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석촌리 들판2> oil on canvas 65×53cm 2013

 

과거 어느 곳으로 꼭 한 번 돌아갈 수 있다면 나는 그날 밤 그 다리 앞을 선택하겠다. 최근에 본 어느 영화에 나오는 설정이다. 딱 한 번만 되돌아 갈 수 있는 과거의 시점. 그곳에 가서 다각도의 관점으로 다시 그 현실을 경험하고 조망하고 반성하는 것이다. 내가 여기서 말하는 그 현실이란 차가 쌩쌩 달리는 다리 위에 위태롭게 한 줄로 서 있던 오리 일가족에 대한 목격담이다. 어쩌면 나는 가해자일수도 있다. 제발 아니기를...

 

김포에는 곳곳에 지평선을 볼 수 있는 장소가 있다. 한국처럼 산과 들판과 강물과 마을이 인접해 있는 장소에 살다보니 그저 앞이 툭 터진 공간만 봐도 왠지 가슴이 서늘해지면서 한동안 추억에 잠기게 된다. 그 옛날 청춘의 한때를 상기시키는 플로리다의 드넓은 평원 같은 곳. 그 막막한 오후의 텅 빈 한기...그것은 오로지 자연이라는 공간을 통해서만 경험할 수 있는 무엇이다. 청춘의 아득했던 감수성을 환기시키고 현실 속 그 무엇인가를 다시금 불러일으키던 느낌들을 나는 종종 이곳 김포에서 느끼곤 한다.

 

이 순간 찜질방 얘기를 또 꺼낸다는 게 조금 멋쩍긴 하지만 김포에서도 꽤나 근사한 들판이 바로 그 찜질방 앞에 펼쳐져 있다. 찜질방 건물에 있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다 보면 어느 곳 하나 막힘 없는 지평선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늦은 오후 탈의실 창밖으로 내다 본 노을 진 풍경은 어딘가 에릭 사티의 한 박자 쉬어가는 듯한 피아노 선율을 닮아 있었고,고즈넉하면서도 다채롭게 변해가는 계절의 스펙트럼 또한 일상에 지친 영혼을 조심스럽게 한번씩 꾸욱 눌러주고는 했다.

  

사건이 있던 그날은 온종일 비가 내렸다. 낮 동안 작업을 하다가 찜질방에 들러 휴식을 취한 뒤

다시 밖으로 나왔을 때는 주위가 어두컴컴한 밤이었다. 나는 차를 타고 집으로 향했다. 와이퍼는 계속 작동 중이었고 자동차 타이어는 질척거리는 길을 따라 조용히 내달렸다. 논두렁과 산책로가 인접해 있는 좁고 구불구불한 길을 빠져나오면 최근에 새로 생긴 4차선 도로가 나타난다. 진입로 앞 다리 앞에서 나는 음악소리를 들으며 한동안 신호등이 켜지기를 기다렸다. 앞 유리창에서 딸깍거리는 와이퍼 소리, 추억의 그림자처럼 깔리던 라디오 음악소리, 저 먼 어딘가에서 환청처럼 들려오는 빗소리들이 나를 둘러싸고 있었고, 우물 속 깊은 곳에 가라앉은 듯 차안 공기는 조금쯤 무겁고도 비현실적인 느낌이었다.

 

도로 앞 진입로는 지평선보다 약간 우묵하게 들어간 형상이라 수평선의 광활함이 실제보다 훨씬 나즈막하면서도 압도적으로 다가온다. 하지만 그날은 그런 들판 따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주위는 어두웠고 빗물을 계속 추적거리고 있었으며 나는 저 앞에서 깜빡이는 신호등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마침내 신호등이 바꿔 운전대를 왼쪽으로 꺾으며 도로 위로 들어섰다. 내 삶에 존재하는 지극히 이상적이라 할 수 있는 수평선을 지나 수직의 공간, 현실 속 내 자리를 향해 달려나가던 바로 그때였다. 오른쪽 눈 가장자리 아래로 뭔가 빨려들 듯 스쳐가는 것이 있었다. 

 

약간 번들거리는 시커먼 노면에 찰싹 달라붙어 있던 노란색 점점의 물체들.

 

그건 분명코 오리였다. 그것도 대여섯 마리쯤 되는 오리 떼였다. 맨 앞에 있던 어미 오리는 새끼 오리들보다 몸집이 컸고, 뒤에 일렬로 서 있던 오리들은 오종종한 체구를 하고 있었다. 그들은 길을 건너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차선 쪽으로 다가와 있었고, 내 자동차 우측 앞바퀴가 지나가는 바로 거기에 오리들의 우두머리인 어미가 서 있었다.

 

무의식중에 브레이크를 밟았던가? 확실하지 않다. 오리 떼들을 인식했을 때는 이미 어미 오리가 서 있던 지점을 통과한 후였다. 뒤에는 다른 자동차들이 바짝 쫓아오고 있었다. 나는 뺑소니치듯 그 자리로부터 멀어지고 있었다. 가슴이 쿵쾅거렸다. 그냥 밟고 지나온 것은 아닐까. 정직하게 말하지만 타이어 바퀴가 덜컹하거는 느낌 따위는 전혀 없었다. 그러나 나는 불안했다.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거기 있던 오리들이 나만의 착각이었는지, 다시 그 자리로 돌아가 확인하기 전까지는 결코 알 수 없는 일들이 그때 벌어진 것이다. 

 

생각하보니 그 오리들 형상이 어쩐지 낯이 익었다. 이제껏 공원이나 강가에서 본 오리들은 대개 흰색 아니면 거무튀튀한 색이었다. 그런데 자동차 헤드라이트에 얼핏 들어난 그 오리들은 플라스틱 재질로 만든 장난감 오리 같았다. 엄마들이 어린애들을 목욕시킬 때 욕조에 함께 띄워 놓곤 하는 바로 그 노란색 오리들이라고나 할까. 어미 뒤에 쪼르르 서 있던 새끼 오리들도 인위적 설정 같았다. 누군가 장난을 친 것일까. 그렇다면 누가, 무슨 이유로 비까지 추적거리는 밤길에 플라스틱 인형 오리들을 그것도 차들만 간간히 지나다니는 길가에 일렬로 주욱 늘어놓았단 말인가.

 

“무식한 애미 같으니라고! 겁도 없이 무슨 배짱으로 이 밤에 새끼들을 끌고 나왔단 말이야. 그러게 애들은 부모를 잘 만나야 한다니깐.”

 

나는 코웃음까지 치며 혼자 중얼거렸다. 그런 와중에도 심리적으로 빠져나갈 구멍을 찾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로부터 1년하고도 6개월이 흘렀지만 찜질방에 다녀올 때마다 여전히 그날 밤 장면들을 되새길 수밖에 없다. 누구에게나 가슴에 묻어두고 있는 수수께끼가 있다. 아무리 해도 실타래를 풀 수 없는 일. 검은색 주머니 속에 파묻힌 영원한 비밀. 그날 밤 그 오리 떼들이 내게는 영원한 수수께끼다. 나는 결코 그들의 생사를 파악할 수 없다. 그것은 불가능하다. 그들의 미래도, 과거도...그러나 꼭 한번 시간을 거슬러 갈 수 있다면, 그래서 과거 속 그 다리 위로 돌아갈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종종 떠올리곤 한다. 그들은 모두 무사한지 확인하고 싶을 뿐이다. 무탈하게 잘 지내고 있는지. 여전히 그 어미 오리는 위태로운 상황에서도 미력하나마 더듬이를 곤두세운 채 새끼 오리들을 잘 이끌고 있는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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