와 은색 캡슐을 건네받았다이번 정상 공격에 대한 우려와 책임감이 그의 얼굴에 짙게 어려 있었다. 그는 오랜 세월 도준과 호형호제하며 지내온 터라, 누구보다도 그의 고유한 습관들을 익히 알고 있었다. 알루미늄 통에 감긴 파란 테이프를 확인한 순간, 문형근의 입에서 무거운 한숨이 흘러나왔다뚜껑 위 ‘DJ’라는 이니셜은 도준과의 기억을 되살리며 가슴 한복판을 스치듯 아릿한 슬픔을 남겼다. 그는 잠시 눈을 질끈 감고, 밀려드는 감정의 물결을 다독였다.


-이거 준이 형 것 맞지요?


이성호가 재촉하듯 물었다.


-분명하군. 이건 도준 거야.


문형근이 눈을 뜨며 고개를 끄덕였다.


-파노라마 사진 찍으려고 왔다 갔다 하는데, 뭔가 발에 걸리는 거예요. 주변을 좀 파봤죠. 태길이 형이 한눈에 알아봤어요. 이거야말로 도준 선배님이 혼자 로체 남벽을 돌파한 증거물이잖아요.

-너희가 그걸 찾으러 거기까지 간 거구나. 고맙구나, 정말.


문형근은 착잡한 심정으로 로체봉을 올려다보았다. 능선 위 험악한 삼각 직벽과 눈 덮인 흰 봉우리가 가슴속에 켜켜이 쌓여 있던 슬픔을 더욱 도드라지게 했다. 아직도 저 산 어딘가에 누워 있을 도준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히말라야에 바쳐진 성스러운 청춘은 여전히 동면하듯 그곳에 남아 있을 것이다.


그동안 얼마나 추웠을까, 얼마나 외롭고 안타까웠을까.’


도준의 등반 실력과 재능을 믿는 사람들은 그의 실종을 둘러싸고 여러 의문을 제기했다. 2년 전 봄 이미 혼자 정상에 올랐고, 더 이상 오를 곳이 없었기에 세상을 등진 채 어딘가에서 홀로 살아 있을 거라 말하는 이들도 있었다. 산이라는 존재가 도준을 선택한 것처럼, 그는 태생부터가 거기에 속한 사람이었다.


그런 그의 고독한 성취를 믿고 따르는 이들이 생각보다 훨씬 많았다. 그러나 정확한 등정 기록도, 사진 증빙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 누구도 그의 로체 남벽 등정 성공을 단언할 수 없었다. 도준은 결국 그 산에서 실종되었고, 한때 이 세상에 분명히 존재했으나 이제 더는 존재하지 않는 자로 사라졌다. 그의 단독 등정 여부는 끝내 수수께끼로 남았고, 그를 사랑한 산악인들의 기억 속에서도 그는 점차 바람처럼 희미해지고 있었다.


문형근은 천천히 숨을 들이쉬며 속으로 되뇌었다.


도준, 자네가 로체 남벽을 올라간 증거가 지금 내 손안에 있어. 결국 원하던 바를 이룬 거야. 이제는 편히 눈을 감게나.’


로체봉 정상에서 도준의 서바이벌 키트를 찾았다는 사실이 아직도 꿈만 같았다. 이토록 기적 같은 일이 벌어진 것 자체가, 어쩌면 신의 계시였는지도 몰랐다. 세상에는 아직도 인간이 이해하지 못하는 일들이 수두룩하다. 도준이 남긴 그 흔적은 우연한 기적이자, 설명할 수 없는 신비였다.


저 높은 설산을 바라보는 문형근의 눈가가 떨렸다하늘을 덮은 먹구름 사이로 한 줄기 햇살이 스며들자 지나온 시간의 아쉬운 잔상들이 떠올랐다. 그는 손바닥으로 먹먹한 가슴께를 눌러 가며 도준에 대한 기억과 그리운 추억들을 곱씹었다. 그러다 문득, 자신이 산에 대한 거창한 꿈을 방패막이 삼아 너무 오랫동안 비관적인 감상주의자로 살아온 것은 아닌지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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