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막함이 나를 살릴 것이다 걷는사람 시인선 109
김수목 지음 / 걷는사람 / 2024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심야 버스

먼 인가의 불빛처럼 반짝이는 무엇이 되고 싶었다.

어둠이 밤새 이렁일 때마다 불 비늘이 되어

외로운 이의 창가를 밝히고 싶었다.

심야 버스의 낯선 실내등이 파랗게 질려 간다.

어둠을 배경 삼아 더 파랗게 질려가는 찌든 얼굴들

이마가 창문에 차갑게 닿는다.

출렁거리며 어둠이 다가왔다가 물러선다.

어둠을 뚫고 먼 인가의 불빛이 다가오다 망설인다.

이 버스가 닿는 곳이 내일이다. (-11-)

아직 가만히 놓다.

개나리꽃 흐드러진 날에 친구는 갔다.

들어갈 수 없는 중환자실 복도를 지날 때

잠깐 열린 문을 지나칠 때

친구의 침대에 삐죽이 나와 있는

작은 발바닥을 보았어.

아주 작고 앙증맞았지.

친구는 가기 전에 영정 사진을 골라 놓았다 했다.

자신이 죽은 후에 살아있는 사람들이 볼 사진을 고르며

제일 예쁜 것으로

장지는 외롭지 않게 붐비는 곳으로 택했다.

너무 외로워서

죽어서라도,

모르는 사람들이라도,

자주 스치는 그런 곳으로 정해 달라고

온몸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주렁주렁 주삿줄을 달고서

고통 너머 고통까지 간 다음에야

섯히 세상과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나는 아직 친구의 손을 잡아 보지 못했는데. (-15-)

막막함이 나를 살릴 것이다.

손이 펴지지 않았다.

잡아야 할 것들이 순식간에 밀려왔다.

손으로 잡아야 하는 것들은 모두 사물이다.

팩소주를 마셔 본 기억은 없는데

매번 꿈마다 팩소주 묶음을

배낭 맨 아래에 넣고 여행을 떠난다.

추전역을 지나면서

아직 오늘이 다 가지 않았다는 것과

더 기다릴 여력이 남아 있다는 것에 숨을 내쉰다.

태백이 고향이라는 여자의 말을 듣고

사랑한다고 고백할 뻔 했다.

막막함이 나를 살릴 것이다.

발부리에 차인 돌멩이를 주워 던지며

그리워할 사람이 없을 때가 좋았다고

말하려다 그만두었다.

손이 펴지지 않았다.

항상 뭔가를 쥐고 있어야 했던 손이지만

항상 비어 있다고 기억하려 했다. (-29-)

부르지 못할 이름

조문은 늘 밤늦은 시각이었다.

장례식장은 늘 도시의 초입이었으므로

인터체인지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다.

생에서 멀지 않은 곳에 죽음이 있듯이

수은등이 천장에서 창백하게 빛나는

로비에서 곱은 손으로 부의 봉투를 쓴다

낯선 한자어를 써서 조의를 표해야 한다.

방명록에 낯선 글씨로 이름을 쓴 후

이름이 맞자 확인한다.

내 이름마저 불확실한 곳

생애 중 가장 많은 꽃들에 싸인

무념한 표정의 영정 앞에

기독교식으로 해야할까, 전통식으로 해야 할까

상주와는 맞절을 해야 하나,목례로도 괜찮을까.

망자는 말이 없다

상주도 말이 없다

조문객도

미리 세팅된 밥상이 뱅반에 담겨 나온다

일회용 스티로폼 국그릇과 플라스틱 숟가락

일회용 생에 일회용 슬픔

반도 안 찬 육개장의 붉은 국물이 숟가락을

붉게 물들인다. (-41-)

주어진 생이 있고, 준비되지 않은 죽음이 있다. 삶의 끝자락에 마주하게 되는 죽음 앞에서 있을 때, 우리는 막막하다는 말을 쓰곤 한다. 시간의 흐름과 노력에 비해 내가 만들어낸 세계의 부질없음에 대해, 우리는 스스로 아픔에 도취되어 마약에 취해 살아가곤 한다.삶이 막막한 그 순간에 새을 놓고 싶은 충동에 시달린다.

생의 마지막 그 순간, 숨이 깔딱 넘어가는 그 상황, 어떤 선택을 하고, 어떤 판단을 하느냐에 따라서, 나의 남아 있는 생에 대해서, 후회를 덜어낼 수 있고, 상처를 덜어낼 수 있다. 시인은 『막막함이 나를 살릴 것이다』에서, 막막함이 나를 살린다고 했다. 여기서 막막함이란 판단을 할 수 없는 상황, 판단하기 싫은 상황에서, 판단해야하는 그러한 막막함이다. 이러한 것들은 생에 대한 회의감이 봇물터지듯 흘러나올 때가 있다. 살아가되 살아있다고 느껴지지 안는 그 순간이 우리 앞에 당도하게 된다.

시는 우리의 마음을 깊숙하게 품고 있었다. 살아서 꿈꾸는 것을 소원이라 한다. 죽어서 꿈꾸는 것들 유언이라 한다,.인간은 죽음 이후 어떻게 될지 모른다. 내가 남긴 유언이 살아있는 사람이 들어줄거라고 장담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유언을 마지막 메시지를 무시할 수 없었다. 나도 내 앞에 당도한 타인의 죽음이 나에게 찾아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죽음 앞에서, 무형의 유언을 다시 남기게 된다. 그것을 살아있는 사람이 들어주길 바라는 그 막막함, 그 막막함이 나를 살리고 ,죽어있는 그들을 살릴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