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 없는 중개자들 - 석유부터 밀까지, 자원 시장을 움직이는 탐욕의 세력들
하비에르 블라스.잭 파시 지음, 김정혜 옮김 / 알키 / 2023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매일 먹는 음식과 연료로부터 일상적인 물건을 구성하는 재료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물질의 세계에 살고 있다. 이 원자재들을 생산자로부터 소비자에게 전달하는 상인들은 세계 경제의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동시에 가장 비밀스럽고 가장 감시를 적게 받는 사람들이기도 하다. 이 책의 저자들은 블룸버그 뉴스에서 에너지와 천연자원을 보도하는 기자들로서, 소수의 원자재 중개기업들이 엄청난 부를 축적하는 과정에서 써온 모호하고 부도덕한 방식을 폭로하며 베일에 가린 그들의 실체를 벗긴다. 때로는 손에 땀을 쥐는 범죄 소설처럼 읽히는 이 놀라운 폭로는 업계 관련자든 호기심 많은 행인이든 모두 놀랄만한 내용이다.

 

이 책의 저자들은 지난 20년 동안 천연자원을 취재해 온 기자로서 놀랍게도 소수의 원자재 중개자들에게 집중된 권력과 영향력을 파헤친다. 그리고 한 번 더 놀라운 것은 그에 대해 알려진 게 거의 없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이런 상황은 머잖아 곧 바뀔 것으로 보인다. 저자들은 글렌코어, 트라피구라, 비톨 등 중개기업의 주요 인물을 포함해 100명 이상의 전현직 임원들을 만났다. 대부분 미친 듯이 열심히 일하고, 지독하게 똑똑하고, 무장 해제될 정도로 인격적이며, 오로지 돈 버는 데만 집중하는 특별한 인물들이 등장한다. 마치 군대 같은 남성 편향적 인적 구성 덕분에 군대 못지않게 편향적이라는 월스트리트 은행가의 성 다양성조차 매우 진보적으로 보일 지경이다. 실제로 일부 대형 원자재 중개기업의 최고 경영진 가운데 여성은 단 한 명도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국제 무역의 역사는 수 세기에 걸쳐 이루어졌으며 이 책의 이야기는 1950년대 필립브라더스, 카길과 같은 기업이 각각 금속과 곡물 무역 제국을 지배하던 시절부터 시작한다. 국제 석유 무역은 이제 막 개척되기 시작했고, 1970년대에 눈부신 성공을 거둔 중개업자 중 한 명이 바로 마크 리치였다. 그는 이후 수십 년 동안 중개업계의 사업 방식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저자들은 이후 다양한 원자재 시장으로 진출한 여러 대형 중개업자들의 흥망성쇠를 도표로 정리했다.

 

저자는 지난 50여 년 동안 이러한 어둠의 비즈니스가 수백만 달러에서 수십억 달러의 수익을 올리며 번창할 수 있었던 네 가지 발전 과정을 중심으로 역사를 정리한다. 첫째, 1911년 록펠러 비즈니스 제국의 해체와 함께 미국 7개 석유 회사의 독점을 깨고 국제 석유 무역이 등장하였다. 둘째, 1991년 소련이 붕괴하면서 화석 연료와 금속을 시장에 공급하는 국가의 역할을 상인들이 대신하게 되었다. 셋째, 2000년대 중국의 도시화로 수억 명의 중국 소비자들이 풍요로운 생활방식을 누리게 되었다. 넷째, 은행 부문의 성장과 세계 경제의 자금 조달 방식에 대한 다양한 발전으로 중개업계가 혜택을 받았다. 이쯤 되면 그래, 부당 거래로 더러운 부자가 되는 사람도 가끔 있는 거지라며 어깨를 으쓱할지 모른다. 하지만 이 업계에서의 성공 여부는 어떤 마음가짐으로 임하느냐에 달려 있다.

 

마크리치앤드코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아파르트헤이트 시대 정부와 거리낌 없이 거래했고, 아프리카 개발도상국에 대한 할인 혜택을 악용하여 유령 회사를 세운 뒤 석유를 더 싸게 사들이는 방식으로 석유수출국기구(OPEC)를 기만하였다. ‘비톨은 쿠바에 대한 미국의 무역 금수 조치를 우회하여 쿠바의 설탕을 사들이고 소련산 석유를 판매했다. 또한 인종 청소 혐의로 기소된 군벌을 고용하여 구 유고슬라비아의 부채를 해결하기도 했다. 1992년 마크리치앤코가 두 개의 새로운 자회사로 분할되었을 때, 두 회사 모두 조사받게 되었다. ‘글렌코어는 사담 후세인 정권 시절, 석유 거래 특권을 얻기 위해 이라크 대사관에 뇌물을 주고 석유 수입을 인도주의적 목표에 사용하려는 유엔의 식량용 석유 프로그램을 훼손했다. ‘트라피구라는 코트디부아르의 오염 스캔들에 연루되어 유독성 폐기물을 현지 계약업체에 팔아넘겨 약 95,000명이 질병에 시달리게 했다.

 

이 사례들은 독재 정권 및 전쟁으로 폐허가 된 국가와 거래하고, 뇌물 수수와 부패 관행에 가담하고, 역외 기업을 통해 더러운 돈을 퍼뜨리는 등 중개업자들이 이윤을 추구하기 위해 거래했던 많은 놀라운 사례 중 일부에 불과하다. 경제와 국제 무역에 익숙한 독자라면 저자들이 균형 잡힌 보도를 하고 있다는 점을 높이 평가할 것이다. 위의 과도한 내용이 그 자체로 시사하는 바가 크지만, 이 책의 목적은 명예훼손 캠페인에 있지 않다. 저자들은 상품을 거래하는 유일한 동기가 거의 언제나 금전적 이해관계일 뿐이라며 철저히 비정치적 논리를 주장하는 중개업자들의 입장에 동의한다. 하지만 정치적 영향력이 목표가 아니라 하여 중개업자들이 미치는 영향력이 없음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 이 외에도 선물, 현물 시장, 톨링, 원자재 슈퍼사이클 등 생소한 거래 관행과 전문 용어에 쉽게 접근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그런데 저자들은 중개기업들로부터 지옥 불 같은 맹렬한 고소를 피해 어떻게 이 책을 쓸 수 있었을까? 2020년 사망하기 전 인터뷰에서 비톨의 회장 겸 CEO인 이안 테일러는 저자들에게 이 책을 쓰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분명히 경고했다. 마지막 두 챕터는 많은 것을 명확히 설명한다. 2011년 글렌코어의 상장사 전환 결정은 폭탄과도 같았다. 투자자, 언론인, 비정부기구(NGO) 및 정부로부터 엄청난 조사를 받으면서 글렌코어뿐만 아니라 그늘에 가렸던 중개업계 전체가 노출되었다. 거래업체의 공급자와 구매자를 포함하여 대부분 사람은 이들 기업이 얼마나 많은 부를 축적했는지 거의 알지 못했다. 또 다른 이유는 정보를 찾는 것이 그 어느 때보다 빠르고 저렴하고 쉬워지면서 중개기업의 경쟁력이 약해진 점이다. 기업의 투명성이 높아지면 뇌물 수수와 부패가 더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게다가 다수의 광업과 석유 회사들이 물류를 직접 처리할 정도로 성장하였다. 요컨대 이 책이 나온 시점은 때가 무르익은 덕분이었다. 하지만 저자들은 중개업자들의 시대가 아직은 끝나지 않았다고 경고한다. 일부 기업은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유가가 급락하자 슈퍼탱커를 고용하여 임시로 석유를 저장함으로써 큰 이익을 취하기도 했다.

 

원자재 중개기업들이 지닌 영향력은 가히 충격적이다. 5대 석유 유통사는 전 세계 석유 수요의 거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하루 2,400만 배럴을 처리한다. 7대 농산물 중개기업은 전 세계 곡물 및 유지 종자의 절반가량을 취급한다. 세계 최대 금속 거래업체인 글렌코어는 전기 자동차의 중요한 원료인 코발트 세계 공급량의 3분의 1을 차지한다. 오로지 그들의 이익을 위해 설계된 것으로 추정되는 정부 정책 또는 실제 정부의 다양한 변화가 목격된다. 글렌코어의 러시아 곡물 사업 책임자가 곡물 가격 상승을 예측한 내기를 걸어온 지 불과 몇 주 만에 수출 금지를 공개적으로 요구하기도 했다. 글렌코어는 201065,900만 달러의 수익을 올렸다.



이처럼 이들이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는 것은 종종 부패한 관행에 얽혀 있기 때문이다. 석유 중개기업 군보르의 창립자 토르비욘 토르크비스트는 저자들에게 불행히도 원자재 산업을 괴롭혀온 장본인은 부패라면서, 숨겨진 영업비밀이 많으며 대부분 무덤까지 가져갈 것이라고 말한다. 그래도 저자들의 이 정도 시도는 괜찮은 편이다. 보스니아에서 유혈 분쟁이 벌어지고 있을 때, 비톨은 악명 높은 세르비아 군벌 아르칸에게 보안 예방 차원에서 100만 달러를 지불하고 그가 누구인지도 모른 채 회의에 참석했다. 50만 파운드의 현금을 들고 런던 히스로 공항에서 체포된 한 글렌코어 임원은 일본과 대부분의 서유럽 국가처럼 뇌물이 불가능한 나라가 있는 한편, 중국처럼 매우 성공적인나라도 있다고 말한다. 스위스는 2016년에야 개인에 대한 뇌물 지급을 더 이상 사업상 정당한 비용으로 허용해서는 안 된다고 선언했음을 지적한다.

 

투자자들의 자금이 종종 그들도 모르는 사이 부패에 연루된다. 저자들은 펜실베이니아, 사우스캐롤라이나, 웨스트버지니아의 공무원 연금 기금이 어떻게 쿠르드의 고위험 투자에 유입되었는지 말한다. 이는 세금이 적게 들고 감시가 소홀한 관할지역에서 익명의 수단을 통해 돈이 오가는 현대 금융 시스템에 대한 비유이다. 이들은 세계가 기후 변화의 현실에 눈을 뜨고 있지만 중개업자들은 여전히 환경을 오염시키는 상품에 크게 의존함으로써 업계 개혁의 속도를 늦추고 있다면서, 소비자들이 제품의 추적 가능성과 윤리적 외주에 점점 더 관심을 기울이고 있음을 지적한다. 정보의 민주화, 세계화의 역전 등 다른 역풍도 중개자들의 입지를 위축시키고 있다. 또한 미국 정부는 외교 정책의 도구로 경제제재를 사용하여 부패에 대한 그물망을 점점 더 촘촘히 좁히고 있다. 그 결과 다수의 중개기업이 뇌물 제공의 수단이 되기도 했던 에이전트(제삼자 해결사) 사용 중단을 발표했다.



그러나 원자재 중개기업의 종말을 예측하는 것은 거의 확실히 시기상조이며, 신규 진입자의 역할이 계속 존재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미국의 제재가 확산되고 서구의 중개자들이 특수 시장에서 물러나도록 강요받으면서 중국 거래자들이 이득을 얻게 되었다. 코프코, 차이나 오일, 주하이 젠룽 등이 대표적이다. 그리고 무대는 다시 러시아로 이어진다. 2017년 글렌코어의 전 CEO인 이반 글라센버그는 러시아 국가에 기여한 공로로 블라디미르 푸틴으로부터 훈장을 받았다. 2014년 미국 재무부는 푸틴이 군보르에 투자하고 있으며 군보르 자금에 접근할 수 있음을 언급했다.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한 세대 만에 에너지와 식량 공급에 가장 큰 차질이 빚어지고 있는 지금, 이 책의 속편을 써야 할 때일지도 모른다.

 

이 책을 읽고 몇 가지 관찰할만한 점이 눈에 뜨인다. 저자들은 당연히 공범(?) 두 명에 대해 간략하게만 언급하고 있다. 하나는 마지막 장에서 강조했듯 최근 미국 정부의 표적이 되어 미국 달러에 대한 중개기업들의 의존도를 높이고 있는 은행들이다. 두 번째는 이러한 기업의 본사를 두고 있으면서도 고집스럽게 딴청을 피우고 있는 스위스다. 사람들의 관심에서 크게 벗어난 원자재 중개업 분야를 용감하게 폭로하면서 독자의 눈을 번쩍 뜨이게 만드는 이 책은 경제나 무역 전문지를 읽지 않더라도 충분히 이해하고 즐길 수 있도록 잘 쓰인 책이다. 우리가 사용하는 모든 제품의 출처에 관심 있는 소비자라면 이 책을 반드시 읽어볼 만하다.


- 핵심요약

1. 전 세계에서 거래되는 자원의 상당 부분을 소수의 회사가 처리하고 있으며, 다시 그중 상당수를 소수의 사람이 소유하고 있다.

2. 이 책은 중개자들의 영향력이 경제에만 국한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세계 전략 자원의 흐름을 통제함으로써 강력한 정치 행위자가 되었다.

3. 중개자들의 수많은 부패와 악행에 관한 이야기가 제시되며, 투자자들은 자신도 모르게 이에 연루되어 있다. 앞으로 이런 상황이 바뀔 수 있을까? (2023-06-12)

 

 

#경제 #얼굴없는중개자들 #시공사 #원자재 #국제무역 #서평단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