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의 전도사 리처드 파인만 청소년평전 8
태기수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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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의 물리학자 하면 우리는 곧바로 아인슈타인을 떠올린다. 아인슈타인이 20세기 전반기를 주도했다면 후반기 과학사를 이끈 또 한 명의 천재 물리학자가 있었는데 그가 바로 리처드 파인만이라고 한다. 아인슈타인의 명성과 업적을 넘어선 인물로 평가 받은 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만. 그의 일대기를 자음과모음 청소년평전 시리즈에서 처음 만났다.

"명예는 아주 귀찮은 겁니다. 그건 견장이나 제복 같은 거죠. 아버지는 저를 그렇게 길렀습니다. 저는 명에라는 게 못마땅합니다. 그건 제 기분만 망치니까요."


이처럼 노벨상을 받게 되면 따르는 큰 영예와 명성 모두 파인만은 바라지 않았다. 그는 뛰어난 과학자이자 꾸미지 않고 거짓이 없는 솔직함과 자유로운 성품으로 지금까지 학생들로부터 존경받는 교수였다. 과학에 대한 순수한 열정과 열린 사고 방식은 권위를 부정하고 아들이 과학자로 성장하기 원했던 그의 아버지 영향이 매우 컸다. 아버지의 교육철학이 천재 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만을 있게 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만큼... 누구나 영광으로 여길법한 노벨상 수상을 거부하려 했다는 점만 봐도 그는 확실히 남다른 인물이었다. 과학자로서 새로운 것을 발견해 냈을 때 느끼는 기쁨이 최고의 상이자 명예라 생각했던 그야말로 진짜 과학자라고 느껴졌다.


아주 어릴때부터 과학을 배운 파인만은 모든 것이 아버지의 덕분이라고 했다. 태어나기도 전에 아들이면 과학자가 될 거라고 생각하면서 아버지는 정작 아들에게 과학자가 되라고 한번도 말하지 않았다. 아버지의 교육방식은 자상했고 아들을 세심하게 배려했다. 파인만은 과학이 무엇인지 과학적 사고와 관찰력 그리고 인내 등 아버지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다. 이때 배웠던 것들은 파인만이 과학자가 되는데 가장 중요하고 든든한 밑거름이 되어 학자로서의 순수성을 잃지 않음 물론 위대한 업적을 남길 수 있게 해주었다.


유대인이었던 파인만은 유대인 학생 수를 제안하는 인종차별로 원했던 컬럼비아 대학 대신 매사추세츠 공과대학에 입학했다. 대학 시절 오로지 과학에만 흥미가 있었던 탓에 다른 과목은 과학에 비해 잘하지 못했다. 그런 파인만을 잘 알았던 지도교수는 세상의 다른 부분도 봐 둘 필요가 있다며 대학원을 다른 학교로 진학하길 조언해 주었다. 우연히 아인슈타인 앞에서 세미나 발표를 했던 파인만은 자신의 발표에 대해 문제점을 지적 받았지만 새겨듣지 않았다. 아무리 위대한 이론이라도 정확하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을 아인슈타인은 인정했는데 이때 파인만은 자기 이론의 우수성만을 고집하지 않고 다른 이론이나 생각에도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이번 청소년평전 과학의 전도사 리처드 파인만편은 중간 중간에 따로 시대적 배경이나 과학적인 부분의 관련 정보를 좀더 자세히 알려주는 코너가 있었다. 파인만은 아인슈타인처럼 원자폭탄 개발 게획에 참여한 과학자였다. 원자폭탄 개발 계획인 <맨해튼 프로젝트>에 대한 설명도 따로 소개해 놓았다.

우라늄 공장의 보안 문제 때문에 공장 내부의 안전 문제가 뒷전일 때 그걸 알게 된 파인만은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아무리 비밀을 유지하기 위함이지만 그것이 안전보다 위에 있을 순 없기에 그는 단호했다. 솔직한 성품과 물리학자로서의 양심은 파인만다운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히틀러보다 먼저 원자폭탄을 개발해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아인슈타인을 비롯한 여러 과학자들이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했지만 원자폭탄이 실제로 투하되고 나서 그 참혹함에 모두 큰 충격을 받았다. 그것은 리처드 파인만도 마찬가지였다. 파인만은 처음엔 원자폭탄이 참혹한 재앙을 불러올 거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자신이 그토록 좋아하는 과학이 원자폭탄 같은 무기 개발로 이용되어 인류의 미래가 어떻게 될 지 장담하지 못하게 될 줄은 그도 미처 몰랐던 것이다.

원자폭탄 개발 이후 심한 죄책감에 시달리며 정신적 혼란에 빠져 지독한 허무주의자가 된 파인만. 폭탄 개발에 참여했단 죄책감과 아내를 잃은 상실감으로 힘겨워 할 때 교수 겸직이라는 파격적인 제안을 받았다. 예전의 열정과 자신감을 잃어버렸지만 그는 프로젝트 책임자 였던 밥의 충고로 죄책감에서 조금씩 벗어났다. 그리고 일상생활 속에서 찾을 수 있는 물리학적 탐구를 찾으며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그가 좋아하는 과학이 그를 다시 살리는 셈이었다.


파인만은 새로운 즐거움이나 모험을 찾아다니던 중 남미 브라질로 가게 됐다. 브라질에서 강의 경험 강연을 하는데 이때도 솔직한 성격의 소유자다운 면모를 보여주었다. 브라질 과학 교과서에는 과학이 없다는 그의 말은 브라질 교육계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오직 시험에 합격할 수 있는 방법만 가르치는 과학은 진짜 과학이 아니라는 파이만. 그 말은 비단 브라질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우리나라 교육도 깊이 생각해보아야 할 부분이 아닐까.



파인만의 강의는 학생들 사이에 인기가 많기로 유명했다.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강의를 이끌었는데 번뜩이는 그만의 기지는 강의를 들으러 온 모든 사람을 사로잡았다. 자질구레한 설명이나 어려운 전문용어 없이 생활 속에서 첨단의 물리학 개념을 자연스레 이끌어 내는 강의라면 충분히 솔깃하지 않을까. 그의 강의 비결은 아주 간단한 것이었다.


'당신이 강의하는 내용을 학생들이 왜 배워야 하는지, 그 점을 명확하게 파악하라. 일단 이것이 분명해지면 강의 방법은 자연스럽게 떠오를 것이다.'

리처드 파인만의 마지막 업적은 우주왕복선 챌린저호 참사의 원인을 밝혀내는 거였다. 다른 조사원들이 자기만의 이익을 위해 달려들때 파인만은 차분하게 뭔가를 찾아낼 수 있을 거라는 아내의 말처럼 실험을 통해 원인을 밝혀냈다. 파인만이기에 숨김없이 시원하게 밝혀낸 것이다. 이 일로 다시 한번 천재 물리학자 파인만의 이름이 세상에 알려졌다.


파인만은 암투병 중에도 꼭 가겠노라 희망하던 투바 여행을 눈앞에 두고 결국 숨을 거두었다. 아마 그는 이승에서 해보지 못한 투바 여행을 영혼이나마 자유롭게 즐기고 있을지도 모른다. 파인만의 죽음은 많은 학생들이 애도했다. 비록 그는 죽었지만 과학에 대한 뜨거운 열정과 유쾌명쾌한 그의 강의는 학생들의 기억 속에 오래남아 있으리라.


청소년 평전 시리즈는 초등전집이지만 중등도 충분히 읽을 수 있을만큼 내용이 알차고 페이지 수가 상당한 편이다. 그래서 우리 중딩이 같은 경우엔 한번에 다 읽지 않고 시간이 날때마다 짬짬히 읽어나가고 있다. 중학생이 되니 확실히 책 읽는 시간도 도서관에 가는 것도 줄어들고 있어 역시 시간적 여유가 많은 초등때 책읽기를 많이 해두는 게 좋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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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의 신 데즈카 오사무 청소년평전 30
김나정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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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대 아이들과 원만한 대화를 하기 위해선 관심있는 분야로 얘깃거리를 찾는 게 좋다. 지난주 우리 초5가 하교 자율활동시간에 만화를 봤다며 즐거워 하길래 만화 좋아하는 엄마도 동참했다. 그러면서 얘기가 나온 '우주소년 아톰' 엄마가 아주 어릴때 봤다고 얘길 했더니 그럼 '아톰'이 엄마보다 나이가 많냐고 물었다. 많아도 훨씬 많지. 그렇게 대화의 물고가 트이고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자음과모음 청소년 평전 시리즈에서 '만화의 신'이라는 눈길을 끌었다. 맞다! '만화의 신'이 바로 바로 '우주소년 아톰'을 탄생시킨 데즈카 오사무였다.


일본만화의 신, 일본만화에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일본 에니메이션의 대부, 데즈카 오사무는 유년시절이 그리 유쾌하지 못했다. 곱슬머리에 안경을 쓰고 외소한 체격이라 아이들의 놀림감이 되던 소년. 요즘 아이들도 잘 아는 왕따가 바로 데즈카 오사무였다. 이유없이 괴롭힘을 당하던 소년은 눈물이 나도 꾹 참는 법을 스스로 터득했다. 인내하며 버텼던 소년을 위로 해 주었던 것도 좋아하는 만화요, 시련을 벗어나게 해준 것도 만화였다. 소년의 그림 솜씨는 괴롭히던 아이들은 물론 선생님까지 깜짝 놀라게 할만큼 뛰어났던 것이다.


데즈카 오사무가 만화를 좋아했던 배경엔 가족 모두가 만화를 좋아했던 영향이 컸다. 만화라면 질색하는 보통의 어른들과 달리 부모님과 함께 만화를 보며 자랐으니 어쩌면 그가 만화를 좋아하는 건 당연했으리라. 잠자리용 독서로 만화를 읽어주시는 엄마라... 우리 중딩이 왈 우리 엄마도 만화를 좋아하지만 그 정도는 아니라면서 살짝 부러워했다. 내가 봐도 데즈카 오사무의 엄마가 진짜 대단해 보였다. 만화 뿐만 연극 같은 예술을 접할 기회도 엄마의 공이 컸다. 텔레비전도 비디오도 없던 시절 아버지는 영화를 좋아하는 아들을 위해 영사기를 사서 가족 영화제를 열어주었다. 그때 데즈카는 처음 미키마우스를 보며 디즈니 만화 영화 살아 움직이는 그림의 매력에 푹 빠져버렸다.

부모님 덕에 좋아하는 만화를 마음껏 즐기며 한적한 시골에서 온갖 곤충들과 밤하늘의 별을 벗삼아 호기심 많은 어린 시절을 보냈던 데즈카 오사무도 전쟁의 소용돌이를 피할 수 없었다. 전쟁 때문에 군인을 양성하는 사관학교에 끌려갔지만 병에 걸려 쫓겨났다. 다음엔 격납고 지붕이나 벽에 석판을 만드는 공장에 끌려가 혹독한 시간을 보내야먄 했다. 그런 그를 버티게 해준 것도 바로 만화였다. 공장에서 나와 집에 숨어서 읽어내려간 다양한 종류의 책들은 그의 만화에 중요한 밑걸음이 되어 주었다. 데즈카 오사무에게 방공호는 만화 요새였던 것이다. 이때 그린 만화만 3000장이 넘었는데 자신의 만화를 누군가에게 보여주고픈 마음이 바깥으로 나갈 용기를 주었다.

전쟁을 겪으면 깨달았던 생명의 소중함에 데즈카는 의사가 되기로 마음을 먹었다. 의대에 다니면서도 만화를 계속 그렸는데 그는 늘 잠이 부족했고 몸이 피곤했다. 만화를 그리면서 환자를 돌본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았지만 환자를 대하면서 사람의 생명에 대해 더 깊은 생각을 할 수 있었다. 데즈카는 의대를 다닐 때 만화가로 정식 데뷔했다. 하지만 졸업하고 병원에 근무하면서 만화를 그릴 수는 없었다. 낮에는 의사, 밤에는 만화가로 살았지만 선배 의사에게 의사를 그만두고 만화가가 되라는 말을 들었다. 그 선배 의사는 데즈카의 뛰어나 만화 실력을 알고 해주는 충고였다. 좋아하는 것을 다 할 수 없다면 가장 좋아하는 것을 선택한 것. 고민하던 데즈카는 어미니의 한마디에 깨닫고 결국 만화가의 길을 선택했다.


17세 데즈카 오사무는 노력 끝에 네 컷 만화 <마짱의 일기장>으로 어린이 신문에 실리며 정식 만화가가 되었다. 만화가로 데뷔한 데즈카는 기존의 만화 형식에 섯어나 다양한 방법으로 만화에 활력을 넣고 싶었다. 영화 장면처럼 만화 장면을 구상해 종이 속의 화면이 활기차게 움직이게 하면서 데즈카의 <신보물섬>은 발행되자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오사카에서 인기로 자신감을 얻었지만 존경하던 만화가에게서 자신의 어린이 만화엔 어린이에 대한 애정이 없다는 말에 큰 충격을 받았다. 큰 깨달음은 도쿄로 진출하는 계기가 됐지만 그 길은 결코 호락호락 하지 않았다.


도쿄의 여러 출판사에게 고배를 마시고 좌절한 데즈카를 다시 일으킨 건 오사카 독자들이었다. 그의 만화를 실어달라는 독자들의 엽서가 한 잡지사에서 그를 찾았던 것이다. 우리가 '우주소년 아톰 <무쇠팔 아톰> 다음으로 잘 알고 있는 '밀림의 왕자 레오' <정글대제> 는 그렇게 도쿄에서 빛을 보게 되었다. 아프리카 대륙을 무대로 한 사자 이야기 '정글대제'는 장편 만화로 데즈카를 도쿄의 인기 작가로 만들어 주었다.

요즘 어른들도 만화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이 강하지만 그 당시 일본에선 만화 추방 운동이 있었다. 만화는 공부에 방해만 될 뿐이며 아이들에게 좋지 못한 영향을 준다는 이유였다. 만화는 정말 다 나쁘기만 한가? 과연 좋은 만화는 무엇인가? 라는 생각은 지금도 여전히 하고 있다. 데즈카는 아이들이 좋아하는 만화가 좋은 만화라고 여겼다. 아이들의 상상력과 꿈을 붇돋아주는 만화를 추구하는 데즈카의 주장은 어른들의 생각을 돌아서게 했다.


히트를 치는 작품 속에 데즈카는 안주하지 않고 계속 새로운 것을 시도하려고 노력하는 만화가였다. 자기 만화의 세계를 넓히기 위해 마감에 쫓겨가면서도 책읽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또 성공했다고 자기 세계만 고집하지 않고 젊은 만화가들의 작품을 읽고 소통하며 마음이 늙지 않게 노력했다. 데즈카 오사무는 점점 나이가 들었지만, 그의 만화만큼은 늙지 않았다는 대목이 우리 중딩에게도 강한 인상으로 와닿았다고 한다.

자신의 꿈을 펼치기 위해 평생 노력을 게을리 않았던 인물 데즈카 오사무청소년 평전 시리즈를 읽으면서 우리 중딩이가 다른 건 몰라도 꼭 본받았으면 하는 게 바로 이것이다. 자신이 좋아하고 하고픈 일에 열정을 갖고 노력한다면 어떤 분야든 인정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청소년 평전 속 인물들의 일대기를 읽으며 깊이 느꼈다. 노력은 우리를 배신하지 않는다고 하지 않던가. 아무리 마감시간이 촉박해도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작품은 절대 대중에게 보이지 않았던 데즈카 오사무는 암으로 병상에 누워서도 손에서 펜을 놓치 않았다.


우리에겐 '우주소년 아톰'으로 잘 알려진 <무쇠팔 아톰>은 일본을 넘어 미키마우스 월트 디즈니의 본고장 미국은 물론 전 세계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았다. 데즈카는 지난날 자신이 했던 다짐처럼 피부색과 국적에 관계없이 아이들이 모두 좋아하는 만화를 만든 셈이다. 또한 데즈카는 돈보다 작품을 중시해 원작에 손을 대지 못하게 하는 계약 조건을 내세워 작품을 지켰다. 자신이 만든 작품에 대한 애정과 자부심을 결코 돈과 타협하지 않는 것이다. 애니메이션은 막대한 제작비가 드는 작업이라 한계에 부딪쳤지만 그는 자신의 신념을 지키며 자신만의 작품을 완성했다.

만화는 우리가 쉽게 읽고 접하지만 한 편의 만화가 완성되기까지 그 긴 시간의 작업은 결코 쉬운 게 아니라는 것을 데즈카 오사무의 일대기를 통해 다시 한번 깨달았다. '만화의 신'조차 늘 연구하고 노력했기에 그 이후 수많은 만화가들이 그 뒤를 이어 지금 우리는 더 재미나고 더 다양한 만화를 볼 수 있는 것이다.


'재미없는 만화는 만화가 아니다. 희망을 가져다주는 것. 그리고 그것이 웃음이 되는 것. 이것이 만화가의 길이다.' 죽기 직전까지 종이를 붙들고 있었다는 데즈카 오사무는 자신이 가장 원했던 만화가라는 직업으로 생을 마감 할 수 있어 참 행복했겠지. 그가 35년 일생을 바쳤지만 유일한 미완성 작품으로 남은 <불새> 아직 본 적이 없어 기회가 된다면 우리 중딩이와 함께 보는 것도 좋겠다.


'만화의 신' 데즈카 오사무의 작품으로 아직 '우주소년 아톰' 밖에 모르는 우리 아이들를 위해 그의 대표작을 검색해서 찾아봤다. <무쇠팔 아톰> <정글대제> <블랙 잭> <불새> <도로로> <리본의 기사> 이렇게 모아놓고 보니 그만의 그림 기법이 확실히 느껴졌다. 전쟁 이후 불모지였던 일본 만화계를 지금의 만화 왕국으로 만드는데 커다란 주춧돌 역할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라 하겠다. 사람들에게 희망과 웃음을 주고 싶다는 그의 만화를 다시 보고 싶다. 이번 주도 세계위인전집 청소년 평전 시리즈를 읽으며 새로운 인물의 일대기를 통해 우리가 배울점을 찾아보는 의미있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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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의사 노먼 베순 - 개정판 청소년평전 1
이원준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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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에서 태어나 유달리 모험심이 강했던 노먼 베순은 어릴 때부터 새로운 상황에 적극적이며 과감하게 행동하는 소년이었다. 한번 마음먹은 일을 끝까지 해내고야 마는 성격은 주위의 걱정을 샀지만 그것은 나중에 의사로써 맹활약을 할때 큰 도움이 되었다. 제 1차 세계대전에서 육군에 입대했지만 전쟁의 참혹함을 견디지 못하고 부상으로 군 복무 중 돌아와야만 했다. 전쟁터에서의 힘든 경험은 깊은 상실감으로 그에게 마음을 상처를 입혔고 그 때문에 나아가야 길을 찾지 못해 방황하기도 했었다. 그때 몸을 혹사시켜 얻은 폐결핵은 그를 또 한번 좌절시키는 듯 했지만 '폐결핵 수술'이라는 책을 접하고 노먼 베순은 눈이 번쩍 뜨였다. 그는 다시 어릴때부터 남달랐던 모험심을 내걸었다. 폐결핵 환자인 자신을 실험 대상으로 삼아 강행했던 기흉 치료는 성공했고 건강을 되찾게 된 것이다. 죽음만 생각하고 있던 그에게 폐결핵 완치는 새로운 삶의 시작이 되어 주었다. 오랫동안 시간을 허비했던 지난날 반성하며 앞으로 두 배로 열심히 살아갈 것을 다짐했다.

본인이 결핵을 걸려 겪어봤던 경험은 많은 것을 느끼게 했으며 또 그를 달라지게 만들었다. 경험을 토대로 개발한 치료법과 수술 기구들은 큰 호응을 얻어 새로운 방법들을 개선시키고 발전시킬 수 있었다. 또 결핵은 가난과 깊은 연관성이 있다는 것을 깨닫고 그는 늘 고민했다. 결핵의 뿌리를 뽑을 수 있는데도 현실 속에선 그렇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 노먼 베순을 힘들게 하고 분노하게 했다. 다 같이 잘 살 수는 없을까 하는 의문 속에 그는 사회주의 체제로 눈을 돌렸다. 가난해서 제때 치료를 받지 못하는 상황이 없도록 그런 그의 생각은 러시아 결핵 발병률 감소가 확신으로 나타나 주었다. 그리고 그에게 당시 에스파냐와 중국의 위태로운 상황이 의사로서의 사명감에 더욱 불을 짚혔다.

에스파냐 내란 속 한복판에서 피를 많이 흘리며 죽어가는 부상병들을 보며 노먼 베순은 한번도 시도치 않았던 일을 진행시켰다. 전쟁터에서 가까운 곳에 이동 수혈대를 만들어 부상병을 즉시 현장에서 치료하게 하는 것은 정말 노먼 베순이었기에 생각하고 가능하게 했으리라. 수많은 마드리드 시민들의 헌혈 참여는 노먼 베순 뿐만 아니라 책을 읽는 우리에게도 깊은 감동으로 다가왔다. 헌혈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깨달았고 비록 엄마는 몇 번 밖에 해본 적 없는 헌혈이지만 우리 중딩이는 커서 건강한 신체를 가진 남자로 헌혈에 적극 동참해 주었으면 좋겠다.

에스파냐의 상황을 알리며 도움을 요청하는 순회강연을 하던 노먼 베순에게 의사를 더욱 절실히 필요한 곳이 생겼다. 바로 일본이 베이징을 공격하며 전쟁이 벌어진 중국이었다. 참혹했던 에스파냐에서의 경험이 베순을 자연스럽게 중국으로 이끌었다. 중국의 정세는 노먼 베순의 입장에서 상세히 알려주었는데 우리는 그의 일대기를 통해 세계사도 함께 알아볼 수 있는 1석 2조의 효과까지 얻었다. 제 1차 세계 대전 이후 격변하는 중국의 정세가 책을 통해 좀 더 쉽게 이해 됐다.


중국에서 노먼 베순의 의료 활동은 에스파냐의 활약을 훨씬 뛰어넘었다. 포탄이 터지는 전장 속에서 죽음을 각오하고 부상병들의 치료하는 모습은 마치 영화속 한 장면처럼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것은 책을 읽은 우리는 물론 수십억 중국인들에게 각인이 되고도 남았으리라. 피를 뽑는 행위 자체가 처음인 중국인들 앞에서 직접 시범을 보이며 중국의 첫 헌혈로 이끌었다. 이때 노먼 베순의 머릿속에는 오로지 부상병들의 빠른 치료만 있을 뿐이었다. 하나를 마음 먹으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매진하는 그의 성격이 여실히 들어났다.


전쟁 속에서 의료 물품은 금새 동이 났고 열악하기 짝이 없는 중국의 공중 보건과 의료 시설을 보며 개선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전혀 관계없던 다른 나라 사람이 자신의 나라 일도 아닌데 그렇게까지 애를 쓰는 모습을 보니 아! 바로 이런 게 의사의 사명감이오, 뜨거운 인류애라는 것이 느껴졌다. 그의 열정에 감명 받은 건 비단 우리 뿐만이 아니었다. 의약품이 거의 바닥 나고 보급이 되지 않아 부상병들이 진통제도 없이 아픔을 참아 낼때 중립의 입장이던 선교사에게 도움을 청하며 간절한 마음으로 설득시켰다.


노먼 베순은 생명과 직결된 환자를 위하는 일이라면 정말 물불을 가리지 않았다. 어떻게 보면 무모하기 짝이 없는 그의 행동에 오히려 중국 군인들이 말릴 정도였으니까. 일에 몰두한 나머지 턱없이 부족한 수면양에 건강을 염려해 억지로 휴식을 취하게 했지만 아무도 그의 고집을 꺽을 수 없었다. 또한 노먼 베순은 의료 행위 뿐만 아니라 의료 종사자들을 위한 교육도 병행했다. 환자를 위한 그의 가르침은 중국의 의료 종사자들 뿐만 아니라 많은 중국인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다.


포격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수술을 끝까지 이어가는 노먼 베순. 환자를 대할 때 최선을 다하지 않는 의료인이 있다면 참지 못하고 불같이 화를 내는 성질은 오롯히 환자를 위한 마음 뿐이기 때문이었다. 일본군의 맹렬한 공격에 부상병들은 날로 늘어나만 가고 의료 사정은 점점 더 나빠졌다. 전쟁이 주는 참혹함은 그 옛날이나 지금 우크라이나의 상황이나 달라진 게 없네. 하루 열여덟 시간 이상 일을 하고 건강을 잃어가던 그를 결국 쓰러뜨린 건 수술 중 메스에 베인 상처였다. 상처에 세균이 감염되어 패혈증으로 생을 마감했던 노먼 베순.


"의사들이여! 아픈 사람들을 기다리지 말고 먼저 찾아가라!" 노먼 베순이 남긴 이 한마디는 비단 의사뿐만 아니라 우리에게도 깊은 여운을 주었다. 마지막으로 <노먼 베순 연보>를 읽으며 그의 일대기를 되짚어 보았다. 다시 봐도 의사로써 정말 많은 일들을 해낸 인물이구나. 문득 지금 환자가 있는 곳으로 직접 찾아가 활동하고 있는 국제 인도주의 구호단체 '국경없는 의사회'가 떠올랐다. 가까이는 지난 몇 년 동안 코로나19 시기에 현장에서 애쓰는 의료인들이 있고.... 여전히 세상엔 노먼 베순 같은 훌륭한 의료인들이 많이 있어 참 감사하다.


우리는 보통 업적이 뛰어난 위인들을 떠올릴 때 우리와 다르게 어떤 특별한 점이 있다고 생각 한다. 하지만 위인도 인간이기에 자신의 꿈과 진로에 대해 고민하고 방황하기도 한다는 것을 청소년 평전 시리즈를 읽으면서 종종 깨닫고 있다. 그래서 진로를 고민하는 질풍노도의 시기 청소년들에게 진짜 강추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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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와 파괴의 여신 카미유 클로델 청소년평전 27
은미희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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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쪽으로 전혀 문외한인 우리 중딩이도 조각가 하면 로댕, 로댕하면 '생각하는 사람'을 떠올렸다. 그런 우리에게 로댕의 연인이란 타이틀로 알려진 카미유 클로델이 생소하면서도 또 궁금했다. 왜 그녀는 스스로의 이름보다도 로댕의 연인으로 더 알려졌을까. 청소년평전 27 창초와 파괴의 여신 카미유 클로델을 다 읽고 덮었을 땐 그 사실이 너무 안타까워 화가 날 지경이었다. 이 기분은 마지막 작가의 말에서도 비슷한 소감을 들을 수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덧붙여 보았다. 카미유 크로델... 슬프도고 아름다운 비운의 천재라고.


보통 아이가 어렸을 때 자연을 벗삼아 자랄 수 있는 건 큰 행복이라고 말하곤 한다. 주인공 카미유는 바로 그런 아이였다. 자연 속에서 나무, 흙, 돌의 본질을 일찌감치 깨달은 것이 그녀가 조각가로 열정을 키우는데 가장 첫 번째 밑거름이 되었다. 자연을 벗으로 삼고 자연의 일부분이 되어 이야기를 나누며 카미유는 자신의 손끝에서 탄생하는 흙 인형들에게서 행복과 위안을 얻었다.


카미유가 자연 속에서 무생물인 돌이나 흙과 교감을 하며 손을 무언가를 만들어내며 위로를 받았던 건 사실 어머니의 냉대와 차별 때문이었다. 첫 아이를 잃은 어머니의 깊은 슬픔은 변질되어 카미유가 원했던 아들이 아니라는 이유를 들어 정신적인 학대를 지속했다. 카미유는 한편으로 어머니를 이해했지만 어머니에게서 들은 모진 말들은 때때로 상처가 되어 그것을 조각으로 치유했던 것이다. 만약 어머니가 조금이라도 살가운 말을 따뜻한 눈빛, 관심을 주었다면 어쩌면 카미유의 생에 마지막이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어려서부터 흙으로 인형을 만드며 재능을 보이던 카미유는 12살 때 만들었던 <다윗과 골리앗>으로 조각가 알프레드 부셰와 인연이 닿았다. 카미유의 천부적인 재능을 한눈에 알아보며 조각가로서의 무한한 가능성을 칭찬해주는 것은 좋았으나 그로 인해 로댕과의 만남도 이루어졌으니 결말을 아는 우리의 입장에선 마냥 기뻐하지 못했다. 본격적인 조각가의 길을 걷기 위해 가족들과 함께 파리로 간 카미유. 하지만 낯선 도시 생활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당시 조각가는 주로 남자들이나 하는 직업이며 여자의 몸으로 수많은 예술가들이 모여든 파리에서 성공하려면 몇 배 아니 몇 십 배의 노력이 필요했다. 카미유는 그것을 알았고 까다롭기 그지없는 조각계에서 살아남으려고 애를 썼다. 그 노력의 첫 결실로 <늙은 헬렌>이 파리 살롱전에서 최고상으로 신문에 실려 모두의 인정 받게 되었다. 그녀의 나이 19세 때 드디어 조각가로서 이름을 알린 셈이었다.

조각가로써 주목을 한 몸에 받기 시작한 카미유와 어쩌면 당대 최대 거장인 로댕과의 만남은 자연스러운 수순이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운명의 장난처럼 로댕과 카미유의 작품은 그 스타일이나 느낌이 매우 비슷하다는 점이다. 천재는 천재를 알아본다고 했던가. 조각에 대한 카미유의 열정과 재능을 로댕도 한눈에 알아 보았다. 서로의 작품과 작품에 대한 생각과 영감을 공유하며 24살이라는 나이 차이는 무의미해졌다.


이미 이름이 널리 알려진 거장 로댕과의 만남은 카미유에겐 득이었을까, 독이었을까. 카미유의 작품만으로도 충분히 그 실력을 인정받아 마땅하지만 그 당시 사회는 그러지 못했다. 더욱이 카미유가 로뎅의 아틀리에서 일하기 시작하고부터는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 로댕의 뮤즈이자 연인, 조수이자 모델이라는 수식어가 평생 카미유에게 꼬리표처럼 따라 붙었다. 그녀의 작품조차 로댕의 아류라는 평을 받았으니 예술가로서 카미유의 자존심으론 용납할 수 없는 일이 아니었을까.


로댕의 연인이라는 소문으로 카미유는 가족에게조차 외면을 받게 되었다. 차라리 로댕의 사랑이 끝까지 해피엔딩이었다면 좋았을텐데... 로댕과 가족이 주는 갈등과 상처에 결국 카미유는 버티지 못했다. 세상의 편견이 아무리 혹독했지만 누구 단 한 명이라도 카미유를 끝까지 보듬어줬다면 그녀의 결말은 달랐을 것이다. 믿었던 사람들에게 받은 상처는 카미유의 마음을 무너뜨렸다.

카미유가 홀로 작품에 몰두하고 있는 이 삽화는 그녀의 마음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것 같아 인상적였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로댕에게 받은 배신과 상처는 <샤쿤탈라>에 매달리면서 위로 받으려는 것처럼 보였다. 샤쿤탈라가 바로 카미유 자신이었다. 그렇게 완성된 작품은 다시금 최고상을 차지했지만 상처뿐인 그녀의 마음은 예전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미친듯이 작품에 몰두해 연이어 성공을 거두었으나 그것들은 카미유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경제적으로나 심리적으로나... 그렇게 카미유는 점점 세상과 멀어지고 최소한의 생계도 버겁게 되었다. 혼자 남겨진 지독한 외로움은 카미유의 정신마저 갉아먹어 정상적인 생활조차 할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 그토록 좋아하던 조각조차 할 수 없을 정도였으니까.


결국 카미유는 정신병원에서 감금된 채 30년 동안 살다가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했다. 천재 조각가의 말로가 이거였다니... 다른 무엇보다도 30년 동안이나 가족과 세상의 무관심 속에 무연고자로 죽음을 맞이했다는 사실이 가장 충격적이었다. 사회의 배려가 가족들의 보살핌이 조금만 있었더라면 그녀는 작품활동을 할 수 있게 도와줬더라면... 그랬다면 깊은 마음의 상처도 다시 한번 작품의 완성으로 치유받지 않았을까.

마지막으로 <카미유 클로델 연보>를 살펴보면서 그녀의 작품들을 하나씩 떠올려 보았다. 그리고 그 작품들이 궁금해서 인터넷으로 검색을 해보았다. 그녀가 살아 생전에 '로댕의 아류작'라는 평을 들여야 했던 작품들. 그녀의 열정과 재능을 제대로 보았다면 그런 말들을 못 했을텐데... 카미유가 살았던 시대가 원망스럽고 카미유를 끝까지 사랑하고 이해해 해주는 사람이 없었다는 사실이 너무 안타까웠다.


누구나 인생에 한번은 찾아오는 질풍노도의 청소년 시기. 자음과모음 청소년평전 시리즈는 그런 시기에 열정적이며 치열하게 자신의 삶을 살았던 인물들의 일대기를 통해 함께 고민하고 생각해볼 수 있는 시간을 갖게 해주고 있다. 우리 중딩이도 앞으로 계속 진로에 대한 고민을 할 텐데 그때마다 청소년평전에서 읽었던 인물들의 희노애락을 떠올리며 자신만의 길을 잘 찾을 수 있길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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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 건축가 안토니 가우디 - 개정판 청소년평전 9
안토니 가우디 지음, 김나정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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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을 너무 사랑하여 감히 외국에 한번 가고프다는 생각이 없던 우리 중딩이의 마음을 바꿔 놓은 건축가 안토니 가우디. 20세기 초 마법사 같은 천재 건축가인 그가 지은 건축물을 한번쯤은 직접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단다. 우물 안의 개구리가 드디어 독서로 생각의 시야가 점점 넓혀지는 건가요.

요즘 아이들 하고 싶은 것도 이루고 싶은 것도 예전 우리때만큼 적극적인 것 같지 않다. 우리 중딩이 같은 경우도 이렇다할 꿈이 아직 없는데 이렇게 세계 다양한 분야에서 활약했던 인물들의 이야기를 두루 읽어보는 것도 참 중요한 것 같다. 지금 이때 열심히 해야하는 공부도 사실 미래에 대한 투자인 것처럼 말이다.


'꿈꾸는 건축가' 안토니 가우디. 그는 과연 어떤 꿈을 가지고 그 많은 건축물을 설계 했을까.

역사와 예술에 관심이 많았던 어린 가우디는 친구들과 틈만 나면 유적지를 찾아갔다. 그전까진 화가가 되고 싶었던 그였는데 우연히 찾은 유적지 안의 대성당 안에서 문득 깨달았다. 사람의 손에서 만들어진 건축물이 주는 위대함을 말이다. 가우디가 화가의 꿈을 접고 건축가가 되기로 결심한 건 바로 그때였다. 그리고 그는 우리에게 그 위대함을 고스란히 느끼게 해주는 세기의 건축가가 되었다.


가우디의 건축물은 남달랐다. 그는 자신만이 만들 수 있는 독특함을 건축물에 고스란히 담아냈다. 그럴 수 있었던 건 그가 자라왔던 환경의 영향이 컸다. 대장장이 아들로 태어나 대장간에서 많은 것들을 보고 배우며 익혔다. 그때 배워둔 기술들이 나중에 건축가 된 가우디가 건축물에 꼭 맞는 수공품을 만드는 게 큰 밑거름이 되었다.


건축학도 시절 가우디는 책벌레 괴짜였다. 유행하는 건축 양식을 그대로 본따지도 않았다. 설계를 해야 하는 건축가가 있어야 할 곳은 현장이라고 생각했다. 건축물은 그 지역에 잘 어울려야 하며 그러기 위해선 그 지역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로 만들어져야 한다고 여겼다. 남들이 봤을땐 고집불통 괴짜지만 그런 가우디를 알아봐 주는 사람을 만났으니 그가 바로 유명한 사업가 구엘이었다. 가우디의 행운 중 하나는 평생의 후원자 구엘을 만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19세기 후반 바르셀로나는 변화의 물결 속에 급격한 산업화의 변화로 오히려 사람들은 점점 살기 힘들어졌다. 일에 치인 사람들이 안식을 얻기 위해 신을 찾을 만한 성당이 바르셀로나에 필요했다. 제대로 된 성당, 가족들이 함께 올 수 있는 커다란 성당 그것이 성가족 대성당 건축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31세의 젊은 건축가 가우디가 성당의 공식 건축가가 되었다. 가우디는 대강 빨리 짓겠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 이때부터 43년간 그가 눈을 감을 때까지 성가족 대성당을 짓게 되었다.



가우디는 성가족 대성당의 공사를 맡는 동안에도 틈틈히 다른 건축물을 지었다. 그가 지은 건축물은 인공적이지만 자연친화적인 게 대부분이었다. 가우디에게 자연이 먼저고 그 다음이 집이었다. 그가 생각했던 건축물은 자연의 일부일 뿐, 자연과 잘 어울리는 것이 중요했다. 그것이 건축가 가우디의 철학이며 그 때문에 그가 지은 건축물들은 작품이 되어 후세에도 빛나고 있는 것이다.


가우디는 구엘 저택, 구엘 공원, 카사 밀라, 카사 바트로 뿐만 아니라 아스토리가 주교관, 성 테라사 학원 등 종교적인 건축물을 지었다. 가우디에게 자연 뿐만 아니라 종교의 정신은 절대적으로 그의 건축물에도 고스란히 나타났다. 그것이 보수적인 가톨릭 건축가로 낙인 찍히게 한 것은 아닌가 싶어 조금은 안타까웠다. 한 분야에 뛰어난 이름하여 천재라 불리우는 사람들의 공통된 점이 가우디에게서도 느꼈다. 그도 조금만 더 다양한 사람들과 더 어울려 살았으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그의 최후가 좀 덜 허망했을지도 모르겠다.


'1백년 안에 이 성당을 짓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 세대는 '꼭 짓겠다'는 집념만 보여 주면 된다. 못 다한 일은 다음 세대가 이어받을 것이다. 다음 세대가 마무리 짓지 못하면 그 다음 세대가 계속하면 된다.'


가우디는 본인이 이 걸작을 완성시키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모두가 힘을 모으면 꼭 완성할 수 있다는 믿음 또한 가지고 있었다. 그랬기에 그는 후세의 많은 뛰어난 건축가들과 함께 성가족 대성당을 만들기 원했다. 가우디의 정신과 생각은 성가족 대성당이 완공되는 그날까지 함께 이어지고 있겠지.



가우디 사후 100주년이 되는 2026년 완공을 목표로 하고 있다는 성가족 대성당(사그라다 파밀리아 대성당)의 모습을 사진으로나마 한번 찾아 보았다. 사진으로만 봐도 감탄이 절로 나오는데 이건 그냥 건축물이 아니라 하나의 거대한 예술작품처럼 느껴진다고 우리 중딩이는 말했다. 그러면서 자신은 기회가 된다면 바르셀로나에 가서 이 성가족 대성당을 직접 두 눈으로 보고 싶다는 말도... 우리 중딩이가 갔을 땐 100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멋지게 완공된 세기의 걸작품을 볼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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