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긋난 인연 - 영화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원작
오쿠노 슈지 지음, 김보예.박세원 옮김 / 디오네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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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목‘ 작가의 에세이집<소설이 국경을 건너는 법>에서도 마침 소개되었는데요,
가족의 의미를 새롭게 정의하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 감동적이라죠.
원작을 읽게 되어 정말 반갑고 기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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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어타운 베어타운 3부작 1
프레드릭 배크만 지음, 이은선 옮김 / 다산책방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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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대 청소년이....누군가의 이마에 대고 방아쇠를 당겼다.

이것은 어쩌다 그런 사건이 벌어졌는지에 대한 이야기다.”

 

소설의 첫 장은 위의 단 두 문장으로 구성되어있다. 두 번째 장부터는 에 대한, 즉 물음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이다. 바짝 긴장해야 무얼 묻고 있는지 알 수 있으리라는 위협 같다. 그리곤 알 수 없는 서술자가 배경 설명은 물론, 장면을 안내하고 하나의 장이 시작 할 때 혹은 끝날 때 여지없이 장을 열거나 마무리하는 설명을 해댄다. 그것은 독백같은 질문이거나, 상황을 명료하게 이해시키려는 듯한 문장들로 이루어져있다. 영화 틈틈이 정황설명을 통해 장면을 보조하여 관객의 이해를 돕거나 호기심을 유발하는 무성영화시대의 변사(辯士)처럼 느껴진다.

 

1. 이야기의 발단과 전개

 

3장의 마지막 문장을 보면 그때는 둘 다 그게 얼마나 맞는 말인지 몰랐다.”이다. 베어타운 아이스하키단 단장 페테르의 아내 미라와 딸 마야 두 모녀의 대화에서 이 마을에서 사는 게 아니야, 마야, 그냥 버티는 거지.”라는 미라의 말이 지닌 후폭풍을 예고하는 서술자의 진술이다. 이것은 독자의 상상력을 빼앗기도 하지만 예고의 내용이 무엇인지 안달하게 하는 역할도 한다.

 

그리고 4장의 마지막 문장은 그는 구단을 먼저 생각할 것이다. 오늘 수네를 내쫓으라는 명령을 하달 받더라도 그럴 것이다.” 이다. 하키단 주전 팀인 A팀 코치를 자진 사퇴시킬 것을 종용하는 구단 이사진들의 요구를 단장인 페테르가 어떻게 받아들일지에 대한 구단 사장의 생각이지만 이 역시 이후 페테르란 인물이 취할 행위를 예고하는 서술자의 진술로 읽힌다. 이렇게 각 장의 마지막 문장에 관심을 기울이다보면 읽는 재미가 더욱 쏠쏠해진다.

 

아이스하키단은 쇠락하는 소도시 베어타운 공동체의 자존심과 경제적 부와 도시 재건이라는 이익의 지렛대이며, 마을 주민 전체가 도달해야 하는 환상이자 꿈이다. 모든 주민들은 하키단과 연결되어 있다. 실업자일망정 왕년의 베어타운 최고의 하키 선수였으며, 술집 주인인 미망인조차 남편은 골키퍼였으니 말이다. 설혹 하키를 좋아하지 않더라도 사랑하는 남편이, 아빠가, 아들이, 동생이, 제자가 베어타운 하키선수인 마을이다. 그런데 10여년 만에 아이스하키 청소년전국대회 4강전에 진출하게 됨으로써 온 마을은 들썩인다. 마을이 도약할 수 있는 기회가 왔다.

 

구단의 세월과 함께해온 일흔 살로 보이는 A팀의 코치 수네가 청소년팀 코치 다비드에게 후줄근한 플래카드에 쓰인 구단 모토인 문화, 가치, 공동체를 설명하는 문장은 다분히 암유(暗喩)적이다. 그는 문화를 운운하지만 그게 무슨 뜻인지 아무도 설명하지 못한다고 하면서, 아마 승리하는 문화 일 것이며, 강박적이고 이기적이며 배려심이 없는 것이고, 공동체를 위해 개인은 희생을 수용하는 것임을 비춘다. 독자는 곧 이 낡아빠진 모토의 정신이 하키 선수들을 지배하며, 또한 마을 주민들, 구단 운영자들의 신념으로서 어떤 사건, 혹은 상황에서 보여 질 모든 행위의 근간을 형성할 것임을 예측하게 된다.

 

한편 마을 주민의 연대를 의미하는 공동체가 위선의 구조 위에 놓여있음을 보게 되는데, 주민들의 거주 지역에 따라 부유층, 중산층, 저소득층의 분명한 경계가 있다는 점이다. 호수를 내려다보는 산비탈에 자리한 고급주택가인 하이츠, 베어타운 중심가에 있는 중산층 거주지역, 그리고 타운의 끝, 숲에 인접한 할로로 불리는 빈곤지역이다. 할로지역의 아이들은 거지타운이라는 조롱과 폭력에 시달리는데, 결코 다른 지역의 아이들과 어울릴 수 없는 유소년팀의 아맛, 사카리아스, 리파, 세 명의 아이들은 할로 삼인방으로 칭하며 그네들만의 우정으로 차별과 멸시를 버텨나간다.

 

이와는 달리, 하이츠에 사는 케빈은 청소년팀의 최고 선수로 기량을 뽐내고, 아버지의 자살로 누이들과 함께하는 벤이라는 열일곱 소년은 케빈의 기량발휘를 위한 보디가드 역할로서 케빈 부모의 지원을 받는다. 이렇게 하키단의 연대는 위선적 의리의 토대를 딛고 있다. 유소년, 청소년 하키선수들은 각자의 출신 계층마다 최고의 선수가 되어 NHL 프로리그에 진출하여 성공하여야 하는 이유를 가지고 있다. 할로의 아이인 아맛은 허리가 휘어지도록 하키장을 청소하는 어머니를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고, 하이츠의 케빈은 부유층의 명예라는 오만을 유지하여 마을 유지로서의 지배력을 과시하는 것이다. 이같은 위선적 연대인 공동체가 어떤 정의(Justice)를 지킬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소설의 한 축을 이끈다.

 

2. 이야기의 위기와 절정

 

이 소설을 온통 물음으로 가득한 이야기로 내모는 사건이 터진다. 4강전에서 베어타운 청소년팀이 승리함으로써 가장 규모가 큰 청소년 아이스하키대회 결승전에 진출하게 된 것이다. 덩치는 작지만 빠른 스피드로 청소년팀의 공격수로 선발된 유소년팀의 아맛, 그리고 페테르와 미라 부부의 열다섯 살 딸아이 마야, 그녀의 둘도 없는 친구 아나는 결승진출을 자축하려는 케빈의 파티에 초대된다. 기절주와 마리화나를 권하고, 마야는 케빈을 따라 그의 방 침대에 눕는다. 청바지를 벗기려하자 그녀가 못하게 한다. 괜히 비싸게 굴지마, 나랑 같이 이층으로 올라왔으면 얘기 끝난 거잖아?” “그만해요, 제발!”, “나를 놓아줘요!!!” 케빈은 마야의 블라우스를 잡아 뜯고, 성폭행에 이른다.

 

그리고 29장의 시작은 예상치 못한 순간에 들이받히는 것이야말로 빙판 위에서 벌어질 수 있는 가장 위험한 상황이다.” 라며 서술자는 잔뜩 은유를 머금은 문장을 뱉어놓는다. 자신의 상처를 숨기던 마야가 결승전을 위해 수도로 출발하려는 하키구단 단장 아빠 페테르, 그리고 변호사인 엄마 미라에게 성폭행 사실을 고백하고, 케빈을 경찰에 고발한다. 결승경기를 위한 버스에 오른 케빈은 경찰에 붙들려 연행된다. 전국 최고의 주공격수가 빠진 채 경기에 임하여야 하는 상황에 처하고 만다. 이어 리더의 자질은 무엇일까?” 라는 서술자의 단 한 문장으로 시작되는 31장은 진정한 리더상으로 팀원의 의기투합, 연대를 이끌어내어 케빈의 빈자리, 그 무력감을 의연하게 메우는 벤이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 답은 독자의 몫이다. 서술자는 장면과 행위를 전달해줄 뿐이다. 본격적인 질문이 시작된 것이다.

    

 

 

마을은 분노하고, 마녀사냥에 나선다. 누가 누구에게 먼저 키스했니? 너도 반응을 보였니?” 성폭행 상황을 우연히 마주했던 아맛에게는 정확히 무슨 소리를 들었느냐, 정확히 어디에서..., 술에 취한 상태였냐고, 그리고 나무라는 눈빛으로...문제의 그 여학생을 좋아했지?”라며, 진실을 거짓과 의혹 그득한 환각으로 몰아댄다. 또한 하키 선수 학부형은 짝사랑에 마음이 상하면 성폭행이다!’라고 외쳐도 된다고 생각하지 않겠어요? 제가 같은 여자로서 이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는 이유가 그거예요.... 이 여학생의 아버지가 이걸 정치적으로 이용하려 하고 있어요.”라며, 사실을 왜곡 재단하기 시작한다.

 

37, 인간이 서로를 대하는 태도에 대해 토론을 벌이다보면 거의 항상인간의 본성을 둘러싼 논란으로 귀결된다.”그리고 배가 가라앉을 때, 집에 불이 났을 때 누굴 먼저 구하겠는가고 물으며, 가족이다. 우선 가족부터 구할 것이다.”고 이야기를 연다. 그런데 이조차 만만치 않다. 가해자 케빈의 부모와 피해자인 마야의 부모역시 자기 자식들을 구하려 들지 않겠는가? 또한 베어타운과 페테르 가족의 싸움이라는 도덕적 딜레마도 있다. 유명한 마이클 샌델의 정의(正義)를 다시금 소환하게 한다. 공리주의적 입장에 선 마을 주민들은 마야와 페테르를 부도덕하다고 비난한다. 공동체의 이익을 우선하지 않은 이기적 처사라고 하면서. 그러나 한 인간을 전체의 행복을 위한 도구로 보는 것이 과연 도덕적인가라는 물음을 마주하면 이익우선주의는 멈춰 서게 된다. 그런데 소설은 마냥 이러한 도덕적 정의론 타령을 하게 두지 않는다.

 

3. 이야기의 결말 ; 산다는 것에서 삶을 이해한다는 것으로

 

서술자는 인간존재를 서사의 개념으로 파악한듯 도덕적 고민은 내 의지를 드러내는 것이라기보다는 내 삶의 이야기를 해석하는 것이라며, 우리에게는 우리가 선택하지 않은 그리고 사회계약의 결과로도 돌릴 수 없는 도덕적 의무가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페테르를 단장직에서 해임하기 위해 모여든 하키단의 후원자인 마을 주민들, 구단 이사진 등 운영위원들은 하키선수인 자식의 미래에, 사업 번영과 이익 증대에, 하키학교의 유치와 도시개발의 가능성에 장애가 되었다는 자기들 삶의 이야기로부터 출발하여 성폭행 피해자인 마야와 그녀의 아빠인 페테르를 성토한다. 이때, 술집 펠센의 사장, 라모나가 등장하여 똑같은 부류에 둘러싸여 자신들의 세계관을 강화하는 부류하고만 대화하려는 고민을 필요로 하지 않는 이들 인간들에게 부끄러움을 알라고 일갈한다. 또한 하키단의 폐쇄적인 연대의 압박으로 목격했던 진실을 말하지 않았던 아맛이 나서 한 가족에게 행하는 집단 린치라 할 수 있는 공개토론장을 향해 진실을 토해낸다. 손바닥에 입이 틀어막힌 채로 지르던 마야의 비명 소리, 멍 자국, 폭행, 이해할 수 없고 추악하며 용서할 수 없는 그 모든 것을아주 사소한 부분까지 이야기 한다.

 

다수와 한 인간의 싸움, 절대 이길 수 없는 싸움, 두 번 다시 하키를 하지 못할 수 있음에도 할로의 소년이, 능력이 되더라도 결코 타인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리라는 그의 삶의 이야기에 놓인 도덕적 의무가 빛을 발한다. 또 있다. 검은 재킷을 입고 펠센의 술집에 모여 자기들만의 삶을 이야기하던 일군의 사람들, 베어타운 하키단을 해코지하는 어느 누구도 용서치 않았던 그들이 익명의 공개투표에서 페테르 해임의 부결에 의무의 표리인 권리를 행사한다. 도덕적 진리란 어쩌면 이처럼 인간 삶의 이야기에 기반을 둔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제 소설은 마지막 시선을 벤이와 케빈, 케빈의 범죄에 반대하는 아맛과 케빈을 옹호하는 전체 팀원, 베어타운에서 A팀 코치인 수네와 베어타운 청소년 팀의 주축선수들을 이끌고 케빈의 아버지 에르달의 후원 하에 경쟁지역인 헤드의 A팀 코치로 자리를 옮겨가는 다비드를 통해의리를 묻기 시작한다. 45, 서술자는 설명한다. “‘의리처럼 설명하기 힘든 단어도 없을 것이다. 의리는 항상 좋은 것으로 간주된다.....문제는 사람들이 서로에게 저지르는 가장 나쁜 짓도 바로 그 의리에서 비롯된다는 거다.”항상 의리를 떠벌리는 예능인이 떠오른다. 그는 빛과 그늘이 공존하는 이 언어의 의미를 정녕 알게 될까?

 

베어타운은 소설에서 단연코 이 세계의 또 다른 표현이며, 하키는 인간들이 몰두하는 삶의 희망, 꿈의 은유다. 소설에는 구체적 이름으로 등장하는, 자신의 목소리를 지닌 인물만 30명이 넘어서고 검은 재킷의 남자들, 구단 이사진들, 시의원 등 익명의 인물군까지 더하면 가히 복잡하기 이를 데 없다. 하키는 복잡한가하면 단순하기 그지없는, 규칙은 이해하기 어렵고, 그 문화와 더불어 지내려면 힘에 부치고...”, 우리네 인생이란 이런 것일 게다. 부의 계층화가 발생시키는 인간 배제와 조롱과 무시, 그리곤 위한답시고 보내는 이기심과 과시를 저변으로 한 값싼 동정, 포식자의 눈을 한 인간들의 무감정과 폭력의 일상화, 거짓말과 공동체라는 연대의 뒤에 웅크리고 행하는 탐욕스러움, 그 추악함의 현상을 묻는다. 또한 가족의 사랑, 우정, 의리, 연대, 정의를 묻는다. 소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이렇게 끊임없이 묻는 여정이다. 그 답은 우리들의 몫이다. 마야는 증거불충분으로 케빈에게 죄를 묻지 못한다. 소녀는 무릎 꿇린 케빈의 이마에 엽총을 겨누고 방아쇠를 당긴다. 그 결과의 기대 역시 독자의 몫이다.

 

성공지향이 삶의 가치처럼 승인되는 세상에 우린 살고 있는 것 같다. 그러하다보니 앞으로 적극적으로 나아가지 않고 삶을 반추하는 인간은 실패자라는 기막힌 주장이 많은 사람들의 인생관을 점령한다. 그러나 소설에서 그 실체를 드러내지 않고 목소리로만 이야기를 견인하는 서술자는 아마도 이렇게 답하는 것 같다. 답을 얻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에게 질문을 던진다는 사실, 바로 삶의 반추, 그 되돌아 봄(Introspection)에 있다고. 산다는 것과 삶을 이해하는 것의 차이에 놓인 그 엄청난 간극에 대해서. ‘재능이 묻혀진 두뇌쯤 으로 직역되는 프랑스 영화 <La Tête en friche>의 주인공 제르맹이 생각난다. 차에 대한 지식이 없어도 기름만 넣으면 움직이듯이 인생을 이런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질문도 반추도 필요치 않았던 사람이, 삶을 이해하려는 사람으로 거듭 나며 인생의 새로운 이해의 세계로 접어드는 감동적인 드라마다. 어쩌면 베어타운의 수많은 삶의 질문들은 삶의 이해의 세계로 우리를 안내하려 한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이르게 된다.()

 

 

붉은색 문자 : 소설인용문장

   푸른색 문자 : 강조를 위한 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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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이 국경을 건너는 방법
정영목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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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출한 영미권의 국내 번역 문학작품을 읽다보면 대개는 번역자 정영목이라는 이름을 발견하게 된다. 해외문학 작품을 즐겨 읽는 독자들에게는 낯설지 않은 이름이다. 그럼에도 나는 그가 쓴 글을 읽을 기회가 없었다. 아니 읽을 기회가 엄청 많았을 터인데 읽지 않았다는 표현이 올바를 것 같다. 번역된 책의 뒤편에는 거의 예외없이 번역자의 해설이나, ‘번역자의 말이라는 형식으로 편집되어 있지만, 나만의 감상이 혹여 번역자의 글로 인해 변형되는 것을 꺼려하기에 항상 외면하는 글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책은 외면해왔던 글들, 번역자로서 썼던 책의 마지막 페이지들에 실렸던 그 글들이 중심이 되어 만들어진 12명의 작가와 작품들에 대한 일종의 문학 해설집이다. 여기에 그가 번역한 작품들과는 무관한 순수한 일상의 단상이나 그의 문학 예술적 감수성을 보여주는 작은 평론들이라 할 수 있는 에세이 22편이 함께 구성되어 있다. 신간 안내에 이 책이 눈에 뜨이자 곧 알아차렸던 것 같다. 내 고유의 작품 감상이 번역자의 해설과 뒤섞일 염려가 없는 상태, 즉 한 걸음 떨어져 번역자가 읽고 느꼈던 작가와 그 작품들의 감상을 함께 나눌 좋은 기회라는 것을.

 

1. ‘정영목이 통과한 작가들

 

<내가 통과한 작가들>은 지난 522일 타계한 필립로스를 비롯하여 존 업다이크, 존 밴빌, 코맥 매카시, 커트 보니것에 이르는 12명의 작가와 작품들에 대한 평론과 해설로 구성되어 있다. 그 첫 인물을 필립 로스가 열고 있는데, 번역자가 가장 좋아했던 작가였던 것 같다. 유태계 미국인이었던 작가로서 그의 작품은 줄곧 자기에게 일어난 일을 이해하려는 기록이었음을 해독해 주는데, 로스를 향해 뻔뻔스러울 정도로 전통적인 소설가라고 비아냥거렸던 바다의 작가 존 밴빌과의 비교 해석은 단연 압권이다.

 

내용이 뻔해지면 스타일도 뻔해진다라는 지론을 펴는 밴빌이 보기에 에브리맨의 평이한 스타일은 곧 삶에 대한 사유가 평이하다.”는 증거로 보였던 모양이다. ‘죽음을 주제로 한 두 작가가 그네들의 작품에서 동일한 모티브인 바다를 등장시킨 문장들을 읽게되면 그 사유의 판이함에 삶의 복잡성을 대하는 입장을 발견하게 된다. 해설자인 정영목의 로스를 위한 대변은 별도로 하고 그 다음의 이해는 독자의 몫이다.

 

내가 예순에 죽었다면 나는 아무것도 쓰지 못했을 것이다.”라고 했던 주제 사라마구돌뗏목, “강인하고 과묵한 남성의 이미지로 굳건하게 각인된 헤밍웨이의 단편 작품을 통해 작가자신의 내면 치유를 향해 묵언적 평온을 지향하는 또 다른 헤밍웨이의 모습으로 안내하기도 하며, “미국의 소도시 중간계급의 삶에 천착했던 존 업다이크토끼 4부작을 중심으로 존 치버필립 로스의 평론과 어울려 더욱 작품에 대한 이해의 범위를 확대시켜주기도 한다. 그리고 오스카 와일드’, ‘알랭 드 보통’, ‘코맥 매카시등을 새롭게 기억하는 읽기의 시간이 되어주기도 한다.

 

소개된 모든 작가들에 대한 해설은 그들의 작품을 접하게 될 경우 분명 보다 깊은 읽기에 도움이 될 것이지만, 단 한편의 작품을 읽었음에도 강렬하게 내 마음을 지배하는 모더니스트 스타일리스트인 존 밴빌바다를 통한 짧은 평론은 그의 또 다른 회색빛 색조 소설을 기다려지게 한다. 그리고 가장 마지막에 배치된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어둠 속의 웃음소리에 대한 웃음을 자아내는 메타 치정극으로서의 꼼꼼한 작품 해석은 그저 책장에 꽂혀 있기만 했던 그의 작품으로 달려가게 만들기도 한다. 내겐 인간의 삶과 역사에 대한 이들 작가들의 각양각색의 시선을 한 곳에서 발견하는 썩 좋은 시간이었다고 해야겠다.

 

2. ‘정영목이 읽은 세상

 

사실 <내가 읽은 세상>이라는 제목 하에 모여진 정영목의 에세이들은 기대하지 못했던 수확이라 할 수 있다. 번역자라는 직업적 편협성에 한 사람을 가두어두고 그 좁은 곳에 관념을 덧씌우고 있었던 내 편견 탓이었을 것이다. 이것은 22편 중 첫 세 번째에 수록된 칭찬과 성취에 선 사람의 모순된 태도를 지적하는 야유할 권리라는 글에서 완벽하게 전복되고 만다. “칭찬하고 갈채를 보낼 때는 그저 박수만 쳐도 되지만, 자신을 비판하려면 야유하지 말고 예의와 격식을 갖추라고요구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결론부에서 남에게 야유할 권리를 인정하는 것은 자신이 갈채로 죽는 것을 막는 영리한 방법일수도 있음을 지적하며 맺는데, 그야말로 그의 사유와 문장에 완전히 매혹되는 순간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자비가 정의에 우선한다는 것을 가르쳐 준 할머니의 목소리, 김태영 감독의 영화 <가족의 탄생>과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그렇게 아버지 된다>, 여기에 순정만화 바닷마을 다이어리까지 가세하며 가족의 의미를 새기는 새로운 가족은 여느 베스트셀러 에세이를 초월하는 사유의 경쾌함과 깊이가 균형을 이룬 감동을 준다.

 

모두 엄선되고 시의성, 또는 지적 지평을 넓히는 글들이지만 내게 인상 깊었던 에세이는 브레이킹 배드의심의 혜택, 두 편을 선택할 수 있다.

전자는 2014년 미국 에미상 작품상을 수상한 드라마 <브레이킹 배드>의 주인공 월터 화이트의 삶에 펼쳐지는 삶의 여러 아이러니에 포커스를 둔 글이다. “세상이 자기를 보는 눈 세 가지”, 자신이 설정한 이미지대로 나도 나를 보고 세상도 나를 보아주는 눈이 일치할 때와 불일치 할 때 벌어지는 인간의 상황을 따라가며, 약자였을 경우의 원망, 강자였을 경우의 자기모독에 대한 세상을 향한 폭력의 모습을 바라보게 해준다. 자신의 간절함을 정당화하는 순간 그것이 악으로 변해가며, 그 악을 선으로 인정받으려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발견케 되는 여정은 불과 4페이지의 짧은 글임에도 거대한 장편소설을 읽어낸 듯한 감상을 주기까지 한다.

 

한편 의심의 혜택합리적 의심이라는 법적 용어를 빗댄 영어의 ‘benefit of the doubt'로 출발해서 세상의 이해에 감추어진 합리성과 투명성의 실체가 발하는 삶의 상황들을 알려준다. 단연 삶의 지혜가 농축된 글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시인 김수영, 평론가 김윤식, 소설가 이문구에 대한 소박하고 친밀감 넘치는 평론 또한 진중하며 맛깔스럽다. 번역가 정영목이 아닌 독보적인 에세이스트로서의 진면목을 알게 되는 기회이기도 하다. 번역뿐 아니라 앞으로 그의 더 많은 창작 작업을 기대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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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시선인장
싸하르 칼리파 지음, 송경숙 옮김 / 한국외국어대학교출판부 지식출판원(HUINE)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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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문학시장에서 아랍이나 아프리카, 동남아등지의 문학작품을 발견하는 것은 좀처럼 쉽지 않다. 이런 기회의 결핍은 해당 지역의 국가와 국민들의 실상을 그네들의 목소리로 들을 수 없음을 의미하고 타인의 시선 특히 서구와 이들보다 정치경제적으로 우월한 언어를 통해서 일방적이고 왜곡된 허상에 익숙하게 되어버려 소외된 이들과의 소통 자체를 어렵게 하기도 한다.

 

이 작품은 국내에 소개된 팔레스타인 문학작품 중 처음 소개되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국내에 2005년도에 번역 출간되었으니 벌써 햇수로 14년이 되었. 팔레스타인 문학을 찾아보게 된 계기는 잔인한 이스라엘(原題;The hidden history of Zionism), 쇼크 독트린(原題; The shock doctrine)이란 두 저술을 읽고 나서 취한 동작이고, 어렵사리 이 작품을 찾아내게 되었다.

 

작품의 서문에 소개되고 있듯이 작가싸하르 칼리파는  나는 여기 오늘의 이야기를 쓴다.”고 선언하고 있다. 이처럼 이 작품은 유태민족주의자들, 다시말해 시오니스트들의 국가인 이스라엘의 무력침공에 점령지로 변한 자신들의 땅 한가운데 유배 아닌 유배로 신음하는 팔레스타인들의 절규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소설의 배경 시간과 공간이 1967‘6일 전쟁에서 아랍 측의 패전으로 이스라엘 점령지가 된 1970년대 초의 요르단 강 서안(西岸) 나블루쓰 이지만 그 사정은 2018년 오늘과 그리 다르지 않다. 이스라엘 정치주도 세력인 시오니스트들은 오늘도 공공연히 이런 선언을 한다.

 

우리는 갈릴리 지역의 아랍주민들을 제거하기 위해

테러와 암살, 협박, 토지강탈, 사회적 서비스의 중단 등 모든 수단과 방법을 사용해야 한다.

우리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여기서 노예로 사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들 모두를 죽여야 한다.”

 

소설은 팔레스타인 상류층 가문인우싸마27세의 청년이 고향인 이스라엘 점령지인 요르단강 서안의 나블루쓰로 돌아가는 장면에서 시작된다. 국경검문소에서 이스라엘군이 이들에 가하는 비인간적이고 무참한 심문의 과정을 순화된 문학의 언어로 묘사하고 있지만, 사적(史的) 사실을 기억하고 있는 독자들에게는 그 끔직한 이스라엘군의 야비하고 잔인한 행태를 떠 올리는데 무리가 없다.

    

 [ 이스라엘 공군의 가자지구 폭격 : 이 사진에는 '이스라엘의 집단학살과 자발적 공범자들'이라는 설명이 붙어있다. ]

 

유전(油田)까지 갔다가 이리로 돌아온다? 여기가 뭐가 좋아서? 당신들은 은혜를 누릴 자격이 없어, 우리야 다르지, 이제 몇 해만 있으면 거기도 우리 땅이 될 것이고,..”하는 이스라엘 군인의 비아냥에서 핍박받는 그네들 고향의 현실을 이내 그려 낼 수 있다. 파괴된 가옥들, 타버린 나무들과 황량하게 드러난 대지, 천정부지로 치솟는 물가, 만성적 실업의 그늘이 드리워진 곳, 배운 자들은 고향을 떠나고 힘없는 노동자들만 남아있는 곳, 요르단강 서안 나블루쓰!

 

작품은 이 지역 상류계층이었던알카미르가문의 장남 아딜그리고 동생바씰과 사촌인 우싸마’, 이스라엘 텔아비브의 공장 노동자 동료인주흐디를 중심으로 그네들 내부의 갈등과 번뇌를 통해 오늘의 팔레스타인인들의 좌절과 분노, 증오를 이야기한다. 만성신장병을 앓는 아버지 알카미르를 포함한 9명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아딜은 적()인 이스라엘의 공장 노동이란 수단을 취하지만 귀향한 사촌 우싸마로부터 적에 대한 저항을 포기하고 주구노릇을 한다는 지속되는 추궁을 받는다. 자신들의 땅을 등지고 떠나는 팔레스타인들은 그나마 외지에서 자신들의 권익을 찾을 수 있는 계층들이다. 이런 외부의 세력들이 고향을 지키며 이스라엘군의 감시 아래 고립과 억압된 세계에 놓인 자들의 무력함을 호통한다. 배고픔과 가족의 생존을 위해 이스라엘지역으로 새벽부터 이동하는 그네들의 고통과 민족적 자존심을 버렸다는 힐난에는 중도가 들어설 자리가 없다.

 

점령! 그것은 여러 의미를 지닌 말이다.

유배! 제 땅 한가운데서 우리는 유배를 당하고 있다. 그것이 현실이다.”

 

이스라엘에 아니 유태인에게 작은 실수라도 하면 고문과 구속, 그리고 죽음만이 기다린다. 저항하는 모든 젊은이들은 인간이하의 감옥에 수감되어 있거나 이미 죽었다. 온통 총부리가 겨누고 있는 지역에서 누가 더 이상 저항이란 언어를 뱉어낸다는 말인가? 나의 가족에게 누가 한 톨의 밀알을 주겠는가? 고향을 떠나지 않고 언젠가는 해방되리라 믿고있는 이 무지한 사람들의 생존 그 자체가 의도적으로 자행되는 폭압과 잔혹성, 경제적 핍박으로 팔레스타인인들을 몰아내려는 이스라엘에 대한 저항이리라.

 

작품은 무력저항과 이스라엘에 대한 적개심의 분출만이 민족의 해방을 가져올 수 있다는 우싸마와 가족의 생존을 위해 이스라엘의 노동자로서 생계를 지켜나가는 동족들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그네들 삶의 방편에선 아딜의 대립, 그리고 소위매판자본까지 들먹이며 서로 손가락질 해대는 동족들 간의 반목, 알카미르와 그의 자식들 바씰누와르를 통해 보여지는 세대간의 가치인식의 괴리와 갈등, ‘주흐디의 이스라엘 노동자와의 싸움에서 적의 대상이란 바로 그들 내부인 자신, 자신들 스스로의 몰락이 아닌가하는 회의와 반성까지 이스라엘 점령 하에 있는 오늘의 팔레스타인인들의 울분과 증오의 요소들을 빼곡히 담아내고 있다.

 

요르단 강 서안지구와 가자지구의 시장에서는 만족이라는 물건은 팔지 않아.”라는행복이란 사치스럽기조차 한 언어의 상실과 좌절의 외침은 그네들을 외면하는 세계 우리들의 마음을 무겁게 내리 누른다.명확한 관점을 위하여 시간을 필요로 하는 대부분의 경험과는 달리 인티파다(팔레스타인 민족 대봉기)는 당장 기록될 필요가 있다.”는 저자의 말처럼 소설적 작품성을 떠나 이스라엘 부르주아들의 탐욕, 국제 자본주의의 착취,...”라는 외피와 광신적 유태민족주의의 패권주의 망령에 대한 세계민을 향한 고발로서의 중요한 가치를 가진다. 문학작품이 이렇듯 이념적 잣대를 깊이 들이대는 것이 곤혹스러운 일이기도 하지만 그네들의 문학은 당분간 이러한 현실을 외면 할 수 없을 것이다....

 

P.S.

2018529, 팔레스타인 박격포 공격에 이스라엘군이 '가자지구'를 공습했다는 뉴스는 사흘 전 이스라엘군 탱크의 공격으로 무장대원 3명이 숨진 것에 대한이슬라믹 지하드의 보복 일환이라 전하고 있다. 이스라엘군은 전투기를 동원해 즉각 공습에 나섰습니다.”패배할 가능성이라곤 전혀 없는 절대적 강자가 벌이는 약자에 대한 무차별적 폭력이 지금도 가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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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버 트위스트
찰스 디킨스 지음, 강미경 옮김 / 느낌이있는책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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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 그릇을 받쳐 든 작은 두 손과 분홍색깔 배경의 예쁘게 장정된 책, 올리버 트위스트(Oliver Twist)가 내 시선을 잡아당긴 이유는 이것이었을 것이다. 아이의 작은 손에 느껴지는 공손함과 그 이면의 두려움, 조심스러움, 연약함이, 그리고 강제된 어떤 힘에 대한 것이.

감정의 과잉일까? 이미 소설의 이야기를 알고 있다는 배경 지식 때문일지는 모르겠다. 에밀의 저자 ‘J.J.루소아이는 자연이다.”라 말했다. 조작된 어떠한 것도 끼어들지 않은 그것, 그런데 이 인위적인 것들이 자연을 다른 무엇으로 변화시킨다. 굴종을, 겸손을, 불필요한 정념들에 주눅 든 존재로, 소설은 바로 이 조작을 자연이라는 선으로 회귀시키려는 놀라운 희생과 믿음, 사랑을 이야기 한다.

   

 

 

1. 범죄를 생산하는 사회

 

산업자본가들의 광기가 고조되던 노동 착취적 환경, 이로 인한 극심한 빈곤이 대중화되던 19세기 영국사회가 배경인 작품이다. “경비절감, 수지타산”, 이 단어들은 아홉 살 어린아이를 팔아먹기 위해 구빈원 위원들의 비밀회의에서 들려오는 음절들이다. 또한 먹이를 주지 않아도 살수 있다는 괴상한 논리를 실험하여 아이 10명중 여덟 명을 저세상으로 보내는 보육원장의 탐욕스러움까지 더해진 파렴치와 잔혹함이 사회의식을 장악한 세계이다.

 

죽 한 그릇 더 주세요, 원장님.”

올리버 트위스트가 죽을 더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그 아이는 교수형을 당할 거요.” (P 30)

    

어쩌다 주어지는 멀건 죽 한 그릇, 그마저도 혹독한 매질이 대신하는 극한의 생존환경, 아이는 구빈원의 탁월한 자본가적 계산에 의해 노동력이 필요하던 장례사에게 떠 넘겨진다. 계층의 밑바닥으로 내려갈수록 약자들 간의 잔인함은 더욱 증폭된다. 거짓과 위선, 질시와 경계의 감정이 더해지고 굶주림과 폭력은 늘어난다. 자연을 거스르는 인간의 그것들이 편협과 무지, 악과 지배욕에 올라타 아이에게 불행을 요구한다.

 

아이는 도망친다. 광기와 불행이 너울대는 고향, ‘머드포구를 벗어나 런던으로. 농촌에서 쫓겨난 도시빈민들로 득실대는 대도시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겠다는 듯이 올리버를 이끈다. 먹을 것도, 잠 잘 곳도 없는 아이에게 구빈원을 대신한 곳은 소매치기 집단이다. 악을 생산하는 사회 구조에서 그야말로 자연스러움 자체일 뿐이다. 집단의 우두머리인 페이긴은 범죄의 종착점인 교수대를 설명함으로써 올리버를 위협하고 속박한다. 사회의 모든 계층이 뒤질세라 범죄를 양산하고, 또한 이것을 인지하지 못한다.

 

선서 시키시오

입 다무시오.”

쇼를 하는구먼.”

판결을 하겠소.”

“3개월간 중노동형에 처한다. 퇴정하시오.” (P 136~137)

 

단지 두려워서 내달린 어린 아이를 잡아와 벌이는 즉결심판의 모습이다. 왜곡된 지식, 부재하는 도덕, 하찮은 권위들이 팽배한 세계, 올리버를 단지 수지타산의 물건으로만 여겼던 구빈원교구(敎區)직원 범블이나, 소매치기 우두머리 페이긴’, 즉결심판 판사, 이들 모두는 자신들이 악인이라 생각지 않는다. ‘선한 이웃이라 자처하는 이들이 만들어내는 추악한 세계의 이율배반(antinomy), 개인의 선한 신념이 악을 축조하는 우리네의 투영일 것이다.

 

2. 사랑이라는 믿음, 그리고 희생

 

이처럼 그 경계를 구분키조차 어려울 만큼 얽혀있는 집단과 계층의 부도덕성이 점령한 사회를 배경으로 하는 이야기임에도 소설은 아름다움과 자연이라는 선의 충만한 감동으로 가슴에 파고든다.

 

브라운로’, ‘로즈’, ‘메일리 여사로 등장하는 인물들에 의해 아이는 구원되고, 보호받는다. 이들은 버려진 채로, 외면 된 채로, 이용과 착취의 대상으로, 냉담함과 밀려드는 공포의 환경이기만 했던 세상에서 안전과, 위로와 평온의 존재함을 아이에게 알려주는 사람들이다. 아이의 고통을 교감할 수 있는 사람들, 아이라는 자연에 대한 조건 없는 믿음을 실천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이 소설의 강렬함은 간신히 벗어났던 구렁텅이로 어린 올리버를 다시금 소매치기집단에 넘겨주었던 낸시라는 여성이 발휘하는 죄에 대한 자기이해와, 그로부터 시작된 인간에 대한 사랑과 처참한 죽음의 장면이랄 수 있다. 매춘, 좀도둑질, 밀고로 점철된 삶을 살아야만 했던 여인이 새로운 삶의 무대로 나갈 수 없을 만큼의 악의 조밀한 얽매임은 그것으로부터의 탈출이란 것이 짐작할 수 없는 용기와 고통임을 보여준다.

 

세상에서 버려졌던 아이, 그 자연을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리는 데에는 무수한 사람들 공동의 협력과 노력, 그리고 생명을 건 분투여야만 한다. 이 소설이 발산하는 감동의 울림은 이처럼 진정함, 정의, 믿음의 회복을 위한 지난한 헌신과 희생임을 발견케 하는 데 있는 것이지 않을까?

 

고작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인간됨을 잃지 않고 행복을 찾아가는 어린 소년의 이야기라는 이 소설에 오랫동안 달린 계도(啓導)적 해석들은 사회와 기성의 인간 공동체가 자신들은 책임이 없음을 회피하는 몰염치가 될 것이다. 디킨스의 이 문학작품은 단순한 아동문학의 차원에 머물지 않는다. 어린아이 올리버 트위스트로 대변되는 자연의 순수성과 도덕적 가치의 고귀함에 대한 환기이며, 이의 회복을 위한 자기반성을 상실한 사회와 인간 구성원들에 대한 비판이라 해야 할 것이다. 때 묻은 마음이 정화되는 듯한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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