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포리 다리 앞>유채 2012-14

 

그림 하나만 덜렁 올려놓으면 재미없을 것도 같다. 그림 그리는 사람이야 나무 하나만 가지고도 백 가지 모양새와 기법을 실험해 볼 수 있겠지만, 그림과 상관 없는 이에게는 백 가지 나무가 다 하나의 나무, 똑같은 초록 빛깔로 보일 테니 말이다.

 

음, 오늘은 어떤 얘기를 할까... 생각하다 보니 불현듯 그 옛날 아현동 우리 집 문간방에 살던 말괄량이 아가씨가 떠오른다. 그 아가씨는 키도 크고 늘씬하면서 성격도 아주 명랑했다. 약간 튀어나온 커다란 입을 활짝 벌리고 웃던 그 시원스러운 미소가 아직도 생각난다. 오죽했으면 울 엄마가 그 언니에게 말괄량이 아가씨라는 별명을 붙였겠는가.

 

나는 그때 초등학생이었는데, 어느 일요일이었다. 말괄량이 아가씨가 안채로 건너오더니 잠깐 텔레비전 좀 봤으면 좋겠다고 말했다.(그 전에도 가끔씩 우리 집 선풍기에 머리카락을 말리러 안채로 건너오기도 했었다.) 언니와 나는 흑백텔레비전으로 <웃으면 복이와요>라는 코미디 재방송 프로그램을 시청 중이었다. 그런데 말괄량이 아가씨가 보고자 하는 프로그램은 따로 있었다. 갈기가 달린 번쩍거리는 허연 옷을 입은 백인 남자가 노래하는 방송이었는데 꽤나 요란뻑적지근해 보였다. 남자의 공연에 흠뻑 취한 말괄량이 아가씨는 소리를 빽빽 지르며 환호성을 질러댔다.

 

마침 부모님은 출타 중이었다. 이런 순간이 오기만을 기다렸던 언니와 나는(평소 엄마가 텔레비전 시청을 엄격하게 관리했던 터라 우리에게는 모처럼 만에 찾아온 기회였다), 어서 빨리 말괄량이 아가씨가 자기 방으로 돌아가기만을 바랐다. 그러나 말괄량이 아가씨는 죽어도 그 백인 남자가 나오는 프로그램을 봐야했던지 좀체 자리에서 일어설 줄을 몰랐다. 우리도 물러서지 않았다. 텔레비전은 우리 집 것이니 우리에게 우선권이 있다고 주장할 도리밖에.. 결국 말괄량이 아가씨가 한 가지 타협안을 제시했다. 서로 5분씩 프로그램을 번갈아 시청하자는 것이다.

 

너풀거리는 빤짝이 옷에 시커먼 구레나룻를 기르고 다리까지 떨어대는 그 백인 남자가 조금은 신기하기도 했다. 더욱 재미있는 건 그 가수의 일거수일투족에 매료되어 괴성까지 지르며 난리법석을 피워대는 말괄량이 아가씨의 모습이었다. 그때 우리가 사이좋게 5분씩 번갈이 가며 시청했던 그 백인 가수가 엘비스 프레슬리였다는 걸 알게 된 건 그로부터 한참 후의 일이다.

 

우리 세대는 어쩐지 엘비스보다는 비틀즈 쪽에 더 열광하는 문화 풍조를 가지고 있는 듯하다. 그런데 나는 요즘 들어 엘비스 프레슬리의 노래에 가끔씩 필이 꽂히고는 한다. 뭐랄까. 약간 느끼하면서도 반항기 어린 그 목소리가 내게는 더 청춘의 향수를 떠올리는 것이다. 청춘이란 과연 어떤 빛깔일까. 저마다의 청춘은 다들 제 나름의 모양새와 색채를 띄고 있다. 엘비스 프레슬리의 목소리에는 샙 그린과 프렌치 울트라마린을 섞어 놓은 청춘의 빛깔과 페인스 그레이와 약간의 번트시에나를 결합해 놓은 듯한 그늘이 공존한다. 그 시절 우리집 문간방에서 일 년 정도 살다 간 말괄량이 아가씨에게 새삼 고마울 따름이다. 그녀가 아니었다면 초등학생이었던 내가 어떻게 엘비스 프레슬리의 그 ‘역사적인’ 하와이 공연을 볼 수 있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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