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석촌리 들판> oil on canvas, 2013

 

아침저녁으로 싸늘한 한기가 화실 안을 감돈다. 아직 외출할 때마다 꽁꽁 싸매야 할 만큼 추운 날씨가 계속되고 있지만, 어딘가 부드럽고 순한 기운이 느껴지는 하루였다. 오늘은 새로 배달된 냉장고 때문에 괜히 마음이 어수선했다.


그동안 10년 넘게 사용해 온 냉장고는 모터가 완전히 고장 나 폐기처분할 수밖에 없었다. 냉장고처럼 커다란 가전제품은 단순한 사물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냉장고가 돌아갈 때마다 숨을 고르는 듯한 소리를 냈고, 늘 곁에서 내 일상을 묵묵히 지켜보며 함께 지내 온 존재였기 때문이다.


냉장고야 잘 가렴. 그동안 수고 많이 했어.


새로 배달된 냉장고는 헌 냉장고보다 훨씬 큰 사이즈였다. 특별히 대용량을 주문한 것도 아닌데 요즘 가정용 냉장고의 크기가 그만큼 커진 모양이다.

텅 빈 냉장고는 하얀 동굴 같다. 환한 광채에 둘러싸인 고래의 뱃속 같은 공간이다. 새 냉장고가 이제 내 허기진 위장과 인사를 나눌 차례이다.


앞으로 잘해 보자. 뭐든 열심히 먹어 두는 게 좋아


냉장고가 없던 시절에는 그날그날 먹을거리를 준비했다. 그만큼 시장에는 더 자주 가야 했겠지만 먹고 남아 버릴 것도 거의 없었다. 그런데 냉장고의 크기가 점점 커지면서 쓸데없이 이것저것 사다 쟁여 두는 일이 많아졌다.


아직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은 빈 냉장고를 들여다보며 잠시 반성했다.


제발 이상한 소스 같은 것은 사 오지 말자. 대형 마트보다 동네 슈퍼를 더 자주 이용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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