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백제의 칠지도가 일본에 있을까? - 백제인 vs 야마토 역사공화국 한국사법정 5
이희진 지음, 박종호 그림 / 자음과모음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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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역사 사건을 놓고 법정이라는 공간에서 역사 속 인물들이 원고와 피고로 나뉘어

논리적으로 따지며 자신의 주장을 펼치는 역사공화국 시리즈.

그간 주입식 역사공부를 해왔다면 이제는 주체적으로 역사를 바라보고 생각할 때이다.

특히나 이번에 읽은 역사공화국 한국사법정 05 왜 백제의 칠지도가 일본에 있을까?를 통해

왜곡하지 않는 올바른 역사공부가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되었다.

삼국시대에서 관심도가 가장 떨어졌던 백제는 사실 제대로 알려지지 않는 나라여서 일 것이다.

우리는 왜 고구려나 신라에 비해 백제의 역사가 생소할까.

이런 인식을 거슬러 올라가보니 그 끝엔 일제 강점기의 일본이 있구나.

그렇다면 일본은 왜 우리의 역사를 왜곡하는데 주력했을까.

그것은 '칠지도' 라는 일본의 국보에서 시작되었다 볼 수 있다.

문득 몇 년 전 국립부여박물관에서 본 칠지도의 모습이 떠올랐다.

역사공부에 있어 나라마다 전성기때를 기억해야 한다고 배웠다.

백제의 전성기는 언제?

4세기 후반 근초고왕 때가 백제의 전성기였다.

중학교 역사 교과서에서도 <삼국의 성립과 발전>에서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에는 <우리 역사의 형성과 고대 국가>에서 다뤄지고 있다.

한국사/세계사 연표는 기원전부터 기원후까지 정리 요약해 놓았다.

백제 근초고왕 즉위를 본다면 기원후 346년이다.

그리고 372년 백제가 일본에 칠지도를 전달한 것으로 되어 있다.

백제의 전성기때 일본에게 전달한 칠지도는 과연 하사 한 걸까? 바친 걸까?

4세기 백제와 동아시아의 정세는 <미리 알아두기> 코너에서 한번 훑고 갔다.

나라는 다소 늦게 세워졌지만 빠른 성장의 배경과

최고 전성기때의 주변 국가와의 외교 상황을 배경지식으로 알려주었다.

역사공화국 한국사법정 02

왜 백제의 칠지도가 일본에 있을까?

재판 첫째 날 - 백제는 일본에 칠지도를 바쳤을까? 아니면 내려 주었을까?

재판 둘째 날 - 백제는 어떤 나라였을까?

재판 셋째 날 - 백제는 정말 강한 나라가 아니었을까?

이번 법정에서는 원고 백제인이 칠지도에 대한 억지 주장과 백제의 역사를 왜곡한

피고 야마토를 명예 훼손으로 소장을 제출했다.

일본 이소노카미 신궁에서 발견된 칠지도는

4세기 후반에 백제에서 만들어 일본에 보낸 칼로

당시 백제와 왜의 활발한 교류를 보여주는 유물이라 하겠다.

4세기 후반 근초고왕 때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하며 전성기를 누린 백제가

이렇다 할 역사적인 기록이 남아있지 않는 탓에

피고는 유일하게 남아있는 일본의 역사서 일본서기를 근거로 칠지도에 적힌 글을

자신들에게 유리한 쪽으로 해석해서 주장하는 상황이 좀 어이가 없었다.


宜供供候王(의공공후왕)

후왕에게 줄 만하다

후왕에게 바칠 만하다

또한 <열려라, 지식 창고>에서는 이 문제의 칠지도에 대해

흥미로운 또다른 사실을 알려주었다.

일본서기의 칠지도 기록과 이소노카미 신궁에서 발견된 칠지도를

서로 다른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고 했다.

이소노카미 신궁의 칠지도가 5세기 후반에 제작된 것이면

일본서기의 칠지도가 372년에 일본에게 주었다는 통설에 비교해 볼 때 다른 게 아닐까?

피고측이 증거로 제출한 일본의 가장 오래된 역사책 '일본서기'를 편찬할 때 참고 했다던

백제의 역사서 '백제기', '백제신찬', '백제본기'가

일본서기처럼 현재까지 전해져 왔다면 아마 이런 재판 자체가 열리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일본서기에 기록된 내용들은 역사적 사실보단 천황의 신격을 위한 왜곡과 과장된 것이 있다니

그렇다면 어찌 칠지도에 대한 기록을 온전한 증거로 믿을 수 있겠는가.

게다가 백제가 한강 유역을 차지하고 역사상 최고의 전성기 때

피고측 주장처럼 일본의 신하가 되겠다 자처를 했다는 것은 역사의 흐름을 잘 몰라도

앞 뒤가 맞지 않는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 것이다.

일본의 신석기 문화를 보면 빗살무늬 토기가 대표 유물이라고 하는데

그 모양이 우리나라와 매우 유사하다.

3세기에 세워진 야마토 정권은 한반도에서 선진 문물을 들여 문화를 발전시켰다.

또한 6세기 중엽 이후 백제로부터 불교를 도입하는 등 삼국의 문화를 받아들이면서

아스카 문화를 꽃피웠다고 한다.

일본의 고대 역사만 봐도 백제가 일본보다 우위에 있었을 거라는 게 어렵지 않게 짐작되는데

칠지도를 진상했다는 일본의 억측에 점점 화가 났다.

이번 역사공화국 한국사법정을 읽을수록

우리가 더욱 백제가 어떤 나라였다는 것을 자세히 알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광활한 영토를 확장했던 고구려나 삼국을 통일한 신라에 비해

백제에 대해선 남아있는 자료나 우리의 관심도가 많이 부족한 것 같다.

백제는 힘을 키우기 위해 정세를 파악한 후 국제 관계를 적극 이용하였다.

신라의 압박에 시달리는 가야와 왜를 끌여들여 백제는 동맹을 만들었다.

신라의 힘이 커지면 교역이 까다로워져 곤란해지는 것은 일본이기에 당연히 백제와 손을 잡는게 좋을 터.

백제가 가야와 왜를 보호하고 어려운 문제를 해결해 주는 대신

두 나라는 백제에게 협조한다는 조건이었다.

재판 셋째 날

백제는 정말 강한 나라가 아니었을까?

읽는 내내 백제의 진짜 모습을 몰랐던 이유가 뭘까 생각했었는데

그 이유는 재판 마지막 날을 통해 알 수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현재 전해지는 가장 오래된 '삼국사기'는 신라가 남긴 기록을 보고 정리한 역사책이다.

당시 고려에는 백제와 고구려의 기록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아 신라의 기록을 참고했다는 게

삼국사기를 편찬한 김부식의 증언이었다.

백제의 입장을 우리 역사책에서 조차 제대로 담지 못했으니 더 말해 무엇하랴.

흔히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는 말이 이번 법정에서 느낄 수 있는 가장 큰 오류인 것 같다.

중국이나 일본에서 역사를 왜곡하고 있는 건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하지만 한반도에는 과학으로 측정해서 증명하고 있는 유물이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백제의 풍납 토성이다.

풍납 토성은 기원전 2세기 ~ 기원후 2세기에 만들어진 것인 판명되었는데

이것만 봐도 중국이나 일본 역사서에 적혀진 백제의 모습은 억측에 불과한 것이다.

명백히 독도가 우리나라 땅이라고 역사적 자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다케시마라고 계속 우기는 것처럼.

역사를 바로 알고자 한다면 우리의 역사 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의 역사에도 관심을 갖고 면밀히 살펴봐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또한 역사는 주체적으로 바라보고 생각하며 지속적인 관심으로 계속 연구해야 하는 학문임을 느꼈다.

남아있는 역사의 기록이 부족하더라고

당시 과거의 삶을 알게 해주는 여러 유물을 우리에게 있으니까.

백제의 숨결을 느낄 수 있다는 청주백제유물전시관에 꼭 한번 가서 백제의 흔적을 찾아봐야겠다.

이번만큼은 정말 읽으면 읽을수록 이해할 수 없는 억측과 왜곡이라며 우리 중딩이는 분통을 터트렸다.

다행히 역사공화국 시리즈 <판결문>에서 속시원한 판결을 내려주었다.

백제는 왜의 눈치나 보며 살았던 허약한 나라가 결코 아니다.

일본서기의 허구적인 내용을 바탕으로 칠지도를 일본측에 유리하게 해석한 것은 잘못 된 것이다.

역사가에 따라 천양지차로 달리 해석되고 있는 백제의 역사는

앞으로도 계속 연구가 꼭 필요하겠다.

또 한번 올바른 역사공부의 중요성을 깨닫게 해준 역사공화국 시리즈.

초등한국사로 시작했지만 중,고등학생도 꼭 읽어봄직한 역사전집으로 강추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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