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다닐 때 친했던 내 친구 하나는 자유분방하고 거침이 없는 성격으로 남자애들 사이에서도 아주 인기가 많았다. 그래서 가벼워 보였었지만 그애가 책사이사이에 써놓은 짧은 글귀들이나 주고 받은 쪽지들에서 그애는 늘 새로운 감각으로 가득찬 감상적인 글들을 남기고는 했다. 말과 행동과 그녀의 글에서 느끼는 불일치감이 묘하게 그 친구를 매력있게 만든다고 생각했었다. 예를들면 남자친구와 헤어진 이유를 물어보면 " 그 애는 비가 내린다고 말하지 않고 비가 온다고 말해. 그게 싫었어" 이런 식. 감각적인 그 친구와는 아직까지도 연락을 주고 받으며 20년 가까이 우정을 이어오고 있다.( 갑자기 그 녀석이 보고싶군. 내일 전화 한 통 해봐야 것다)
이 책을 읽으며 그 친구 생각이 난 것은 그때 내 친구가 좋아했던 소설가가 한수산이었고 친구의 추천으로 한수산의 책을 몇 권 읽었기 때문이다. 바다로 간 목마 같은 책들...
온다 리쿠는 일본의 유명한 추리소설가라고 하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는 20살의 나이에 내가 읽었던 한수산의 글이 떠올랐다. 아주 감각적이고... 아, 이렇게도 표현을 할 수 있다니... 하며 감탄하게 되는 순간 순간의 문장들.
막 출발했을 때는 누구나 침묵을 두려워하며 수다를 떨었으나, 이제는 침묵에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오히려 지금까지보다 더 많은 말이 몸속에 가득 차 있지만, 자신의 속에서만 가득 차버려 이야기 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 것이다(P61)
해질녘에는 주위가 어두워져 가는데다 피로가 겹쳐 우울해졌지만 해가 저물어 버리자 오히려 조금씩 힘이 나기 시작한다. 자신이 새로운 세계의 주민이 된 것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낮의 세계는 끝났지만, 밤은 이제 막 시작됐을 뿐이다. 모든 것의 시작은 언제나 기대에 가득 차 있다(P105)
기분이 가라앉자 격한 감정에 휩쓸린 후의 허탈함이 찾아왔다(P133)
대체로 우리 같은 어린아이들의 부드러움이란 건 플러스의 부드러움이잖아. 뭔가 해준다거나 문자 그대로 뭔가 준다거나. 그러나 너희들 경우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아주는 부드러움이야. 그런게 어른이라고 생각해.(P196)
어렴풋이 밤이 새기 시작했다. 그것은 문자 그대로 한겹씩 막이 벗겨져 가는 것처럼, 그때까지 어둠에 가라앉아 있던 것이 우르르 앞으로 떠밀리듯 올라왔다(P245)
온 몸이 땀으로 젖어 머리부터 발끝까지 빠짐없이 열을 내뿜고 있는 게 느껴졌다. 이럴 때는 생물이라는 것이 일개의 연소기관이구나 하는 걸 실감한다(P281)
이런 구절들이다. 이런 구절들이 별 것 아닌 주제의 소설에 양념을 치듯이 적절히 배치되어있다. 그래서 책을 끝까지 읽으면서 멋진 글을 발견하는 기쁨을 준다. 이러니 읽는 동안에도 문장 하나 하나에 신경을 쓰면서 읽고 싶어졌다.
별 것 아닌 내용인데... 말 그대로 하룻동안 보행제에 참여한 고등학교 3학년 생들의 이야기일 뿐인데 단순히 그것뿐이었는데 읽고 있는동안 왠지 맘이 짠해온다.
조심스럽게 친구들을 깊이 배려하고 좋아해주는 심지 굳고 성숙한 10대들을 보니 부럽기도 했고 질투도 났다. 내가 어릴 적에 저토록 깊은 우정을 나누었던가. 그러기 위해 나는 노력했던가. 결코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그 시절에 대한 그리움도 함께...
이들의 모습이 부러워서였을까? 자꾸만 옛 친구들이 생각이 난다.
보행제라는 행사를 우리 학교에서도 할 수 없을까? 거기서 거기인 코스대로 움직이는 수학여행이 아니라 1년을 준비해온 보행제라는 행사를 통해 단 하루동안이지만 아이들과 어른들도 부쩍 성장할 수 있는 그런 행사가 있으면 좋겠다.
애들이 조금 더 크면 무작정 걷기만 하는 여행을 꼭 해보아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