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 정말 진국이다. 가볍게 읽히지만 내용이 결코 가볍지 않다. 지로의 성장소설이지만 현실 사회의 문제점에 대해서 콕콕 찝어내는 정말 재미있는 소설이다. 처음으로 오쿠다 히데오의 작품을 읽었는데 어느새 푹 빠져서 아마도 그의 팬이 되지 않을까 싶다.
간결한 문체와 톡톡튀는 대사, 군더더기 없는 내용, 사춘기 소년의 시각이라 눈높이를 낮추어 부담없이 읽을 수 있다는 점. 그리고 너무나 매력적인 인물들...
지로의 친구인 곰삭은 늙은이 같은 말과 행동의 무카이(얼마나 귀여운가!). 현실적이고 재바른 준(이 놈도 너무 맘에 든다), 불량학생 구로키(밥 한 번 사먹이며 머리 한 번 쓰다듬어 주고 싶다), 건방지고 똑똑하며 허영과 진실을 구분할 줄 아는 나나에. 그리고 선량하고 가족적인 남쪽 섬 이리오모테의 섬 주민들. 또한 아이들을 존중하고 남의 사생활을 문제삼지 않으며 규칙을 엄격하게 지키게 하면서도 온화함을 잊지 않는 파이카지학교의 선생님들. 마지막으로 사회부적응자이며, 권력에 불응하는 무정부주의자이며 그리고 진정한 투사이자 자유롭고 강한 영혼의 아버지 우에하라 이치로.
아이는 성장하면서 아버지를 이해한다. 강인해보였던 아버지가 현실에 타협하면서 조금씩 비굴해지고 이중적이 되는 것을, 그리고 뒤돌아서는 굽은 어깨를 나약함을, 어느새 키가 쑥쑥 자라 아버지 키 만해지면 아이들은 그제서야 조금씩 아버지가 완벽하지 않다는 것을 이해하고 한 인간으로 동정하게 된다. 대부분의 성장소설 속 아버지와 아들관계가 이러하다. 현실도 그러하므로.
이 책의 주인공인 우에하라는 다른다. 젊었을때의 이상이 현실속에서 변질되고 자식들을 위해, 보다 안정적인 사회적,경제적 지위를 위해 현실과 타협하며 비굴해지는 아버지가 아니기 때문이다.
우에하라는 끝까지 현실에 굴하지 않고 소신을 잃어버리지 않고 불도저처럼 꿋꿋하다. 그럼에도 도시에서의 우에하라는 난폭하고 일도 하지 않고 빈둥거리며, 어려운 말만 늘어놓으며 학교에 찾아와서 선생님에게 쓸데 없는 말까지 늘어놓아 아들을 곤란하게 만들고 부끄럽게 만든다. 그러다 결국 쫓겨나다시피해서 섬에 가게 된다.
그러나 섬에서는 다르다. 우에하라는 여전히 난폭하고 대책없지만 자신의 노동으로 자신에게 필요한 물건들과 식량을 자급자족하고 남과 더불어 살아가고 불의에 결코 굴하지 않는 모습으로 자신의 이상의 꿈을 끝까지 이어나가려고 한다. 이렇듯 사람은 자신이 있는 장소가 바뀌면 자신의 가치도 달라지는 듯 하다.
그래서 2권의 내용이 특히 좋았다. 도쿄에서의 우헤하라의 주장들이 늘 관습과 법과 사회비리에 이리 부딪치고 저리 부딪쳐 상처뿐이었다면 섬에서는 자신의 개인 노동과 이웃과의 공동체적 관계속에서 개인이 국가와 체제의 간섭을 받지 않고 개개인의 도덕적 판단, 개인의 노동, 타인과의 공동체 삶 만으로 충분히 행복하게 잘 살 수 있다는 이상향을 보여주는 것이라서 마음 속이 훤해지는 것 같았다. 공산주의가 하나의 정치체제로서가 아니라 물욕없는 섬 사람들의 생활문화로 자리잡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아서 정말 좋았다.
아마 지로도 이 이상적인 섬에서 안전하고 건강하게 성장기를 마칠 수 있게 되었을 것이다.
"혁명은 운동으로는 안 일어나. 한사람 한사람 마음속으로 일으키는 거라고""집단은 어차피 집단이라고, 부르주아지도 프롤레타리아도 집단이 되면 다 똑같아. 권력을 탐하고 그것을 못 지켜서 안달이지"(327p)
"날씨 좋은 날에는 논밭을 갈고 비오는 날에는 책을 읽는 것이야말로 본디 인간이 지녀야 할 모습이로고"(127p)
"아버지를 따라하지 마라. 아버지는 약간 극단적이거든. 하지만 비겁한 어른은 되지마. 제 이익으로만 살아가는 그런 사람은 되지 말라고. 이건 아니다 싶을 때는 철저히 싸워.져도 좋으니까 싸워. 남하고 달라도 괜찮아. 고독을 두려워하지 마라. 이해해주는 사람은 반드시 있어"(289p)
몇 달 전에 하종강의 '길에서 만난 사람들' 이란 책을 읽었다. 우리나라의 노동운동을 이끌었던(아니 뒤에서 묵묵히 한 길을 걸어왔던 이란 표현이 더 맞을듯) 사람들이 현재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에 대한 후일담쯤 된다. 노동운동과 학생운동을 하던 많은 사람들이 지금은 다 어디서 무얼하고 있을까? 물론 임종석처럼 정치판에 뛰어들어 소신없이 박쥐노릇이나 하는 사람들도 있어 욕을 먹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소시민으로 살면서 건전한 한 가정을 꾸려나가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길에서 만난 사람들'에서 처럼 소수의 사람들이긴 하지만 아직도 자신이 처한 상황속에서 진보적인 노력들을 끊이지 않고 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물론 이 책의 주인공들이 우에하라처럼 극단적이진 않지만(^^) 그래서 책을 읽으면서 왠지 안심이 되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