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나라 정벌 - 은주 혁명과 역경의 비밀
리숴 지음, 홍상훈 옮김 / 글항아리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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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골문은 표준적인 '남성문자'이며,게디기 룽산 문화 이후 부락의 옛풍습이 아직 바래지 않은 시대의 남성들이 창조한 문자다. 당시에는 아직 후세 사람들이 이해하는 것과 같은 왕조의 질서가 없었고, 부락들 사이의 약탈이 흔한 일이었고,피에 굶주린 신들이 야만적이고 황량한 대지를 주재했다. (-326-)

D2는 D1에서 동북족으로 2150미터 떨어진, 궁성의 동쪽 담장과 가까운 곳에 있다. 이것은 제3기 말엽에 건축된 것으로서, 규모는 D1보다 조금 작지만 양식은 비슷하다. 정원은 남북의 길이가 70미터 남짓이고 동서의 폭이 60미터 정도이며, 주랑이 있는 담장을 둘렀다. 정원 중앙에서 북쪽을 치우친 곳에 독립된 대형 전당이 있으며,,남쪽 정원의 담장 위에는 문지기의 문간방과 대문으로 통하는 길이 있다. 중심 전당과 북쪽 정원의 담장 사이에도 우물이 하나 있는데, 처음 발굴했을 때는 하나의 큰 모덤(M1)과 도굴된 구멍이라고 여겼다. D2의 정원 안에서는 인신공양제사의 흔적을 발견하지 못했다. (-100-)

첫째, 각 시기의 무덤에서는 순장된 사람이 발견되지 않았고, 나중에 제사하면서 인간 희생을 매장한 현상도 없었다. 묘지와 관련된 유적 가운데 94H3 쓰레기 도랑에서만 인신공양제사의 흔적이 있었다.

둘째, 궁전 구역 건축에 사람을 희생하여 기초를 다지지 않았고 ,D1정원 안에서만 제사에 비쳐진 5구의 유골이 발견되었다.

셋째, 청동 작업장 F9에는 기초를 다지고 바쳐진 10여구의 유골이 있었고, 그 옆의 제사갱 H99에도 2구가 있었다. 시간적으로 청동 작업장의 인신공양제사 행위는 더 이른 시기(제2기) 에 나타났고 ,궁전의 인신공양제사 행위는 그 뒤를 이은 것이다. (-121-)

타이시의 무덤 중에는 ㄸ 3개의 견갑골을 부장한 M103 이 있다. 무덤 주인의 신장은 약 170센티미터이며,2명의 작은 남자 하인을 순장했다. 1명은 15세 전후의 소년으로, 두 다리는 무릎뼈 아래가 절단되어 있었는데, 생전에 그런 장애가 있었던 듯 하다. 갑골문에서 정강이를 잘라내는 것이 '월 刖'인데 도망칠 가능성이 있는 노예에 대해서는 가장 훌륭한 예방 수단이지만 사망률도 높았다. 은허의 복사에 따르면, 상나라 왕은 여러 명의 노예에게 월형을 실시한 적이 있으며, 또 점을 쳐서 언제 정강이를 자라야 사망륭이 낮아지는지를 묻기도 했다. (-265-)

상나라가 '족'을 사회의 기본 단위로 삼았다는 것은 무덤에서 대단히 뚜렷하게 나타난다. 이른바 부족이 모여 사고 부족이 모여 장례를 지내기 때문에, 부족의 무덤은 일반적으로 서열이 있다. 족장은 부족 성원과 함께 묻히지만, 무덤의 위치는 앞쪽이나 중간의 상대적으로 존귀한 자리에 있고, 일반적으로 부족 성원들과 떨어져 단독으로 배장되지 않았다. 남성의 무덤에는 종종 무기를 부장했다. 부족 묘지의 성원은 피차 간에 빈부 격차가 있었을 가능성이 크지만, 모두 같은 묘지를 사용했고, 출토된 청동기에도 종종 같은 족휘가 들어 있었다. 통치 받던 농노는 순장된 경우가 아니라면 주인 가족의 묘지에 함께 묻힐수 없었다. (-340-)

부장품과 인간 희생을 모두 배치한 뒤에는 묘혈에 흙을 채우고 다지기 시작했다. 다지는 과정에서도 인간과 개를 순장했을 수 있다. 절반 정도의 깊이에 도달하자 세 살 어린애 하나를 죽여서 ,그 인두를 얼굴이 아래로 향하도록 흙 속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지면과 1미터 쯤 떨어진 곳에 이르자 또 25세 전후의 여자 하나를 죽여서 인두를 옆으로 돌려서 흙속에 안치했다. (-413-)

상나라의 갑골복사에느 융과 적이 없다. 주족이 말한 융은 지역과 문화가 상대적으로 주족과 가까우나 약간'야만적이고 낙후한'부족들이다. 가장 분명한 것은 융족도 희성이나 강성과 같은 족성을 거지고 있으며,여기에 그들과 주족이 어떤 유래를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 상족이 보기에 주족과 융족은 크게 구별되지 않고, 모든 넓은 의미의 강족에 속했다. (-454-)

다만 그럼에도 일부 실마리가 남아 있으니,이것이 바로 문왕 주창이 창작한 『역경』 이다. 주창은 줄곧 암흑의 상나라 시대를 살다가 상 왕조가 멸망하는 모습을 보지 못하고 죽었으나, 『역경』 에 진귀한 기록을 아주 많이 남겼다. 개중에는 상족의 피비린내 나는 제사 의식과 인간희생 사냥을 담당했던 주족의 경험도 포함된다.

주 왕조가 건립된 뒤에 상 왕조의 갑골 문서들은 철저히 파괴되었으나, 감히 문왕이 남긴 『역경』 을 훼손한 사람은 없었다. 다만 거기 기록된 잔혹한 일들을 평범한 내용으로 변했다. 이것은 확실히 효과가 있었고, 어느덧 3000년이 지났다. (-526-)

다만 『제왕세기』의 서사에는 또 뚜렷하게 소설화된 특징이 있다.에를 들어 정리情理 로 보자면,주창이 구금되어 있던 시기에 주왕은 백읍고에게 자기 마차를 몰게 하지 않았을 것이고, 그렇게 한 것은 응당 주창이 석방된 뒤의 일일 터다. 또 주왕이 백읍고를 죽여서 삶아 주창에게 준 것이 그가 '성인'이 아님을 입증하기 위해서였다는 것도 드라마 같은 서사다. 그 전의 「천문」과 『육도』 에는 모두 이런 이야기가 없다. (-688-)

다만 무왕은 여전히 엄청난 압박을 받고 있었다. 그는 상 왕조의 강대함과 포악함을 잘 알고 있었다. 일단 상왕조의 진노를 촉발하면 누구라도 그 결과를 예측할 수 없었다. 하지만 상나라 정별을 포기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서부에서 은상의 궁정에 이르기까지 갖가지 세력이 모두 그 사업의 속도를 높이도록 재촉했다. 과연 주나라가 정말 상 왕조에 대항할 역량이 있는가? (-748-)

무덤을 모두 약탈하고 파괴한 뒤에 주족은 이 거대한 도굴 구덩이들을 메워서 다시 평지로 만들었다. 철저하게 파괴한 뒤에 의식적으로 이곳을 철저하게 잊힌 땅으로 만들고자 했음을 알 수 있다.

3000여년이 흐른뒤에 1세대 고고학자들이 이 묘실을 다시 발굴했을 때, 비로소 거대한 도굴갱 외에 남겨진 물품은 이미 극히 적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다만 그들이 어느 거대한 구덩이를 채운 흙에서 나머지 절반의 조각을 발견한 것은 행운이었다. 이것은 도굴 구덩이의 발굴과 매립이 동시에 진행되었음을 의미한다. (-805-)

물론 춘추 시기 인신공양제사의 회복 현상은 주류를 형성하지 못했는데, 이것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원인 때문일 것이다.

첫째, 전국 시기의 사회 재조직과 정치적 변혁이다. 열국의 겸병전쟁으로 위협이 나날이 증가함에 따라, 각 나라에서 모두 변법을 진행하여 귀족 제도를 없애고, 군주 집권과 관료제를 실행했다. 국가의 최우선적인 목표는 부국강병으로 국제 경쟁에서 승리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관료 기구가 이성적이고 실리적인 방식으로 사회를 관리해야 했으니, 인신공양제사는 당연히 용인할 수 없고 실리적인 방식으로 사회를 관리해야 했으니,인신공양제사는 당연히 용인할 수 없고 반드시

금지해야 할 행위였다. (-858-)

중국역사에서 최초의 국가 상나라는, 기원전 1600년 경에 생겨나 기원전 1046년에 멸망했다. 상나라 다음으로 주나라가 세워졌으며, 기원전 1046년에 생겨나 기원전 2156년에 멸망했으며, 주나라는 중국 역사에서 가장 오래된 왕조였다. 하지만 1899년, 중국이 청조 지배하에 있을 때, 갑골 문자가 발견돼었고, 글자에 새겨진 짐승의 뼈는 이 책에서 언급하고 있는 상나라 사람들이 점을 치는데 사용하였다.

책 제목이 왜 상나라 정복 이 아니고, 상나라 정벌인가 궁금했다. 상나라는 19세기까지만 해도 존재하지 않았고, 신비로운 나라, 신화적인 나라 은허, 은나라가 존재했다. 갑골문자는 중국의 역사를 다시 써야 했으며, 중국의 최초 국가는 주나라가 아닌 상나라였다는 사실과 더불어 중국의 역사는 공식적으로 3600년에 이른다.

책 『상나라 정벌』 은 상나라 마지막 왕과 주나라를 세운 왕 ,주나라 문왕 주창과 문왕의 아들 무왕이 나온다. 1959 년부터 발굴된 허난성 뤄양시 지역의 일리터우 유적을 이해하게 되면, 상나라의 역사와 문화,관습을 읽을 수 있으며,상나라 내부에 만연되어 있었던 인신공양제사는 상나라 멸망의 단초를 제공하였고,상나라 다음으로 세워진 주나라는 상나라의 존재를 철처하게 지우기 시작했다. 중국의 역사에서 상나라가 존재해서는 안되는 것이며,주나라가 상나라보다 더 위대하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했으며, 사마천의 사기, 공자의 논어, 지금 우리가 아는 운세, 점을 치는 책으로 알려져 있는 역궤, 역경 에 그 흔적이 남아있다. 통일신라와 일제가 행했던 역사 지우기 작업을 주나라도 자행했다.

상나라는 제후국이었던 주나라의 왕 문왕 (文王)인 희창(姬昌)을 소환하였다. 그리고 문뢍의 아들 백읍고 (伯邑考,?~?)를 인신공양제사의 제물로 삼아서, 주나라와 돈독한 관계를 형성하고 싶었다. 하지만 , 백읍고의 시체를 먹었던 백읍고의 아버지 문왕 주창은 문왕의 두번째 아들 무왕을 시켜서, 상나라 정벌을 시도하였고, 그것이 성공하게 되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작가 리숴 의 관점에서 서술하고 있으며,그 당시 청동기 문화, 상나라를 멸망시키고, 상나라의 존재 자체를 없애고자 한다. 당연히 상나라의 인신공야제사를 금지시켰다. 특히 그 때 당시 주나라 문왕 주창이 쓴 갑골복사에 남겨졌던 역궤, 역경은 지금과 다른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상나라 정벌』 은 역궤 해석하는데 많은 양을 할애하였으며, 그 당시 점을 쳐서 ,국가의 재앙을 멀리하였고, 그 구실로 인싱공양제사를 반복하였다.살아있는 어린 여성과 성인 여성을 산 채로 매장하여, 신의 노여움을 덜어내고자 하였다. 책 『상나라 정벌』의 기초 자료들과 역사적 근거들은 그때 당시 존재했던 갑골복사와 사마천의 사기, 공자의 논어,문왕 주창이 쓴 역경 , 그리고 그 당시 제왕세기에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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