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직을 하고 알게 된 내 앞자리의 풋풋한 젊은 국어선생님은 이 책을 매년 가을 읽는다고 했다. 그리고 친구에게 선물한 것까지 치면 이 책을 20권쯤 샀다했다. 씩씩하고 아무하고나 잘 어울리고 다양한 사람들과 인간관계를 형성하고 있는 그녀가 무엇때문에 그녀와는 정 반대의 성격을 지니었을 이 책의 주인공들에게 빠졌을까? 자신과는 전혀 다르기 때문에? 아마 그녀가 국어 선생님이어서 더 그렇지 않았을까 싶다.
김형경의 세월을 보면서 그녀의 젊은 시절을 옅보면서 마음이 아파 나도 덩달아 앓았다. 답답할 정도로 보수적이고 올곧기만 한 그녀를 보면서 마음이 아팠다. 신경숙의 소설 주인공들도 마찬가지. 그리고 이 책의 하진과 미란역시...
이렇게 깊이 깊이 슬퍼하고 고통스러워하고 더디게 더디게 상처 치유 좀 하지 마라고... 그냥 좀 잊어버릴 것 잊어버리고 살라고. 인생은 어차피 그런 게 아니겠냐고, 완벽한 삶이, 완벽한 사랑이 어디있겠느냐고, 그냥 그렇게 시간에 몸을 맡기다보면 그저 그렇게 살아지고 또 그렇게 잊혀지는 것 아니겠냐고 그렇게 말해버리고 싶다. 제발 쿨하게 좀 살아라, 그러다보면 나름대로 삶도 재미있지 않겠느냐고 그렇게 말하고 싶다. 그녀들을 향해 소리라도 치고 싶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그녀들은 아무 대꾸도 없이 등을 오므려 뱃속의 태아와 같은 모습으로 몇 날 며칠을 잠만 자겠지...... 밤새 스케이트 보드만 타거나, 봉을 들고 아무 거나 사정없이 두드리거나, 책만 읽거나, 밤새 오지않는 전화를 기다리며 새벽을 맞거나, 채워지지 않는 빈 가슴을 끌어 안고 허한 눈으로 산길을 헤메겠지......
나는 이런 그녀들에게 소리치는 대신에 아무것도 하지 않아주는 배려를 배워야한다. 빗속을 울면서 뛰어오면 그저 빗물을 닦아낼 수건을 건네주며 따뜻한 잣죽이나 한그릇 끓여 주면서 그냥 등이나 조금 쓸어주는..... 그런 법을 나는 배워야 한다. 긴 시간을 필요로 하는 그녀들에게 혹은 그들에게 그저 나도 내 긴 시간을 내어주는 법을 배워야 한다.
하진이 내가 될 수도 내 가족이 될 수도 그리고 내 제자들이 될수도 또 내 아이가 될 수도 (그렇게 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지만)있다. 그러니 나는 나의 방법이 아니지만 소리치는 대신에 기다려 주는 법을 꼭 배워야 할 것 같다.
잊으려고 하지 말아라. 생각을 많이 하렴. 아픈 일일수록 그렇게 해야해. 생각하지 않으려고 하면 잊을 수도 없지. 무슨 일에든 바닥이 있지 않겠니. 언젠가는 발이 거기에 닿겠지. 그때, 탁 차고 솟아오르는 거야.(p214)
그들이 자기 발로 바닥을 치고 탁 솟아오를 때 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