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너를 위한다’는 속삭임을 의심해볼 필요가 있다. 혹시 자식을 위한 게 아니라 부모 자신의 비교 우위를 남에게 인정받기 위한 것은 아닐까. 후배 직원을 위해서가 아니라 부장이나 이사 자신이 얼마나 잘났는지 보여주기 위한 것은 아닐까.

"너 하나만을 위해 모든 걸 바쳤다"는 부모 밑에서 자란 자식들은 커서도 정신적 탯줄을 끊어내지 못한다. 영원히 철들지 않는 마마 보이, 파파 걸로 평생을 살아간다. "미안해. 당신, 엄마 만들어서. 당신도 여자 하고 싶었을 텐데…."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의 노규태(오정세)가 아내에게 혀 짧은 발음으로 한 말이다. 연인이나 배우자에게서 엄마 아빠를 찾는 게 노규태뿐일까.

‘너를 위해’ 이데올로기는 위험하다. 진심으로 ‘너를 위한 것’일지라도 자칫 너에게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는 의미로 변질되기 쉽다. 자식에 대한 관심이 집착과 학대로, 사랑이 스토킹으로 변하는 건 순간이다. 너를 위한다는 마음으로 얼마든지 무례해지고 잔인해질 수 있는 게 인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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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다가 운동했다.
가벼운 걷기, 그덕에 독보적 활동의 오늘치를 달성했다.
운동에 대한 동기를 부여하기도 하고, 리디 ‘수진‘이나 ‘민준‘의 목소리로 들으며 운동하기에도 괜찮다.
평소 대수롭지 않게 넘겼던 운동 과정이나 헬스장에서의 편견과 차별에 대해 생각지 못했던 점을 꼬집은 것도 좋았다. 인권운동가로서의 관점이 드러나는 부분도 마음에 든다.
장르의 한계가 있어서 작가가 쓴 다른 책이 궁금해졌다.


아틀라스처럼 일로 힘을 쓰는 것만이 아니라, 헤라클레스처럼 쓰는 힘도 필요하다. 일이 아닌 데다 에너지를 들이는 것, 사람들은 그런 것을 가리켜 흔히 사치라 한다. 그러나 어디 삶이 필수품만으로 이루어지는가. 살아가려면 간혹이라도 사치품이 필요하다. 여유와 틈을 ‘사치’라고 낙인찍은 건 아닐까. 그렇게 사치라는 말은 ‘분수를 지켜라’ 하는 말로도 바뀌어 우리 삶을 단속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필요해서가 아니라 즐거워서 힘을 쓰는 일이 사치라면, 난 내 힘을 하늘을 들어 올리는 데 쓰는 사치를 마음껏 부릴 것이다.

아무튼, 피트니스 | 류은숙 저

임금이나 노동시간 같은, 처우만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웃어야 한다. 상냥함이 의무다. 그런 감정노동의 시대다. 특히 체육관 샘들은 언제든 웃어야 한다. 체육관을 다니면서 내게 가장 거슬렸던 건 회원들의 반말이다. 체육관 샘들은 거의 다 젊은 분들이다. 그래선지 트레이너들에게 존대를 하는 회원을 보기 힘들다. 상대적으로 젊은 회원들만 샘들에게 존대를 한다. 나이 많은 쪽이 적은 쪽을 향해선 반말을 하는 건 전통이고 흠이 아니라고 여기는 걸까? 아니다. 나이 많다고 반말을 할 수 있다고 여기는 건, 전통이 아니라 신분사회의 의식인 거다. 21세기 만민평등에 기반한 공화국의 시민의식과는 거리가 멀다. 체육관이건 어디서건 우린 동등한 시민으로 만나는 거다. 나이뿐만 아니라 하는 일, 일에서의 직위 같은 거를 따져 함부로 반말을 하는 건 타인을 동등한 인간으로 대우하지 않는, 요새 하는 말로 적폐 중 하나다.

나는 평소에도 깎아달라는 말, 그냥 좀 해달라는 말이 싫다. 원자재나 재료는 조목조목 값을 따지면서 사람의 수고에 제값을 치르는 경우는 드물다. 경제가 어렵다 하면 사람에게 치러야 할 몫부터 깎으려 하지 않던가. 체육관 기본 이용료는 이 돈으로 내가 사용하는 전기요금, 수도요금이나 될까 싶을 정도로 싸다. 경쟁이 심하니 체육관마다 일종의 박리다매 전략을 쓰기 때문일 것이다. PT로 수익을 벌충한다고들 말한다. 그러나 원래 그 정도는 받아야 제값일 것 같다. 제값을 받지 못하는 것이 체육만이겠는가. 물론 저마다 사비로 해결하지 않고, 보편복지처럼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공공체육이 활성화되면 훨씬 더 좋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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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 낙수 효과는 현실이다. 위에서 물이 넘치면 아래로 내려가듯이 악은 계속해서 피라미드 계단 아래로 흘러내린다. 직장 상사에게서 받은 스트레스는 상사에게 되돌아가지도, 사라지지도 않는다. 그 아래에 있는 부하에게 내려간다. 스트레스 질량보존의 법칙일까. 갈 곳을 찾지 못한 스트레스는 거리로 쏟아져 나온다. 대상은 눈앞의 불특정 다수다. "네가 뭔데 왜 기분 나쁜 눈으로 쳐다봐?" "어깨를 치고도 왜 사과를 하지 않는 거야?" 멱살잡이를 하고, 주먹다짐을 한다. 거리에서 분노를 풀 용기조차 없는 자들은? 아내와 자녀에게 푼다. 한국 사회에 가정 폭력과 아동 학대가 넘쳐나는 이유 중 하나다. 학대받은 아이들은 다시 학교에서 분노를 배설한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폭력에 면죄부를 주자는 게 아니다. 폭력의 배경에 무엇이 있는지 보자는 것이다.

그가 철없는 악인, 마스오를 보고 느낀 것은 서글픔이다. 서글픔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게 됐을 때 가지는 감정이다. 한국 사회에도 어쩔 수 없는 현실 앞에서 서글픔을 안고 사는 이들이 얼마나 많을까. 그 서글픔을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으로 바꿀 순 없을까. 악을 아래로, 아래로 내려 보내는 시스템을 어떻게 심판대에 세울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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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는 고전문학 전공자였는데, 고전문학 속 영웅들이 대다수고아인 것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았다. 고아들만이 진정으로 용감해질 수 있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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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다. 다 괜찮다. 인간은 악(惡)에 패배할 수 있지만 영혼까지 내주진 않는다. 악이 인간을 현혹해 죽일 수는 있어도 마음까지 빼앗아가지 못한다. 악이 이긴 것처럼 보이지만 악이 가질 수 있는 건 인간의 거죽뿐이다. 악마가 카메라에 담을 수 있는 건 오직 죽은 자의 데스마스크뿐이다. 한없이 약한 인간도 악마가 갖지 못한 힘을 가지고 있다. 그 힘은 가족, 친구, 사람에 대한 마음이다. 오롯이 인간으로서 살고자 하는 마음이다. 악에 무릎 꿇지도, 용서하지도 않겠다는 마음이다. 그리하여, 인간이란 한계는 오히려 구원이 된다.

나를 성폭행한 소년들을 절대 용서하지 않을 것이며 이 사실은 1000퍼센트 확신하는데 용서가 나를 구원해주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 《헝거》, 337쪽.

‘가해자를 용서해야 한다’는 낡아빠진 이데올로기 앞에 굴복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의 결연함에 고개가 숙여진다. 피해자에게 "합의하고 잊어버리라"고 종용하고, 가해자에게 "반성하면 용서받을 수 있다"고 말하는 사회는 누구의 편인가. 이런 사회에서 살아가는 피해자는 얼마나 불행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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