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의 빛, 청자 2
정찬주 지음 / 불광출판사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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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비안검법으로 해방된 노비들의 숫자는 1만 여명에 이르렀다. 특히 청해진을 폐할 때 노비가 되어 벽골군으로 강제 이주한 군사들의 자식은 1백년 동안 세습노비를 벗어나지 못했는데, 그들도 엯시 면천의 혜택을 받았다. 장보고 반란군으로 낙인찍힌 청해진의 군사들은 모두 노비가 되어 벽골군으로 갔다가 신라가 망한 이후 또다시 나주 오씨,충주 유씨, 청주 김씨 호족들에게 보내졌던 것이다. 물론 부안으로 가서 도공이 된 노비들도 있었다. (-15-) ​ ​ "나는 초마선을 타고 왔다.배가 느리기는 하지만 흔들림이 덜해 편하더구나. 뱟멀미는 없었느니라." 초마선이란 1천석을 실을 수 있는 대형 조운선이었다. 최열이 탄 배는 아마도 2백 석 정도 실을 수 있는 배 밑바닥이 평평한 평저선이었을 터였다. 청자 운반선은 작은 세곡선 정도의 크기인데 길이는 어른 걸음으로 십 여보, 넓이는 대여섯 보 깊이는 한 걸음 반 정도에다 돛이 하나밖에 없는 배였다. (-93-) ​ ​ "어캐 인동초와 연꽃을 생각했소?" "탐진도공덜은 문양을 어처케 청자그럭에 넣을지 수년 전부텀 고민해 왔지라. 최근에는 음각만 헐 것이 아니라 나전칠기멩키로 상감까지 허는 것이 으쩌냐는느 시도가 많아지고 있지라우." (-173-) ​ ​ 날씬한 몸체에는 42개의 원으로 된 창이 있는데, 둥근 창 속에는 학이 구름을 뚫고 위를 향해 날고, 창밖의 학 23마리는 구름 사이에서 아래쪽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학의 날개는 백토 상감으로 하고 부리와 다리는 흑토 상감을 해서 기법의 절정을 보여주었는데, 병에 새긴 학은 모두 65마리였다. 그러나 그것은 병이 가만히 있을 때의 숫자이고, 괴짜 도공이 병을 빙글빙글 졸리자 수천마리의 학이 구름 사이로 비색 창공을 나는 듯했다. 최충수의 집사가 탄성을 질렀다. (-261-) ​ ​ 구름 한 점 없는 부드러운 하늘빛도 , 신록이 녹음으로 바뀌어자고 있는 천개산 산자락도 탐진바다처럼 온통 푸른색이었다. 정 족장이 호공에 눈길을 한 번 주고 난 뒤 말했다. "자네는 천상 청자를 맹글고 살 사람이네.녹천이란 푸를 녹(綠) 자에 하늘 천(天) 자, 푸른 하늘이 아닌가." (-322-) ​ ​ 신라 도공에 의해, 중국의 청자 기술이 전남 강진, 탐진현으로 청자 기술 이전하였다. 고려 청자의 기원은 통일신라시대 강진에서 시작되었다. 9세기 경, 통일신라시대 노비들에 의해서, 청자 기술이 조금씩 발달하게 된다.그 과정에서, 해적들을 퇴치하기 위해 장보고가 청해진 대사로 부임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장보고는 살해되고, 신라의 도공 문화는 개성 벽락도로 문화 이동이 시작되고 있다. 챙해진 유민들은 벽골군이 되어, 떠돌아 다니느 처지에 놓여지고 말았다. 청자를 맹글기 위해 태어난 최녹천,그의 후손들은 장보고가 죽은 이후, 흩어지게 된다. 개경 벽란도로 ,그들이 옮겨갔으며, 고려시대 노비 안검법에 의해, 1만 세속노비들이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었다. ​ ​ 소설 『깨달음의 빛, 청자 2』 에는 강징이 아닌 고려 개성으로 향하고 있다. 서서히 고려 청자 문화가 성장하게 되었으며,아름다운 비취색과 학 문양이 어떻게 고려 청자에 스며들게 되었는지 살펴 보고자 한다. 물론 고려 시대는 몽골 침략으로 인해,24대 고려왕 원종에서, 25대 왕 충렬왕으로고려 왕권이 이동되는 과정을 엿볼 수 있었다. 고려 청자는 나전칠기 기술을 융합 함으로서, 생활자기였던 청자 문화가 학문양, 연꽃 문양을 기록함으로서, 예술적 가치를 가미하게 된다. 이 소설에서, 고려 청자의 기원 뿐만 아니라, k-컬쳐의 기원이 고려 청자에서 시작된 이유까지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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