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경제 지배 시대, 인간의 존엄성이 유지될 수 있을까?

 

인공지능 기술을 비롯한 인터넷 기반의 오늘, 유비쿼터스(ubiquitous)기술이 소위 인간의 존엄성을 위협하고 있다는 지적에 대한 논쟁은 제아무리 반복되어도 그 해결을 위한 대안의 도출은 매우 중차대한 바로 지금의 인간 앞에 놓인 과제일 것이다. 이 결정이 곧 인류 미래의 삶의 방향을 결정할 것이기 때문이다. 마침 국제도서전과 더불어 인공지능이 일상이 된 시대, 인간의 고유한 영역에 대한 인간선언, Homo duduri이라는 국내 문학인들의 글모음집도 눈에 띈다. 그들이 인간의 의미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가 과연 이 세계의 추세에 어떤 반향을 이끌어 낼 수 있을까?

 


반복되어 진부하게 느껴지는 제법 거창해 보이는 이 문제의 한 측면을 생각해보게 된 계기는 콜레주 드 프랑스 교수인 법학자 알랭 쉬피오(Alain Supiot) 이성이 법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법이 이성을 만든다.”라는, 법의 교리적 기능, 하나의 믿음 체계로서 법의 교조적 역할을 역설한 법률적 인간의 출현(Homo Juridicus)2법적 기술4과학 기술의 제어: 금기의 기술에서 말하는 기술을 인간적으로 만드는 도구로서의 법을 읽으며 제기된 법의 태도에 관한 문제를 생각게 된 것이다. 인공지능에 대한 숙의 과제로 또 하나의 층위인 법과 기술의 문제를 덧대어 말하고 싶은 것이다.

 

특히 시간과 장소라는 시공을 초월해 언제 어디서든 네트워크에 접속하여 인간 서로가 연결되는 삶을 만들어준다는 오늘의 유비쿼터스 세계에서 법()은 어떠한 변화된 가치를 가져야 할 것인가라는 문제의 논의가 내 정신을 윽박질렀기 때문이다. 이제 인공지능 기반의 유비쿼터스 기술은 인간과 사물의 경계를 흐릿하게 지워버림으로써 지금까지 인간사회가 믿어 온 믿음의 문턱을 허물어뜨리고 있다. 그것은 인간과 인간이 만든 이 세계가 믿어 온 인간은 노동력을 제공할 수 있지만, 인간 자신의 인격 전체를 계약의 대상으로 삼을 수 없다.“인간 존엄성에 대한 믿음의 균열이다.

 

이를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인간에게는 거래 될 수 없는 영역이 정말 존재하는가?’ 라는 다소 끔찍한 인간을 향한 물음이 된다. 만약 이러한 영역이란 존재하지 않음이 밝혀진다거나, 기술경제 주도 자본가들을 비롯한 그 집단이 이 영역을 부정하여 사라지게 된다면, 소위 인간의 사물화는 단순한 비유로서가 아니라 사회의 법적 구조 자체가 될 것이고, 지금까지 인간을 보호하기 위한 법의 기능은 그 대상을 상실하게 되고 완전히 새로운 무엇으로 변하게 될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거래 될 수 없는 영역을 끝까지 지켜낸다면 유비쿼터스 사회에서도 인간은 기술진보 보다 상위의 원리로 계속 남을 수 있게 될 것이다. 현대사회가 인간을 무엇으로 이해할 것인가는 이처럼 철학적이고, 헌법적이며 형이상학적인 문제가 아닐 수 없다.

 

1. 도그마(dogma)로서의

 

문제가 되는 인간의 존엄이라는 지금까지 인류가 지켜온 불가침의 영역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 인간 사회가 어떻게 작동해 왔는가를 짧게 생각해 보는 것으로 시작되어야 할 것 같다. 알랭 쉬피오 교수에게 박사학위 지도를 받은 노동연구원 박제상 교수는 모든 사람이 의심하지 않고 믿는 구조로서의 한 사회의 보편적 믿음을 도그마로 정의하며, 모든 인간 사회는 나름의 믿음 체계인 이 도그마에 기초해야하며, 이러한 보편적 믿음 체계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 사회는 단 하루도 유지 될 수 없을 것이라고, 인간 사회는 어떤 확립된 객관적 사실에 기초하는 것이 아니라 이처럼 그렇게 믿을 뿐인 도그마에 기초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의 예로서 우리들이 모국어인 한국어를 어떻게 배웠는지 거슬러 유추해보면 그곳에는 무턱대고 믿어야 하는 교조성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기존의 세계라는 체계에 다가가려면 어린아이는 우선 말하는 법부터 배워야한다. 이때 아이는 어머니의 얼굴 뒤에 숨어있는 언어의 입법자에게 무조건 복종해야 한다. 언어에 의미를 부여하는 일정한 제약에 복종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이처럼 최초에는 완전한 타율성에 의한 맹목적 믿음이 기초하고 있다. 이 근원적 타율성 없이는 그 어떤 자율성도 획득할 수 없다. 즉 이 최초의 타율성, 맹목적 믿음이 주체 형성의 첫 번째 교리이자 인간 삶의 원칙이다. 다시 말해 모국어를 가르쳐 준 사람의 말을 무턱대고 믿지 않는다면 결코 한국어를 쓰고 있지 못할 것이고, 그 아이는 이 맹목적 믿음을 실현하지 못함으로써 자기 의사 표현의 자유를 행사하지 못할 것이다. 이는 곧 이성적 행위를 가능하게 하는 일차적 조건이 말(언어)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여기서 인간은 이성적인 존재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교리적 기초에 근거하여 비로소 이성적인 존재가 된다는 말이 성립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도그마로서의 법이란 무엇인가. 한 사회가 스스로 정한 나아갈 방향이며, 사회가 스스로에게 부과한 이상적 모습이 곧 법이다. 법은 거울에 비친 사회의 표상이다. 즉 한 사회의 보편적 믿음 체계가 법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이 말을 되새겨보면 우리의 이성은 법이라는 도그마에 근거할 때만 이성적이라는 말이기도 하다. 이성이 얼마나 취약한 것인지를, 법의 교리적 기능을 파괴할 때, 즉 법을 논리실증주의적인 것으로 변질시켜 해석하게 될 때, 과학 이성이라는 이름 아래 인간을 순전히 생물학적 환원물로 취급한 끔찍한 비극의 역사를 우리는 알고 있다. 법은 인간에게 금기나 터부처럼 인류학적 기능을 지닌 교리이자 교조이며 교의인 것이다.

 

법은 시대, 장소를 달리하며 그 환경에서 인간과 세계의 중재 속에서 인간을 보호하기 위해 그 한계를 설정하는 도그마인 것이다. 법질서에 터 잡고 있는 원리들은 천명되고 찬양되는 것이지 계산되거나 논증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 존엄성은 그 어떤 과학적 토론이 이성적인 것이 되기 위해 발 딛고 서야하는 토대로서 법 원리이며, 과학이 이 법질서를 정초한다는 주장은 터무니없는 망상이다.” 최초의 맹목적 믿음이라는 토대가 없이는 어떠한 이성도 세워지지 않는다. 수학의 무수한 공리들을 생각해보라, 그 맹목적 믿음에 기초하지 않고서는 그 무엇도 증명될 수 없으며, 증명되지 않으며, 수학(기하학)이라는 골조가 성립되지 않는 것과 같다. 법의 도그마로서의 정의는 오늘날 생물학주의나 기술경제주의를 주장하는 집단들로 인해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 인간사회가 양보할 수 없는 교리이다. 법의 도그마성이 부정되는 순간이 곧 인간과 인간 사회의 파국일 것이다.


 

2. 인간과 도구 사이의 중재기능으로서의

 

법은 인간과 도구 사이의 중재기능을 맡아왔다. 도구가 인간에게 미칠 수 있는 위험 여부에 따라 특정한 금기에서 벗어날 수 없도록 도구의 용도를 제한하는 일을. (...) 법은 인간과 도구 사이의 중재기능을 맡아왔다.” - 알랭 쉬피오 , 법률적 인간의 출현에서

 

이 같은 법의 도그마로서의 존재 위치를 기반으로 해서 기술경제중심주의의 시대인 오늘에 있어 법의 미래를 생각해보자. 법은 인간들 사이에 정의를 세우고 인간들을 이성의 왕국에 복종시키는 다양한 방법 중 하나이다. 유비쿼터스 기술이 지금처럼 사람들 일상의 행위를 점령하기 전, 산업사회에서는 법이 사무실이나 공장이라는 물리적 공간에 있는 노동자를 보호했다. 하루 8시간 노동과 같은 개념도 모두 물리적 공간의 출입문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러나 오늘의 환경에서는 그 출입 담장이 사라지고 집, 카페, 지하철, 심지어 침실에서도 업무망에 접속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현대의 노동법은 더 이상 공간을 규제하는 법이 아니라 접속(연결)을 규제하는 법으로 이동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언제부터 연결을 끊어도 되는가라는 질문으로서 법의 방향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즉 법기술적 문제를 넘어서는 물음을 내재하고 있기 때문인데, 유비쿼터스 기술이 노동시간의 한계를 끊임없이 확장하려는 자본의 본성을 실현하고 확장하는 최적의 도구이기에 자본의 시간 점유에 맞서 개인 삶의 시간을 방어하는 새로운 형태의 권리에 대한 이해의 필요를 제기하고 있는 까닭이다. 지금의 유비쿼터스 자본주의는 더 많은 연결을 통해 더 많은 노동을 낳고 그 결과 노동과 휴식의 경계를 소멸시킨다. 따라서 현대 법은 연결을 차단할 권리를 보장하는 법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이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니라는 데 심각성이 있다.

 

여기에는 인간의 시간을 누구의 것으로 볼 것이냐 라는 매우 근본적인 정치철학의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 전통적 법률들은 노동자에게 노동력만을 거래 대상으로 보고, 노동자의 인격 자체는 계약밖에 남겨 둔다는 노동자를 보호하기 위한 허구의 전제 위에 성립해왔다. 다시 말해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력을 팔수 있지만, 자기 자신을 팔수는 없다는 믿음에 서서 노동계약은 노예계약이 아니라고 에두른 것이었다. 지금까지 우리들은 이러한 믿음에서 경제활동에 참여해 왔으며, 비근하게 벌어지는 노동자들의 단결권도 이러한 믿음에 기초해 가능해왔다. 사실 인간은 수단이 아니라 목적 그 자체라는 칸트를 인용할 필요도 없이 우리들은 자신의 인격 전체를 거래 대상으로 삼을 수 없다는 확고한 믿음들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원격 근무, 스마트기기 기반 업무, 플랫폼 노동 등에서는 노동 그 자체보다도 노동자의 주의력, 감정, 반응속도, 생활패턴, 심지어 수면과 이동 데이터까지 생산성의 일부로 포섭된다. 바로 이러한 노동력과 인격 사이의 경계자체를 흐리게 만드는 기술현실을 이해해야 한다. 이제 노동의 상품화라는 말은 지나간 옛 표현이다. 삶의 상품화’, ‘주체성의 상품화라는 인간의 그림자가 조금은 남은 표현으로 이동했다. 여기서 오늘의 기술경제자본의 궁극적 목표가 인간의 사물화라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기술자본이 고의적으로 악의적 의도를 가지고 인간을 사물화 하고자 한다기보다 구조적으로 측정 가능한 모든 것을 생산성 자원으로 전환하려는 경향을 가진다는 것을 강조하려는 것이다. 이점이 매우 중요한데, 법이 어느 곳을 바라보아야만 하는가에 지시점이기 때문이다.

 

3. 기술경제 자본 지배시대의 법의 향방, 의미 부재의 시대가 뜻하는 것

 

인류의 시간이 경과하면서 산업자본주의 시대, 포드자본주의, 정보자본주의, 플랫폼자본주의 등 각 자본주의를 주도하는 환경의 변화에 따라 인간의 신체, 시간으로부터, 지식에 대해, 인간의 주목과 관심에 대해 법은 그것들에 의해 침해될 인간존엄을 보호해왔다. 그것은 노동시간 제한, 최저임금, 산업재해 보상과 같은 것들로 표현되었다. 이제 연결되지 않을 권리, 데이터 소유권과 같은 권리가 인공지능자본주의 시대에 새롭게 보호되어야 할 권리로 등장하고 있다. 즉 과거의 법이 인간의 몸을 보호했다면 지금의 법은 인간의 정신적, 정보적 자아를 보호하려 한다. 이것은 법이 기존의 노동법 확장의 길이 아닌 새로운 형태의 인격권 체계로 발전해야만 함을 가리킨다.

 

이렇게 법은 인간과 도구 사이에서 그 중재를 통해 인간 존엄의 훼손을 방어하는 데 그 기능을 존속시켜 왔다. 그런데 이제 기술경제 자본은 이렇게 묻고 있다. ‘인간에게는 거래될 수 없는 영역이 존재하는가?’, 인류의 오랜 인간의 법률에서 방어해 온 인간의 인격과 노동력을 분리할 수 있는 인간존엄의 영역이라는 것이 정말 존재하가는 하는 것인가 하고 묻고 있는 것이다. 일부 생명주의나 경제중심주의 법학자들은 인간을 세포들의 화학적 물리적 조성물, 계산 될 수 있는 수량적 존재로 생각하기 시작했으며, 그에 따라 인간의 사물화가 아니라 인간을 사물과 동일한 선상에서 해석하기 시작했다.

 

법은 언제나 사회가 인간을 어떻게 이해하는 지를 제도화해 온 인간의 기술적 산물이다. 인공지능 디지털 기반의 유비쿼터스 시대의 법은 인간을 무엇이라고 이해할 것이냐는 질문 앞에 선 것이다. 인간을 데이터의 집합, 예측 가능한 행동 패턴, 관리 가능한 생산성 단위로 이해하게 된다면 그에 맞는 적절한 체계로 재편 될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인간에게 측정되지 않고 환원되지 않은 영역이 있다는 인식이 유지된다면 법은 그 영역을 보호하는 방향으로 발전 할 것이다. 다시 반복해서 기술한다면 법의 과제는 단순히 기술발전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기술이 침범할 수 없는 경계를 설정하여 인간을 보호하는 역할을 수행해왔다. 그러함에도 오늘의 기술자본은 더 이상 그 보호대상의 위치에서 인간을 세우려 하지 않는다. 그저 숫자이고 물질이라고 말이다.

 

우리는 유전학에서 내린 판결에 따라 독일 민족의 삶과 법을 만들어간다. (...) 국가는 인종의 보존이라는 목적을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 히틀러 유겐트 입문서에서

 

인간의 세계를 사물의 세계로 깎아내리는 소위 인적 물자라는 개념 사용을 통해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법 주체를 없애버린 히틀러의 제3국 언어는 사람들의 정체성과 권리를 보장하는 법률을 부정함으로 전체주의가 어떻게 인간을 말살했는가라는 인간 사물화가 초래하는 법과 세계 파국의 적절한 역사적 사례일 것이다. 나치의 생물학적 법의식은 바로 지금의 기술경제주의 법의식과 빼닮아있다. 소위 과학적 법칙을 정치적, 법적 기준으로 삼을 때, 거기에는 일체의 책임감이나 죄의식이 사라져버리게 된다.

 

이러한 환경 아래에서 법이라는 도그마는 그 교리로서의 지위를 잃고 만다. 인간의 맹목적 믿음이라는 기초 위에 있던 법이 그 기초가 부재하는 현실을 맞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법 이전에 인간의 이 맹목적 믿음인 도그마를 형성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바로 이 세계를 형성하고 있는 사회 구성원들의 믿음이다. 사회구성원들이 편리함과 효율성의 증가라는 진보에 매몰되어 기술경제 자본이 인간의 삶에서 인간 존엄을 서서히 박탈해 가 궁극에 인간 고유의 영역으로 주장할 것이 남아 있지 않을 때, 그때 인간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은 아주 막연하게 인공지능이 몰고 온 시대를 자신들의 편리를 비롯한 유무형의 이익 관점으로, 즉 효율성 높은 긍정의 낭만적 기술로 받아들인다. 이 문제는 오래 붙들고 숙고해야만 하는 문제이다. 그래서 발견되지 못한 드러나지 않은 층위의 과제들을 망라해 숙의되어 할 현 인류의 시급한 당면 과제가 아닐 수 없다. 유비쿼터스 시대에 법이 관리해야 할 영역은 무엇인가?에 대한 논의는 기술자본과 협의해야 할 문제가 아니다, 자금 한국의 정치권력은 실용주의에 매달려 그 기술자본의 압도적 부와 권력에 매료된 듯하다.

 

우리는 허구, 맹목적 믿음에 기대 이 세계를 구축해 온 존재이다. 이제 인간 존엄이라는 최후의 허구를 포기 할 것인지, 아니면 끝까지 이 영역을 버텨낼 것인지 갈림길에 들어서 있다. 인간들 인식의 문제이다.’ 우리들은 인류의 미래를 위해 어떤 인식을 가져야 하나? 기술경제 자본주의자들의 특이점의 시대, 인간존엄성을 가진 인간이라는 종이 더 이상 없는 세계를 지향한다면 과연 인간사회를 존립해온 믿음이라는 허구의 붕괴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곧 인간 세계의 절대적 파국이 아닐까?

 

자기 자신과 세상에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무의미에 빠지지 않고 이성적 존재로서 살아가기 위해 그 존재의 의미실현을 지탱하고 보호하기 위해 작동했던 법이라는 의미체계가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 세계는 어쩌면 무의 세계일지도 모른다. 이 세계는 이러한 의미체계에 대한 믿음과 함께 세상에 태어난 것이다. 큰 울림을 주는 이 문장으로 맺는다. 인간 존엄이라는 이 교조적 믿음을 우리들이 잃는 순간, 그것은 민주주의는 물론 세계의 질서를 지탱하는 법의 붕괴를 초래한다. 법이 이 최후의 인간에 대한 엄중한 교리를 버텨낼 수 있도록 하여야 되지 않겠는가.

 

이성은 약()한 것이다. 끊임없이 그 딛고 선 바를 돌아보고 보살피지 않으면

언제라도 광기와 망상으로 변질 될 수 있다. (...)

도그마는 인간의 탐욕과 망상에 한계를 설정하는 외부적 조건으로 기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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