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그림 김미진
한국 등반사는 1950년대 북한산 개척 등반에서 시작되어, 1960~70년대 본격적인 산악 문화의 활성기를 거쳐 고산 원정으로 발전해 왔다. 1977년, 한국 원정대가 히말라야 8,000미터급 안나푸르나 등정에 성공하며 세계 산악계에 본격적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기술적 등반과 스포츠 클라이밍이 확산되었고, 한국 등반의 기반은 더욱 단단해졌다. 그 흐름 속에서 도준은 단연 돋보이는 인물이었다.
그는 히말라야 14좌 중 9개를 등정한 산악인이며, 최근 그의 서바이벌 키트가 로체봉 정상에서 발견되면서 세계 최초로 로체 남벽을 단독 등정한 인물로 보도되었다. 비록 생환에는 실패했지만, 그의 발걸음은 누구도 넘지 못한 남벽의 한계를 넘어섰고, 이 소식은 세계 등반사에 중대한 이정표로 기록되었다. 도준의 업적은 당분간 깨지기 어려운 전설로 남을 것이다. 그의 삶은 산에서 시작되어, 결국 산에서 조용히 마침표를 찍었다.
지상에서 살다 간 한 인간의 인생은 장편 대하소설처럼 구구절절 기록될 수도, 혹은 단 몇 줄의 문장으로 축약될 수도 있다. 인호는 그 삶을 글로 남겨야 한다는 책임을 안고, 도준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한성일보에 실릴 특집기사를 위해 여러 증언과 이를 뒷받침할 물증이나 기록이 필요했다.
가장 먼저 연락이 닿은 사람은, 그의 고등학교 동창이자 이번 원정대의 대장이었던 우태길이었다. 그는 당시 네팔의 한 의료 시설에서 치료를 받고 있었다. 귀국을 기다리던 그와 어렵사리 전화 연결이 닿은 뒤, 간략하나마 도준의 삶 전반에 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도준과 함께 등반했던 동료들로부터도 단편적인 일화들이 조금씩 흘러나왔다. 한 인물을 둘러싼 기록과 기억의 조각들이 여기저기서 모여들기 시작한 것이다. 도준의 고모부 자택에서는 그의 유품 일부를 확인할 수 있었고, 운 좋게도 등반 일지 몇 권이 발견되었다. 사고 직후, 가장 가까운 일가친척이었던 고모부 식구들에게 전달된 것들이었다.
그러나 진짜 난관은 ‘SY’ 이니셜로만 남겨진 여인을 찾는 일이었다. 그녀는 도준의 기록 어디에도, 누구의 증언 속에도 나타나지 않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베일에 싸인 채, 철저히 지워진 이름, 실체 없는 존재로 남았다. 도준의 오랜 선배 문형근은 그때 카트만두에 머물고 있었다. 그 역시 SY 정체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다며 당혹스러워했다.
-기자님, 이렇게 국제전화까지 하셨는데... 죄송합니다. 도준 곁에 여자가 있었다니, 저로선 금시초문입니다.
-전혀 여자와 관련된 얘기를 들은 적이 없으셨나요?
-아직 젊고 생긴 것도 멀쩡한데, 여자가 아예 없었겠어요? 하지만 누구를 진지하게 사귀는 모습은 한 번도 본 적 없습니다.
-그럼, 로체에서 발견된 그 편지는요?
-저도 그게 궁금합니다. 훈에게는 산이 인생의 전부였죠. 주말이면 늘 산으로 사라지는 연습벌레였으니, 그런 녀석을 감당할 여자가 과연 있었을까 싶네요. 혹시 누군가를 마음에 품었다 해도, 오래가진 못했을 겁니다.
-여자 이야기를 한 적이 없다는 거죠?
-허허. 다 지난 일 아닙니까. 생전에 연애를 했건, 아니건, 이제 와서 그걸 따지는 게 무슨 의미인지...
사람이 죽고 나면 흔적은 쉽게 잊히고, 미담은 지나치게 포장되기 마련이다. 문형근은 후배의 명성에 더는 손상을 끼치고 싶지 않았고, 그래서 더 이상의 질문에는 단호히 선을 그었다.
인호는 아쉬운 마음을 억누르며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편집국 안은 매일 반복되는 일상의 번잡함이 가득했다. 창밖으로 찌뿌듯하게 흐린 광화문 거리가 아득히 내려다보였다. 뒤엉킨 심경이 천천히 가라앉을 때까지, 말없이 그 회색 풍경 속에 자신을 내맡겼다.
누구에게나, 한 시절을 추억하게 만드는 그리운 얼굴이 있다. 세월의 풍화 속에 각인된, 인생의 또 다른 자화상처럼. 도준이 로체에서 실종되기 직전까지 마음속 깊이 품었던 ‘SY’, 그녀는 과연 누구였을까. 그녀가 이 세상에 존재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의 마지막이 조금은 따뜻했으리라 믿고 싶었다.
이후, 한성일보는 도준에 대한 특집 기사를 세 차례에 걸쳐 연재했다. 다각적인 면모를 취재한 결과, 걸출한 산악인 도준의 생애와 학창 시절, 성격과 등반 스타일, 가족과 지인들에게서 들은 일화들까지 체계적으로 정리되었다. 그러나 ‘SY’ 그 여인의 존재는 끝내 미스터리로 남았고, 기사는 조심스러운 여운을 남긴 채 어정쩡하게 마무리되었다. 마지막까지 풀리지 않은 그 퍼즐 하나가 인호의 마음 한편에 묘한 허기를 남겼다.
-김 기자, 빨리 기사 넘겨.
-잠깐만요, 확인할 게 좀 있어서요.
한성일보 편집국은 오늘도 분주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도준 특집기사가 마지막으로 나간 지도 어느새 사흘째였다. 편집회의를 마치고 자리로 돌아온 인호는 한 통의 낯선 전화를 받았다.
수화기 너머, 차분한 목소리의 여자가 자신이 ‘SY’를 알고 있다고 말했다. 그동안 비슷한 제보 전화를 몇 차례 받아왔기에 인호는 담담하게 대응하려 했지만, 이번은 뭔가 달랐다. 그녀는 도준과 SY 그녀와 함께 찍은 사진도 여러 장 가지고 있다고 덧붙였다.
-그 사진들을 제게 보여주실 수 있습니까?
-물론이에요. 하지만 한 가지 조건이 있어요.
-조건이요?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죠?
-그 서바이벌 키트에서 나온 편지요. 그걸 저에게 주세요.
인호는 어처구니없다는 듯 짧게 코웃음을 쳤다. 정신이 온전한 사람의 말이라고는 도무지 믿기 어려웠다. 그대로 전화를 끊으려는 순간, 수화기에서 그녀의 목소리가 다시 흘러나왔다.
-그 편지를 주시면, 두 사람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드릴게요.
-그런데... 도준 씨와는 어떤 관계예요?
-저는 그 편지에 나오는 여자의, 가장 가까운 친구입니다. 그 편지를, 제 주인에게 돌려줘야 마땅하죠.
그녀는 담담한 어조로 차분히 말을 이어갔다. 그 편지가 로체봉 정상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면, 그걸로 충분했을 거라고. 하지만 이제 그 편지는 산에서 내려왔고,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이상, 그 진짜 주인은 오직 한 사람뿐이라는 것이다.
-그 편지의 수신인은 바로 제 친구예요.
인호는 수화기를 든 채 상체를 길게 뻗어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가슴이 서서히 뛰기 시작했다.
‘분명히 무언가 있군.’
지금 이 여자의 말이 사실이라면, 도준에 관한 진정한 완결편을 쓸 수 있을지도 모른다. 설령 기사화할 수 없는 이야기라 해도, 도준과 SY에 얽힌 미스터리는 더 이상 그를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았다. 무엇보다 사진까지 갖고 있다는 제보자를 직접 만나 본다고 해서 손해 볼 일도 없었다.
-좋습니다. 우리 한번 만나 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