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 없는 중개자들 - 석유부터 밀까지, 자원 시장을 움직이는 탐욕의 세력들
하비에르 블라스.잭 파시 지음, 김정혜 옮김 / 알키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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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먹는 음식과 연료로부터 일상적인 물건을 구성하는 재료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물질의 세계에 살고 있다. 이 원자재들을 생산자로부터 소비자에게 전달하는 상인들은 세계 경제의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동시에 가장 비밀스럽고 가장 감시를 적게 받는 사람들이기도 하다. 이 책의 저자들은 블룸버그 뉴스에서 에너지와 천연자원을 보도하는 기자들로서, 소수의 원자재 중개기업들이 엄청난 부를 축적하는 과정에서 써온 모호하고 부도덕한 방식을 폭로하며 베일에 가린 그들의 실체를 벗긴다. 때로는 손에 땀을 쥐는 범죄 소설처럼 읽히는 이 놀라운 폭로는 업계 관련자든 호기심 많은 행인이든 모두 놀랄만한 내용이다.

 

이 책의 저자들은 지난 20년 동안 천연자원을 취재해 온 기자로서 놀랍게도 소수의 원자재 중개자들에게 집중된 권력과 영향력을 파헤친다. 그리고 한 번 더 놀라운 것은 그에 대해 알려진 게 거의 없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이런 상황은 머잖아 곧 바뀔 것으로 보인다. 저자들은 글렌코어, 트라피구라, 비톨 등 중개기업의 주요 인물을 포함해 100명 이상의 전현직 임원들을 만났다. 대부분 미친 듯이 열심히 일하고, 지독하게 똑똑하고, 무장 해제될 정도로 인격적이며, 오로지 돈 버는 데만 집중하는 특별한 인물들이 등장한다. 마치 군대 같은 남성 편향적 인적 구성 덕분에 군대 못지않게 편향적이라는 월스트리트 은행가의 성 다양성조차 매우 진보적으로 보일 지경이다. 실제로 일부 대형 원자재 중개기업의 최고 경영진 가운데 여성은 단 한 명도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국제 무역의 역사는 수 세기에 걸쳐 이루어졌으며 이 책의 이야기는 1950년대 필립브라더스, 카길과 같은 기업이 각각 금속과 곡물 무역 제국을 지배하던 시절부터 시작한다. 국제 석유 무역은 이제 막 개척되기 시작했고, 1970년대에 눈부신 성공을 거둔 중개업자 중 한 명이 바로 마크 리치였다. 그는 이후 수십 년 동안 중개업계의 사업 방식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저자들은 이후 다양한 원자재 시장으로 진출한 여러 대형 중개업자들의 흥망성쇠를 도표로 정리했다.

 

저자는 지난 50여 년 동안 이러한 어둠의 비즈니스가 수백만 달러에서 수십억 달러의 수익을 올리며 번창할 수 있었던 네 가지 발전 과정을 중심으로 역사를 정리한다. 첫째, 1911년 록펠러 비즈니스 제국의 해체와 함께 미국 7개 석유 회사의 독점을 깨고 국제 석유 무역이 등장하였다. 둘째, 1991년 소련이 붕괴하면서 화석 연료와 금속을 시장에 공급하는 국가의 역할을 상인들이 대신하게 되었다. 셋째, 2000년대 중국의 도시화로 수억 명의 중국 소비자들이 풍요로운 생활방식을 누리게 되었다. 넷째, 은행 부문의 성장과 세계 경제의 자금 조달 방식에 대한 다양한 발전으로 중개업계가 혜택을 받았다. 이쯤 되면 그래, 부당 거래로 더러운 부자가 되는 사람도 가끔 있는 거지라며 어깨를 으쓱할지 모른다. 하지만 이 업계에서의 성공 여부는 어떤 마음가짐으로 임하느냐에 달려 있다.

 

마크리치앤드코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아파르트헤이트 시대 정부와 거리낌 없이 거래했고, 아프리카 개발도상국에 대한 할인 혜택을 악용하여 유령 회사를 세운 뒤 석유를 더 싸게 사들이는 방식으로 석유수출국기구(OPEC)를 기만하였다. ‘비톨은 쿠바에 대한 미국의 무역 금수 조치를 우회하여 쿠바의 설탕을 사들이고 소련산 석유를 판매했다. 또한 인종 청소 혐의로 기소된 군벌을 고용하여 구 유고슬라비아의 부채를 해결하기도 했다. 1992년 마크리치앤코가 두 개의 새로운 자회사로 분할되었을 때, 두 회사 모두 조사받게 되었다. ‘글렌코어는 사담 후세인 정권 시절, 석유 거래 특권을 얻기 위해 이라크 대사관에 뇌물을 주고 석유 수입을 인도주의적 목표에 사용하려는 유엔의 식량용 석유 프로그램을 훼손했다. ‘트라피구라는 코트디부아르의 오염 스캔들에 연루되어 유독성 폐기물을 현지 계약업체에 팔아넘겨 약 95,000명이 질병에 시달리게 했다.

 

이 사례들은 독재 정권 및 전쟁으로 폐허가 된 국가와 거래하고, 뇌물 수수와 부패 관행에 가담하고, 역외 기업을 통해 더러운 돈을 퍼뜨리는 등 중개업자들이 이윤을 추구하기 위해 거래했던 많은 놀라운 사례 중 일부에 불과하다. 경제와 국제 무역에 익숙한 독자라면 저자들이 균형 잡힌 보도를 하고 있다는 점을 높이 평가할 것이다. 위의 과도한 내용이 그 자체로 시사하는 바가 크지만, 이 책의 목적은 명예훼손 캠페인에 있지 않다. 저자들은 상품을 거래하는 유일한 동기가 거의 언제나 금전적 이해관계일 뿐이라며 철저히 비정치적 논리를 주장하는 중개업자들의 입장에 동의한다. 하지만 정치적 영향력이 목표가 아니라 하여 중개업자들이 미치는 영향력이 없음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 이 외에도 선물, 현물 시장, 톨링, 원자재 슈퍼사이클 등 생소한 거래 관행과 전문 용어에 쉽게 접근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그런데 저자들은 중개기업들로부터 지옥 불 같은 맹렬한 고소를 피해 어떻게 이 책을 쓸 수 있었을까? 2020년 사망하기 전 인터뷰에서 비톨의 회장 겸 CEO인 이안 테일러는 저자들에게 이 책을 쓰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분명히 경고했다. 마지막 두 챕터는 많은 것을 명확히 설명한다. 2011년 글렌코어의 상장사 전환 결정은 폭탄과도 같았다. 투자자, 언론인, 비정부기구(NGO) 및 정부로부터 엄청난 조사를 받으면서 글렌코어뿐만 아니라 그늘에 가렸던 중개업계 전체가 노출되었다. 거래업체의 공급자와 구매자를 포함하여 대부분 사람은 이들 기업이 얼마나 많은 부를 축적했는지 거의 알지 못했다. 또 다른 이유는 정보를 찾는 것이 그 어느 때보다 빠르고 저렴하고 쉬워지면서 중개기업의 경쟁력이 약해진 점이다. 기업의 투명성이 높아지면 뇌물 수수와 부패가 더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게다가 다수의 광업과 석유 회사들이 물류를 직접 처리할 정도로 성장하였다. 요컨대 이 책이 나온 시점은 때가 무르익은 덕분이었다. 하지만 저자들은 중개업자들의 시대가 아직은 끝나지 않았다고 경고한다. 일부 기업은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유가가 급락하자 슈퍼탱커를 고용하여 임시로 석유를 저장함으로써 큰 이익을 취하기도 했다.

 

원자재 중개기업들이 지닌 영향력은 가히 충격적이다. 5대 석유 유통사는 전 세계 석유 수요의 거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하루 2,400만 배럴을 처리한다. 7대 농산물 중개기업은 전 세계 곡물 및 유지 종자의 절반가량을 취급한다. 세계 최대 금속 거래업체인 글렌코어는 전기 자동차의 중요한 원료인 코발트 세계 공급량의 3분의 1을 차지한다. 오로지 그들의 이익을 위해 설계된 것으로 추정되는 정부 정책 또는 실제 정부의 다양한 변화가 목격된다. 글렌코어의 러시아 곡물 사업 책임자가 곡물 가격 상승을 예측한 내기를 걸어온 지 불과 몇 주 만에 수출 금지를 공개적으로 요구하기도 했다. 글렌코어는 201065,900만 달러의 수익을 올렸다.



이처럼 이들이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는 것은 종종 부패한 관행에 얽혀 있기 때문이다. 석유 중개기업 군보르의 창립자 토르비욘 토르크비스트는 저자들에게 불행히도 원자재 산업을 괴롭혀온 장본인은 부패라면서, 숨겨진 영업비밀이 많으며 대부분 무덤까지 가져갈 것이라고 말한다. 그래도 저자들의 이 정도 시도는 괜찮은 편이다. 보스니아에서 유혈 분쟁이 벌어지고 있을 때, 비톨은 악명 높은 세르비아 군벌 아르칸에게 보안 예방 차원에서 100만 달러를 지불하고 그가 누구인지도 모른 채 회의에 참석했다. 50만 파운드의 현금을 들고 런던 히스로 공항에서 체포된 한 글렌코어 임원은 일본과 대부분의 서유럽 국가처럼 뇌물이 불가능한 나라가 있는 한편, 중국처럼 매우 성공적인나라도 있다고 말한다. 스위스는 2016년에야 개인에 대한 뇌물 지급을 더 이상 사업상 정당한 비용으로 허용해서는 안 된다고 선언했음을 지적한다.

 

투자자들의 자금이 종종 그들도 모르는 사이 부패에 연루된다. 저자들은 펜실베이니아, 사우스캐롤라이나, 웨스트버지니아의 공무원 연금 기금이 어떻게 쿠르드의 고위험 투자에 유입되었는지 말한다. 이는 세금이 적게 들고 감시가 소홀한 관할지역에서 익명의 수단을 통해 돈이 오가는 현대 금융 시스템에 대한 비유이다. 이들은 세계가 기후 변화의 현실에 눈을 뜨고 있지만 중개업자들은 여전히 환경을 오염시키는 상품에 크게 의존함으로써 업계 개혁의 속도를 늦추고 있다면서, 소비자들이 제품의 추적 가능성과 윤리적 외주에 점점 더 관심을 기울이고 있음을 지적한다. 정보의 민주화, 세계화의 역전 등 다른 역풍도 중개자들의 입지를 위축시키고 있다. 또한 미국 정부는 외교 정책의 도구로 경제제재를 사용하여 부패에 대한 그물망을 점점 더 촘촘히 좁히고 있다. 그 결과 다수의 중개기업이 뇌물 제공의 수단이 되기도 했던 에이전트(제삼자 해결사) 사용 중단을 발표했다.



그러나 원자재 중개기업의 종말을 예측하는 것은 거의 확실히 시기상조이며, 신규 진입자의 역할이 계속 존재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미국의 제재가 확산되고 서구의 중개자들이 특수 시장에서 물러나도록 강요받으면서 중국 거래자들이 이득을 얻게 되었다. 코프코, 차이나 오일, 주하이 젠룽 등이 대표적이다. 그리고 무대는 다시 러시아로 이어진다. 2017년 글렌코어의 전 CEO인 이반 글라센버그는 러시아 국가에 기여한 공로로 블라디미르 푸틴으로부터 훈장을 받았다. 2014년 미국 재무부는 푸틴이 군보르에 투자하고 있으며 군보르 자금에 접근할 수 있음을 언급했다.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한 세대 만에 에너지와 식량 공급에 가장 큰 차질이 빚어지고 있는 지금, 이 책의 속편을 써야 할 때일지도 모른다.

 

이 책을 읽고 몇 가지 관찰할만한 점이 눈에 뜨인다. 저자들은 당연히 공범(?) 두 명에 대해 간략하게만 언급하고 있다. 하나는 마지막 장에서 강조했듯 최근 미국 정부의 표적이 되어 미국 달러에 대한 중개기업들의 의존도를 높이고 있는 은행들이다. 두 번째는 이러한 기업의 본사를 두고 있으면서도 고집스럽게 딴청을 피우고 있는 스위스다. 사람들의 관심에서 크게 벗어난 원자재 중개업 분야를 용감하게 폭로하면서 독자의 눈을 번쩍 뜨이게 만드는 이 책은 경제나 무역 전문지를 읽지 않더라도 충분히 이해하고 즐길 수 있도록 잘 쓰인 책이다. 우리가 사용하는 모든 제품의 출처에 관심 있는 소비자라면 이 책을 반드시 읽어볼 만하다.


- 핵심요약

1. 전 세계에서 거래되는 자원의 상당 부분을 소수의 회사가 처리하고 있으며, 다시 그중 상당수를 소수의 사람이 소유하고 있다.

2. 이 책은 중개자들의 영향력이 경제에만 국한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세계 전략 자원의 흐름을 통제함으로써 강력한 정치 행위자가 되었다.

3. 중개자들의 수많은 부패와 악행에 관한 이야기가 제시되며, 투자자들은 자신도 모르게 이에 연루되어 있다. 앞으로 이런 상황이 바뀔 수 있을까? (2023-06-12)

 

 

#경제 #얼굴없는중개자들 #시공사 #원자재 #국제무역 #서평단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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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 없는 중개자들 - 석유부터 밀까지, 자원 시장을 움직이는 탐욕의 세력들
하비에르 블라스.잭 파시 지음, 김정혜 옮김 / 알키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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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전 근처에도 안 가보고 세계적인 기업에 석유를 파는 원자재 중개 기업의 민낯을 드러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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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은 성서를 쓰지 않았다 - 천 년에 걸친 인류사의 기록 다시 읽기
카럴 판스하이크.카이 미헬 지음, 추선영 옮김 / 시공사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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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가 수렵 채집하는 소규모 집단생활에서 거대한 익명의 사회에서 정착 생활하게 된 사건을 제러드 다이아몬드는 인류 역사상 최악의 실수라고 표현한다. 성서는 인류학적 접근 측면에서 인간의 세 가지 본성-감정과 직관(자연적), 사회적 습관(문화적), 합리적 측면-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기록물이다. 성서는 인류가 기록한 일기장이며 인류의 조상에게 닥쳤던 문제와 해결책 모두 기록되어 있다. 인류 문명의 기록을 통해 문화가 진화해온 면모를 재조명하려는 의도에서 저술되었다. 이 책은 전체 5부로 구성되어 창세기로 시작하는 1부와 2부는 히브리 성서 가운데 율법을 의미하는 <토라>를 논의한다. 2부는 모세오경 중 나머지 네 권을 다루며 3부에서는 예언서를 뜻하는 느비임에 주목한다. 4부는 성문서를 뜻하는 케투빔을 다루며 마지막 5부에서는 신약성서를 들여다본다. 이 책의 순서는 히브리 성서 <타나크>를 따르되 성서의 구절을 인용할 판본으로는 가장 유명한 성서인 King James Bible을 채택하였다. 생물학적 진화는 고통스러울 만큼 느리고 주변 여건의 변화를 따르지 않는 반면, 문화적 변이는 특정한 필요를 충족하거나 특정 문제를 해결할 목적으로 출현하므로 다양하고 급진적이며 인류 보편적이다. 저자들처럼 불가지론자의 한 사람으로서 이처럼 새로운 시각으로 수십 년 전 제쳐두었던 인류 기록물로서의 성서를 재발견하는 계기로 삼게 되어 매우 감사하다.

사회 통념상 새 자동차에 문제가 있다면 품질관리, 즉 리콜과 수리는 제조사의 책임이다. 과감하게도 하느님의 리콜 대책은 아담의 갈빗대였다. 이브가 아담의 두 번째 아내라는 소문이 떠돌았다는 얘기도 재미있거니와, 떠나간 첫 번째 아내의 빈자리를 아담의 갈빗대로 셀프리콜하고 이를 시행착오 과정이라 칭하는 것도 흥미롭다. 만일 이브가 없었더라면 외로운 아담은 수간도 서슴지 않았을 것이고 실제 당시에는 흔했던 인간 본성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를 통해 정착 이후 일부다처제 사회에서 아내를 맞이할 수 없는 가난한 남성들의 실존적 생활사를 그려볼 수 있다.

하느님의 행동에 일관성이 없는 이유는 성서보다 오래된 이야기에서 동방의 유산을 솎아내고 새로운 종교에 걸맞은 이야기로 재탄생시키기 위함이었다. 막스 베버가 말한 탈 마법화 과정이 완료되었다면 말하는 뱀도, 선악과를 따먹는 우발적 행위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다수의 신 가운데 먼저 세력을 얻어 유일신임을 선포한 것으로 하느님은 애초부터 유일신이 아니었다. 또한, 선악과를 맺었다는 생명의 나무는 이미 중동 지역에 퍼져 있던 익숙한 설화였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이브가 쫓겨난 진짜 이유는 과거 동물들과 가까이 지내던 수렵 채집 시대에서 정착 생활로 환경이 바뀌면서 신의 모습을 닮고 신에 말씀에 귀 기울여야 했는데 그렇지 못했기 때문이다.

인류의 정착 생활과 더불어 잉여 산물과 사유물의 개념이 싹트고 부와 사회질서가 재편되면서 일대 혼란을 겪게 되자, 일관성 없고 때로는 지상 최대의 폭력을 행사하는 하느님의 존재에 대한 비중이 매우 높아졌다. 질서에 순응하지 않으면 목숨을 내놓아야 하는 정도로 사회 규약이 엄해지고 철저히 지킬 것이 요구되었다. 역설적으로 익명의 대규모 사회로 변모하는 만큼 경쟁, 불평등, 폭력이 난무하는 혼돈과 무질서에 무방비로 노출되고 그 정도 또한 가중되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아벨을 살해한 카인이 지은 엄청난 죄악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으로부터 각별한 보호를 받는 과정처럼, 형제살해는 그 극단적인 질서유지의 방편이요 정당성 획득의 수단으로 이해할 수 있다. 결국 성서는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는 수단이자 기준, 또는 실천 강령의 역할을 해야만 했을 것이다.

사회적으로 이토록 의미 깊고 소중한 종교의 존재가 타락하여 혹세무민하는 사회의 독소가 되었을 때의 혼란을 우리는 역사 속에서 여러 차례 겪어왔고,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이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 혼란한 사회상을 틈타 하느님의 말씀을 전한다면서 자신이 하느님이 되어 개인의 이익을 추구하며 거대 사회악이 된 소위 종교계의 거물들과 자식들에게 세습하기에 골몰하는 기업화된 교회를 우리는 오늘도 지켜보고 있지만, 그들은 별다른 사회적 저항이나 법적 조치도 받지 않는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랴. 이런 괴물들이 만들어진 데에는 우리 사회의 비뚤어진 자화상이 이쁘기만 하다고 여기는 다수의 지지자가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사회가 고도로 발달하면서 신의 존재와 역할이 영혼에서 신으로 격상하였는데, 그렇다면 오늘의 우리에게는 더욱 강력한 하느님이 필요한 것일까? 대홍수 이후에도 카인과 아벨 시대의 대혼돈은 여전했고 사람들의 행동거지도 별반 나아지지 않았다고 하지 않나. 이런 사례를 보면 인류 역사상 가장 정보가 발달했다는 현세에서조차도 구원은커녕 재난을 통제하는 종교의 힘이 거의 한계에 도달한 것 아닌가 하는 느낌을 떨치기 어렵다. 그러나 사실은 종교 자체가 아니라, 종교를 잘못 이해한 사람들의 인식이 문제의 핵심이리라.

언어 관련 전공자로서 성서에 언급되는 바벨탑 이야기는 언제나 말이 되지 않는 의문투성이 이야기였다. 삶의 터전이 도시로 옮겨오면서 오랜 세월에 걸쳐 종교가 도시 여건을 유지하기 위한 사회적 요령을 제공한 것이다. 신의 저주로 파괴된 바벨탑은 수많은 인류가 단일 언어와 어휘로 소통할 수 있었다는 가당찮은 얘기라기보다는, 언어로 표현되긴 하였어도 삶의 기준이 되는 신의 목소리와 다른 소리를 냄으로써 강력한 규칙에 따르지 않던 인간들의 모순된 모습을 나타난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또한, 보이지 않는 영혼에서 하늘나라에 앉아계신 구체화한 신의 반열에 오른 하느님으로 그의 위상이 커진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러니 하느님의 아들 예수가 이 땅에 다녀간 지 벌써 2천 년이 더 지나도록 인류 평화는커녕 인간의 언어 한 가지도 원상복구 해놓지 못했다고 힐난할 일은 아니다.

대부분 문명국가가 더 이상 부족사회를 유지하지는 않지만 부족사회 시대의 족장들이 가졌던 부와 권력은 여전히 존속하며 다양한 형태로 발견된다. 예나 지금이나 족장처럼 부와 권력(오늘날에는 재력)을 지닌 인물들에게는 어느 사회건 예외적으로 관대한 모습을 보인다. 복잡하게 얽힌 가족력과 족보, 재산 문제를 깔끔하게 정리하는 장치는 바로 장자상속제다. 올해 초 큰 인기를 누렸던 케이블TV 드라마 <재벌집 막내아들>은 재벌 회장으로 발전한 족장 지위의 뒤틀린 후계 구도와 장자상속제를 번복 선언함으로써 생기는 가족 내 유혈 투쟁을 다루었다. 이는 전통적으로 복수와 더불어 가장 흔하고 인기 만점인 드라마의 소재인 동시에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잘 짜인 이야기의 힘을 여지없이 보여준다. 법률상으로는 불법이라 하면서도 극소수 족장들 사이에 엄연히 실재하는 일부다처제가 사회 지도층의 일반적 결혼제도로 자리매김하기까지는 아직도 갈 길이 멀다는 내용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다.

농업과 더불어 인류 최대의 실수인 영구 정착이 시작되면서 많은 새로운 현상이 기존 삶의 방식을 방해하게 되었다. 더 많은 질병이 발생했고, 재산과 사회 계층의 도입으로 폭력과 불의가 발생했으며, 결국에는 노골적인 전쟁으로 이어졌다. 이 모든 현상은 인간의 직관적인 본성과 충돌하는 '불일치'로 경험되었다. 종교에서는 이러한 충격적인 변화에 대한 해답을 찾아냈으며, 새로운 악을 막기 위한 예방 시스템도 개발했다. 이 책의 저자들은 이를 지적 제도화 종교의 도래라고 부른다. 유대 민족과 성경의 경우, 과거의 정령 숭배나 다신교와 같은 직관적인 종교와는 달리 급진적인 유일신교를 발명하였으며 토라는 이러한 시대적 배경을 충실히 반영한 중요한 기록물이다. 예컨대 이스라엘 민족이 대규모로 이집트를 탈출했다는 이야기도 기록 한 줄조차 없어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기 어렵지만, 그보다는 율법 탄생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배경 설정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또 한편으로 하느님이 왜 그토록 폭력적이고 일관성 없는 모습을 보였는가에 대한 의문을 이렇게 이해할 수 있다니, 저자들의 참신한 시각이 매우 놀랍다. 이쯤 되면 신이 인간을 창조한 것이 아니라, 혼란스러운 사회를 건강하게 존속시키기 위해 인간의 특성을 덧입힌 절대적 존재가 필요했었다는 설명이 더 설득력을 지닌다.

이 책 전반에 걸쳐 반복되는데, 토라가 그토록 세세한 인간의 생활까지 간섭(?)하는 이유는 토라 자체가 하나의 규범이자 사회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안전장치였기 때문이다. 저자들은 토라가 쓰인 목적을 폭력 방지, 질병 예방, 시스템 보호, 모르는 죄로 인한 벌을 피하는 방법, 제물과 제의의 확산으로 규정하고 있다. ‘값비싼 신호’, 또는 정체성에 관한 언급을 통해 일부 기독교인들이 보이는 편협한 태도가 떠오른다. 대한민국 헌법이 보장하는 종교를 가질 자유를 무시라도 하는 듯, 사람이라면 누구나 하느님의 자녀여야만 한다며 어떻게 하느님을 믿지 않을 수 있느냐는 이상한 주장을 종종 목격한다. 개인적으로 교인이라면 얼마나 진실한 자세로 살아가느냐가 최우선 과제라고 본다. 주변에 그런 진실한 신자가 훨씬 많은데도 불구하고 교인이 아니거나 심지어 해외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에게까지 찾아가 좋은 말씀 전한다며 열심이다. 소위 이교도의 나라에서 선교사가 비참한 최후를 맞는 경우가 있다. 사실 그 나라에서는 기독교가 이교도다. 이교도가 개종을 권하니 마찰이 없을 수 없다. 애초부터 세상은 유일신 체제가 아니었음에도 유일신 체제가 되도록 매우 도전적으로 포교하고 결과적으로 우리 이웃의 참된 봉사자들 명예를 실추시킨다. 종교에 대해 진지함을 증명하는 데 다반사로 도를 넘으니 아마 전 세계에서 한국만큼 세속화된 곳이 없을 것 같다. 복을 받고 천국 가는 조건으로 신을 믿다니, 거래라도 하자는 것인가. 끊임없이 타락을 유혹받는 인간 본성을 다스리기 위해 토라는 그래서 여전히 쓸모 있고 유효한 장치일 것이다.

이스라엘 왕국을 멸망의 문턱까지 몰고 갔던 주변 제국들 틈새에서 이들 최약체 민족이 살아남는 데 필요한 것은 천둥과 번개로 무장하고 침략자들을 무자비하게 응징할 수 있는 막강한 군대 같은 신이어야 했다. 그래서 야훼는 불기둥의 모습으로 나타나 용광로처럼 내뿜고 산을 녹여내는 국가와 민족과 왕조 모두의 신이 되었다. 다신교 체제에서 당시 최강국이던 아시리아 왕을 야훼의 모델로 삼았으며 독재적 성격을 지닌 아시리아 군주의 절대 통치 사상을 종교에 활용했다는 설명은 매우 흥미롭다.

저자들은 호모 사피엔스가 수렵채집인이었을 때 인간 심리의 기저가 그 형태를 갖추었다고 가정한다. 수만 년 동안 이 기간이 지속되었기 때문에 여전히 우리의 생각과 느낌 등 우리가 현재 주로 직관(우리의 첫 번째 본성)에 기인하는 것들, 즉 집단 결속의 중요성, 동료 인간에 대한 배려, 정의감, 평등주의 및 민주적 토론 경향, 종교성, 사물 뒤에 존재하는 더 큰 힘을 확인하려는 직관에 깊이 고정되어 있다고 본다. 또한, 성경의 저자들이 매우 심오하고 충격적인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노력했고, 그 과정에서 여러 단계에 걸쳐 급진적 일신론을 도입한 누적된 문화적 과정을 설명하기 위해 성경 이야기를 자세히 확대하여 보여준다. 이 익명의 저자들은 피에 굶주리고 잔인한 야훼를 선두에 두고 점차 오래된 성서 본문을 다시 썼다. 그러나 이 지적 제도적 종교가 직관적인 종교성과 충돌하면서 부드럽고 자비로운 신의 이미지가 도입되었다. 종합하면 성경은 직관적 종교와 지적으로 제도화된 종교가 싸우는 과정을 반영한 기록이다.

다신교 체제가 월등히 지배적이었던 시대에 유일신을 모시는 신흥 종교가 끈질긴 저항 끝에 결국 승리를 거두는 경이로움이 인류의 믿음 체계를 흔들어놓았고, 서구 문화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마침내 서구인들의 세계관을 기초하게 되었다. 이는 오늘날 다양한 인종과 민족적 배경을 지녀 다원성에서는 으뜸이라는 미국이라는 나라가 체제 유지의 방편으로 강력한 연방법과 법치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 세태를 연상시킨다. 아브라함이 하느님의 명에 따라 아들 이사악을 제물로 바치고, 예수가 자기 믿음을 지키려 십자가에 못 박혔던 두 장면은 죽음의 위협을 바탕으로 한 절대적 진지함을 구축하려는 지성적 종교가 자기 신뢰도를 높이려 한 궁극의 증거이다.

토라가 요구하는 율법을 모두 지켜낸 이스라엘 왕은 역사상 단 한 명도 없었다. 왕국의 출발은 전도유망했으나 끝에 가서는 권력, , 여자에 대한 욕망으로 처절하게 몰락하였다. 하느님이 왕들의 방종을 내버려 둔 것이 아니라 사실은 폭주하는 왕권을 제대로 견제할 장치가 없었다. 판관의 뒤를 이은 예언자들을 통해 인간의 본성에 대하여 더욱 강력하게 고삐를 틀어쥠으로써 아사비야(사람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집단적 연대)의 복원을 실현하고자 한 것으로 이해된다.

신의 말씀을 전하는 예언자가 갖춰야 할 사회적 미덕은 대가 없이 언제든 자신을 희생할 수 있다는 가능성, 즉 이상적인 대의명분에 헌신하고 자신의 임무에 대한 확신을 사람들에게 심어주며 초자연적 행동을 실천하는 것이었다. 이런 카리스마적 권위를 확보하느라 그들의 삶은 매우 고단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오늘날 신의 예언자를 자처하는 일부 대형교회 목회자들이 고대 예언자의 삶과는 매우 딴판인 모습을 볼 때마다 종교의 참뜻을 흐리는 듯하여 안타깝다. 예언자가 나타나 사회 전반에 영향을 미칠 수 있었던 배경으로 문화적 진화 과정을 대입 설명하는 부분은 저절로 이해를 자아낸다.

야훼가 현대인의 시각에서는 믿기 어려울 만큼 야만적인 지상 최대의 폭력을 전담함으로써 신의 섭리를 거스른다면 감당할 수 없는 재앙이 닥치리라는 공포와 함께 인간 심리의 마지노선을 정한 셈이다. 모든 악행과 불안을 주관함으로써 사회를 하나로 결속시키고 악행과 불안을 초래하는 인간의 행위에 철퇴는 가하는 전지전능한 신의 반열에 오른 것이다. 종교는 인간의 타고난 도덕성 위에 자리를 잡음으로써 인간과 공존할 수 있게 되었다. 남은 일은 하느님이 인간의 도덕을 인정해주는 것이며, 신의 인정을 받는 최선의 방편은 종교적인 삶을 영위하는 것이다. 눈 귀 어둑한 신자가 하느님의 말씀이라면 설령 누군가로부터 잘못 전달되고 사악한 의도가 있더라도 맹종하는 단점이 종종 발견되는 이유일 것이다.

천주교는 제사 의식 허용은 물론 신도가 주인이 되는 신앙생활을 장려한다. 반면 (특히 우리나라) 기독교는 대체로 제사와 조상신을 부정하며 신자에게 주어지는 선택의 여지가 적은 편이다. 조상의 불멸성을 믿고자 하는 인간의 첫 번째 본성을 굳이 억제하면서 우상을 섬긴다고 매도하는 편협한 자세가 교세 확장의 가장 큰 걸림돌이다. 종교적 관점에서 성공적인 확산과 포교를 원한다면 제도적 지성적 종교가 왜 기복신앙 수준을 넘어서지 못하는지 통렬히 반성해 볼 필요가 있다. 하느님이 개인뿐 아니라 민족과 국가의 구원자가 되고 못되고는 종교의 본질 자체와는 큰 관련이 없다. 사회에 미치는 종교적 영향력은 신자들이 얼마나 의식적으로 깨어있느냐의 차이일 것이다.

착하게만 살던 욥에게 형용할 수 없는 고난을 부여한 하느님의 가혹함 뒤에는 인간으로서 이해하지 못할 하느님만의 사정이 있었고, 고난을 몇 배로 곱하여 보상한 후에는 인간을 위한 하느님만의 계획이 있었노라고 말한다. 하느님은 역경과 보상을 동시에 주관함으로써 전지전능에 대한 의구심을 떨치며 신성성을 확보하는 것으로 진화하였다. 주어진 고통을 감내함과 동시에 공개적으로 하느님을 비난하며 반기를 드는 욥은 직관적 종교에서 제도적 종교로 진화하는 과정상의 마찰을 상징한다. 절대 선의 맞은편에 절대 악을 세움으로써 피조물에 대하여 책임을 지는 하느님과 이를 시기하는 사탄의 갈등과 경쟁을 받아들이도록 하였다. 본래 절대 악은 존재하지 않으나 절대 선 존재의 정당성을 입증하기 위해서라면 없는 악도 만들어내는 미국-오늘날 대표적 기독교 국가임을 자처하는-의 대외정책을 보면 쉽게 체감할 수 있다.

어릴 적 성서를 읽다가 난데없는 승리하리라’, ‘군대여 일어나라’, ‘적을 섬멸하고등 대단히 호전적인 용어들을 접하고 당황스러웠다. 인제 보니 다신교로부터 압도적 우위를 차지하기 위한 필승 전략의 하나였고, 성서의 이런 분위기가 현재 우리나라의 남북분단 현실에서 전쟁을 부추기고 갈등을 조장하는 극우적 발언에 이용당하는 듯하다. 천국과 지옥 이분법은 삶과 죽음이라는 서구 이원적 세계관의 연장선이며, 종교도 결국은 인간의 필연적 사망에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기 때문에 성서의 저자들은 저승시스템, 즉 선한 사람은 보상받지 못한 채 죽고 악한 사람은 처벌받지 않고 죽는 현실에 대한 보상 체계를 도출한 게 아닌가 싶다.

과연 종교란 신이 있다고 믿는다면 있는 것이고 없다면 없는 것인가? 인류 초기에 하느님을 믿지 않거나 죄를 지으면 지옥에 떨어진다는 생각은 실현 여부를 떠나 분명 사람들의 도덕심을 자극하고 공포를 연상시켰을 것이다. 만물을 창조하고 전지전능하다는 하느님이 저승만큼은 예외적으로 악마의 관할구역으로 인정한다니 참으로 기발한 발상이다. 하느님 아니라 누구라도 저승에 간 이후의 세상을 설명할 수는 없지 않나. 성서는 이렇게 죽음과 저승을 이용하여 사람들을 신성성에 복속시키려는 고도의 장치로 진화하였다고 저자들은 말한다.

미국의 사이비 기독교나 광신도를 소재로 한 공포영화에 등장하는 매우 보편적인 소재가 바로 종말론일 것이다. 미국 텍사스 주 와코시의 집단 자살, 일본 오옴 진리교의 사린 가스 지하철 테러, 한국의 휴거 재림 사기극 등 성서를 곡해한 사람들이 끊임없이 사회적 물의를 빚고 있다. 영화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역시 광신도의 엽기적인 연쇄살인을 모티브로 하고 있으며, 악마를 대상화하고 강력범죄를 일으킨다는 종말론적 특징을 보인다. 예수가 추종자들에게 제시한 재앙을 뜻하며 본래 인간세계를 괴롭히는 가뭄, 전염병 그리고 온갖 종류의 폭력을 말한다. 역설적으로 이 책의 근본 주제는 재앙이 문화적 진화를 촉진하는 원동력이라는 데에 있다. 끊임없이 인간을 괴롭히는 재앙을 극복하기 위해 영혼이 유일신으로 탈바꿈한 것처럼, 재앙 역시 악마의 반열에 올랐다.

그리스도교 이외의 대상, 특히 이슬람과 같은 이교도를 악마로 규정하고 절정의 증오심을 보여주었던 십자군 원정은 그리스도교의 성공 비결로 작용한 이중성을 보여주는 훌륭한 사례이다. 십자군 원정은 이슬람의 서유럽으로의 팽창을 저지하고, 민족주의와 시민계급 성장의 바탕이 되었으며, 유럽식 세계관의 지평이 확대되고, 선교적 관심을 끄는 데에 일조했다. 그러나 우리는 기독교 정신의 본질인 사랑을 버리고 참혹한 전쟁을 신성한 것으로 만들려 했던 인간의 어리석음과 탐욕에 대한 경계를 게을리했음을 기억해야 한다. 성전(聖戰)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전쟁은 최고의 악이며 이교도들을 무력으로 결코 돌이키게 할 수는 없었다. 앞서 언급한 종말론과 인간의 민감한 반응은 종교의 문제가 아닌 인간의 심리 구조에 있으므로 종교를 탓해서는 안 되는 이유다.

성서에는 그리스도교가 다신교에서 유일신으로 거듭나는 오랜 시간과 과정이 녹아있다. 그리스 철학의 로고스가 말씀이 되고 모든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영광을 하느님에게로 돌리는 발상의 전환은 서구 문화에 엄청난 영향을 미친다. 드디어 그리스 철학과 그리스도교 신학은 서로를 보완하며 지원하는 생산적 관계로서의 공생 관계를 구축한 것이다. 이로써 하느님은 현실 초월적 존재가 되었고 현실과의 연계는 예수, 마리아, 악마 그리고 모든 천상의 존재들이 맡게 되었다. 이후 진정한 의미의 삼위일체 개념은 하느님 아버지, 성모마리아, 아들 예수의 구도로 굳어졌다.

직관적 종교와 지성적 종교의 융합인 그리스도교가 언제든 폭발할 가능성의 딜레마는 첫째, 예수가 인간의 형상으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때부터 하느님은 인간이 되었는데 영원불변한 존재가 인간 세상에 등장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며 둘째, 전지전능 완전체 하느님이라는데 왜 세계는 이토록 많은 고통이 존재하는가 하는 점이며 셋째, 예수가 자신을 희생하여 모든 죄를 짊어지고 인류를 구원했다는데 구원의 진짜 의미는 무엇인가에 있다.

문화적 진화의 관점에서 지금 인류는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 그 추세를 살펴보면 첫째, 종교와 과학이 갈등할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둘째, 규범을 제시하는 유일한 제도로서 종교가 누리던 특권은 사라져도 도덕의 감시자로 활동할 필요성은 남는다. 셋째, 인간의 첫 번째 본성에 호소하는 영적 믿음을 뒷받침하는 종교적 다원화가 발생한다. 넷째, 전통적 교회는 종교의 영성화와 개인화를 꾸준히 비판하며 단순한 제도로의 전락을 부정한다. 다섯째, 내부적으로는 집단의 결속을 다지고 외부적으로는 집단의 문을 닫아거는 단절성이 강화된다는 것이다.

종교는 항상 하나의 실체로 존재해온 것이 아니며 직관적 개인적 종교와 지성적 제도적 종교로 구성된다. 부글대며 끓어오르는 문화적 수프로 비유되는 문화적 진화는 전문화와 차별화의 길을 걸으며 과학으로 분화되었다. 문화적 보호 시스템으로 작동하는 이유는 첫째, 종교 공동체의 결속력을 강화하는 값비싼 신호로 기능하기 때문이며 둘째, 종말론적 기반으로 모든 일의 이면에 행위자가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며 셋째, 집단의 결속(아사비야)을 이루는 사회의 접착제 역할 때문이다.

성경에 관해 말하자면, 종교적 경외심과 세속적 경멸 사이의 간극을 좁히는 것이 어려운 과제일 수 있다. 기독교 신자라면 성경을 비판적 분석에 영향을 받지 않는 신의 신성한 메시지로 간주하기 마련이다. 비종교인들 역시 성경을 시대에 뒤떨어지고 무지한 글의 모음집으로 무시하거나 심지어 위험한 책으로 치부하는 경우가 많다. 진화 인류학자 카렐 반 샤이크와 역사학자 카이 미셸은 이 책에서 그러한 격차를 해소하고 성경이 인류 역사상 가장 중요한 책이라는 논지를 대담하게 옹호한다. 두 사람 모두 불가지론자이지만 성경이야말로 우리 인류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귀중한 열쇠라고 믿는다. 인지 과학, 진화 생물학, 고고학, 종교사의 렌즈를 통해 성경이 인간의 본성과 우리 종의 문화적 진화에 대해 무엇을 말하는지 알아내려 한다.

저자들은 종교적 의미와는 상관없이, 성경에서 우리가 인류의 가장 위대한 질문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다고 본다. 성경은 우리가 왜 죽음을 두려워하는지, 큰 불행에 어떻게 대처하는지, 정의에 대한 우리의 깊은 열망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를 가르쳐 준다. 우리가 익명의 대규모 사회에서 어떻게 생존하는 법을 배웠는지, 왜 현대의 삶이 때때로 무의미하게 느껴지는지, 그리고 낙원에 대한 갈망으로 묘사해야 할 대상에게 왜 그리 자주 잔소리해대는지를 보여준다. 후광을 걷어내고 보면 성경은 모든 인류에게 중요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고 말한다.

성경 분석의 대부분은 호모 사피엔스가 수렵 채집 생활에서 오늘날의 좌식 생활방식으로 전환한 인류 문화 진화의 중추적 순간에 근거하고 있다. 이 새로운 삶의 방식은 무수한 사회적 스트레스 요인과 불평등을 초래하여 먼 조상들에게 심각한 문제를 초래했다. 저자는 이러한 문제를 좌식 생활하는 우리의 생활방식이 만들어낸 어려움으로, 너무 새롭고 시급해서 사람들은 이를 통제할 수 있는 문화적 해결책을 개발해야만 했다고 설명한다.

저자들은 아담과 이브, 카인과 아벨, 바벨탑, 출애굽, 모세와 모세 율법, 욥기, 선지서, 시편, 신약성경 등 성경 전체에서 이러한 문화적 해결책을 찾아낸다. 저자는 생물학적-인류학적 관점에서 이러한 텍스트를 읽으면서 도덕과 정의, 그리고 세상에서 자신의 위치를 이해하기 위한 인류의 투쟁에 대한 통찰을 드러낸다. 이 책에서 특히 주목할 만한 부분은 성경적 폭력에 관한 장이다. 저자들은 구약성경을 잔인하고 보복적인 신의 메시지로 투영하며 용서할 수 없는 폭력적 텍스트로 묘사하는 사람들의 주장을 논리적으로 반박한다. 오히려 구약성경에 표현된 도덕성은 인류의 문화 진화에 있어 중요한 진전을 상징하는 것으로 본다. 결국, 성경은 인간 본성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적나라한 기록이며 문화가 진화해 온 흔적의 결과물이다. 녹록지 않은 내용에다 읽는 데 오래 걸리긴 했어도 굉장히 흥미롭고 유익한 시간이었음에 감사드린다.


#한달한권할만한데 #성서 #구약 #신약 #인류문화 #종교진화 #한달의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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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은 성서를 쓰지 않았다 - 천 년에 걸친 인류사의 기록 다시 읽기
카럴 판스하이크.카이 미헬 지음, 추선영 옮김 / 시공사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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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제목을 원제처럼 ‘인간 본성에 관한 좋은 책‘ 으로 냈어도 좋았을 뻔. 조금 어렵지만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인류 문화 진화의 기록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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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일 밤의 우주 - 잠들기 전 짤막하게 읽어보는 천문우주 이야기 Collect 22
김명진 외 지음 / 동양북스(동양문고)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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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개봉한 우주 방위 특공대 이야기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3>의 등장인물 가운데 별 또는 우주와 관련 있는 이름이 있다. 악당의 딸이었으나 회개(?)하고 착한 편이 되기로 한 네뷸라(nebular)는 별의 구름인 성운을 뜻한다. 머리 회전이 엄청 빠르고 다루지 못하는 무기가 없으나 자신의 정체성이 너구리임을 뒤늦게 깨닫는 영특한 동물의 별명은 로켓(우주선)이다. 모두 우주 시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 내용에 잘 어울리게 지은 이름이다.

 

우주에 대한 탐구는 곧 우리의 존재가 어디에서 왔으며, 무엇이며, 어디로 가는지에 대한 위대한 질문에 대답하기 위함입니다. 은하는 우주를 이해하기 위한 등불에 해당하지요.(33)

 

영화의 등장인물처럼 이 책은 우주와 관련하여 90가지나 되는 이름 또는 주제에 천연색 사진을 곁들이고 각각의 사연을 달아 거의 화보 급으로 구성하였다. 현직 천문학자들이 협업으로 만든 책이라 두께감과 무게감이 제법 묵직하다. 난해하고 지루할 것 같은 전문적인 내용을 쉽게 풀어 써놓아 책의 부제처럼 잠들기 전 짤막하게 읽어보는 아이들 베갯머리 이야기책으로도 손색이 없겠다. 필자가 어릴 적에 이런 책 읽어주는 소리를 들으며 잠들곤 했다면 벌써 천문학자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착각은 자유다.




진짜 과학 기술의 가치는 당장 돈이 되지는 않더라도 인류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하는 것, 경제적인 이익은 잠시 뒤로 하고 협력하는 데 있습니다. 그렇기에 지금 경제적으로는 각국이 전쟁을 방불케 하는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지만, 과학계는 나름 치열하게, 쉼 없이 움직이는 지구를 관찰하기 위해 협력하고 있는 것입니다.(289)

 

90개의 주제를 4부로 나누어 구성한 이 책의 1유니버스는 별, 은하, 행성, 오로라 등 낭만과 신비로 가득한, 일상에서 만날 수 있는 일반적인 소재로 천문학 입문을 다룬다. 2스페이스는 지구 밖의 세계를 알아내고픈 인간의 본원적 욕구인 우주 탐사와 비약적으로 발전하고 있는 우주 산업에 관련된 이야기를 엮었다. 3코스모스는 우주 거대 구조, 블랙홀, 시간 여행 등 우주 그 이상의 우주, 그리고 우주 관측에 필요한 이론적 배경과 천문학자들에 얽힌 사연을 소개한다. 4우주, 그리고 천문학자에서는 이 책을 엮은 천문학자로서 사람 냄새나는 저자들의 삶을 담았다. 각 부의 명칭이 모두 우주이기도 하고, 우리가 한글로는 그저 우주한 가지로 통칭하고 있지만 사실 영어로 우주를 표기할 때의 용어와 사전적 정의는 조금씩 다르다.

cosmos : 잘 정돈된 전체로서 발견되는 우주

universe : 현존하는 모든 물질과 공간을 전체로서 고려한 우주

space : 비어 있고 사용할 수 있는 연속적인 영역 또는 공간

galaxy : 은하계. 은하수의 뿌연 모습이 우유 같다(Milky Way)는 데서 우유를 뜻하는 그리스어 galax 에서 유래.

90개의 주제 전체는 아니지만 굵직한 소재의 끄트머리마다 QR 코드를 활용한 추가 자료를 확인할 수 있다. 사진부터 인터넷 동영상, 각종 우주 전문 기구의 홈페이지 등 참고해볼 만한 자료가 가득하니 활용해볼 만하다. 애초 이 책의 목적처럼 천문학 기초상식과 교양을 쌓는 읽기 자료로 그만이다.

 



인체를 구성하는 모든 원자는 우주 대폭발, 별의 중심, 혹은 초신성 폭발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주 먼지로 떠돌던 다양한 원자들이 태양계가 형성될 당시 지구에 뭉쳐져 지금의 우리 몸속까지 들어오게 된 것이죠.(358)

 

지금까지 알려진 우주의 크기를 분류하면 지구<태양계<우리은하<국부은하군<은하단<초은하단<관측가능한 우주의 순서다. 지구와 태양 사이의 거리는 약 15천만 km이고 이를 1천문단위(AU. Astronomical Unit)로 정의한다. 태양이 거느린 8개의 행성을 통틀어 태양계라고 하며 지구와 해왕성 사이의 거리는 약 30AU이다. 별이 1년 동안 이동하는 거리인 63,241AU1광년(LY. Light Year)이라 한다. 태양계는 수백억 개의 별 무리를 거느린 우리은하에 속해있고, 태양은 우리은하 중심에서 약 3만 광년 거리에 있다. 우리은하를 포함한 40여 개의 은하가 모여 5천만 광년의 국부은하군을 이루고, 다시 국부은하군은 수백 개의 은하단과 무리를 지어 초은하단을 이룬다. 은하 약 10만 개를 거느린 초은하단은 현재까지 알려진 우주의 가장 거대한 구조로, 천문학자들이 추산하기로는 1027승 크기이다. 상상조차 안 되는 이 엄청난 규모를 생각하면 지구에 사는 우리 인류는 그야말로 먼지만도 못한 존재로 여겨진다.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되도다소리가 절로 나온다. 광대무변한 우주 앞에서 한없이 초라해지고 겸손해진다. 이토록 넓은 우주인데 생명의 징후라고는 지구밖에 없다니 이 또한 신비롭기 그지없다. 저절로 고개가 숙어지고 경외감이 들 수밖에 없다. 온갖 오만한 생각이 들 때마다 별이 빛나는 밤하늘을 올려다봐야 하는 이유다. 천문학자를 꿈꾸는 이들뿐 아니라 지구과학에 관심 있는 독자들의 천문학 길라잡이 또는 입문서로 안성맞춤이다. (2023-05-29)

 



#천문학 #90일밤의우주 #동양북스 #리뷰어스 #책추천 #리뷰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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