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춘추 전국 시대에 제자백가가 등장했을까? - 순자 vs 맹자 역사공화국 세계사법정 4
신동준 지음, 이남고 그림 / 자음과모음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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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중딩이가 역사공화국 법정시리즈에 푹 빠져 지낸지도 벌써 8주가 흘렀다.

중학교 역사 교과서에서 처음 배울 세계사를 좀 더 깊이있게 이해할 만한 책으로 선택 했었는데

역시 탁월한 선택이었음을 느끼게 해주었다.

이번 주에 재미나게 읽었던 건 제자백가 사상으로 본 중국의 역사와 문명 이야기

역사공화국 세계사법정 04 왜 춘추 전국 시대에 재자백가가 등장했을까?

본문을 읽기에 앞서 늘 그래 왔듯이 교과서엔 어떻게 연계되어 있는지 먼저 살펴보았다.

중학교 역사 교과서에선 중국의 통일 제국, 춘추 전국 시대, 공자의 사상을

고등학교 세계사 교과서에선 중국 문명의 성립, 춘추 전국 시대와 제자백가에 대해

좀 더 깊게 배우게 되는구나.

이번 법정 공방은 공자의 사상을 이어받는 진짜가 누구인지를 놓고 벌어지는 순자와 맹자의 대결이니만큼

세계사 연표에선 공자 탄생이 눈에 가장 먼저 들어왔다.

세계 4대 성인으로 보는 석가가 먼저 그 다음이 공자 순이네.

제자백가 사상가들의 탄생 순으로 본다면 공자 다음으로 묵자, 맹자, 장자, 순자, 한비자 이렇게.

춘추 전국 시대를 대표하는 두 사상가인 순자와 맹자가 각각 원고와 피고로 재판정에 서게 되었다.

소송을 건 원고는 순자로 맹자가 공자 사상의 후계자로 알려진 후 이단으로 몰려 억울함을 풀자 했고

피고 맹자는 공자의 사상을 이어받아 군왕의 덕치 실현을 주장하며 자신이 유가의 수호자가 했으니

과연 이번 공방 판결이 어떻게 날지 사뭇 궁금해졌다.

이번 공방에서 미리 알아두면 좋을 제자백가의 등장 배경을 살펴보았다.

중국의 춘추 정국 시대에서 큰 변혁이 있으면서 사상이 크게 발달 했는데

이때 많은 사상가와 학파가 등장하고 이를 '제자백가'라 불렀다고 한다.

그렇다면 '제자백가'가 무슨 뜻?

'제자'란 여러 학자를 '백가'란 수많은 학파를 의미한다.

역사가 사마천은 이 제자백가를 크게 음양가, 유가, 묵가, 명가, 법가, 도가, 이렇게 6가로 분류하고

이 중 유가가 공자를 시조로 '인(仁)'의 도덕을 최고 이념으로 하는 사상인 것이다.

역사공화국 시리즈를 몇 주 동안 열심히 읽다보니

이제 재판에 필요한 서류인 소장을 보는 눈도 제법 커졌다.

역사공화국 세계사법정 04

왜 춘추 전국 시대에 재자백가가 등장했을까?

중국의 역사는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제자백가는 어떻게 등장하게 되었을까?

누가 유가의 정통성을 이어받은 걸까?

중국의 역사하면 역시 세계 4대 문명을 먼저 떠올리게 된다.

세계사 공부의 맨 처음은 세계 4대 문명이니까 어떻게든 꼭 기억하기!

우리 중딩이는 이제 4대 문명쯤은 기본이란다.

중국 문명은 황허 강 중하류의 황토 지대를 중심으로 초기 국가의 형태가 나타났다고 교과서에선 말한다.

당시 청동기를 사용해 청동기 문화를 바탕으로 문명이 시작된 거구나.



중국 역사를 배우면 또 기억해야 할 것은 갑골 문자로

이 갑골 문자의 발견으로 은 왕조가 실재했다는 것이 사실로 드러났으니 매우 중요하다고 하겠다.

춘추 전국 시대를 말하기 전에 은 왕조에 이어 주 왕조에 대해서도 알아두자.

봉건제가 유명했던 주 왕조가 쇠퇴하고 제후들이 세력을 얻으며 춘추 전국 시대가 열리게 된 것이니까.

원고 순자가는 피고 맹자가 묵자의 사상을 가져다가 이용해 놓고

공자의 후계자라 함을 볼 수 없어 소송을 건게 이번 법정 공방의 핵심인 바.

그렇다면 공자의 사상은 무엇일까?

공자하면 학창시절 배웠던 성선설, 성악설이 먼저 떠오르는데

이번 법정 공방에서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은

공자는 인간을 원래부터 선하거나 악하다고 나누지 않았다고 한다.

게다가 맹자의 성선설과 반대되며 순자가 주장했다는 성악설은 사람들이 잘못 해석한 것으로

사실 순자는 공자의 사상을 이어 예를 중시했을 뿐이란다.

춘추 천국 시대에 활약한 제자백가 사상들을 나열해 놓은 연표를 보면

묵자가 유가를 비판하여 묵가를 세웠다.

이후 맹자는 공자의 후계자라고 자처하며 묵가를 공격했지만

맹자의 주장은 유가보다 묵가 쪽에 가깝다는 게 원고 순자의 주장이었다.


<열려라, 지식 창고>엔 앞서 잠깐 나와던 세계 4대 문명을 정리해 놓았다.

발생 순서로 보자면 메소포타미아 문명, 이집트 문명, 인도 문명, 중국 문명 순이다.

발생 순서와 함께 각 문명이 발생지 또한 알아두는 게 좋겠지.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

이집트 문명은 나일 강

인도 문명은 인더스 강

중국 문명은 황허 강

춘추 전국 시대의 큰 변화 속에 제자백가는 어떻게 등장한 걸까.

제자백가는 공자의 군자학에서 비롯되었다는 유가가 점점 변질되어 비판하면서 등장하게 되었다.

특히 묵가를 주장한 묵자는 유가에서 가르치는 번거로운 예의 절차가 가난한 백성들을

더욱 어렵게 만든다고 여기며 반대 입장을 내세웠다.

그간 춘추 전국 시대와 제자백가, 공자와 맹자, 성선설과 성악설 등은 들어봤지만

묵가가 주장하는 겸애는 또 생소했다.

이웃과 주변을 두루 살아하는 겸애.

나와 남을 구별해 사랑하는 별애.

이 두 가지가 비교하기 쉽게 만화로 설명해 놓았다.

진정한 박애를 두고 겸애와 별애는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다면 유학은 현실에 맞지 않는 학문인 걸까.

유학은 현실에 맞지 않는 학문이라며 유가를 비판한 인물로는 한비자가 있다.

원래 순자의 제자였던 한비자는

어지러운 시기에 스승인 순자의 예치로는 부국강병이 어렵다 여겨 강력한 법치가 필요했다.

아무리 좋은 사상도 시대에 따라 맞지 않을 수 있으며

기존의 사상이 시대에 맞게 새롭게 고쳐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동양이든 서양이든 마찬가지로

영국의 로크나 프랑스의 루소도 시대에 맞는 사상을 찾아

정치에 반영하면서 나아가 나라 전체에 영향을 주었구나.

역사공화국 시리즈에선 재판 셋째 날에 늘 주목한다.

앞선 내용에서 내내 궁금했던 질문의 답을 마지막 재판에서 찾을 수 있으니까.

제자백가는 정말 유가와 다른 주장을 했는지 묵자, 열자, 한비자가 차례로 증인으로 나왔다.

교과서에는 공자가 덕치주의를 기반으로

예절을 가르치면 국민은 부끄러움을 알게 되어 올바로 행동하게 되된다고 주장했다.

공자의 덕치를 두고 실현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과연 무엇일까?

맹자의 말처럼 '의'?

아니면 순자의 말처럼 '예'?

우리 중딩이는 공자의 말엔 맹자의 '의'와 순자의 '예' 모두가 포함되어 있는 것 같은데

굳이 그걸 가르고 따지는 건 무의미하게 느껴진다고 했다.

맹자가 공자의 학문과 사상을 왜곡했다는 순자.

자신은 세상의 평화를 위해 의를 중시한 왕도가 필요했다는 맹자.

판결을 내리기 앞서 이렇게 원고와 피고의 최후 진술까지 모두 들어보았다.

<열려가 지식 창고>에서 마지막으로 알려주는 중국의 역사 한 페이지.

중국의 반제국.반봉건주의 혁명 운동인 5.4운동은

중국 공산주의 운동의 출발점인과 동시에 중국 현대사의 개막으로 평가받고 있은 바

세계사를 배우면 알아둬야 할 중요한 중국 역사인데

이 운동이 우리나라의 독립운동인 3.1 운동에서 큰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또 마오쩌둥에 의해 주도된 사회주의 운동인 문화 대혁명은

부르주아 세력 타파와 자본주의 타도를 외쳤는데 이것은 중국의 발전을 지연시켰다고 평가받았다.

이번 '유가의 정통성 확인의 소'에 관한 소송 사건 기각되었다.

맹자가 주장한 것은 공자의 본래 취지와는 다르다는 원고의 주장은 인정하나

고의적으로 공자의 학문과 사상을 왜곡했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이다.

비록 원고의 청구는 기각되었지만 원고의 마음이 충분히 이해되며

학문이란 게 기존의 이념과 가치에 따라 바뀌며

또 훗날 재평가 받을 수 있으니 너무 상심하지 않길 바란다며 결론을 내렸다.

순자와 맹자 두 사람의 사상이 앞으로도 인류 평화에 기여할테니...

춘추 전국 시대는 하나로 통일 되지 못하고 어지러운 시국이었지만

수많은 학파와 학자들이 자유롭게 자신의 사상과 학문을 펴칠 수 있던 시대였다.

지금 세계사를 배우는 우리 머리는 여러 사상을 파악하느라 조금 아파졌지만

후대에 미치는 그 영향력을 생각하면 충분히 이해해야겠지.

세계사법정을 통해 알게 된 사실들을 관련 논술 문제로 풀면서 한번 더 다지며 마무리했다.

제자백가에 나오는 유가, 도가, 법가 사상은 역사에 관심있넌 나조차 참 아리쏭했던 부분이었는데

역사공화국 시리즈 덕에 우리 중딩이는 나보다 더 해박한 지식을 자랑하게 됐네.

역사 속에서 영원한 승자도 영원한 패자도 없다는 것을 다시금 깨달았다며

역사는 정말이지 알면 알수록 새로운 사실을 일깨워 주는 것 같단다.

우리집 책장 비중에 가장 많이 차지하는 것 또한 역사책.

녀석이 좋아하는 역사책 컬렉션에 또 한자리 당당하게 차지하고 있는 역사공화국 시리즈

오래오래 함께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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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백제의 칠지도가 일본에 있을까? - 백제인 vs 야마토 역사공화국 한국사법정 5
이희진 지음, 박종호 그림 / 자음과모음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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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역사 사건을 놓고 법정이라는 공간에서 역사 속 인물들이 원고와 피고로 나뉘어

논리적으로 따지며 자신의 주장을 펼치는 역사공화국 시리즈.

그간 주입식 역사공부를 해왔다면 이제는 주체적으로 역사를 바라보고 생각할 때이다.

특히나 이번에 읽은 역사공화국 한국사법정 05 왜 백제의 칠지도가 일본에 있을까?를 통해

왜곡하지 않는 올바른 역사공부가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되었다.

삼국시대에서 관심도가 가장 떨어졌던 백제는 사실 제대로 알려지지 않는 나라여서 일 것이다.

우리는 왜 고구려나 신라에 비해 백제의 역사가 생소할까.

이런 인식을 거슬러 올라가보니 그 끝엔 일제 강점기의 일본이 있구나.

그렇다면 일본은 왜 우리의 역사를 왜곡하는데 주력했을까.

그것은 '칠지도' 라는 일본의 국보에서 시작되었다 볼 수 있다.

문득 몇 년 전 국립부여박물관에서 본 칠지도의 모습이 떠올랐다.

역사공부에 있어 나라마다 전성기때를 기억해야 한다고 배웠다.

백제의 전성기는 언제?

4세기 후반 근초고왕 때가 백제의 전성기였다.

중학교 역사 교과서에서도 <삼국의 성립과 발전>에서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에는 <우리 역사의 형성과 고대 국가>에서 다뤄지고 있다.

한국사/세계사 연표는 기원전부터 기원후까지 정리 요약해 놓았다.

백제 근초고왕 즉위를 본다면 기원후 346년이다.

그리고 372년 백제가 일본에 칠지도를 전달한 것으로 되어 있다.

백제의 전성기때 일본에게 전달한 칠지도는 과연 하사 한 걸까? 바친 걸까?

4세기 백제와 동아시아의 정세는 <미리 알아두기> 코너에서 한번 훑고 갔다.

나라는 다소 늦게 세워졌지만 빠른 성장의 배경과

최고 전성기때의 주변 국가와의 외교 상황을 배경지식으로 알려주었다.

역사공화국 한국사법정 02

왜 백제의 칠지도가 일본에 있을까?

재판 첫째 날 - 백제는 일본에 칠지도를 바쳤을까? 아니면 내려 주었을까?

재판 둘째 날 - 백제는 어떤 나라였을까?

재판 셋째 날 - 백제는 정말 강한 나라가 아니었을까?

이번 법정에서는 원고 백제인이 칠지도에 대한 억지 주장과 백제의 역사를 왜곡한

피고 야마토를 명예 훼손으로 소장을 제출했다.

일본 이소노카미 신궁에서 발견된 칠지도는

4세기 후반에 백제에서 만들어 일본에 보낸 칼로

당시 백제와 왜의 활발한 교류를 보여주는 유물이라 하겠다.

4세기 후반 근초고왕 때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하며 전성기를 누린 백제가

이렇다 할 역사적인 기록이 남아있지 않는 탓에

피고는 유일하게 남아있는 일본의 역사서 일본서기를 근거로 칠지도에 적힌 글을

자신들에게 유리한 쪽으로 해석해서 주장하는 상황이 좀 어이가 없었다.


宜供供候王(의공공후왕)

후왕에게 줄 만하다

후왕에게 바칠 만하다

또한 <열려라, 지식 창고>에서는 이 문제의 칠지도에 대해

흥미로운 또다른 사실을 알려주었다.

일본서기의 칠지도 기록과 이소노카미 신궁에서 발견된 칠지도를

서로 다른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고 했다.

이소노카미 신궁의 칠지도가 5세기 후반에 제작된 것이면

일본서기의 칠지도가 372년에 일본에게 주었다는 통설에 비교해 볼 때 다른 게 아닐까?

피고측이 증거로 제출한 일본의 가장 오래된 역사책 '일본서기'를 편찬할 때 참고 했다던

백제의 역사서 '백제기', '백제신찬', '백제본기'가

일본서기처럼 현재까지 전해져 왔다면 아마 이런 재판 자체가 열리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일본서기에 기록된 내용들은 역사적 사실보단 천황의 신격을 위한 왜곡과 과장된 것이 있다니

그렇다면 어찌 칠지도에 대한 기록을 온전한 증거로 믿을 수 있겠는가.

게다가 백제가 한강 유역을 차지하고 역사상 최고의 전성기 때

피고측 주장처럼 일본의 신하가 되겠다 자처를 했다는 것은 역사의 흐름을 잘 몰라도

앞 뒤가 맞지 않는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 것이다.

일본의 신석기 문화를 보면 빗살무늬 토기가 대표 유물이라고 하는데

그 모양이 우리나라와 매우 유사하다.

3세기에 세워진 야마토 정권은 한반도에서 선진 문물을 들여 문화를 발전시켰다.

또한 6세기 중엽 이후 백제로부터 불교를 도입하는 등 삼국의 문화를 받아들이면서

아스카 문화를 꽃피웠다고 한다.

일본의 고대 역사만 봐도 백제가 일본보다 우위에 있었을 거라는 게 어렵지 않게 짐작되는데

칠지도를 진상했다는 일본의 억측에 점점 화가 났다.

이번 역사공화국 한국사법정을 읽을수록

우리가 더욱 백제가 어떤 나라였다는 것을 자세히 알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광활한 영토를 확장했던 고구려나 삼국을 통일한 신라에 비해

백제에 대해선 남아있는 자료나 우리의 관심도가 많이 부족한 것 같다.

백제는 힘을 키우기 위해 정세를 파악한 후 국제 관계를 적극 이용하였다.

신라의 압박에 시달리는 가야와 왜를 끌여들여 백제는 동맹을 만들었다.

신라의 힘이 커지면 교역이 까다로워져 곤란해지는 것은 일본이기에 당연히 백제와 손을 잡는게 좋을 터.

백제가 가야와 왜를 보호하고 어려운 문제를 해결해 주는 대신

두 나라는 백제에게 협조한다는 조건이었다.

재판 셋째 날

백제는 정말 강한 나라가 아니었을까?

읽는 내내 백제의 진짜 모습을 몰랐던 이유가 뭘까 생각했었는데

그 이유는 재판 마지막 날을 통해 알 수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현재 전해지는 가장 오래된 '삼국사기'는 신라가 남긴 기록을 보고 정리한 역사책이다.

당시 고려에는 백제와 고구려의 기록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아 신라의 기록을 참고했다는 게

삼국사기를 편찬한 김부식의 증언이었다.

백제의 입장을 우리 역사책에서 조차 제대로 담지 못했으니 더 말해 무엇하랴.

흔히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는 말이 이번 법정에서 느낄 수 있는 가장 큰 오류인 것 같다.

중국이나 일본에서 역사를 왜곡하고 있는 건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하지만 한반도에는 과학으로 측정해서 증명하고 있는 유물이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백제의 풍납 토성이다.

풍납 토성은 기원전 2세기 ~ 기원후 2세기에 만들어진 것인 판명되었는데

이것만 봐도 중국이나 일본 역사서에 적혀진 백제의 모습은 억측에 불과한 것이다.

명백히 독도가 우리나라 땅이라고 역사적 자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다케시마라고 계속 우기는 것처럼.

역사를 바로 알고자 한다면 우리의 역사 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의 역사에도 관심을 갖고 면밀히 살펴봐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또한 역사는 주체적으로 바라보고 생각하며 지속적인 관심으로 계속 연구해야 하는 학문임을 느꼈다.

남아있는 역사의 기록이 부족하더라고

당시 과거의 삶을 알게 해주는 여러 유물을 우리에게 있으니까.

백제의 숨결을 느낄 수 있다는 청주백제유물전시관에 꼭 한번 가서 백제의 흔적을 찾아봐야겠다.

이번만큼은 정말 읽으면 읽을수록 이해할 수 없는 억측과 왜곡이라며 우리 중딩이는 분통을 터트렸다.

다행히 역사공화국 시리즈 <판결문>에서 속시원한 판결을 내려주었다.

백제는 왜의 눈치나 보며 살았던 허약한 나라가 결코 아니다.

일본서기의 허구적인 내용을 바탕으로 칠지도를 일본측에 유리하게 해석한 것은 잘못 된 것이다.

역사가에 따라 천양지차로 달리 해석되고 있는 백제의 역사는

앞으로도 계속 연구가 꼭 필요하겠다.

또 한번 올바른 역사공부의 중요성을 깨닫게 해준 역사공화국 시리즈.

초등한국사로 시작했지만 중,고등학생도 꼭 읽어봄직한 역사전집으로 강추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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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연개소문은 영류왕을 배반했을까? - 영류왕 vs 연개소문 역사공화국 한국사법정 9
함규진 지음 / 자음과모음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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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역사지만 읽으면서 새롭게 배우는 게 있다고 우리 중딩이가 손에서 놓치 않고 있는

역사전집 역사공화국 법정시리즈.

역사공화국을 읽을수록 역사 속 승자와 패자 양측의 입장을 모두 들어봐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면서

이번 주엔 영류왕 VS 연개소문의 열띤 법정 이야기를 선택했다.

고구려 인물 중에서 우리에겐 영류왕보다 연개소문이 좀 더 익숙한데

영류왕은 왜 연개소문을 법정에 세웠을까?

역사공화국 한국사법정 09

왜 연개소문은 영류왕을 배반했을까?

연개소문은 왜 정변을 일으켰을까?

연개소문은 고구려를 강하게 만들었을까?

왜 고구려가 삼국을 통일하지 못했을까?

차례에서 3일에 걸친 재판 속 소송 내용을 살펴보았다.

우리 중딩이가 본문을 읽기에 앞서 차례를 꼭 훑어보는 이유는

무슨 내용으로 양 측의 변론이 오고 갈지 생각하면서 읽으면 재판 내용이 더 흥미롭게 느껴진다고 했다.

중등 교과정에선 2학년엔 세계사를 3학년때 역사를 배우는 걸로 알고 있다.

백제의 멸망 이후, 고구려는 신라와 당의 공격으로 국력이 약해지면서

연개소문이 죽자 결국 멸망하게 된다.

끝까지 살아남는 자가 최후의 승자라고 했던가.

백제, 고구려가 차례로 멸망한 후 남은 신라가 삼국 통일을 이룬 셈이다.

역사공부에 있어 연표는 중요하다.

한국사 vs 세계사

나란히 놓고 비교해볼 수 있어 좋다.

이를테면 한국사 654년 고구려가 말갈과 손을 잡고 거란을 공격 했을 비슷한 시기

세계사 655년엔 측천무후가 황후에 오르는 기록이 있다.

원고 영류왕은 고구려의 27대 왕으로

연개소문에게 죽임을 당해 그 억울함과 진실을 알리고자 소송을 걸었다.

그렇다면 피고 연개소문은

을지문덕, 양만춘과 함께 우리에겐 고구려 영웅으로 이름이 알려진 인물인데

영류왕을 죽였다는 건 반박할 수 없는 사실이라 놀라웠다.

역사공화국 시리즈는 본격적인 공방에 앞서

<미리 알아두기>를 통해 당시 주변 정세와 그 배경을 파악해 볼 수 있었다.

수나라의 뒤를 이은 당나라는 한창 세력을 키우고 있을 때라

전쟁을 피해야 한다는 영류왕와의 입장과

맞서 싸워야야 한다는 연개소문의 입장이 서로 부딪쳤다.

역사 속 결과 기록으로 볼 때 영류왕은 신하인 연개소문에게 죽임을 당하고

연개소문은 왕을 살해하고 정변을 일으켜 권력을 장악한 이가 되었다.

고구려 장군이자 국사를 담당하는 최고의 관직 대대로 집안 출신인 연개소문.

연개소문이 왕의 다음으로 높은 자리인 대대로가 되는 건 자연스러운 수순이었으나

영류왕의 반대로 쉽지 않았다고 한다.

이것을 가지고 원고측에선 연개소문의 인격에 대해 논하였는데

사실 연개소문에 대한 역사적인 평가가 극과 극으로 갈린 이유는

후대 역사가들의 평가 때문이었다.

증인으로 나온 김부식과 신채호의 증언은 완전 달랐다.

'삼국사기'를 편찬한 김부식은 연개소문을 역적이라 했으나

'조선상고사'를 쓴 독립운동가 신채호는 다시 없을 영웅으로 보았다.

고구려 하면 광개토 대왕때의 광활한 영토 확장을 손꼽을 수 있는데

다음 왕인 장수왕은 도읍을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옮겼던 까닭은 무엇일까?

평양은 국내성보다 지대가 풍요롭고 교통이 좋았던 것과

백제와 신라에 대한 대비의 목적도 있었구나.

만약에 일찍부터 삼국이 힘을 합쳤다면 굳이 평양으로 천도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고

고구려의 영토가 한반도로 후퇴하는 결과도 낳지 않았을지도 모를 일.

고구려의 너른 영토가 사라진 것에 대해 늘 안타까워 했던 우리 중딩이는

<열려라 지식창고>를 읽으면서 또 한번 탄식했다.

그렇다면 영류왕의 입장은?

당나라에 의해 돌궐이 멸망하자 고구려 혼자 힘으로 상대하는 것은 역부족으로 판단한 것이다.

나라를 다스리는 영류왕이 볼 땐 일단 전쟁을 피하고 힘을 기르는 게 우선이라 생각했기에

어쩔 수 없이 당나라와 친하게 지낼 수 밖에 없음이 어느 정도 이해가 됐다.

연개소문이 영류왕을 죽이고 정권을 장악한 이후의 정세는

고구려 연표를 보며 알 수 있었다.

다른 건 모르겠고 적국이라 여기며 대적하던 당나라에서 도교를 굳이 들여왔던 건 왜일까?

그것도 고구려는 삼국 중 가장 불교를 받아드린 나라인데 말이다.

원고와 피고 양측의 주장이 펼쳐질수록

그걸 읽는 우리 중딩이의 비판적 사고력도 커지는 게 느껴지는구나.

고구려의 영토는 지금 우리가 마음대로 가볼 수 있는 곳이 아니라 백제, 신라와 달리

유물과 유적에 대해 목마른 게 사실이다.

<역사 유물 돋보기>에선 암문 토기, 호우명 청동합, 사신도를 그림과 함께 설명을 곁들어놓아

유심히 살펴볼 수 있었다.

재판 마지막 셋째 날.

우리 중딩이가 가장 궁금하고 안타깝게 생각하던 질문

왜 고구려가 삼국을 통일하지 못했을까?

고구려의 멸명과 관련해 연개소문이 영웅이이냐 아니냐를 다뤘다.

교과서에선 연개소문이 죽은 후 고구려는 지배층의 권력 쟁탈 싸움으로 국론이 분열되었다고 했다.

그 권력 다툼의 주축이 된 게 연개소문의 아들들이라는 사실.

결국 연개소문이 자식들에게 권력을 물려준 일은 고구려 멸망에 영향을 끼쳤다고 볼 수 있겠다.

이번 법정 공방의 판결.

피고의 경우 쿠데타와 고구려 멸망과 직결된 부적절한 권력 승계에 대한 잘못은 명백하다.

원고의 경우 쿠데타로 인한 피해자는 인정되나 왕으로서 신하를 충분히 설득하지 못한 점 또한 인정된다.

영류왕과 연개소문이 서로 이해하지 않는 것이

고구려의 비극이라는 사실.

어려울 때일수록 힘을 모아야 하는데

영류왕과 연개소문은 서로 의심하며 해치려고 했기에

위대하고 찬란했던 고구려는 결국 역사에서 사라지게 된 것이다.

고구려의 유물을 보러 국립중앙박물관은 언제쯤 가볼 수 있을까.

역사를 배운다면 꼭 가봐야 할 곳이기에 언젠가는 우리도 가보리라.

역사공화국 한국사법정 09

왜 연개소문은 영류왕을 배반했을까?

우리 중딩이는 흥미롭게 읽었던 이번 재판에서

가장 궁금했고 깨달음이 컸던 질문들을 추려 노트에 정리해보는 시간을 가졌다.

역사공화국 법정시리즈는 읽으면 읽을수록

역사공부의 자세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볼 수 있게끔 해주는 고마운 책인 것 같다.

일방적인 승자의 기록이 아닌

주체적이고 열린 사고로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이 꼭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게 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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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일 끝 중간고사 기말고사 중학 역사① (2024년용) - 7일 끝으로 끝내자! 중등 7일 끝 (2024년)
천재교육 편집부 지음 / 천재교육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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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학년제를 만끽하고 있는 우리집 자유로운 영혼 중딩이도 이제 그 자유는 이번 학기로 끝!

중학교 2학년이 되면 현타를 맞을 지필고사 결과가 사뭇 궁금한데...

중학내신을 위해 어쩔 수 없는 관문인 중간고사 기말고사를 7일로 끝낼 수 있는 문제집을 만났다.

시간은 없고 공부할 것은 많은데 7일동안 하루 8쪽 학습으로

중학 사회 내신 평가 대비를 할 수 있다니 상당히 매력적이지 아니한가.

아직은 중1이지만 방대한 역사를 미리 훑어보자 했더니 역사에 관심이 많은 녀석도 흥쾌히 응했다.

7일 끝 중간고사 기말고사 중학 역사 1

BOOK 1

1일 세계의 선사 문화와 고대 문명

2일 고대 제국들의 특성과 주변 세계의 성장

3일 인도, 동아시아, 이슬람 문화의 형성과 확산

4일 크리스트교 문화의 확산, 송과 몽골 제국

5일 동아시아, 서아시아, 북아프리카, 유럽 지역 질서의 변화

6일 누구나 100점 테스트 1~2회, 서술형·사고력 테스트/창의·융합·코딩 테스트

7일 학교 시험 기본 테스트 1~2회

BOOK 2

1일 유럽과 아메리카의 국민 국가 체제

2일 유럽의 산업화와 제국주의, 서아시아와 인도의 국민 국가 건설 운동

3일 동아시아의 국민 국가 건설 운동

4일 세계 대전과 사회 변동

5일 현대 세계의 전개와 과제

6일 누구나 100점 테스트 1~2회, 서술형·사고력 테스트/창의·융합·코딩 테스트

7일 학교 시험 기본 테스트 1~2회

두 권으로 분권이 가능하여 중간고사때 1권 기말고사때 2권으로

시험기간때 편하게 나눠 공부할 수 있겠다.

공부할 내용을 만화로 살펴보는 <생각열기>

만화로 꼭 알아할 핵심을 훑어보고 퀴즈를 풀어보는 워밍업 단계로

공부할 내용을 염두하면서 살펴보는 게 좋겠지.

본격적으로 공부는 교과 핵심 정리부터.

핵심 내용을 살펴보면서 빈칸 문제 채우기는 교과서 핵심 내용을 다시 한번 체크하는데 좋다.

역사공부는 핵심 정리가 잘 되어 있어야만 방대한 양도 잘 소화할 수 있는 법이니까.

자나께나 핵심 정리, 핵심 정리가 답인 것 같다.

핵심 정리를 바탕으로 관려된 기초 확인 문제를 풀면서 공부한 내용을 테스트 해본다.

교과서 핵심 정리 1페이지, 기초 확인 문제 1페이지이며

그렇게 총 핵심 정리 2페이지, 확인 문제 2페이지가 1일치 학습 구성 분량이다.

다음은 내신 기출 베스트로 다양한 유형 문제를 풀어보기.

대표 예제를 푼 다음 바로 아래 개념 가이드에서 한번 더 꼭 알아야 할 용어나 개념을 익힌다.

대표 문제를 풀때 잘 모를 경우엔 여기서 문제 해결의 힌트를 얻을 수 있다.

5일차 공부를 끝낸 다음엔 6일차에선 앞서 공부한 내용이 잘 이해 되었는지

누구나 100점 테스트와 서술형.사고력 테스트로 총괄 점검이 가능하다.

객관식 문제는 누구나 100점 테스트로,

서술형 문제는 집중적으로 풀어볼 수 있는 서술형.사고력 테스트로

문제 적응력을 높여보기 딱 좋겠끔 되어 있다.





더욱 참신하고 다양한 자료들을 활용한 문제로 이루어져 사고력을키워주는

창의.융합.코딩 테스트까지.

중학 내신을 넘어서 고등 내신과 수능까지 멀리 내다볼 수 있는 문제들이다.

학교 시험 대비 마지막은 시험 문제에 가까운 예상 문제들을 풀어보는 거겠지?!

학교 시험 기본 테스트 1회, 2회로 실전 마무리까지 끝.

7일 끝 중간고사 기말고사 중학 역사 1

책 속 특별부록으로 각 권마다

핵심용어풀이, 핵심총집합이 함께 있다.

28개의 개념어와 핵심 어휘를 잘 익혀둔다면

교과 속 용어가 더 이상 어렵게 느껴지지 않겠지.

역사공부의 질적 향상에도 큰 도움이 된다.

특히 절취선이 있어 핵심 정리 카드 모음으로

잘 만들어 시험기간 동안 짜투리 시간도

헛투로 쓰지 않게 해주는 핫 아이템이 되겠다.


우리 중딩이는 내년부터 교과목으로 역사를 배울 예정.

초등때부터 한국사는 믿고 있는 터라 크게 걱정하지 않지만

아무래도 세계사는 한국사와 또 달라 앞으로 조금씩 해야되지 않을까 했었다.

그래도 그동안 꾸준히 세계사 책들을 읽으며 세계사에 대한 기본 지식은 어느 정도 갖추고 있고

문제를 대하는 녀석의 태도를 보니 생각보다 어렵지 않게 잘 풀어냈다.

시작의 첫 단추를 잘 꿰었는지 오답없이 수월하게 풀어나가며

우리 중딩이는 7일 끝 중간고사 기말고사 중학 역사 한국사편인 다음 2권도 미리 찜해두었다.

시험기간 알찬 7일을 보낼 수 있게 해 줄

7일 끝 중간고사 기말고사 중학 역사 1

이렇게 미리 만나보니 중학내신 핵심이 될 중간/기말고사에 대한 불안감을

아주 살짝은 덜어낼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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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가야는 하나로 통일되지 못했을까? - 월광 태자 vs 진흥왕 역사공화국 한국사법정 4
조원영 지음, 이주한 그림 / 자음과모음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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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소가야의 땅에 살고 있는 우리 중딩이가

삼국에서 제일 비중이 적은 가야를 안타까워하며 꺼내든

역사공화국 한국사법정 04

왜 가야는 하나로 통일되지 못했을까?

본인 역시 가야 역사에서 제일 궁금했던 부분이라 말했다.

약소국의 설움으로 고구려, 백제, 신라에 비해

고대국가 중 하나인 가야가 제대로 조명받지 못한 것 같아 매우 슬프다면서.

역시 지역사랑이 남다른 우리 중딩이다.

가야와 신라 중 어느 나라가 더 강한 나라였을까?

광개토 대왕은 왜 신라를 도와 가야를 공격했을까?

가야는 어떻게 신라에게 멸망했을까?

역사공화국 한국사법정은

총 3일에 걸쳐 열띤 법정 공방이 오고간다.

이번 법정에선 어떤 질문과 그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는지

차례를 훑어보며 미리 가늠해 보았다.

중학교에선 역사 시간에 삼국의 성립과 발전으로

고등학교에선 한국사 시간에 우리 역사의 형성과 고대 국가로 배우게 된다.

우리 중딩이는 삼국시대 이전이 살짝 취약하던데

이번 법정 공방으로 가야와 신라 그리고 고대 국가의 성장에 대해 잘 알아두면 좋겠네.

한국사 연표로 살펴보는 가야의 흥망성쇠.

가야를 배울때 수로왕이 시조인 건 익히 아는 바.

가락국과 가라국, 이름이 비슷하지만 엄연히 다른 가야국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가라국이 신라에 의해 멸망하면서 우리가 아는 가야는 여기서 끝이 나는 거로구나.

원고 월광 태자 vs 피고 진흥왕

역사를 배우는 친구들에게 두 인물 중에

누굴 더 잘 아느냐 묻는다면 역시

신라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진흥왕이라 대답할 테지.

그건 우리 중딩이도 마찬가지니까.

하지만 역사공화국 한국사법정을 읽으니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인

가라국의 마지막 태자 월광에 대해서

사뭇 궁금해졌다.

가야가 500년 이상이나 존재했던 국가였다는 것도

신라에게 멸망되기 전 삼국의 다른 나라와 어깨를 나란히 한 적도 있었다는 사실도 미처 몰랐다.

그만큼 가야사는 많이 알려지지도 않았고 왜곡되고 축소된 것이다.

그래서 재판 첫째 날 타이틀이 더 흥미를 끌었다.

가야 vs 신라

신라에 비해 약소국이라고만 생각했던 가야 아닌가.

가야가 연맹국이라는 알고 있지만 여섯 개의 연맹 즉 육가야는 틀렸다.

무려 열두 나라 이상이 있었다고 하는데

육가야라는 인식은 삼국유사에서 가라국이 세워진 때를 묘사하는 부분에서 생긴 오해였다.

우리가 익숙한 금관가야, 대가야, 아라가야, 소가야 등의 이름은 신라와 고려 시대에 붙여졌다.

수로왕이 세운 가락국은 금관가야를 말하고 비슷한 이름의 가라국은 대가야를 말하는 것으로

원고 월광 태자는 대가야의 마지막 태자인 것이다.

교과서에서는 신라는 진한의 소국인 하나인 사로국에서 시작되었다고 했다.

그 중 신라 4대 석탈해왕이 수로왕의 가락국을 공격했으나 졌다는 이야기가 <삼국유사>에

신라 5대 파사왕때 가야가 신라를 공격 해서 방어를 했다는 건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는 바

이때는 가야가 신라보다 강했음을 알 수 있었다.

가야가 마냥 힘이 약했던 나라가 아니었구나.

덕분에 가야에 대한 인식이 조금은 달라졌다.

가야하면 무엇이 제일 유명한가 우리 중딩이에게 물었더니 망설임 없이 '철'이라고 했다.

고대 사회에서 철기 문화는 매우 중요한 부분이었는데

가락국은 철기 제작 기술을 발달하여 철제 농기구나 무기 같은 다양한 철제품을 만들 수 있었다.

지금의 김해 지방에는 질 좋은 철이 많이 생산되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또한 지리적인 요건으로 만든 철제품을 중국이나 왜에 수출하는 해상 무역이 발달했다.

그렇다면 가야는 언제부터 신라보다 국가 발전이 뒤쳐지게 된 걸까?

그건 재판 둘째 날 광개토 대왕이 신라의 요청으로 가야를 공격한 이야기를 통해 알 수 있었다.

백제와 고구려과 전면전을 펼칠 때 백제와 우호적인 가야에게 타격을 입혀

백제에게 지원을 해 줄 수 없게 만드는 게 가야를 공격한 진짜 이유였음을 광개토 대왕이 증언했다.

고구려의 공격으로 중심지였던 낙동강 하류 지역이 회복하기 여러운 타격을 받았고

가야는 연맹의 중심 세력이 해체되었다.

비록 삼국에 비해 가야와 관련한 문헌 자료는 부족하지만

가야의 옛 땅 곳곳에서 발굴된 유적과 유물로 가야의 역사를 파악할 수 있으니 다행이네.

우리 동네 박물관에서도 가야가 남긴 상형 토기, 청동 솥, 바퀴 달린 잔, 용봉 무늬 고리자루칼 같은

문화유산을 직접 볼 수 있었다.

재판 마지막 날엔 가야가 어떻게 신라에게 멸망했는지 그 결과에 대해 알아보았다.

가야는 연맹국으로 초기엔 김해 가락국의 세력이 가장 컸으나 가락국이 몰락한 이후엔

고령의 가라국 즉 대가야가 연맹의 중심 세력이 되었다.

연맹 내에서 신라 왕실과 결혼 동맹을 맺은 것을 과시하고팠던 가라국.

하지만 결혼 동맹은 곧 깨져 버렸고 연맹 내의 국가들로부터 많은 비난을 받았다.

가라국을 중심으로 한 가야 후기엔 신라와 백제의 다툼 속에서 연맹은 분열했다.

백제와 연합해서 신라와 싸웠던 관산성 전투에서 치명적인 패배는 결정적인 원인이 되어

결국 가야는 제대로 싸워보지 못하고 신라에게 항복할 수 밖에 없었구나.

가라국의 마지막 태자인 월광 태자는 불교에 귀의하여 승려가 되었다고 알고 있었는데

그가 승려가 된 곳은 비교적 가까운 합천군 가야면에 있는 거덕사라는 사실은 이번에 알았네.

거덕사와 함께 월강 태자가 창건한 월광사도 기회가 된다면 한번 가봐야지.

코로나가 좀 잠잠해지면 가보고 싶은 곳으로 우리는 고령의 대가야박물관을 찜했다.

가야의 500년 역사 마지막을 장식했던 대가야인데 유물과 역사를 한번 직접 둘러보고 싶다니까.

경상북도 고령군으로 가즈아!

요즘은 학교 수업에서도 토론을 통해 비판적 논리적 사고를 키우려고 많이 노력 중이라고 들었다.

거기에 딱 부합하는 역사공화국 법정시리즈.

이제까지 역사를 굵직굵직한 역사적 사실의 단면 위주의 공부였다면

역사공화국을 읽는 동안엔 치열한 논쟁을 통해 몰랐던 역사 속 라이벌들의 입장을

이해해 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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