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김미진

 

베이스캠프 주변에는 거센 돌풍이 몰아치고, 굵은 눈발이 사방으로 매섭게 흩날렸다. 며칠 전 라마제 때 매달아 둔 초르파의 오색 천 조각들이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바람 속에서 허공을 휘저었지만, 식당 텐트 안은 분주한 움직임과 떠들썩한 목소리로 활기가 넘쳤다.

 

중앙에는 저녁 식사가 차려진 길쭉한 플라스틱 테이블이 놓여 있었고, 스무 명쯤 되는 대원들이 그 주위에 둘러앉아 시끌벅적한 분위기 속에서 밥을 먹는 중이었다. 몇몇은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깔끔한 차림의 도시 직장인이었지만, 이제는 하나같이 게릴라 전투에 나선 산적을 닮았다. 한낮의 맹렬한 햇볕을 피할 길 없는 히말라야 고산에서, 그들의 피부는 까무잡잡하게 그을리고 얼굴은 검붉게 타 있었다.

 

며칠째 제대로 씻지 못해 꾀죄죄한 사내들은 음식을 푹푹 떠 입에 넣으며 왁자하게 웃고 떠들었다. 식탁 위는 화려하지는 않았으나, 어쩐지 잔칫날처럼 풍성함이 느껴졌다. 하얀 쌀밥과 닭볶음탕, 김치와 조미김, 몇 가지 네팔식 반찬과 렌틸콩 수프가 전부였지만, 등줄기까지 텅 빈 듯 허기진 대원들에게는 무엇보다 위로가 되는 정성스러운 한 끼였다. 해발 5,200미터에 자리한 베이스캠프에서는 아무리 먹어도 배가 금세 꺼지고, 계속해서 뭔가 속이 허전했다. 조리팀은 식탁 중앙의 큰 접시와 냄비가 바닥을 드러낼 때마다 말없이 음식을 다시 채워 올리며 그런 대원들의 식사를 챙겼다.

 

오늘 화제의 중심은 단연코 한국 원정대가 로체봉 정상에서 거둔 쾌거였다. 마침내 첫발을 내디딘 등정의 순간을 자축하듯 분위기는 한껏 고조되었다. 이성호는 치료 중인 우태길 대장을 대신해 위태로웠던 순간들의 조마조마한 뒷이야기를 들려주었고, 다른 대원들의 입에서는 절로 탄성과 웃음이 터져 나왔다. ‘로체라는 단어만으로도 모두의 얼굴에 긍지와 자부심이 깃든 미소가 번졌다.

 

그러는 동안 바깥 날씨는 점점 험악해졌고, 얼기설기 엮어 세운 식당 텐트는 모진 풍랑 속에서 표류하는 작은 배처럼 요동쳤다. 그 출렁이는 소리는 단순한 자연의 바람이 아니라, 거대하고 초자연적인 존재가 이 세계의 경계를 헤집으며 낮게 으르렁대는 경고의 울림처럼 들려왔다.


-오늘 조금만 늦게 내려왔으면 큰일 날 뻔했어요.

-그러게나 말이야


대원들은 순간 말을 멈추고, 투명한 비닐창 너머로 매섭게 휘몰아치는 눈발을 바라보았다. 텐트 천은 거세게 흔들리며 금방이라도 찢어질 듯했고, 몇몇은 혹시 쓰러질까 두 손으로 기둥을 움켜쥔 채 숨을 죽였다.

 

식사가 끝난 후, 문형근과 청송은 다리가 흔들거리는 간이 식탁 앞에 앉아 주방장이 특별히 준비한 야크 버터 티를 마셨다. 청송은 손에 들고 있던 서바이벌 키트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찌그러진 알루미늄 통은 본체와 뚜껑이 단단히 맞물린 채 무슨 중요한 비밀이라도 품은 듯 쉽게 열릴 것 같지 않았다.


-안에 뭐가 들었는지 궁금해요.

-그래, 조심해서 한번 꺼내봐라.


청송은 알루미늄 통의 상단과 하단을 고무줄로 감은 후 얼굴이 벌게지도록 힘껏 비틀었지만 뚜껑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화끈거리는 손바닥을 주무르며 밖으로 뛰어나간 그는 담당 주치의에게서 수술용 고무장갑을 얻어왔다. 또 다른 시도와 몇 번의 좌절 끝에, 조그만 캡슐의 뚜껑이 마침내 딸칵 소리를 내며 열렸다. 주위에 있던 대원들 모두 입맛을 다시며 호기심 어린 눈길로 지켜보았다.


-뭔데 로체 정상에 묻어뒀을까?

-신상정보, 그런 거겠지.


키트 안을 살피던 청송의 입에서 갑작스레 흥분 섞인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있어요. 뭐가 있어요. 종이 같아요.


문형근이 긴장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종이라고? 이리 줘봐라.


청송은 아쉬운 기색을 감추지 못한 채 서바이벌 키트를 통째로 문형근에게 건넸다. 내 손으로 직접 꺼내서 도준의 숨결을 제일 먼저 맡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까마득한 후배 처지에 대선배의 지시를 감히 거스를 수는 없었다.


문형근은 손마디 두 개가 잘려 나간 뭉툭한 손으로 작게 또르르 말린 종이를 조심스럽게 펼쳤다. 어른 손바닥 한 개 반쯤 되는 불투명한 습자지였고, 네 겹으로 접힌 종이에는 한 글자 한 글자 정성을 들여 쓴 깨알 같은 글씨들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었다. 그는 돋보기안경을 끼고 잠시 숨을 고른 뒤, 그 글을 조용히 읽어 내려갔다.

 

사랑하는 SY.


이틀 전부터 눈보라가 거세게 몰아치더니 결국 이곳에 갇히고 말았소. 이대로 움직이는 건 위험해서 계속 텐트 안에서 버티고 있소. 몸은 점점 쇠약해지고, 정신은 흐려져 가오. 체온이 떨어지지 않도록 조금씩이라도 몸을 움직이고, 연료가 넉넉지 않아도 하루에 열 잔 넘게 차를 마셔야 하오. 탈수가 오면 모든 게 끝장이요. 날씨가 개이길 기다리며, 침묵 속에서 체력을 아끼고 있소. 고독이란 녀석은 말없이 나를 집어삼키려 하고, 나는 그 무서운 적과 끝없이 싸우고 있소. 오늘 아침에도 스치듯 아주 잠깐, 이 산에서 내려가고 싶다는 강렬한 유혹을 느꼈다오. 다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 그러나 여기서 멈출 수는 없소. 나는 이 공포의 벽을 넘어설 것이오. 늘 그래왔듯, 그 어딘가에 길이 있을 거라 믿는다오.


언젠가 당신은 왜 나였어요?’라고 물었소. 그땐 대답하지 못했지만, 지금은 말할 수 있소. 이유 같은 건 없었소. 처음 만난 순간, 나도 모르게 마음이 움직였으니까. 설명이 불가한 힘, 방향성, 혹은 숙명 같은 것. 그저, 당신에게 가기 위한 오랜 여정이 끝났다는 것을 알았을 뿐이오. 전에도 말했듯, 당신을 만나 나는 새롭게 태어났소. 그 외엔 어떤 단어도 떠오르지 않소. 사랑이란, 그 사람의 꿈을 막지 않는 거라 했던 당신의 그 말이 내겐 참으로 뼈아프게 남았소. 혹시 지금도 내가 떠난 것을 슬퍼하고 있소? 그 생각을 하면, 이 고도에서도 견디기 힘들다오. 미안하오, 정말... 미안하오.


당신을 떠올릴 때마다 이 조그만 텐트 안이 환해진다오. 낮에도 밤에도 당신의 이름이 내 마음속을 조용히 맴돌고 있소. 우리는 떨어져 있지만 늘 함께 있소. 처음부터... 아니, 태어나기도 전부터 우리는 하나였소. 지금도 당신은 내 곁에서, 함께 이 남벽을 오르고 있소. 약속한 대로, 이 편지를 정상에 남겨두려 하오. 만약, 올라갈 수 있다면.


삶이란 결국 출생과 죽음 사이에 놓인 수많은 선택의 연속이라오. 나는 오래전에 이 산을 선택했고, 그리고 당신을 사랑했소. 죽음을 마주하는 등반과, 영원을 꿈꾸는 사랑... 그 둘 모두 내게 주어진 거스를 수 없는 특별한 운명이었소. 당신을, 나의 유일한 사랑, 영원히 사랑하오. 이곳의 라리그라스 향기를 실어 보내오. 부디 내게 행운을 빌어주오. LOVE, 도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