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Distant Mirror: The Calamitous 14th Century (Paperback)
Barbara Wertheim Tuchman / Ballantine Books / 198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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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0년 시차의 낯선 문명의 과거로부터 불변하는 인간본성의 반영을 발견한다.

그 발견은 아마 이런 것이 될 것이다.

야만의 세계는 어떻게 출현하는가, 그 원인 행위들은 무엇인가?

 

[summary]

 

감상글의 요약을 앞세우는 이유는 책의 방대함, 이를테면 중세 백과사전이라할 만큼 당대의 다채로운 생활상을 비롯한 정치, 종교, 문화의 모든 것이 망라되어 있어 내 누추한 소회가 산만한 감상이 될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 한 마디로 이 걸출한 역사저술은 타락해가는 교회와 전장의 참상, 궁정과 귀족들의 흥청만청 풍요와 대비되어 절규하는 농민 모두를 목격한 대영주 앙게랑 드 쿠시 7세라는 인물의 삶을 중심으로 14세기 파국의 유럽을 들여다보는 역사 서사(敍事)이다.

 

1303년 훗날 소빙하기로 불릴 혹한과 냉해가 유럽대륙 전체를 휩쓸며 대기근으로 14세기를 맞는 당대인들은 이 세기가 인류 역사상 가장 끔찍한 인간 퇴행의 시대로 기록될 것임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한 세기 내내 유럽 전역을 휩쓴 흑사병, 끝나지 않고 지속되며 점점 확산되어가는 전쟁, 교회의 탐욕과 문란함의 극성 등 모든 것의 부패를 향해 마치 의도적으로 미친 듯 질주해나가는 듯한 재앙의 시대를 통해 이 독특한 역사저술은 600년 시차의 먼 역사의 시간을 오늘의 세계에 비춘다. 그것은 먼 거울, 즉 낯선 문명의 과거에 맺힌 상()으로부터 불변하는 인간본성의 반영을 발견하는 것이 될 것이다. 그 발견을 위한 물음은 아마 이런 것이 될 것이다. 야만의 세계는 어떻게 출현하는가, 그 원인 행위들은 무엇인가?

 

야만과 폭력의 끝을 향하기라도 한 듯 지옥의 구렁텅이로 질주하는 14세기라는 과거는 오늘 우리들의 행동에 여전히 남아있는 인간 본성의 거울이 된다. 변화없이 무한 반복하는 인간의 그 어리석은 행동들을 무엇보다 읽히는 역사(narrative history)’를 통해 모든 대중들이 인간은 역사를 통해 무엇이 되는가?’라는 물음을 스스로 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 이 위대한 저술에서 바로 지금 우리들의 모습을 생생하게 직시하게 된다. 이 책의 국역본 출간에 앞서 거듭 두 차례 읽으며, 오래 펼쳐볼 소장본의 필요성을 느낀 책이었다. 가족들 모두 돌아가며 읽어 보고 서로 그 소회를 나누기에 좋은 저작이다. 터크먼은 14세기 이 야만의 인간 양상이 20세기 나치의 잔혹상으로 반복되었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것은 다시금 오늘 신파시즘과 극우화되어가는 이 세계 양상의 거울이 되어 인류 자신들의 모습을 돌아볼 것을 제안하는 듯하다. 우리들은 이 책으로부터 무수한 인간 반영(反映)들을 발견하고 현실 통찰의 지혜를 거둬 올릴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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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역사는 인간 진보(발전)의 문명 서사가 아니다.

 

역사철학자로서의 헤겔은 역사는 하나의 방향으로 발전하는, 특히 인간 정신이 자기 자신을 인식해 가는 과정으로서 세계사는 자유의식의 진보라고, 자유의 진보라는 통일적 의미의 존재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20세기의 대표 역사저술가인 바바라 터크먼(Barbara W. Tuchman)은 이 주장의 빈틈을 쫓기라도 하듯 진보의 대척에 있는 퇴행의 역사로, 오직 폭력과 야만의 지배로 규칙이 무너져 내리며 그 바닥의 한계로 빠져드는 속박의 진보(?)’가 인간 정신을 휩쓸던 14세기 중세 100년의 재앙적 시기를 다루고 있다. 헤겔의 역사관을 조롱하듯 자유의 보편원리가 이성의 운동으로 진전해가기는커녕 이 시대는 인간의 오판과 우연, 모순과 정신적 지체를 넘어 퇴행으로 치달으며 역사의 시간 속에서 인간 본성의 항구적 변화 불능성을 입증한다. 사학자들은 이 시기를 싫어하고 회피하는데, 인류의 진보라는 패턴에 끼워 맞출 수가 없기 때문이다.”라는 저자 서문의 글은 곧 헤겔 부류의 철학에 대한 반박의 의지표명일수도 있을 것이다.

 

아마 터크먼은 이러한 반()헤겔주의 역사관으로서, 과거를 있는 그대로 복원하는 문헌과 사료 중심의 객관적 역사를 강조하여 역사의 정확성을 기술하는 실증주의 역사학에 기초한 연대기적 서사형식으로 독자적인 역사서술방식을 선택하였을 것만 같다. 이처럼 전통적 역사학자와 다른 걸음으로 자유로운 문체와 극적(劇的) 역사서술을 채택하는, 다시 말해 학술적 엄밀성과 문학적 서사를 결합하여 일반 독자도 몰입해서 읽을 수 있는 이야기로 바꾸어 놓았다. 14세기 내내 유럽 전역을 휩쓴 흑사병, 끝나지 않고 지속되며 점점 확산되어가는 전쟁, 교회의 탐욕과 문란함의 극성 등 모든 것의 부패를 향해 마치 의도적으로 미친 듯 질주해나가는 듯한 재앙의 시대를 통해 오늘의 세계를 비춘다. 종말로 치닫는 14세기라는 과거는 현재를 비추는 거울이 된다. 무엇보다 읽히는 역사(narrative history)’로서 모든 대중들이 인간은 역사를 통해 무엇이 되는가?’라는 물음을 스스로 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랐던 것인지도 모른다.

 

이 책 먼 거울 (A distant mirror)은 역사 속 인간의 행위로부터 윤리적, 정치적 반성의 사유를 추출하고자 하는 치밀한 노고의 과실이다. 대체 인간과 인간사회의 반복되는 재앙의 뿌리에 있는 근원 혹은 요인들은 무엇인지 역사적 시간을 따라 밀도 높고 긴장감 있는 전개로 마치 소설처럼 몰입하게 한다. 터크먼 역사서술의 한 특징인데 저자는 추상적 구조보다 시대를 대표할 만한 특정인물의 삶을 서사의 도구로 삼아 그들의 판단, 오판, 성격, 감정에 주목하게 하여 역사를 인간적 드라마로 만들어낸다. 어쩌면 이것이 이 독특한 역사서를 흥미로운 이야기로 받아들이게 하는 요인일지도 모르겠다. 해서 이 책의 중심인물은 프랑스 북부 피카르디 지역의 대()영주 앙게랑 드 쿠시 7(1340-1397)의 행적과 관련하여 전개된다.

 

공감의 어려움, 즉 중세의 정신적이고 정서적인 가치에 진정으로 들어가기의 어려움이야말로 마지막 장애물이었다. 여기서의 주된 장벽은 바로 당시의 기독교인 것 같다. (...)

중세 기독교의 지배원리와 일상생활 사이의 간극은 중세의 거대한 함정이었다.” -저자 서문에서

 

이 파국의 시대를 둘러보며 인간이라는 종이 이전에 오늘보다 더 나쁜 일도 견디고 살아남았음을 알게 됨으로써 오늘의 삶을 안심하게 될 거라는 저자의 조크의 목소리에 독서 내내 연신 머리를 끄덕였다. 대체 14세기가 왜 치명적 재앙의 시기였는지, 역사의 진보라는 이해에 파열음을 내게 하는지, 그 영향의 요인들을 찾는 대항해(1,200여 쪽에 이르는)는 그야말로 흥미진진한 시간이 된다. 14세기 100년의 시간 동안 인간을 더할 나위 없는 야만과 폭력의 심화상태로 몰아넣은 현상들을 시시콜콜 열거하려면 아마 이 책의 내용을 모두 쏟아 내놓아야 할 만큼 무수하게 복잡한 사안들의 상호 얽힘을 일일이 기술해야 할 터일 것이다.

 

2. 세계의 질서와 규칙은 어떻게 무너지는가.

 

그것은 14세기가 시작되자 몰아치기 시작한 기후변동으로 인한 대기근, 교회의 극단적인 부패와 타락을 비롯한 교권의 분열, 14세기 내내 시차를 두고 6차례나 유럽 인구를 몰살시킨 흑사병의 창궐, 프랑스의 왕위 계승을 빌미로 삼아 영지를 두고 벌어진 프랑스와 잉글랜드의 전쟁으로 시작되어 이후 100년간 이해관계망의 복잡한 얽힘으로 심화 확장되어간 백년전쟁, 이 전쟁의 부산물인 유럽대륙 전체를 약탈 유린, 방화, 살해가 무법적으로 자행되는 예외없는 유럽전역으로의 귀족과 기사계급들로 구성된 산적단과 용병 무리의 확산, 기사도라는 모순으로 점철된 영예와 관능이 뒤섞인 허위의 정신이 야기한 폭력성의 파급으로서 이식된 파국적 발현들, 여전히 기독교 아마겟돈, 예수 재림이라는 유한 역사성에 매몰된 어리석은 도시평민과 농민들의 노예근성 등이 상호 최악의 상태를 향한 암흑, 즉 적대적이고 폭력적인 사건들의 압력으로 질서와 규칙이 남김없이 무너져 내린 무법의 시대를 목격하게 한다.

 

정말이지 스위스 역사학자 시스몽디(J.C.LS. de Sismondi)의 말처럼 “14세기는 인류에게 좋지 않았던 시기였다.” 한꺼번에 이러한 동시다발의 재앙적 사건들이 발생했다는 이유만으로 인간과 그들의 사회가 야만으로 복귀하는 것일까? 물론 그럴 수 있겠다. 대량운송 역량이 없던 시대에 기근은 지역자원에 의존해야만 하던 사람들을 굶주림에 시달리게 했을 것이고, 거기에 교회의 사악하기 그지없는 약탈적 세금 징수, 전쟁으로 인한 자원 강탈, 흑사병과 전쟁으로 인한 인구감소가 불러온 노동력의 가공할 감소, 여기에 일 없는 귀족들이 벌이는 산적단의 약탈과 파괴, 살인 등이 쉴 새 없이 몰아닥치는 세상이라면 그 누가 온전한 정신으로 살아남을 수 있겠는가. 사실 오늘의 시선으로 보면 정말 낯선 문명, 아니 문명이랄 수 없는 세계를 들여다보는 느낌이다.

 

“14세기의 헤픈 정서의 이면에는 고통과 죽음의 장관에 대한 전반적인 무감각이 있었다.”

 

이러한 시대에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품게 될까? 그 어디에서도 그 누구에게도 하물며 교회에서도 보증된 미래에 대한 느낌은커녕 하루를 견딜 구원조차도 전혀 찾을 수 없었던 사람들에게 도덕성이란 어쩌면 낯선 언어였을지도 모른다. 거듭되는 국왕 등 귀족세력의 오판과 실정(失政)은 체포된 귀족과 국왕을 석방하기 위한 몸값이라는 납세의 부담 증가로 돌아오고, 그 누구도 살아남을 수 없이 휩쓰는 흑사병은 무의식적으로 인명(人命)에 대한 경시를 조장했을 것이다. 더구나 끊임없이 벌어지는 약탈전쟁과 산적단의 싹쓸이식 집단 학살에 노출되면 삶과 죽음의 경계가 흐릿해졌을 것이다. 여기에 더해 교회는 삶이란 기껏해야 영원한 고향을 향한 힘들고 지치는 여행일 뿐이며, 내세인 하느님에게로 나아가는 중에 겪는 유배의 한 단계라는 의식이라고 떠들어대고 있었으니, 지상의 삶에서 겪는 잔인하고 참혹한 헤어날 수 없는 형편은 더더욱 축적된 인류의 지식들인 규칙들의 가치를 상실토록 하는 요소였을 것이다.

 

영토의 지배를 통한 권력의 확보는 필연적으로 전쟁이라는 폭력을 요구한다. 14세기 내내 유럽 전역을 지옥으로 몰아넣은 백년전쟁은 프랑스 국왕 필리프4세의 손자인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3세가 프랑스왕위 계승권의 주장을 빌미로 시작한 영토 야욕, 즉 교역로의 안정적 확보와 생산물 거점의 확보를 위한 침략전쟁이 발단이다. 이것을 오늘날 형성된 국가와 비교할 수 없는 것이 부계와 모계의 가문들, 결혼으로 인해 얽힌 가문들, 조약과 동맹으로 결합된 관계들로 인해 유럽 대륙 전체에 흩뿌려져 있는 그들의 영지로 인해 발생하는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뒤얽혀 있는 국가이전의 봉건체제 결과이기 때문이다. 바바라 터크먼이 서사의 중심인물로 내세운 대영주 쿠시가문의 앙게랑 7세는 이러한 양상을 보여주는 전형적 귀족이자, 기사이며, 소위 산적단(용병부대)으로 불리는 세력과의 그 경계가 모호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앙게랑 7세의 아버지인 앙게랑 6세와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공국 카타리나 공주와의 결합은 프랑스 국왕과 오스트리아 공작 사이에 두 번의 조약 체결을 통해서 이루어진 이미 영토와 부와 정치적 거래를 함유하고 있다. 이것은 카타리나를 통한 새로운 영지를 포함하고 막대한 결혼 지참금과 상호 전쟁동맹을 의미한다. 또한 앙게랑 7세는 잉글랜드 에드워드 3세 국왕의 장녀 이자벨라와 결혼함으로써 프랑스, 잉글랜드,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등에 산재한 그의 영지는 유럽 대륙 곳곳에 이해관계를 갖게 된다. 이것이 실체화되는 과정으로서 교황령 회복을 위해 이탈리아 지역을 통과하며 벌이는 전쟁의 양상에서 드러나는 데, 경로의 도처에서 이해관계자들과 마주치게 되고, 분명 적대적 전쟁이지만 혈연으로 맺어진 영주의 지역을 지나갈 때면 상호 양해 아래 공격 없이 그저 통과한다거나, 어제의 우호관계가 돌연 상대의 이해관계의 변화로 인해 배신을 당하는 낭패를 당하는 등 그야말로 정상적 전쟁이라 할 수 없는 혼전의 양태를 드러낸다.

 

게다가 교황은 이를 자기 권력의 보호를 위한 대리전으로 삼음으로써 그 혼전의 양상은 더욱 복잡해진다. 교황파(그 속에서도 또 여러 분파들), 국왕파(잉글랜드 국왕파 프랑스 국왕파 등), 그리고 개별 영주의 이해득실의 판단에 따른 내편과 네편의 규정 불가능성은 더욱 전쟁을 난감하게 바라보게 한다. 이러한 난맥상이 역사의 유래가 없는 100년 전쟁을 만들어내고 확대시킨다. 이에 대한 피해는 누가 안아야 할까. 고스란히 피지배자들인 농민과 상인 등 평민들이다. 더구나 공식 전쟁이 아닌 지역약탈 전쟁도 쉴 새 없이 발생되는데, 이것의 토대인 당대 기사귀족계급의 정신인 기사도 정신이라는 허무맹랑하고 모순으로 점철된 폭력성과 예절이 결합된 기이함의 발로가 중대하게 작용한다.

 

프랑스와 잉글랜드의 공식 전쟁이 일시적 휴전 상태에 들어가면 병력은 갑자기 주 수입원인 약탈수입이 사라진다. 이를 벌충하기 위해 약탈을 지속하는 소위 산적단이라는 집단이다. 이것의 세력이 어찌나 강력한지, 그 수장들이 귀족의 이름을 하고 역사 기록에 남아있는 이유이다. 전쟁으로 이미 손상이 극심한 지역의 살아남은 곳을 이들이 다시금 유린한다. 이들 폭력성의 궁극적 배경과 관련해서 눈에 띄게 유치하고 잔인했던 중세 행동의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는 억제되지 못한 충동으로 인한 두드러진 무능력의 원천을 주목하게 된다.

 

인구의 절반이 21세 미만이었고, 3분의 114세 미만이었다는 사실이다. 각종의 전쟁 지휘자들과 기사들이 대개 20세 전후였다는 사실에서 전장의 잔인한 야수성이 그들의 격렬한 충동의 배설이었음을 짐작케 한다. 강간, 약탈, 파괴, 방화, 살인. 한 세기 내내 인구를 절멸하다시피 생명을 반복적으로 습격한 흑사병과 이러한 참혹한 야만적 전쟁은 서로 지옥의 형상을 더욱 재촉했을 것이다. 넘쳐나는 시체들과 악화된 생활환경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그 원인을 모호하게 하며 삶을 더욱 황폐시켰을 것이다. 14세기 중세의 심리란 어쩌면 성장하지 못한 유아성 탈피에 실패한 시대성의 한계였는지도 모른다. 교회를 위시한 국왕과 귀족 지배세력의 총체적 부패와 타락이라는 정신적 부패의 기반위에 전염병과 전쟁으로 넘쳐나는 시체와 굶주림은 끊임없이 서로 순환하며 그 부정성의 끝으로 치달았다.

 

3. 파괴되는 인간의 삶 - 성숙하지 못한 시민 의식

 

앞서 언급했듯 프랑스 국왕 필리프4세와 교황 보니파시오와의 싸움으로 비롯된 아비뇽 유수(-幽囚, Avignon Papacy)’라고 칭하기도 하는 교황청 이전의 배경도 어떤 세속 군주에게도 어떠한 형태의 세금도 내지 말라고 금지하며 국왕의 조세 부과권은 교황 자신의 승인 하에서만 가능하다는 황금 독점의 탐욕이 불러온 결과이다. 권원을 받기 위해서는 모든 피조물은 유일한 거룩한 자인 (자신인)교황에게만 복종하는 것이 필수라는 이 황당무계(荒唐無稽)한 선언은 프랑스가 지배하고 있던 나폴리와 시칠리아 왕국의 영지가 있던 프랑스 영토 내 아비뇽으로 교황청의 이전을 초래한다. 세입과 모든 통치 조직을 중앙집중화하여 위신과 권력 벌충에 혈안이 되어있던 교황의 무차별적 조세 약취(略取)와 기만적 성물거래 판매 수익, 사면권 판매, 죽어가는 자의 유증 몰수에 이르기까지 그악한 부에 대한 탐닉이 만들어낸 결과다. 조세 부과를 두고 벌어진 싸움의 피해는 고스란히 농민의 부담이었다.

 

아아, 단 하루도 쉬지 못하는 나는 장차 어떻게 될까? (...) 촌민으로 태어난 바로 그 순간부터 힘들구나. 태어날 때에 고통도 함께 태어나는 구나 (...) 너희 귀족들은 마치 먹이를 찾는 늑대와도 같다. 너희는 지옥에서 울부짖게 될 것이니...“

 

이렇게 요구되는 것이란 인내, 고통, 체념뿐이었던 농민의 비참은 절정에 이르렀다. 끊임없는 전쟁 자원의 강제부담과 대기근의 굶주림, 흑사병의 반복적 강타. 교회와 귀족 계급의 폭력적 강탈이 그 어떤 제약도 없이 오직 자신들의 이익만을 위해 자행되는 사회는 사실 그리 쉽게 상상되지 않는다. 홉스가 말한 인간은 인간에 대해 늑대라는 말이 여지없이 들어맞는 사회, 오늘의 독자인 내게는 하나의 폭력을 야기했던 극히 사적 탐욕의 추구를 모두가 개별적으로 자행할 경우, 그것들이 지속적으로 쌓이면 규칙파괴의 압력은 자동적으로 작동된다는 실증 사례로 받아들여진다.

 

시민이나 농촌 빈민의 저항이 왜 없었겠는가. 1358년 우아즈 강변 생뢰마을에서 시작되어 10만 명에 달하는 농민조직이 교회를 상대로 전쟁을 벌였으며, 소부르주아와 연합한 이 비()귀족 공동전쟁은 기사귀족, 혹은 산적단에 의해 무참하게 도륙되어 한 달 만에 절멸되기도 한다. 젊은 쿠시 영주 앙게랑 7세가 자기 영지의 신사계급의 선두에 나서서 자크들의 절멸을 완수했다.” 이 기록처럼 쿠시의 영주는 자크들이 집결한 클레르몽으로 진격하여 3000명 이상의 농민을 학살하여 저항운동을 압살하는 공(?)을 세우기도 한다. (자크(Jacques)는 귀족계급이 농민을 비하하여 부르던 호칭이다)

 

사실 이 농민봉기는 얻은 것이 아무것도 없었으며 변화도 전무했다는 점에서 이미 누적된 죽음만을 더 늘렸다는 사가(史家)들의 평처럼 농민저항자들은 스스로의 심리적 열등감을 극복하지 못했음을 보여줄 뿐이다. 아직 그들의 정신이 숙성되려면 역사의 시간이 더 필요했던 것이리라. 이와 더불어 1358년 삼부회의를 소집하여 국왕의 실정과 추밀관 등 왕의 측근들의 부패 척결을 요구하는 상인들로 이루어진 제3계급의 개혁운동도 있었다. 시민지도자인 마르셀의 도시 파리 성벽의 수호를 통해 국왕을 비롯한 귀족과 성직자 계급의 실정과 부패의 시정에 접근했지만 내부 지지자들에 의해 피살됨으로써 좋은 정부를 향한 꿈도 일장춘몽으로 끝나버린다.

 

바라바 터크먼은 이에 대해 짧은 논평을 하는데, 프랑스 국민은 군주제를 제한하려는 시도를 지지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 시민대중의 인식능력은 시대의 문화를 호령하고 사회구조 깊이 뿌리내린 제도 종교인 기독교 천년 지배가 만들어놓은 수동적 삶을 떠날 수 없었을 게다. 삼부회의 권리가 사라지고, 이들이 결의했던 개혁법 조항들은 페기 되었다. 이로써 프랑스 왕실은 절대왕정 시대를 누리며 더욱 왕권이 방치되는 것을 우리들은 안다. 시민대중은 모든 문제, 즉 과도한 세금, 부정직한 정부, 변조된 주화, 군사적 패배. 산적단의 도적질, 자국의 영락한 상황 등을 황실의 사악한 추밀관과 비겁한 귀족 탓으로 돌렸으며. 국왕이나 왕세자 탓으로 돌리지 않았다.이러한 역사들을 읽을 때마다 항상 역사의 발목을 잡는 시민적 몽매성이라는 수구성의 본질을 보는듯해 울화가 치밀어 오른다.

 

4. 결어 - 파국의 역사에서 우리가 읽어야 하는 것

 

600년 시차의 먼 거울인 14세기 보증된 미래에 대한 느낌을 전혀 갖지 못했던 고통의 시대로부터 무엇을 볼 수 있는 것인가? 나는 시민 개혁운동의 실패의 과정에 주목했는데, 오늘 우리들이 경계해야하는 것은 실정에 대한 개혁을 주도했던 삼부회의 지도자 마르셀이 자신의 지지토대인 시민집단에 의한 피살로 끝났다는 이면의 실체이다. 이러한 살해집단의 심리적 본성은 아렌트도 지적했듯 오늘날 파시즘으로 지칭되는 것, 특히 전체주의의 특징 중 하나인 강자 동일시의 유해한 감정이다. 자신들은 분명 피지배 계급임에도 왕족과 귀족, 성직자 계급의 그 약탈적 폭력성과 진실을 호도하는 은폐된 탐욕에 자신들의 권한을 떠넘기는 노예근성이다. 이것이 바로 지금 여기에서도 여전히 사라지지 않은 채 떠도는 것은 그것이 바로 우리들의 취약한 본성이기 때문일 것이다.

 

문제가 복잡해지는 것은 쾌락을 금지하면서 실제로는 단념하지 않았기 때문이며,

교회가 그 금지를 파열시키는 주체였기에. 금전과 소유에 대해서라면 14세기보다

더 관심을 쏟았던 시대가 없었으며, 이른바 육()에 대한 관심은 극단으로 치달았다.”

 

또한 타락의 극한 지점까지 치달은 그들만의 폐쇄된 카르텔을 형성하여 자신들의 이권을 위해 서로 결탁하여 사회를 밑바닥까지 좀먹었던 중세 교회는 오늘의 한국 개신교마피아나, 사법카르텔, 언론 카르텔 등 기득권으로 결탁한 세력처럼 이 사회가 오랜시간 축적한 민주주의 제도와 관행들을 무너뜨리는 중대한 악성 요인의 실체를 보여준다. 혼인과 동맹과 이해거래로 혼란스럽게 엮인, 폐쇄된 카르텔 네트워크로 형성된 14세기 유럽의 귀족들이 보인 양태는 그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어떻게 행동하는지, 그 결과 세계의 파국을 만들어내는 대표적 원인임을 증거 한다. 혈연과 이해(利害)로 얽힌 관계에는 정의(正義)의 윤리가 들어서지 못한다. 즉 규칙과 질서를 무력하게 만들어버린다. 그러한 세계에서 대중의 삶을 실종되기 마련이다. 그렇게 침몰을 맞이하게 될 때, 중세의 사람들처럼 아마겟돈이라는 최후의 전쟁 승리로 새로운 세계가 올 것이라는 망상의 기다림 같은 것은 오늘날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힘겨운 고통의 나락에 젖은 삶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프랑스와 잉글랜드, 스페인과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공국의 왕과 대영주 귀족들이 그네들의 사적 이익을 위해 벌이는 전쟁이 초래한 것은 무엇인가? 수많은 평민들의 무고한 죽음과 삶의 기반 상실 아닌가. 그런데 그들에게 전쟁을 야기한 지배계급은 어떻게 행동했나? 끊임없는 강탈과 협박, 살해의 위협 아닌가 말이다. 그들 지배계급은 그 오랜 소모적 전쟁에도 불구하고 이 역사의 기록에는 휘황찬란한 궁중과 금을 입힌 산해진미의 성찬 아닌가. 죽을 때까지 쥐어짜여지는 평민과 농민의 한탄이 무얼 말하고 있는가. 전쟁의 폭력을 미화하고 그 야만적 폭력에 환호하는 심리가 무엇인지 알지 못함을 돌아보아야 한다.

 

저술의 제목이 "A Distant Mirror"인 것은 이 야만과 파국의 역사를 오늘의 우리들의 본성을 반영하는 것으로 읽기를 바라는 의지의 표현일 것이다. 이 역사 속 인간의 행위는 끝없이 반복되고 있다. 역사는 결코 반복되지 않지만, 인간은 항상 반복한다.’는 볼테르의 말은 인간행위의 그 반복성에 대한 경고의 선언인 것이다. 역사는 우리들의 거울이다. 우리는 그 거울에서 자신들의 모습을 볼 수 있어야 하며, 그 발견된 모습으로부터 자기 인식의 지평을 돌보아야 할 것이라 믿는다. 세세하게 서술된 방대한 이 역사저술의 미흡한 감상에 머문 것이 유감스러울 뿐이다. 내 능력의 한계이다. 독자들은 흑사병, 십자군 전쟁, 교회의 타락, 세금, 노역, 노예제(봉건제)등 사회구조의 붕괴와 함께 결혼, 출산, 노동, 성 역할 등 개인의 삶을 구체적으로 재구성하여 역사의 시간이라는 흐름 속에 인간의 심리와 정치적 긴장을 극적으로 직조해낸 이 저술로부터 무한한 영감과 반영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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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토 슈타이얼 지음, 이계성 옮김 / 워크룸프레스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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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가 만들어내는 평균적 세계의 이미지들, 

텍스트들은 어떤 의미들을 함유하고 있는가?


책의 본문을 이야기하기 전에 기괴한 형상의 표지 이미지부터 시작해야겠다. 나는 저자가 2024년 스테빌리티 AI가 공개한 오픈소스 모델 디퓨전 3(SD3) 미디엄에 “‘풀밭 위에 누운 소녀라는 무해한 요청을 프롬프트에 입력하고 그에 반응해 내놓은 출력 이미지라는 말 밖에 모른다. 히토 슈타이얼이 정확하게 어떤 형용을 추가한 요구를 써넣었는지는 모르지만, 이 요청에 의해 생성된 사지가 뒤틀린 기괴한 이미지가 책 표지의 생물체 이미지다.

 

표지 및 62, 스테이블 디퓨전 3‘풀밭위의 소녀를 생성한 이미지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이미지를 생성하기 위해 기계학습 재료로 수집된 대량의 데이터와 그 학습을 위한 막대한 에너지자원의 소비의 결과가 이것인가? 우린 AI, 나아가 AGI에 무엇을 기대하고 있는가? 이것을 위해 미친 듯 자원을 쏟아부으며 맹렬하게 독점적 지위를 선점하기위해 광란의 질주를 하는 기업들 정신의 정체는 무엇인가? 우리들이 AI에게 궁극적으로 기대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들 질문을 향한 2017년부터 2024년에 이르는 이미지 제작 현장에 대해 2025년 출간한 일종의 현장 보고서가 이 저작이다.

 

히토 슈타이얼의 이 책은 생성형 AI를 단순한 기술 혁신이나 창작 도구로 바라보지 않는, 즉 AI 자체에 대한 기술 비평이나 예술 비평을 넘어선다. 그것은 생성형 AI를 둘러싼 기술, 자본, 국가, 전쟁, 노동, 이미지, 정치의 관계를 총체적으로 분석하려는 오늘 지구촌에서 벌어지는 비판적 현장 보고서에 가깝다. 그녀가 궁극적으로 묻는 것은 ‘AI는 무엇을 만들어 내는가?’가 아니라 AI는 어떤 사회, 세계를 만들어 내고 있으며, 그 과정에서 우리들은 무엇을 잃고 있는가?’라는 질문일 것이다.

 

1. 위기 자체를 성장 동력으로 하는 AI

 

우선 슈타이얼은 생성형 AI의 등장을 기술 발전의 자연스러운 결과로 보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금융위기, 팬데믹, 기후위기, 전쟁, 극우 정치의 부상이라는 다중 위기 속에서 출현한 현상으로 해독하는 것이다. 따라서 AI는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등장한 기술이라기보다, 위기 자체를 새로운 성장 동력으로 전환하려는 자본주의적 프로젝트와 결부되어 있다고 본다. 즉 생성형 AI는 이러한 세계의 위기와 무관하게 등장한 기술이 아니라, 오히려 그 위기들을 새로운 경제적 기회로 전환하는 자본주의적 욕망체계 속에서 등장했다는 역사적 맥락에 주목한다.

 

특히 슈타이얼은 AI와 전쟁의 결합을 중요한 문제로 제기한다. 가자지구와 우크라이나는 단순한 전쟁터가 아니라 AI 기반 감시 체계와 표적 생성 시스템, 자동화된 군사 기술이 실험되는 거대한 연구소가 되었다. 팔란티어와 같은 기업들이 군사 데이터를 분석하여 전장에 활용하는 사례는 AI 발전이 국가안보 논리와 군비 경쟁 속으로 깊이 편입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 과정에서 전쟁은 단순히 정치적 목적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AI 학습을 위한 데이터를 생산하는 장치처럼 기능하기 시작한다. 범용 인공지능과 초지능 개발 경쟁은 결국 승자독식이라는 자본주의적 논리에 따라 움직이며, 국가와 기업은 이를 피할 수 없는 운명처럼 제시한다. 그러나 슈타이얼은 이러한 가속주의적 담론이 실제로는 소수의 기술 기업과 초고액 자산가들의 이해관계를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일 뿐이라고 본다. 이스라엘이 지금 전쟁을 끝낼 의지를 보이지 않은 요인의 하나일 수도 있다.

 

2. 통계적 산물로서 AI 생성물이 의미하는 것 - 평균성, 누구를 위한 평균인가, 그것이 수렴하는 것은?

 

그녀의 비판은 이미지 자체에 대한 분석으로 이어진다. 생성형 AI는 흔히 창조적 도구로 포장되지만, 실제로는 미술사와 인터넷 전체에 축적된 방대한 인간의 창작물을 무단으로 수집하고 평균화하여 재가공하는 체계에 가깝다. 따라서 AI가 생산하는 이미지는 현실을 재현하는 사진 이미지와 근본적으로 다르다. 그것은 실재와의 접촉이 아니라 확률과 통계에 기초한다. 과거 사진이 현실의 흔적이었다면, AI 이미지는 데이터세트 속 관계들의 평균값이다. 여기서 이미지는 더 이상 진실이나 사실을 지시하지 않는다. 대신 가장 개연적인 것, 가장 그럴듯한 것, 가장 자주 등장한 것에 수렴한다.

 

본문 78, 상단 이미지: LAION-5B 데이터 세트의 학습재료/ 하단 이미지: 스테이블 디퓨전이 생성한 히토 슈타이얼의 이미지

 

이 심층학습 텍스트2 이미지 생성기 중 하나인 LAION-5B데이터 세트에 그녀의 사진도 몇 장 들어있는 모양이다. 슈타이얼은 모델에게 히토 슈타이얼의 이미지를 생성해달라고 요청한다. 어떤 결과물을 내놓았을까? 날조로 증강된, 사회적 신호들을 극단적 논리로 밀어붙인 지극히 편협하고 왜곡된 동양인의 이미지를 내놓는다. 슈타이얼은 화가 많이 났을 테다. 얼굴인식의 편향을 줄이기 위해서라는 위선적 명분에 기대 유령같은 인종화된 표현형으로 사회관계를 고도로 이념화된 최적치로 수렴한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이것이 슈타이얼이 말하는 통계적 사실주의에 숨어있는 권력의 편향이다. AI는 대규모 데이터 속에서 패턴을 추출하여 이미지를 생성하지만, 그 과정은 현실에 대한 관찰이 아니라 양적 축적에 의존한다. 충분히 많은 데이터를 모으면 세계의 본질이 드러날 것이라는 믿음이 그 배후에 있다. 그러나 이 방식은 현실을 이해하기보다 평균을 규범으로 만들 위험을 내포한다. 생성된 이미지는 특정 개인이나 사건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사회가 상상하는 평균적 인간상과 평균적 세계를 시각화한다.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례가 슈타이얼이 언급하는 야누스 문제이다. 드림 퓨전이나 텍스트 투 3D와 같은 시스템은 종종 서로 다른 방향을 바라보는 두 개의 얼굴이 결합된 기이한 인물을 생성한다. 이는 기계학습이 얼굴 인식에 지나치게 편중된 결과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개인과 집단의 관계라는 더 근본적인 문제를 드러낸다. 하나의 인간은 어떻게 집단을 대표하는가? 반대로 군중은 어떻게 하나의 얼굴로 표상될 수 있는가? AI가 만들어내는 인물들은 특정 개인이라기보다 수많은 얼굴들의 평균적 합성물이다. 이들은 실제 인간이 아니라 집단적 통계가 만들어낸 유령 같은 존재들이다.

 

이 지점에서 슈타이얼은 19세기 우생학자 프랜시스 골턴의 합성사진을 떠올린다. 골턴은 범죄자, 유대인, 결핵 환자 등의 사진을 겹쳐 특정 집단의 전형적 얼굴을 만들려 했다. 오늘날 AI가 생성하는 평균적 얼굴 역시 이와 유사한 위험을 안고 있다. 인종화된 표현형이나 사회적 편견이 데이터세트 속에 축적될 경우, AI는 그것을 객관적 현실인양 재생산한다. 데이터는 복잡한 사회적·역사적 과정을 삭제한 채 마치 특정 특성이 집단에 본질적으로 내재한 것처럼 보이게 만든다. , 매개와 해석의 과정이 사라지고 통계적 결과가 곧 진실인 것처럼 제시된다.

 

더 나아가 이러한 시스템은 인간 사회의 조건화 방식 자체를 반영한다. AI는 서로 연관된 평균치를 계산하면서도 동시에 극단적이고 비현실적인 이상치를 향해 수렴한다. 예컨대 아름다움, 성공, 생산성의 기준은 평균을 기반으로 형성되지만, 실제로는 거의 도달 불가능한 이상적 모델을 규범으로 제시한다. 문제는 이러한 규범이 자연스럽고 자생적인 결과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그러나 그 배후에는 시장의 이해관계와 알고리즘적 최적화, 수많은 가중치와 매개변수가 작동하고 있다. 신경망의 은닉층은 이러한 사회적·이념적 개입을 가린 채, 결과만을 객관적 사실처럼 드러낸다.

 

3. AI의 물질적 토대가 말하는 것 - 거대한 열역학적 생산체계

 

슈타이얼은 또한 AI의 물질적 토대를 강조한다. 생성형 AI는 막대한 전력과 자원을 소비하며, 데이터센터와 화석연료 기반 인프라에 의존한다. 따라서 AI는 비물질적 정보 기술이 아니라 거대한 열역학적 생산 체계다. 화석연료를 태워 얻은 에너지가 이미지를 생산하고, 그 과정에서 환경 파괴와 사회적 비용이 발생한다. 그녀가 이익은 사유화되고 위험은 사회화된다고 말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데이터를 제공한 이용자들, 콘텐츠를 만든 창작자들, 편향을 제거하기 위해 저임금 노동을 수행하는 미세노동자들은 보상을 받지 못하지만, 기술 기업들은 그 성과를 독점한다.

 

결국 슈타이얼이 비판하는 것은 기술 그 자체가 아니다. 그녀가 문제 삼는 것은 AI를 둘러싼 사회적 관계와 권력 구조이다. 생성형 AI는 인간의 창의성을 확장하는 도구일 수 있지만, 동시에 전쟁을 자동화하고, 평균을 규범으로 만들며, 편향과 차별을 재생산하고, 방대한 무급 노동을 수탈하는 체계이기도 하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AI가 얼마나 더 강력해질 것인가가 아니라, 누가 그것을 소유하고 통제하며, 그 혜택과 위험을 누가 부담하는가를 묻는 일이다. 슈타이얼에게 AI는 미래 기술이 아니라 오늘날 자본주의와 국가 권력의 작동 방식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반향적 실체이며, 우리는 그 반영 속에서 기술의 문제가 아닌 민주주의와 인간 사회의 미래를 보아야 한다.

 

한편 슈타이얼은 AI가 문화와 정치에 미치는 영향도 우려한다. AI는 대규모 데이터의 평균을 바탕으로 작동하기 때문에 예외적이거나 독창적인 것을 점차 제거하고 가장 그럴듯한 것만 반복한다. 이는 모델 붕괴(model collapse)’ 현상으로 나타나며, 결국 문화는 획일화되고 상투화된다. 인터넷과 AI는 표현 비용을 낮췄지만, 그 결과 형성된 공론장은 깊은 정치적 조직화보다 단기적 관심과 인정 욕구에 의해 움직이는 공간이 되었다. 정치 역시 점점 더 파편화되고 개인화되며, 연대보다는 정체성 경쟁으로 변질된다.

 

이러한 비판의 밑바탕에는 더욱 근본적인 철학적 질문이 놓여 있다. 상식은 무엇인가? 인간의 직관은 어떻게 형성되는가? 개인과 집단은 어떤 관계에 있는가? AI는 인간의 사고를 모방한다고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통계적 상관관계를 통해 세계를 계산할 뿐이다. 따라서 인간의 판단과 경험을 데이터로 환원하는 순간, 우리는 세계를 이해하는 능력 자체를 잃어버릴 위험에 처한다.

 

4. 결어 - 생성형 AI, 범용 AGI를 향한 궁극적 각축전의 의미; 현대사회의 권력구조의 거울

 

반복하지만 슈타이얼의 핵심 주장은 생성형 AI가 단순한 기술 혁신이 아니라 현대 사회의 권력 구조를 압축적으로 드러내는 거울이라는 것이다. AI가 생산하는 것은 이미지뿐 아니라 평균성, 순응성, 군사화, 착취, 그리고 통계적 현실이다. 따라서 우리가 물어야 할 것은 AI가 얼마나 똑똑해질 것인가가 아니다. 오히려 이 기술은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 “그 비용은 누가 지불하는가?”, “누가 이 시스템을 소유하고 통제하는가?”, “확률이 진실을 대체하는 시대에 인간의 판단과 정치적 책임은 무엇이 될 것인가?”라는 물음이다. 슈타이얼에게 AI 비판은 결국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민주주의와 사회의 미래를 둘러싼 정치적 문제인 셈이다.

 

슈타이얼은 AI 자체를 본질적으로 악한 기술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라 점이다. 오히려 그녀는 반복해서 왜 현재의 AI가 이런 방식으로 개발되고 있는가?’를 묻는 것이다. 따라서 그녀의 비판 대상은 기술 자체라기보다 기술을 둘러싼 자본주의적·군사적·국가주의적 권력장치(dispositif;배치)에 가깝다 라고 판단하는 것이다. 이런 방식이란 바로 이렇게 표현될 것이다.

생성형 AI는 단순한 이미지 생산 기술이 아니라, 현대 자본주의와 국가 권력이 세계를 평균화하고 관리하는 방식을 드러내는 거대한 통계적 장치이며, 따라서 AI의 문제는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경제적 문제임을 드러내는 것이다.

 

끝으로 빼놓을 수 없는 슈타이얼의 통찰로 마무리하련다. 기계 학습 이미지는 정체된 시각적 *슬롭을 만들어내는 최적화 시스템이라는 지적이다. 이것은 평균을 향해 수렴하여 중간이라는 통계적 조합, 그 주변을 공전하면서 협소한 주류를 만들어내는 자본의 시장성 발현이다. 관습과 상투성을 벗어나지 못하고 가상의 정규분포곡선에 몰려들며 고만고만한 이미지와 텍스트로 귀결되는, 그러함으로써 문화의 교착과 획일화를 조성한다. 결국 과거를 끝없이 변주하는 수구성과 획일성이라는 전체주의는 오늘 AI의 본질에 내재된 것이라는 말일 것이다.

 

사실 슈타이얼의 글은 문장 하나하나가 굉장히 압축적이고, 철학·미디어이론·정치경제학·기술비평이 뒤섞여 있어서 그대로 읽으면 논점이 흩어져 보이기 쉽지만, 전체를 관통하는 축은 의외로 단순하다. "AI가 만들어낸 평균적 세계를 우리는 현실이라고 받아들여도 되는가?", "지금 AI가 학습하고 있는 것은 세계 자체가 아니라, 자본주의 플랫폼 사회가 이미 왜곡해 놓은 세계상은 아닌가?" 로 압축 할 수 있을는지 모르겠다. ‘AI 기술철학+ AI 정치경제학이라고 말 할 수 있는 이 책을 읽으며 오늘 우리들이 사용하는 인공지능이 사회가 가진 규범과 편견을 재생산하는 정치적 도구이기도 하다는 생각을 품을 수 있다면 아마 이 글의 소임은 다한 것일 테다.

 

히토 슈타이얼(Hito Steyer;1966.1,1~), 독일 뮌헨 출생의 일본계 독일인

베를린 예술대학 교수로 재직중


*AI 슬롭(AI Slop): 2025년 올해의 단어로 선정된 단어다. 이는 인공지능을 활용해 대량 생산된 저품질의 디지털 콘텐츠라는 뜻을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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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보다 : 여름 2026 소설 보다
구소현.남궁지혜.박민경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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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해의 문지문학상후보작들을 이 계절의 소설로 세 편씩 선정해 소설선집을 꾸려 펴내는 소설보다를 매 계절 읽으며 말하지 않은 부분이 있음을 문득, 아니 새삼스레 알아차렸다고 해야 할까? 이 선집에는 평론가와 작가의 인터뷰들이 해당 단편작품에 이어 실려 있다. 그 글들을 읽으며, 평론가들의 세심하고 주의 깊은, 또한 다정하지만 엄격한 시선들을 살필 수 있었다. 특히, 해당 작품을 떠나 작가의 다른 장소와 지면에서의 지나가듯 언급한 말(문장)들 조차 작품에 대한 이해를 더해가려는 노고들을 자주 접하게 되었다. 이 선집은 탁월함을 향해 나아가는 우리 시대의 젊은 소설가들과 그네들의 작품 뿐 아니라 문학평론가들의 독해 관점을 엿보는 작은 통로로서 독자 대중과 평론가를 이어주는, 그래서 그들과 독자들이 연결되는 가교의 역할도 하고 있다는 생각을 한 번은 말하고 싶었기에 이렇게 시작해 보았다.

 

소설의 내용을 역설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즐거운 나라를 쓴 박민경 작가의 예전 인터뷰 내용 코끼리를 좋아합니다. 눈은 온순한데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잖아요. 저도 그런 작가가 되고 싶습니다.”를 상기하며 이소 문학평론가는 이 작품을 소설 쓰기에 대한 소설, 예술가 소설로도 읽을 수 있었음을 말할 때, 작가의 조심스러움만큼이나 독자의 읽기에도 다정한 주의 깊음의 필요성을 확인하게 되었다. 이 작품의 주인공 신나라가 소설 첫 문장에 타율적으로 등장할 때, 그녀의 나 좀 살자!”라는 절규의 강렬함은 여느 코믹한 온라인 숏컷의 한 장면처럼 가벼운 흥미로 다가왔다. 짐승 같은 괴력을 발휘하며 저항하는 거구의 여성이 담겨있는 충격적 영상은 이미 그 후의 소설 속 설명 없이도 이미 독자의 상상 속에서는 빠른 인터넷 유포와 확산을 이어가며 희화화되는 과정을 그릴 수 있다.

 

살자녀로 불리는 밈으로 폭발적으로 소비되는 이 사회 저변의 욕망, 인간들의 변하지 않는 본성들이 배경처럼 빠르게 흐른다. 사실 나는 거의 눈이 지면(紙面)위를 날아다닐 정도로 흥미롭게 읽어나갔다. 어쩌면 이렇게 이야기에 빠져 읽었다는 것은 내게도 오직 큰 체격을 가지고 태어났다는 것만으로 사람을 거부하는 부당성에 대해 비판하면서도 실제로, 혹은 무의식적으로라도 그렇게 정상성의 스펙트럼에서 벗어난 사람들에 대한 암묵적이고도 끈질긴 배제의 몸짓을 하고 있었던 것 아니었나하고 돌아보게 되었다.

 

최근에 읽었거나 읽고 있는 소설들에서 나는 가벼운 경쾌함을 느끼고 있는데, 그것이 소외나 배제의 고통이나 고뇌라는 바다에 푹 절어 있는, 그 찰랑거리는 수면의 가벼움에 올라 타는 즐거움에 빠지면서도 바로 그 물 속에 깃든 이 세계의 무거운 속살을 직면케 하는 웃음의 진짜 얼굴을 보게 된다. 경박함의 역설이랄까? 마치 소설 속 살자녀 밈이 반복될수록 가벼워져 멀리 흩어짐으로써 마침내 누구든 읽을 수 있는 것이 되는 역설처럼 말이다. 신나라의 절규가 왜 터져 나왔는지, 그 절규는 우리들 사회의 어떤 모습이 만들어냈는지를 독자들이 이야기 속에서 발견해내는 여정이 될 것 같다,

 


측은지심의 남궁지혜 작가는 홍성희 평론가와의 인터뷰에서 능청스러움이 제 안에서 좀 더 커졌으면 해요.”고 말하지만 이 작품은 이미 유쾌한 능글맞음이 차고 넘쳐흐른다. 소설은 코인으로 인생 말아먹고 사람다운 채팅봇 노릇으로 로맨스 스캠 알바를 하는 라는 인물의 가해자와 피해자라는 심리적 육체적인 권력관계의 자리 변동을 관찰케 하는, 그로부터 인간성, 혹은 윤리성의 생각으로 이끄는 작품이다. 소설의 소재인 스캠(scam)사기는 캄보디아에서의 한국인 피살사건으로 국내는 물론 국제사회에도 큰 관심을 유발했던 악랄한 신종 범죄이다.

 

주인공의 대사나 행위가 하도 유쾌하게 그려져서 마치 징글맞은 범죄 현장이 희극같이 느껴졌는데, 이 작품의 묘미 중 하나는 남의 불행을 차마 외면할 수 없어 안타까이 여기는 마음을 뜻하는 제목 측은지심처럼 주인공 라는 인물이 거짓과 기만의 행위를 하며 이러한 자신의 얄팍한 마음을 정당화하는 인간성을 표현하는 이 말을 중심으로 관찰토록 하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스캠 범죄에 가담한 인간들의 모순된 위치, 피해자이면서 동시에 가해자가 되어 사회로부터 고립되는 양상과 이들에게 범죄의 표적이 되는 사람들, 이 범죄가 어떤 과정을 통해 형성되는지를 통속적으로 그 구체적 조건들을 보여주는 것이다.

 

소설의 첫 문장, 사랑한다면서 고추 안 보여주는 심리는 뭘까라는 이 발칙한 물음은 피해자가 될 표적에게 젊은 여성인 채하는 채팅봇을 연기하여 기만한 뒤에 표적으로부터 받은 고추 사진과 채팅 글들로 위협하여 재산을 갈취하는 가 수입원으로 낚아채지 못해 아쉬워하며 표적의 심리를 고민하는 구절이다. 측은지심을 곱씹으며 이 인물을 따라가는 내내 그 어리숙함에 내재된 윤리적 불모성과 정당화의 임기웅변 등 오늘 우리들 사회를 점령하고 있는 소위 AI시대의 미세노동의 기만적 실체에 대해서도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어줄 것 같다.

 

남궁지혜 작가의 측은지심이 스캠 범죄의 현장 속에 있는 인물을 통해 진짜와 가짜, 진심과 위선, 신뢰와 기만의 경계를 오가며 물음을 던졌다면, 구소현 작가의 화이트 데이는 진짜라고 믿을 수 있는 것이 부족한 오늘의 사회에서 가짜를 진짜라고 믿기를 스스로 요구하는 현실을 깊숙이 찌른다. 하늘의 날개가 되기로 약속한 자는 세상의 모든 속박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사이비 종교 약속천익사원이 신도 착취와 사기, 살인교사, 불법 의료행위로 고발되며 세상에 알려지자 교주가 죽음으로써 해체됨에 따라 살아남은 어린 아이들의 이후 삶의 양태를 다룬다.

 

소설은 성장한 세 인물의 삶의 현실을 쫓는데, 이들은 모두 어딘가에 빠져들거나 중독된 삶을 살아가며, 일군의 사람들이 이미 해체되었던 약속천익사원에 다시금 몰려드는 상황들은 오늘 우리들이 살아가고 있는 이 사회에 대한 신뢰의 실종을 이루는 원인들을 생각하려는 듯하다. 아주 최근에 나는 이 맹목적 믿음이란 것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 계기가 있었는데, 이 최초의 무조건적, 타율성에 대한 믿음이 없었다면 자율도 성립할 수 없었을 거라는 얘기였다. 즉 인간의 합리적 이성이란 것도 모두 이 맹목적 믿음의 기반 위에 서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어린아이가 말을 배울 때처럼 말이다. 거기에 무슨 이성, 왜라는 물음에 대한 답이 있겠는가. 어쩌면 소설 속 재원, 승현, 연주가 자신들이 어린시절 믿었던 새()인간의 종교가 비록 가짜임을 깨달았더라도 그것이 진짜라고 믿으려하는, 그 이유에 대한 탐문은 확신에 가득 찬 눈을 볼 때마다 무서웠다는 구소현 작가의 말처럼, 그저 믿어야 하기 때문이라는 이유도 있음을 포용하게 된다.

 

현실의 안과 밖 어디에도 편히 머물 수 없는 오늘의 우리들이 겪는 무력감이 바로 이러한 맹목성의 믿음이 우리들의 자리, 숨 쉴 자리를 마련해주는 까닭이기도 할 것이다. 작가의 말처럼 안간힘을 쓰려는 우리들의 모습이라는 측면에서 어쩌면 이들 거짓된 믿음의 진짜를 이해하려 든다면 바로 그 행위가 삶의 평온, 제자리를 돌려주는 것이 될 수도 있으리라는 막연한 생각도 해보게 된다. 각 작품들을 통해 이 세계를 읽는 관심사와 지향 가치까지 드러내 보여준 하혁진, 홍성희, 이소 세 분의 평론가들과 신선하고 유쾌한 가운데 진지함까지 아울러 지펴 낸 세 작가에게 정말 즐거운 독서였다고 조용한 마음의 응원을 보낸다. 아직 가을과 겨울 두 계절의 여섯 작품이 남았지만 이번 여름 호에서 문지문학상 수상작이 나왔으면 하는 바람도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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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경제 지배 시대, 인간의 존엄성이 유지될 수 있을까?

 

인공지능 기술을 비롯한 인터넷 기반의 오늘, 유비쿼터스(ubiquitous)기술이 소위 인간의 존엄성을 위협하고 있다는 지적에 대한 논쟁은 제아무리 반복되어도 그 해결을 위한 대안의 도출은 매우 중차대한 바로 지금의 인간 앞에 놓인 과제일 것이다. 이 결정이 곧 인류 미래의 삶의 방향을 결정할 것이기 때문이다. 마침 국제도서전과 더불어 인공지능이 일상이 된 시대, 인간의 고유한 영역에 대한 인간선언, Homo duduri이라는 국내 문학인들의 글모음집도 눈에 띈다. 그들이 인간의 의미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가 과연 이 세계의 추세에 어떤 반향을 이끌어 낼 수 있을까?

 


반복되어 진부하게 느껴지는 제법 거창해 보이는 이 문제의 한 측면을 생각해보게 된 계기는 콜레주 드 프랑스 교수인 법학자 알랭 쉬피오(Alain Supiot) 이성이 법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법이 이성을 만든다.”라는, 법의 교리적 기능, 하나의 믿음 체계로서 법의 교조적 역할을 역설한 법률적 인간의 출현(Homo Juridicus)2법적 기술4과학 기술의 제어: 금기의 기술에서 말하는 기술을 인간적으로 만드는 도구로서의 법을 읽으며 제기된 법의 태도에 관한 문제를 생각게 된 것이다. 인공지능에 대한 숙의 과제로 또 하나의 층위인 법과 기술의 문제를 덧대어 말하고 싶은 것이다.

 

특히 시간과 장소라는 시공을 초월해 언제 어디서든 네트워크에 접속하여 인간 서로가 연결되는 삶을 만들어준다는 오늘의 유비쿼터스 세계에서 법()은 어떠한 변화된 가치를 가져야 할 것인가라는 문제의 논의가 내 정신을 윽박질렀기 때문이다. 이제 인공지능 기반의 유비쿼터스 기술은 인간과 사물의 경계를 흐릿하게 지워버림으로써 지금까지 인간사회가 믿어 온 믿음의 문턱을 허물어뜨리고 있다. 그것은 인간과 인간이 만든 이 세계가 믿어 온 인간은 노동력을 제공할 수 있지만, 인간 자신의 인격 전체를 계약의 대상으로 삼을 수 없다.“인간 존엄성에 대한 믿음의 균열이다.

 

이를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인간에게는 거래 될 수 없는 영역이 정말 존재하는가?’ 라는 다소 끔찍한 인간을 향한 물음이 된다. 만약 이러한 영역이란 존재하지 않음이 밝혀진다거나, 기술경제 주도 자본가들을 비롯한 그 집단이 이 영역을 부정하여 사라지게 된다면, 소위 인간의 사물화는 단순한 비유로서가 아니라 사회의 법적 구조 자체가 될 것이고, 지금까지 인간을 보호하기 위한 법의 기능은 그 대상을 상실하게 되고 완전히 새로운 무엇으로 변하게 될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거래 될 수 없는 영역을 끝까지 지켜낸다면 유비쿼터스 사회에서도 인간은 기술진보 보다 상위의 원리로 계속 남을 수 있게 될 것이다. 현대사회가 인간을 무엇으로 이해할 것인가는 이처럼 철학적이고, 헌법적이며 형이상학적인 문제가 아닐 수 없다.

 

1. 도그마(dogma)로서의

 

문제가 되는 인간의 존엄이라는 지금까지 인류가 지켜온 불가침의 영역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 인간 사회가 어떻게 작동해 왔는가를 짧게 생각해 보는 것으로 시작되어야 할 것 같다. 알랭 쉬피오 교수에게 박사학위 지도를 받은 노동연구원 박제상 교수는 모든 사람이 의심하지 않고 믿는 구조로서의 한 사회의 보편적 믿음을 도그마로 정의하며, 모든 인간 사회는 나름의 믿음 체계인 이 도그마에 기초해야하며, 이러한 보편적 믿음 체계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 사회는 단 하루도 유지 될 수 없을 것이라고, 인간 사회는 어떤 확립된 객관적 사실에 기초하는 것이 아니라 이처럼 그렇게 믿을 뿐인 도그마에 기초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의 예로서 우리들이 모국어인 한국어를 어떻게 배웠는지 거슬러 유추해보면 그곳에는 무턱대고 믿어야 하는 교조성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기존의 세계라는 체계에 다가가려면 어린아이는 우선 말하는 법부터 배워야한다. 이때 아이는 어머니의 얼굴 뒤에 숨어있는 언어의 입법자에게 무조건 복종해야 한다. 언어에 의미를 부여하는 일정한 제약에 복종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이처럼 최초에는 완전한 타율성에 의한 맹목적 믿음이 기초하고 있다. 이 근원적 타율성 없이는 그 어떤 자율성도 획득할 수 없다. 즉 이 최초의 타율성, 맹목적 믿음이 주체 형성의 첫 번째 교리이자 인간 삶의 원칙이다. 다시 말해 모국어를 가르쳐 준 사람의 말을 무턱대고 믿지 않는다면 결코 한국어를 쓰고 있지 못할 것이고, 그 아이는 이 맹목적 믿음을 실현하지 못함으로써 자기 의사 표현의 자유를 행사하지 못할 것이다. 이는 곧 이성적 행위를 가능하게 하는 일차적 조건이 말(언어)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여기서 인간은 이성적인 존재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교리적 기초에 근거하여 비로소 이성적인 존재가 된다는 말이 성립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도그마로서의 법이란 무엇인가. 한 사회가 스스로 정한 나아갈 방향이며, 사회가 스스로에게 부과한 이상적 모습이 곧 법이다. 법은 거울에 비친 사회의 표상이다. 즉 한 사회의 보편적 믿음 체계가 법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이 말을 되새겨보면 우리의 이성은 법이라는 도그마에 근거할 때만 이성적이라는 말이기도 하다. 이성이 얼마나 취약한 것인지를, 법의 교리적 기능을 파괴할 때, 즉 법을 논리실증주의적인 것으로 변질시켜 해석하게 될 때, 과학 이성이라는 이름 아래 인간을 순전히 생물학적 환원물로 취급한 끔찍한 비극의 역사를 우리는 알고 있다. 법은 인간에게 금기나 터부처럼 인류학적 기능을 지닌 교리이자 교조이며 교의인 것이다.

 

법은 시대, 장소를 달리하며 그 환경에서 인간과 세계의 중재 속에서 인간을 보호하기 위해 그 한계를 설정하는 도그마인 것이다. 법질서에 터 잡고 있는 원리들은 천명되고 찬양되는 것이지 계산되거나 논증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 존엄성은 그 어떤 과학적 토론이 이성적인 것이 되기 위해 발 딛고 서야하는 토대로서 법 원리이며, 과학이 이 법질서를 정초한다는 주장은 터무니없는 망상이다.” 최초의 맹목적 믿음이라는 토대가 없이는 어떠한 이성도 세워지지 않는다. 수학의 무수한 공리들을 생각해보라, 그 맹목적 믿음에 기초하지 않고서는 그 무엇도 증명될 수 없으며, 증명되지 않으며, 수학(기하학)이라는 골조가 성립되지 않는 것과 같다. 법의 도그마로서의 정의는 오늘날 생물학주의나 기술경제주의를 주장하는 집단들로 인해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 인간사회가 양보할 수 없는 교리이다. 법의 도그마성이 부정되는 순간이 곧 인간과 인간 사회의 파국일 것이다.


 

2. 인간과 도구 사이의 중재기능으로서의

 

법은 인간과 도구 사이의 중재기능을 맡아왔다. 도구가 인간에게 미칠 수 있는 위험 여부에 따라 특정한 금기에서 벗어날 수 없도록 도구의 용도를 제한하는 일을. (...) 법은 인간과 도구 사이의 중재기능을 맡아왔다.” - 알랭 쉬피오 , 법률적 인간의 출현에서

 

이 같은 법의 도그마로서의 존재 위치를 기반으로 해서 기술경제중심주의의 시대인 오늘에 있어 법의 미래를 생각해보자. 법은 인간들 사이에 정의를 세우고 인간들을 이성의 왕국에 복종시키는 다양한 방법 중 하나이다. 유비쿼터스 기술이 지금처럼 사람들 일상의 행위를 점령하기 전, 산업사회에서는 법이 사무실이나 공장이라는 물리적 공간에 있는 노동자를 보호했다. 하루 8시간 노동과 같은 개념도 모두 물리적 공간의 출입문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러나 오늘의 환경에서는 그 출입 담장이 사라지고 집, 카페, 지하철, 심지어 침실에서도 업무망에 접속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현대의 노동법은 더 이상 공간을 규제하는 법이 아니라 접속(연결)을 규제하는 법으로 이동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언제부터 연결을 끊어도 되는가라는 질문으로서 법의 방향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즉 법기술적 문제를 넘어서는 물음을 내재하고 있기 때문인데, 유비쿼터스 기술이 노동시간의 한계를 끊임없이 확장하려는 자본의 본성을 실현하고 확장하는 최적의 도구이기에 자본의 시간 점유에 맞서 개인 삶의 시간을 방어하는 새로운 형태의 권리에 대한 이해의 필요를 제기하고 있는 까닭이다. 지금의 유비쿼터스 자본주의는 더 많은 연결을 통해 더 많은 노동을 낳고 그 결과 노동과 휴식의 경계를 소멸시킨다. 따라서 현대 법은 연결을 차단할 권리를 보장하는 법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이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니라는 데 심각성이 있다.

 

여기에는 인간의 시간을 누구의 것으로 볼 것이냐 라는 매우 근본적인 정치철학의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 전통적 법률들은 노동자에게 노동력만을 거래 대상으로 보고, 노동자의 인격 자체는 계약밖에 남겨 둔다는 노동자를 보호하기 위한 허구의 전제 위에 성립해왔다. 다시 말해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력을 팔수 있지만, 자기 자신을 팔수는 없다는 믿음에 서서 노동계약은 노예계약이 아니라고 에두른 것이었다. 지금까지 우리들은 이러한 믿음에서 경제활동에 참여해 왔으며, 비근하게 벌어지는 노동자들의 단결권도 이러한 믿음에 기초해 가능해왔다. 사실 인간은 수단이 아니라 목적 그 자체라는 칸트를 인용할 필요도 없이 우리들은 자신의 인격 전체를 거래 대상으로 삼을 수 없다는 확고한 믿음들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원격 근무, 스마트기기 기반 업무, 플랫폼 노동 등에서는 노동 그 자체보다도 노동자의 주의력, 감정, 반응속도, 생활패턴, 심지어 수면과 이동 데이터까지 생산성의 일부로 포섭된다. 바로 이러한 노동력과 인격 사이의 경계자체를 흐리게 만드는 기술현실을 이해해야 한다. 이제 노동의 상품화라는 말은 지나간 옛 표현이다. 삶의 상품화’, ‘주체성의 상품화라는 인간의 그림자가 조금은 남은 표현으로 이동했다. 여기서 오늘의 기술경제자본의 궁극적 목표가 인간의 사물화라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기술자본이 고의적으로 악의적 의도를 가지고 인간을 사물화 하고자 한다기보다 구조적으로 측정 가능한 모든 것을 생산성 자원으로 전환하려는 경향을 가진다는 것을 강조하려는 것이다. 이점이 매우 중요한데, 법이 어느 곳을 바라보아야만 하는가에 지시점이기 때문이다.

 

3. 기술경제 자본 지배시대의 법의 향방, 의미 부재의 시대가 뜻하는 것

 

인류의 시간이 경과하면서 산업자본주의 시대, 포드자본주의, 정보자본주의, 플랫폼자본주의 등 각 자본주의를 주도하는 환경의 변화에 따라 인간의 신체, 시간으로부터, 지식에 대해, 인간의 주목과 관심에 대해 법은 그것들에 의해 침해될 인간존엄을 보호해왔다. 그것은 노동시간 제한, 최저임금, 산업재해 보상과 같은 것들로 표현되었다. 이제 연결되지 않을 권리, 데이터 소유권과 같은 권리가 인공지능자본주의 시대에 새롭게 보호되어야 할 권리로 등장하고 있다. 즉 과거의 법이 인간의 몸을 보호했다면 지금의 법은 인간의 정신적, 정보적 자아를 보호하려 한다. 이것은 법이 기존의 노동법 확장의 길이 아닌 새로운 형태의 인격권 체계로 발전해야만 함을 가리킨다.

 

이렇게 법은 인간과 도구 사이에서 그 중재를 통해 인간 존엄의 훼손을 방어하는 데 그 기능을 존속시켜 왔다. 그런데 이제 기술경제 자본은 이렇게 묻고 있다. ‘인간에게는 거래될 수 없는 영역이 존재하는가?’, 인류의 오랜 인간의 법률에서 방어해 온 인간의 인격과 노동력을 분리할 수 있는 인간존엄의 영역이라는 것이 정말 존재하가는 하는 것인가 하고 묻고 있는 것이다. 일부 생명주의나 경제중심주의 법학자들은 인간을 세포들의 화학적 물리적 조성물, 계산 될 수 있는 수량적 존재로 생각하기 시작했으며, 그에 따라 인간의 사물화가 아니라 인간을 사물과 동일한 선상에서 해석하기 시작했다.

 

법은 언제나 사회가 인간을 어떻게 이해하는 지를 제도화해 온 인간의 기술적 산물이다. 인공지능 디지털 기반의 유비쿼터스 시대의 법은 인간을 무엇이라고 이해할 것이냐는 질문 앞에 선 것이다. 인간을 데이터의 집합, 예측 가능한 행동 패턴, 관리 가능한 생산성 단위로 이해하게 된다면 그에 맞는 적절한 체계로 재편 될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인간에게 측정되지 않고 환원되지 않은 영역이 있다는 인식이 유지된다면 법은 그 영역을 보호하는 방향으로 발전 할 것이다. 다시 반복해서 기술한다면 법의 과제는 단순히 기술발전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기술이 침범할 수 없는 경계를 설정하여 인간을 보호하는 역할을 수행해왔다. 그러함에도 오늘의 기술자본은 더 이상 그 보호대상의 위치에서 인간을 세우려 하지 않는다. 그저 숫자이고 물질이라고 말이다.

 

우리는 유전학에서 내린 판결에 따라 독일 민족의 삶과 법을 만들어간다. (...) 국가는 인종의 보존이라는 목적을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 히틀러 유겐트 입문서에서

 

인간의 세계를 사물의 세계로 깎아내리는 소위 인적 물자라는 개념 사용을 통해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법 주체를 없애버린 히틀러의 제3제국 언어는 사람들의 정체성과 권리를 보장하는 법률을 부정함으로 전체주의가 어떻게 인간을 말살했는가라는 인간 사물화가 초래하는 법과 세계 파국의 적절한 역사적 사례일 것이다. 나치의 생물학적 법의식은 바로 지금의 기술경제주의 법의식과 빼닮아있다. 소위 과학적 법칙을 정치적, 법적 기준으로 삼을 때, 거기에는 일체의 책임감이나 죄의식이 사라져버리게 된다.

 

이러한 환경 아래에서 법이라는 도그마는 그 교리로서의 지위를 잃고 만다. 인간의 맹목적 믿음이라는 기초 위에 있던 법이 그 기초가 부재하는 현실을 맞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법 이전에 인간의 이 맹목적 믿음인 도그마를 형성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바로 이 세계를 형성하고 있는 사회 구성원들의 믿음이다. 사회구성원들이 편리함과 효율성의 증가라는 진보에 매몰되어 기술경제 자본이 인간의 삶에서 인간 존엄을 서서히 박탈해 가 궁극에 인간 고유의 영역으로 주장할 것이 남아 있지 않을 때, 그때 인간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은 아주 막연하게 인공지능이 몰고 온 시대를 자신들의 편리를 비롯한 유무형의 이익 관점으로, 즉 효율성 높은 긍정의 낭만적 기술로 받아들인다. 이 문제는 오래 붙들고 숙고해야만 하는 문제이다. 그래서 발견되지 못한 드러나지 않은 층위의 과제들을 망라해 숙의되어 할 현 인류의 시급한 당면 과제가 아닐 수 없다. 유비쿼터스 시대에 법이 관리해야 할 영역은 무엇인가?에 대한 논의는 기술자본과 협의해야 할 문제가 아니다, 자금 한국의 정치권력은 실용주의에 매달려 그 기술자본의 압도적 부와 권력에 매료된 듯하다.

 

우리는 허구, 맹목적 믿음에 기대 이 세계를 구축해 온 존재이다. 이제 인간 존엄이라는 최후의 허구를 포기 할 것인지, 아니면 끝까지 이 영역을 버텨낼 것인지 갈림길에 들어서 있다. 인간들 인식의 문제이다.’ 우리들은 인류의 미래를 위해 어떤 인식을 가져야 하나? 기술경제 자본주의자들의 특이점의 시대, 인간존엄성을 가진 인간이라는 종이 더 이상 없는 세계를 지향한다면 과연 인간사회를 존립해온 믿음이라는 허구의 붕괴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곧 인간 세계의 절대적 파국이 아닐까?

 

자기 자신과 세상에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무의미에 빠지지 않고 이성적 존재로서 살아가기 위해 그 존재의 의미실현을 지탱하고 보호하기 위해 작동했던 법이라는 의미체계가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 세계는 어쩌면 무의 세계일지도 모른다. 이 세계는 이러한 의미체계에 대한 믿음과 함께 세상에 태어난 것이다. 큰 울림을 주는 이 문장으로 맺는다. 인간 존엄이라는 이 교조적 믿음을 우리들이 잃는 순간, 그것은 민주주의는 물론 세계의 질서를 지탱하는 법의 붕괴를 초래한다. 법이 이 최후의 인간에 대한 엄중한 교리를 버텨낼 수 있도록 하여야 되지 않겠는가.

 

이성은 약()한 것이다. 끊임없이 그 딛고 선 바를 돌아보고 보살피지 않으면

언제라도 광기와 망상으로 변질 될 수 있다. (...)

도그마는 인간의 탐욕과 망상에 한계를 설정하는 외부적 조건으로 기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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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플들, 행인들 을유세계문학전집 7
보토 슈트라우스 지음, 정항균 옮김 / 을유문화사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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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터 한트케, 엘프리데 엘리네크와 함께 20세기 독일 문학예술의 삼두마차로 불리던 보토 슈트라우스(1944~)사랑, 고향, 문학, 회상이라는 네 가지 주제의 연작 형식의 에세이다. 202482세의 노령에도 신작을 발표할 만큼 창작활동이 활발한 인물이다. 작가의 성향은 그의 글 속 한단원의 문장으로 대신한다.

 

낙오자들이나 폭도들 또는 그러한 부류의 사람들, 이들은 아직도 정상적인 기준을 받아들이는 법을 배우지 못한 사람들이다. 경찰이 친히 나서서 냉정함이라는 사람의 전략을 근거로 두들겨 패서 정상적 기준 속에 처넣어야 되지 않겠어? 무엇 때문에 그렇게 하겠어, 저절로 그렇게 될 텐데. 삶이란 그런 것이다.” - 차량의 강물, 105쪽에서

 

이 문장은 굳이 해석하지 않겠다. 보토 슈트라우스는 이라는 에세이에서 완성된 모든 글은 작가가 자신도 예견치 못한 순진함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며 그 누구도 예외없이 쓴 글에는 작가의 정체성이 드러나기 마련이라고 쓰고 있다. 자신만은 이를 회피할 수 있는 글을 쓸 수 있다는 듯 말이다. 그런데 그의 생각들인 이 에세이에는 딸기가 수북이 담긴 쟁반 위에서 가장 좋은 딸기만을 주워 담고 남은 것은 다른 사람에게 넘기는 식의 체리피킹(cherry-picking)의 얄궂음을 보게 된다. 그는 예술비평 담론들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지금은 영락한 자기중심적인 소박함이 아주 진부한 말들로 견해를 주도하고 있다. (...) 예술 작품을 비판적인 사용 가치에 따라서만 면밀하게 검토하고, 주관적인 관련성이나 천박한 사회비판주의의 검사대 위에서 평가하는 악습은 예술이 가진 자유로운 상징적 기본 질서를 어느 정도 침해한다.” - , 117쪽에서

 

비평 담론은 싸잡혀 천박한 비판주의요, 영락한 자기중심적 소박함이며, 진부한 말들이고, 자유로운 상징질서를 침해하는 악습이 된다. 타인의 비판은 주관성에 매몰된 진부함에 불과하지만 자신의 주관성만은 독자적 예술의 상징적 가치를 지닌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세상에 이러한 궤변을 천연덕스럽게 미문으로 포장하는 인격은 괴기스럽기조차 하다. 그런데 시인 옥타비오파스의 진정한 작가는 맨 먼저 자신의 실존을 의심한다. 문학은 누군가가 내가 말할 때, 내 안에서 말하는 것은 누구인가?’라고 자문할 때에야 비로소 시작된다.”는 말을 인용하면서 자기 성찰을 강변한다. 아무튼 자기성찰과는 거리가 먼 글을 쓰면서 자성을 옹호하는 이러한 모순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람을 대체 어떻게 이해하여야 하는 것일지 당혹스러움 속에서 이 책을 읽어나가는 독자를 생각해보라. 막대한 인내심을 요구하는 읽기였음을 토로하지 않을 수 없다. 혹여 아주 작은 영감의 불씨라도 발견할 수 있을 거라는 보상의 기대심리 속에서.

 


1. 첫사랑, 첫키스, 도달 불가능한 강도의 경제학(economy intensive)’

- 감각의 제국, 최초의 황홀을 현재화하려는 그 파국의 형상을 중심으로

 

물론 긍정의 읽기를 한 순간이 있었으니 다행스럽게도 가장 분량이 많은 에세이 커플들이 제일 앞에 수록되었기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으면 아마 이 책을 읽는 수고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모든 사랑은 등 뒤에 유토피아를 만든다. 이 보잘 것 없는 파트너 관계의 근원도 행복과 노래로 넘쳐나던 아득한 옛날에 있다. 그러나 시작은 이제 꽁꽁 얼어붙은 경직된 순간으로 바뀌어 (...) 꽁꽁 얼려 냉동된, 그래서 별로 영양이 풍부하지 않은 여행용 식량과 같은 바로 그 최초의 시기가.“ - 커플들, 9쪽에서

 

이 회상의 작가는 이후 그의 모든 글의 원류라 할 수 있는 이미 지나가버린 최초의 경험들의 절대적 환상, 결코 되돌릴 수 없는 흐릿한 기억의 감각을 야기한 시간의 흐름 속 부패한 사랑을 돌리려하는 인간의 도달할 수 없는 욕망을 말한다. 시간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리고 권태와 혼란 속에 침대에서 일어나는 두 남녀의 모습에서 무미건조해진 사랑의 냉기를 그려낸다. 이어지는 글들에서 현대의 육체적 관계만 갖는 사이의 남녀로 이동한다. 마치 최초의 저 지나가버린 인생 1라운드의 열정, 사람을 흥분시키는 저 보존된 사랑의 흔적, 그 쾌락을 찾아 헤매는 애정 없는 사랑의 관계들로 귀결된 오늘을 비춘다.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새로운 기회들과 교류하고, 새로운 외적 자극들로 신속히 주거지를 바꾸는 오늘의 파트너들에게서 작가는 소망하는 것과 주어진 것이 항상 단기적으로만 일치할 수 있는 이러한 교류에는 약속된 결합은 생겨날 수 없을 것이라고, 오늘의 세태에서 숙고해 보아야할 현대 성애에 은폐된 의미를 묻는다.

 

순수한 성애가 사랑 그 자체를 실현할 수 있는 곳이란 오직 광기라는 이미지 속뿐이다.”

- 커플들, 60쪽에서

 

그는 말한다. 우리는 가치나 규칙 또는 문화전체, 즉 형식들에서 벗어날 수 없는 존재들이기에 사랑의 기술, 섹스의 즐거움이라는 인간의 가장 자연스러운 행위도 사회적 제약이라는 밀실에 갇힐 수밖에 없다고. 때문에 이러한 현실 세계를 벗어나는 길은 광기에서나 가능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사실 이러한 진술을 하는 보토 슈트라우스에게 놀랐는데, 지배질서의 어떤 영역에서 탈주하는 자들은 미쳐야 가능한 것임을 알기에 그의 이해와 공명했기 때문이다. 그는 오시마 감독의 영화 감각의 제국등장인물 창녀 사다가 자신이 살해한 애인의 왼쪽 허벅지에 새겨놓은 우리 두 사람 영원히라는 글귀에서 두 사람의 위대한 첫 만남의 황홀을 영원히 박제하려는, 1라운드의 무한한 육체의 시간의 소멸에 대한 반항의 행위로 해석한다. 이것이야말로 인간이라는 종족이 가진 근본적 딜레마를 다룬 기초적 교훈이라고 말이다.

 

결국 보토 슈트라우스는 최초의 황홀이라는 지나가버린 쾌락, 되찾고 싶은 쾌락을 통해 회상의 감미로움, 회상의 미학(예술)을 말하고자 하였지만, 그의 의지를 넘어 욕망의 운동, 그 본질인 현대 자본주의 속성을 드러내고 말게 된다. 그가 수호하고자하는 현대자본주의의 영원한 성장, 영원한 혁신, 영원한 소비를 요구하는 욕망의 형식을 말이다. 첫 키스, 첫 사랑, 첫 혁명, 첫 승리, 첫 성적 황홀 등 이 예상치 못한 강렬한 경험은 두 번 다시 동일한 강도로 경험 할 수 없는 것이다. 때문에 점점 더 강한 자극, 더 위험한 행위, 더 철저한 독점을 추구하고, 한 번 경험한 그 절대적 강도를 반복하려는 욕망은 결국 자기 파괴에 이른다. 그래서 보토는 욕망의 끝인 도달 불가능한 회상 재현의 욕망의 끝인 파괴를 읽어내지 못한다.

 

2. 시간의 물결과 진리의 관계, 비판담론과 지양(止揚)에 대해서

 

현대 사회는 욕망의 결핍으로 괴로워하는 사회가 아니다. 오히려 너무 많은 이미지, 너무 많은 상품, 너무 많은 쾌락 가능성 때문에 고통 받는다. 자본주의는 바로 이 지점, 욕망을 억압하는 체제가 아니라 오히려 욕망을 끝없이 동원하는 체제라는 점에서 인간의 욕망 운동과 놀랍도록 닮아있다. 보토가 장황하게 설명하는 감각의 제국의 두 연인의 광기는 잃어버린 최초의 황홀을 현재화하려는 시도이며, 이는 결코 충분함을 인정하지 않는 자본주의 자기증식 운동과 구조적으로 동일한 욕망의 형식이다. ‘>상품>더 많은 돈이라는 자본의 회로는 욕망>만족>더 큰 욕망이라는 욕망의 회로와 닮아있다. 여기서 감각의 제국의 비극성이 드러난다. 극단적 에로티즘과 극단적 자본주의는 둘 다 한계를 초과하려는 운동이다. 그 초과의 논리가 육체를 파괴하는 순간을 그린 현대성에 대한 우화가 바로 오시마 나기사가 의도한 영상일 것이다. 보토는 예술은 비판이어서는 안 되며, 미학적 기호, 유희에서 느끼는 쾌락이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례로서 오기사의 영화를 설명하지만, 이 영화는 이미 사회 비판을 중심 의제로 삼고 있는 작품이기에 그는 분명 잘못 이용한 것일 게다.

 

大島渚(오시마 나기사)감독感覺帝國에서


그는 이 최초의 욕망의 강도에 대한 그리움, 회상을 말하면서 시간이라는 속도, 점증하는 가속화에 모든 존재는 전면적인 희생물이 될 수밖에 없다고 설파하면서 이 법칙을 벗어나는 그 어떤 것도 없기에 좌파의 세미나를 통해 발간된 무수한 책들이 몇 년 전 겪은 운명과 똑같이 서점의 계산대 한 모퉁이의 전문서적코너로 사라지게 될 것이다.”라고 증오의 말을 쏟아 놓는다. 그러면서 가장 철저한 진리조차도 잠시 머무는 하나의 물결에 지나지 않을 운명을 맞이하기에, 그 비판적 발언에 대중은 싫증을 느끼게 되고, 사회운동 역시 상황을 개선시키기 위한 최소의 시도를 하기도 전에 스스로 싫증을 느끼게 될 것이라며 싫증은 우리 인간 문화의 절대적 지배자이기에 파국을 말하는 비판에 대한 관심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시점에나 정말의 파국이 찾아 올 것이라고 비판담론을 폄훼한다.

 

그런데 파국에 대한 관심이 존재하지 않을 때 파국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파국을 예견하는 목소리가 파국을 막는 것이고, 그 파국의 목소리가 죽음을 맞이했기 때문에 파국이 발생하는 것이니, 파국을 말하는 비판담론은 헛된 것이 아니다. 비판을 고작 싫증, 염증, 피곤함으로 인식하는 사람의 자기 직시 회피, 비판을 거부하는 태도가 바로 파국을 가속화하는 사회일 것이다. 그래, 시간의 흐름은 많은 것들을 빛바랜 누추함으로 만들어버린다. 그렇지만 그 시간의 풍화를 견뎌내고 여전히 진실을 발하는 것들이 있다. 바로 그러한 것들은 사라지지 않고 오늘과 미래의 삶에 지평을 제시하고 있다. 그래서 과거와 만날 때 계승하면서 동시에 극복한다라는 지양(止揚)이 필요한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나는 보수성을 비난한 적이 없다. 그저 이러한 지양 없이 몽매와 편협으로 과거를 붙들고 신봉하는 것을 보수라고 우길 때 그것을 나는 비판하는 것이다.

 

3. 문학의 몽롱함, 회상의 미학이라는 이면(裏面)

 

보토는 고대 그리스 로마의 미술에 천착한 낭만적 고전주의 양식의 그림을 그렸던 19세기 독일 화가 안셀름 포이어바흐(Anselm Feuerbach: 1829-1880)를 설명하면서 그의 회화들에 대한 도피적 몸짓과 복고적 도취’라는 비평을 비판한다. 포이어바흐는 초기 산업사회의 비참한 시대에 등을 돌리고 인문주의 이상을 쫒은 진정한 창작 예술가라고 말이다. 비방하려면 예술분야 내의 진보주의가 지금보다 더 큰 의미를 지녀야만 할 것이라고 비평담론이 현재라는 시간을 탈피하지 못한 현재성에 얽매인, 곧 시간의 풍파로 사라질 아무런 의미도 지니지 못한 것이라고.  이러한 비난은 정의롭지 못한 악의에 불과한데, 현재라는 동시대의 안목으로 과거를 바라보는 그 어떤 담론도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는 가히 절대적 상대주의의 궤변이라 아니할 수 없다. 더구나 포이어바흐에 대한 비평은 매우 중요한 역사성을 지닌 담론인데, 그것에 대해서는 일체의 언급도 하지 않고 매도하는 글쓰기는 비열하다고 말 할 수밖에 없다.

 

안셀름 포이어바흐가 현실 도피로서 그리스 로마제국의 예술을 소환한 것은 다분히 곧이어 다가올 훗날의 독일민족의 정체성과 관련하여 폭넓게 세계지성들에 의해 비판받는 핵심 사안이기 때문이다. 이미 알려져 있듯 19세기 말 독일 지성인들이 그리스 로마 문화에 열광한 것은 자신들의 정체성, 즉 아리안 족의 순혈성(純血性)을 그곳에서 찾았기 때문이고, 그것이 곧 타자 배제의 전체주의 파시즘을 출산하는 정치문화의 토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다시말해 훗날 나치가 남긴 참혹한 인류 역사인 까닭이다. 보토는 나치에 대한 그리움, 파시즘의 복귀에 대한 회상에 젖어 비판 담론들을 천박한 비판주의라고 혐오를 드러내는 것이다. 누가 더 혐오스러운가? 나치의 폭력인가? 파국을 외치는 비평가들인가?

 

보토는 이런 얘기까지 쏟아낸다. 제기발랄하면 할수록 그 속에는 깊은 사고가 결여되어 있다. 이렇게 톡 쏘는 이성은 멍청하다.” 물론 재담들에는 무모와 편협, 우둔함이 있기는 하다. 그렇다고 이러한 제기발랄의 이성이 모두 멍청한 것은 결코 아니다. 여기에 곰브로치의 소설 페르디두르케 무모하고 편협하며 우둔한 사람들을 이해하는 것은 깨어있고 섬세하며 정신이 예리한 사람들을 이해하는 것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자기 논리 옹호의 문장을 인용하며 몽롱함은 중요한 가치라고 주장하고 나선다. 물론 모호성, 흐릿한 몽롱함은 문학의 전반적 기술의 하나인 것에 동의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 몽롱함이 제기발랄의 톡 쏘는 이성의 멍청함과 대극을 이루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보토는 플로베르, 샤르트르까지 발췌하여 몽롱함을 그들의 무감각증, 기면증, 격정적 태만함과 비교하면서 마치 무슨 문학의 절대가치나 되는 양 자신의 회상의 미학을 포장한다. 보토의 회상, 명석한 기억이 아닌 몽롱하고 흐릿한 불분명한 기억으로서의 그리움, 자신이 자라난 옛 집이 있던 시절, 과거로의 회귀를 예찬한다.

 

현재의 열정을 비난하는 이 작가는 몽롱함은 모든 예술가, 특히 이야기꾼에게 있어서는 지각의 필수 불가결한 수단인 동시에 아주 가까운 주변의 매우 구체적인 것들로부터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현실회피와 과거 복귀에의 열망을 더없이 정당화한다.  브레히트의 희곡 억척어멈과 히치콕의 를 대비하며, 브레히트를 멍청한 이성으로, 또한 억견(臆見)으로 매도하며, 히치콕을 신화의 일부로서 이 땅의 순수이미지의 개가(凱歌)라고 말할 때 정신 비판 기능에 대한 혐오가 얼마나 극한에 이르러 있는지를 목격하게 된다.

 

보토의 신화에 대한 환상과 집착, 즉 과거의 흐릿한 전설에 대한 맹목적이다시피 한 애정은 그의 독일민족 순혈주의, 나치에 대한 그리움을 문학의 광휘로 덮어 쓰려는 기만성으로 비친다. 황혼/여명; Dämmer이라는 글의 한 문장은 캐리어를 안고 자신의 차 앞에 앉아있는 낯선 여자아이를 자신의 차에 태우고 목적지로 향하는 여정에서 성적 향응을 받는 이야기 끝에 먹물을 온통 뒤집어 쓴 몽롱함에 의탁한 아래와 같은 기만적 언어의 향연을 펼친다.

 

인간의 성애와 그 문화는 신화의 저장고였다. 이 잠적해 있는 비밀스러운 존재들이 사는 고요한 신들의 세계, 피곤한 상태에서 사랑을 하려고 하는 지친 욕망은 때때로 신들의 세계를 들어 올려 우리에게 선사한다.” - 황혼/여명, 135쪽에서


음란함이 지배하는 인간 왕국을 신화화하는 글장이의 솜씨는 얼마나 교묘하게 세련되었는가. 이 글장이 극작가는 현재의 비판을 이렇게 신화라는 과거의 영예 속으로 침수시켜 그 더러운 죄악을 회상, 몽롱함이라는 신비의 심연 속으로 수장해 버린다. 여기에는 역사라는 것도 없고, 만일 이 글장이가 역사를 말한다면 그것은 너무 흐리멍텅해서 사실 또는 진실일 수 없는 모호함이 되어버려 부정될 것이다. 사실 이 40년이 지난 케케묵은 에세이를 읽게 된 것은 내 불찰이지만, 그 어떤 책이 의미가 없을 수 있겠는가. 반면교사로서, 아니 생각의 다양성이라는 측면에서 유럽의 대중들로부터 인기를 한 몸에 받고 있는 주류 예술가의 생각을 읽을 수 있었다는 점에 의미를 둘 수 있겠다.

 

옐리네크의 반대 자리에 있는 작가, 보토 슈트라우스로 인해 잊고 있던 오시마 감독의 영화 감각의 제국을 다시금 복기하는 시간이 되었음은 작은 보상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그의 글을 한 마디로 묘사한다면 세심하고 주의 깊으며 발칙하기까지 한 인간 관찰자의 흉물스러운 시선이 느껴지는 불쾌한 관능이라고 해야 할까? “회상 자체는 다정하며, 정신적 승화의 선물인 것이다.”라며 고향집 란 강변 천 년 된 떡갈나무 옆에 있는 제국 직속 도시에서 오랫동안 서 있었다며 회상에 잠긴 장면의 묘사는 얼마나 끔찍했는지. 급류에 휘말려 뒤집어진 보트로 인해 물속에 빠진 소녀를 비젠트 강변 둥근 바위에 다리를 꼬고 앉아 이 사태를 거만하게 관람하던 남자(작가로 짐작되는)가 소녀를 건져 올리며 잠시 동안 중단된 소녀의 삶, 그녀의 어린 얼굴에 남겨 놓은 달콤한 공포를 즐기는 모습에서 파시스트의 모습을 떠올렸다면 너무 나간 것일까? 아무튼 내 지평의 영역에 없던 글을 이렇게 예기치 않게 읽게도 된다. 몽롱함, 회상, 사랑의 광기 등에 관심 있는 독자들에게는 충분히 흥미로운 책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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