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가야는 하나로 통일되지 못했을까? - 월광 태자 vs 진흥왕 역사공화국 한국사법정 4
조원영 지음, 이주한 그림 / 자음과모음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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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소가야의 땅에 살고 있는 우리 중딩이가

삼국에서 제일 비중이 적은 가야를 안타까워하며 꺼내든

역사공화국 한국사법정 04

왜 가야는 하나로 통일되지 못했을까?

본인 역시 가야 역사에서 제일 궁금했던 부분이라 말했다.

약소국의 설움으로 고구려, 백제, 신라에 비해

고대국가 중 하나인 가야가 제대로 조명받지 못한 것 같아 매우 슬프다면서.

역시 지역사랑이 남다른 우리 중딩이다.

가야와 신라 중 어느 나라가 더 강한 나라였을까?

광개토 대왕은 왜 신라를 도와 가야를 공격했을까?

가야는 어떻게 신라에게 멸망했을까?

역사공화국 한국사법정은

총 3일에 걸쳐 열띤 법정 공방이 오고간다.

이번 법정에선 어떤 질문과 그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는지

차례를 훑어보며 미리 가늠해 보았다.

중학교에선 역사 시간에 삼국의 성립과 발전으로

고등학교에선 한국사 시간에 우리 역사의 형성과 고대 국가로 배우게 된다.

우리 중딩이는 삼국시대 이전이 살짝 취약하던데

이번 법정 공방으로 가야와 신라 그리고 고대 국가의 성장에 대해 잘 알아두면 좋겠네.

한국사 연표로 살펴보는 가야의 흥망성쇠.

가야를 배울때 수로왕이 시조인 건 익히 아는 바.

가락국과 가라국, 이름이 비슷하지만 엄연히 다른 가야국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가라국이 신라에 의해 멸망하면서 우리가 아는 가야는 여기서 끝이 나는 거로구나.

원고 월광 태자 vs 피고 진흥왕

역사를 배우는 친구들에게 두 인물 중에

누굴 더 잘 아느냐 묻는다면 역시

신라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진흥왕이라 대답할 테지.

그건 우리 중딩이도 마찬가지니까.

하지만 역사공화국 한국사법정을 읽으니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인

가라국의 마지막 태자 월광에 대해서

사뭇 궁금해졌다.

가야가 500년 이상이나 존재했던 국가였다는 것도

신라에게 멸망되기 전 삼국의 다른 나라와 어깨를 나란히 한 적도 있었다는 사실도 미처 몰랐다.

그만큼 가야사는 많이 알려지지도 않았고 왜곡되고 축소된 것이다.

그래서 재판 첫째 날 타이틀이 더 흥미를 끌었다.

가야 vs 신라

신라에 비해 약소국이라고만 생각했던 가야 아닌가.

가야가 연맹국이라는 알고 있지만 여섯 개의 연맹 즉 육가야는 틀렸다.

무려 열두 나라 이상이 있었다고 하는데

육가야라는 인식은 삼국유사에서 가라국이 세워진 때를 묘사하는 부분에서 생긴 오해였다.

우리가 익숙한 금관가야, 대가야, 아라가야, 소가야 등의 이름은 신라와 고려 시대에 붙여졌다.

수로왕이 세운 가락국은 금관가야를 말하고 비슷한 이름의 가라국은 대가야를 말하는 것으로

원고 월광 태자는 대가야의 마지막 태자인 것이다.

교과서에서는 신라는 진한의 소국인 하나인 사로국에서 시작되었다고 했다.

그 중 신라 4대 석탈해왕이 수로왕의 가락국을 공격했으나 졌다는 이야기가 <삼국유사>에

신라 5대 파사왕때 가야가 신라를 공격 해서 방어를 했다는 건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는 바

이때는 가야가 신라보다 강했음을 알 수 있었다.

가야가 마냥 힘이 약했던 나라가 아니었구나.

덕분에 가야에 대한 인식이 조금은 달라졌다.

가야하면 무엇이 제일 유명한가 우리 중딩이에게 물었더니 망설임 없이 '철'이라고 했다.

고대 사회에서 철기 문화는 매우 중요한 부분이었는데

가락국은 철기 제작 기술을 발달하여 철제 농기구나 무기 같은 다양한 철제품을 만들 수 있었다.

지금의 김해 지방에는 질 좋은 철이 많이 생산되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또한 지리적인 요건으로 만든 철제품을 중국이나 왜에 수출하는 해상 무역이 발달했다.

그렇다면 가야는 언제부터 신라보다 국가 발전이 뒤쳐지게 된 걸까?

그건 재판 둘째 날 광개토 대왕이 신라의 요청으로 가야를 공격한 이야기를 통해 알 수 있었다.

백제와 고구려과 전면전을 펼칠 때 백제와 우호적인 가야에게 타격을 입혀

백제에게 지원을 해 줄 수 없게 만드는 게 가야를 공격한 진짜 이유였음을 광개토 대왕이 증언했다.

고구려의 공격으로 중심지였던 낙동강 하류 지역이 회복하기 여러운 타격을 받았고

가야는 연맹의 중심 세력이 해체되었다.

비록 삼국에 비해 가야와 관련한 문헌 자료는 부족하지만

가야의 옛 땅 곳곳에서 발굴된 유적과 유물로 가야의 역사를 파악할 수 있으니 다행이네.

우리 동네 박물관에서도 가야가 남긴 상형 토기, 청동 솥, 바퀴 달린 잔, 용봉 무늬 고리자루칼 같은

문화유산을 직접 볼 수 있었다.

재판 마지막 날엔 가야가 어떻게 신라에게 멸망했는지 그 결과에 대해 알아보았다.

가야는 연맹국으로 초기엔 김해 가락국의 세력이 가장 컸으나 가락국이 몰락한 이후엔

고령의 가라국 즉 대가야가 연맹의 중심 세력이 되었다.

연맹 내에서 신라 왕실과 결혼 동맹을 맺은 것을 과시하고팠던 가라국.

하지만 결혼 동맹은 곧 깨져 버렸고 연맹 내의 국가들로부터 많은 비난을 받았다.

가라국을 중심으로 한 가야 후기엔 신라와 백제의 다툼 속에서 연맹은 분열했다.

백제와 연합해서 신라와 싸웠던 관산성 전투에서 치명적인 패배는 결정적인 원인이 되어

결국 가야는 제대로 싸워보지 못하고 신라에게 항복할 수 밖에 없었구나.

가라국의 마지막 태자인 월광 태자는 불교에 귀의하여 승려가 되었다고 알고 있었는데

그가 승려가 된 곳은 비교적 가까운 합천군 가야면에 있는 거덕사라는 사실은 이번에 알았네.

거덕사와 함께 월강 태자가 창건한 월광사도 기회가 된다면 한번 가봐야지.

코로나가 좀 잠잠해지면 가보고 싶은 곳으로 우리는 고령의 대가야박물관을 찜했다.

가야의 500년 역사 마지막을 장식했던 대가야인데 유물과 역사를 한번 직접 둘러보고 싶다니까.

경상북도 고령군으로 가즈아!

요즘은 학교 수업에서도 토론을 통해 비판적 논리적 사고를 키우려고 많이 노력 중이라고 들었다.

거기에 딱 부합하는 역사공화국 법정시리즈.

이제까지 역사를 굵직굵직한 역사적 사실의 단면 위주의 공부였다면

역사공화국을 읽는 동안엔 치열한 논쟁을 통해 몰랐던 역사 속 라이벌들의 입장을

이해해 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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