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플들, 행인들 을유세계문학전집 7
보토 슈트라우스 지음, 정항균 옮김 / 을유문화사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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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터 한트케, 엘프리데 엘리네크와 함께 20세기 독일 문학예술의 삼두마차로 불리던 보토 슈트라우스(1944~)사랑, 고향, 문학, 회상이라는 네 가지 주제의 연작 형식의 에세이다. 202482세의 노령에도 신작을 발표할 만큼 창작활동이 활발한 인물이다. 작가의 성향은 그의 글 속 한단원의 문장으로 대신한다.

 

낙오자들이나 폭도들 또는 그러한 부류의 사람들, 이들은 아직도 정상적인 기준을 받아들이는 법을 배우지 못한 사람들이다. 경찰이 친히 나서서 냉정함이라는 사람의 전략을 근거로 두들겨 패서 정상적 기준 속에 처넣어야 되지 않겠어? 무엇 때문에 그렇게 하겠어, 저절로 그렇게 될 텐데. 삶이란 그런 것이다.” - 차량의 강물, 105쪽에서

 

이 문장은 굳이 해석하지 않겠다. 보토 슈트라우스는 이라는 에세이에서 완성된 모든 글은 작가가 자신도 예견치 못한 순진함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며 그 누구도 예외없이 쓴 글에는 작가의 정체성이 드러나기 마련이라고 쓰고 있다. 자신만은 이를 회피할 수 있는 글을 쓸 수 있다는 듯 말이다. 그런데 그의 생각들인 이 에세이에는 딸기가 수북이 담긴 쟁반 위에서 가장 좋은 딸기만을 주워 담고 남은 것은 다른 사람에게 넘기는 식의 체리피킹(cherry-picking)의 얄궂음을 보게 된다. 그는 예술비평 담론들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지금은 영락한 자기중심적인 소박함이 아주 진부한 말들로 견해를 주도하고 있다. (...) 예술 작품을 비판적인 사용 가치에 따라서만 면밀하게 검토하고, 주관적인 관련성이나 천박한 사회비판주의의 검사대 위에서 평가하는 악습은 예술이 가진 자유로운 상징적 기본 질서를 어느 정도 침해한다.” - , 117쪽에서

 

비평 담론은 싸잡혀 천박한 비판주의요, 영락한 자기중심적 소박함이며, 진부한 말들이고, 자유로운 상징질서를 침해하는 악습이 된다. 타인의 비판은 주관성에 매몰된 진부함에 불과하지만 자신의 주관성만은 독자적 예술의 상징적 가치를 지닌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세상에 이러한 궤변을 천연덕스럽게 미문으로 포장하는 인격은 괴기스럽기조차 하다. 그런데 시인 옥타비오파스의 진정한 작가는 맨 먼저 자신의 실존을 의심한다. 문학은 누군가가 내가 말할 때, 내 안에서 말하는 것은 누구인가?’라고 자문할 때에야 비로소 시작된다.”는 말을 인용하면서 자기 성찰을 강변한다. 아무튼 자기성찰과는 거리가 먼 글을 쓰면서 자성을 옹호하는 이러한 모순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람을 대체 어떻게 이해하여야 하는 것일지 당혹스러움 속에서 이 책을 읽어나가는 독자를 생각해보라. 막대한 인내심을 요구하는 읽기였음을 토로하지 않을 수 없다. 혹여 아주 작은 영감의 불씨라도 발견할 수 있을 거라는 보상의 기대심리 속에서.

 


1. 첫사랑, 첫키스, 도달 불가능한 강도의 경제학(economy intensive)’

- 감각의 제국, 최초의 황홀을 현재화하려는 그 파국의 형상을 중심으로

 

물론 긍정의 읽기를 한 순간이 있었으니 다행스럽게도 가장 분량이 많은 에세이 커플들들이 제일 앞에 수록되었기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으면 아마 이 책을 읽는 수고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모든 사랑은 등 뒤에 유토피아를 만든다. 이 보잘 것 없는 파트너 관계의 근원도 행복과 노래로 넘쳐나던 아득한 옛날에 있다. 그러나 시작은 이제 꽁꽁 얼어붙은 경직된 순간으로 바뀌어 (...) 꽁꽁 얼려 냉동된, 그래서 별로 영양이 풍부하지 않은 여행용 식량과 같은 바로 그 최초의 시기가.“ - 커플들, 9쪽에서

 

이 회상의 작가는 이후 그의 모든 글의 원류라 할 수 있는 이미 지나가버린 최초의 경험들의 절대적 환상, 결코 되돌릴 수 없는 흐릿한 기억의 감각을 야기한 시간의 흐름 속 부패한 사랑을 돌리려하는 인간의 도달할 수 없는 욕망을 말한다. 시간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리고 권태와 혼란 속에 침대에서 일어나는 두 남녀의 모습에서 무미건조해진 사랑의 냉기를 그려낸다. 이어지는 글들에서 현대의 육체적 관계만 갖는 사이의 남녀로 이동한다. 마치 최초의 저 지나가버린 인생 1라운드의 열정, 사람을 흥분시키는 저 보존된 사랑의 흔적, 그 쾌락을 찾아 헤매는 애정 없는 사랑의 관계들로 귀결된 오늘을 비춘다.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새로운 기회들과 교류하고, 새로운 외적 자극들로 신속히 주거지를 바꾸는 오늘의 파트너들에게서 작가는 소망하는 것과 주어진 것이 항상 단기적으로만 일치할 수 있는 이러한 교류에는 약속된 결합은 생겨날 수 없을 것이라고, 오늘의 세태에서 숙고해 보아야할 현대 성애에 은폐된 의미를 묻는다.

 

순수한 성애가 사랑 그 자체를 실현할 수 있는 곳이란 오직 광기라는 이미지 속뿐이다.”

- 커플들, 60쪽에서

 

그는 말한다. 우리는 가치나 규칙 또는 문화전체, 즉 형식들에서 벗어날 수 없는 존재들이기에 사랑의 기술, 섹스의 즐거움이라는 인간의 가장 자연스러운 행위도 사회적 제약이라는 밀실에 갇힐 수밖에 없다고. 때문에 이러한 현실 세계를 벗어나는 길은 광기에서나 가능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사실 이러한 진술을 하는 보토 슈트라우스에게 놀랐는데, 지배질서의 어떤 영역에서 탈주하는 자들은 미쳐야 가능한 것임을 알기에 그의 이해와 공명했기 때문이다. 그는 오시마 감독의 영화 감각의 제국등장인물 창녀 사다가 자신이 살해한 애인의 왼쪽 허벅지에 새겨놓은 우리 두 사람 영원히라는 글귀에서 두 사람의 위대한 첫 만남의 황홀을 영원히 박제하려는, 1라운드의 무한한 육체의 시간의 소멸에 대한 반항의 행위로 해석한다. 이것이야말로 인간이라는 종족이 가진 근본적 딜레마를 다룬 기초적 교훈이라고 말이다.

 

결국 보토 슈트라우스는 최초의 황홀이라는 지나가버린 쾌락, 되찾고 싶은 쾌락을 통해 회상의 감미로움, 회상의 미학(예술)을 말하고자 하였지만, 그의 의지를 넘어 욕망의 운동, 그 본질인 현대 자본주의 속성을 드러내고 말게 된다. 그가 수호하고자하는 현대자본주의의 영원한 성장, 영원한 혁신, 영원한 소비를 요구하는 욕망의 형식을 말이다. 첫 키스, 첫 사랑, 첫 혁명, 첫 승리, 첫 성적 황홀 등 이 예상치 못한 강렬한 경험은 두 번 다시 동일한 강도로 경험 할 수 없는 것이다. 때문에 점점 더 강한 자극, 더 위험한 행위, 더 철저한 독점을 추구하고, 한 번 경험한 그 절대적 강도를 반복하려는 욕망은 결국 자기 파괴에 이른다. 그래서 보토는 욕망의 끝인 도달 불가능한 회상 재현의 욕망의 끝인 파괴를 읽어내지 못한다.

 

2. 시간의 물결과 진리의 관계, 비판담론과 지양(止揚)에 대해서

 

현대 사회는 욕망의 결핍으로 괴로워하는 사회가 아니다. 오히려 너무 많은 이미지, 너무 많은 상품, 너무 많은 쾌락 가능성 때문에 고통 받는다. 자본주의는 바로 이 지점, 욕망을 억압하는 체제가 아니라 오히려 욕망을 끝없이 동원하는 체제라는 점에서 인간의 욕망 운동과 놀랍도록 닮아있다. 보토가 장황하게 설명하는 감각의 제국의 두 연인의 광기는 잃어버린 최초의 황홀을 현재화하려는 시도이며, 이는 결코 충분함을 인정하지 않는 자본주의 자기증식 운동과 구조적으로 동일한 욕망의 형식이다. ‘>상품>더 많은 돈이라는 자본의 회로는 욕망>만족>더 큰 욕망이라는 욕망의 회로와 닮아있다. 여기서 감각의 제국의 비극성이 드러난다. 극단적 에로티즘과 극단적 자본주의는 둘 다 한계를 초과하려는 운동이다. 그 초과의 논리가 육체를 파괴하는 순간을 그린 현대성에 대한 우화가 바로 오시마 나기사가 의도한 영상일 것이다. 보토는 예술은 비판이어서는 안 되며, 미학적 기호, 유희에서 느끼는 쾌락이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례로서 오기사의 영화를 설명하지만, 이 영화는 이미 사회 비판을 중심 의제로 삼고 있는 작품이기에 그는 분명 잘못 이용한 것일 게다.

 

大島渚(오시마 나기사)감독感覺帝國에서


그는 이 최초의 욕망의 강도에 대한 그리움, 회상을 말하면서 시간이라는 속도, 점증하는 가속화에 모든 존재는 전면적인 희생물이 될 수밖에 없다고 설파하면서 이 법칙을 벗어나는 그 어떤 것도 없기에 좌파의 세미나를 통해 발간된 무수한 책들이 몇 년 전 겪은 운명과 똑같이 서점의 계산대 한 모퉁이의 전문서적코너로 사라지게 될 것이다.”라고 증오의 말을 쏟아 놓는다. 그러면서 가장 철저한 진리조차도 잠시 머무는 하나의 물결에 지나지 않을 운명을 맞이하기에, 그 비판적 발언에 대중은 싫증을 느끼게 되고, 사회운동 역시 상황을 개선시키기 위한 최소의 시도를 하기도 전에 스스로 싫증을 느끼게 될 것이라며 싫증은 우리 인간 문화의 절대적 지배자이기에 파국을 말하는 비판에 대한 관심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시점에나 정말의 파국이 찾아 올 것이라고 비판담론을 폄훼한다.

 

그런데 파국에 대한 관심이 존재하지 않을 때 파국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파국을 예견하는 목소리가 파국을 막는 것이고, 그 파국의 목소리가 죽음을 맞이했기 때문에 파국이 발생하는 것이니, 파국을 말하는 비판담론은 헛된 것이 아니다. 비판을 고작 싫증, 염증, 피곤함으로 인식하는 사람의 자기 직시 회피, 비판을 거부하는 태도가 바로 파국을 가속화하는 사회일 것이다. 그래, 시간의 흐름은 많은 것들을 빛바랜 누추함으로 만들어버린다. 그렇지만 그 시간의 풍화를 견뎌내고 여전히 진실을 발하는 것들이 있다. 바로 그러한 것들은 사라지지 않고 오늘과 미래의 삶에 지평을 제시하고 있다. 그래서 과거와 만날 때 계승하면서 동시에 극복한다라는 지양(止揚)이 필요한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나는 보수성을 비난한 적이 없다. 그저 이러한 지양 없이 몽매와 편협으로 과거를 붙들고 신봉하는 것을 보수라고 우길 때 그것을 나는 비판하는 것이다.

 

3. 문학의 몽롱함, 회상의 미학이라는 이면(裏面)

 

보토는 고대 그리스 로마의 미술에 천착한 낭만적 고전주의 양식의 그림을 그렸던 19세기 독일 화가 안셀름 포이어바흐(Anselm Feuerbach: 1829-1880)를 설명하면서 그의 회화들에 대한 도피적 몸짓과 복고적 도취’라는 비평을 비판한다. 포이어바흐는 초기 산업사회의 비참한 시대에 등을 돌리고 인문주의 이상을 쫒은 진정한 창작 예술가라고 말이다. 비방하려면 예술분야 내의 진보주의가 지금보다 더 큰 의미를 지녀야만 할 것이라고 비평담론이 현재라는 시간을 탈피하지 못한 현재성에 얽매인, 곧 시간의 풍파로 사라질 아무런 의미도 지니지 못한 것이라고.  이러한 비난은 정의롭지 못한 악의에 불과한데, 현재라는 동시대의 안목으로 과거를 바라보는 그 어떤 담론도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는 가히 절대적 상대주의의 궤변이라 아니할 수 없다. 더구나 포이어바흐에 대한 비평은 매우 중요한 역사성을 지닌 담론인데, 그것에 대해서는 일체의 언급도 하지 않고 매도하는 글쓰기는 비열하다고 말 할 수밖에 없다.

 

안셀름 포이어바흐가 현실 도피로서 그리스 로마제국의 예술을 소환한 것은 다분히 곧이어 다가올 훗날의 독일민족의 정체성과 관련하여 폭넓게 세계지성들에 의해 비판받는 핵심 사안이기 때문이다. 이미 알려져 있듯 19세기 말 독일 지성인들이 그리스 로마 문화에 열광한 것은 자신들의 정체성, 즉 아리안 족의 순혈성(純血性)을 그곳에서 찾았기 때문이고, 그것이 곧 타자 배제의 전체주의 파시즘을 출산하는 정치문화의 토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다시말해 훗날 나치가 남긴 참혹한 인류 역사인 까닭이다. 보토는 나치에 대한 그리움, 파시즘의 복귀에 대한 회상에 젖어 비판 담론들을 천박한 비판주의라고 혐오를 드러내는 것이다. 누가 더 혐오스러운가? 나치의 폭력인가? 파국을 외치는 비평가들인가?

 

보토는 이런 얘기까지 쏟아낸다. 제기발랄하면 할수록 그 속에는 깊은 사고가 결여되어 있다. 이렇게 톡 쏘는 이성은 멍청하다.” 물론 재담들에는 무모와 편협, 우둔함이 있기는 하다. 그렇다고 이러한 제기발랄의 이성이 모두 멍청한 것은 결코 아니다. 여기에 곰브로치의 소설 페르디두르케 무모하고 편협하며 우둔한 사람들을 이해하는 것은 깨어있고 섬세하며 정신이 예리한 사람들을 이해하는 것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자기 논리 옹호의 문장을 인용하며 몽롱함은 중요한 가치라고 주장하고 나선다. 물론 모호성, 흐릿한 몽롱함은 문학의 전반적 기술의 하나인 것에 동의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 몽롱함이 제기발랄의 톡 쏘는 이성의 멍청함과 대극을 이루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보토는 플로베르, 샤르트르까지 발췌하여 몽롱함을 그들의 무감각증, 기면증, 격정적 태만함과 비교하면서 마치 무슨 문학의 절대가치나 되는 양 자신의 회상의 미학을 포장한다. 보토의 회상, 명석한 기억이 아닌 몽롱하고 흐릿한 불분명한 기억으로서의 그리움, 자신이 자라난 옛 집이 있던 시절, 과거로의 회귀를 예찬한다.

 

현재의 열정을 비난하는 이 작가는 몽롱함은 모든 예술가, 특히 이야기꾼에게 있어서는 지각의 필수 불가결한 수단인 동시에 아주 가까운 주변의 매우 구체적인 것들로부터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현실회피와 과거 복귀에의 열망을 더없이 정당화한다.  브레히트의 희곡 억척어멈과 히치콕의 를 대비하며, 브레히트를 멍청한 이성으로, 또한 억견(臆見)으로 매도하며, 히치콕을 신화의 일부로서 이 땅의 순수이미지의 개가(凱歌)라고 말할 때 정신 비판 지능에 대한 혐오가 얼마나 극한에 이르러 있는지를 목격하게 된다.

 

보토의 신화에 대한 환상과 집착, 즉 과거의 흐릿한 전설에 대한 맹목적이다시피 한 애정은 그의 독일민족 순혈주의, 나치에 대한 그리움을 문학의 광휘로 덮어 쓰려는 기만성으로 비친다. 황혼/여명; Dämmer이라는 글의 한 문장은 캐리어를 안고 자신의 차 앞에 앉아있는 낯선 여자아이를 자신의 차에 태우고 목적지로 향하는 여정에서 성적 향응을 받는 이야기 끝에 먹물을 온통 뒤집어 쓴 몽롱함에 의탁한 아래와 같은 기만적 언어의 향연을 펼친다.

 

인간의 성애와 그 문화는 신화의 저장고였다. 이 잠적해 있는 비밀스러운 존재들이 사는 고요한 신들의 세계, 피곤한 상태에서 사랑을 하려고 하는 지친 욕망은 때때로 신들의 세계를 들어 올려 우리에게 선사한다.” - 황혼/여명, 135쪽에서


음란함이 지배하는 인간 왕국을 신화화하는 글장이의 솜씨는 얼마나 교묘하게 세련되었는가. 이 글장이 극작가는 현재의 비판을 이렇게 신화라는 과거의 영예 속으로 침수시켜 그 더러운 죄악을 회상, 몽롱함이라는 신비의 심연 속으로 수장해 버린다. 여기에는 역사라는 것도 없고, 만일 이 글장이가 역사를 말한다면 그것은 너무 흐리멍텅해서 사실 또는 진실일 수 없는 모호함이 되어버려 부정될 것이다. 사실 이 40년이 지난 케케묶은 에세이를 읽게 된 것은 내 불찰이지만, 그 어떤 책이 의미가 없을 수 있겠는가. 반면교사로서, 아니 생각의 다양성이라는 측면에서 유럽의 대중들로부터 인기를 한 몸에 받고 있는 주류 예술가의 생각을 읽을 수 있었다는 점에 의미를 둘 수 있겠다.

 

옐리네크의 반대 자리에 있는 작가, 보토 슈트라우스로 인해 잊고 있던 오시마 감독의 영화 감각의 제국을 다시금 복기하는 시간이 되었음은 작은 보상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그의 글을 한 마디로 묘사한다면 세심하고 주의 깊으며 발칙하기까지 한 인간 관찰자의 흉물스러운 시선이 느껴지는 불쾌한 관능이라고 해야 할까? “회상 자체는 다정하며, 정신적 승화의 선물인 것이다.”라며 고향집 란 강변 천 년 된 떡갈나무 옆에 있는 제국 직속 도시에서 오랫동안 서 있었다며 회상에 잠긴 장면의 묘사는 얼마나 끔찍했는지. 급류에 휘말려 뒤집어진 보트로 인해 물속에 빠진 소녀를 비젠트 강변 둥근 바위에 다리를 꼬고 앉아 이 사태를 거만하게 관람하던 남자(작가로 짐작되는)가 소녀를 건져 올리며 잠시 동안 중단된 소녀의 삶, 그녀의 어린 얼굴에 남겨 놓은 달콤한 공포를 즐기는 모습에서 파시스트의 모습을 떠올렸다면 너무 나아간 것일까? 아무튼 내 지평의 영역에 없던 글을 이렇게 예기치 않게 읽게도 된다. 몽롱함, 회상, 사랑의 광기 등에 관심 있는 독자들에게는 충분히 흥미로운 책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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