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너를 위한다’는 속삭임을 의심해볼 필요가 있다. 혹시 자식을 위한 게 아니라 부모 자신의 비교 우위를 남에게 인정받기 위한 것은 아닐까. 후배 직원을 위해서가 아니라 부장이나 이사 자신이 얼마나 잘났는지 보여주기 위한 것은 아닐까.
"너 하나만을 위해 모든 걸 바쳤다"는 부모 밑에서 자란 자식들은 커서도 정신적 탯줄을 끊어내지 못한다. 영원히 철들지 않는 마마 보이, 파파 걸로 평생을 살아간다. "미안해. 당신, 엄마 만들어서. 당신도 여자 하고 싶었을 텐데…."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의 노규태(오정세)가 아내에게 혀 짧은 발음으로 한 말이다. 연인이나 배우자에게서 엄마 아빠를 찾는 게 노규태뿐일까.
‘너를 위해’ 이데올로기는 위험하다. 진심으로 ‘너를 위한 것’일지라도 자칫 너에게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는 의미로 변질되기 쉽다. 자식에 대한 관심이 집착과 학대로, 사랑이 스토킹으로 변하는 건 순간이다. 너를 위한다는 마음으로 얼마든지 무례해지고 잔인해질 수 있는 게 인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