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타자 - 정체성의 환상과 역설 무의식의 저널 Umbr(a)
슬라보예 지젝/ 러셀 그리그 외 지음, 강수영 옮김 / 인간사랑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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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은 사회라는 거대 구조에 짓눌려 그것이 설정하고 있는 수많은 규칙들과 제도, 혹은 문화라는 관습적 양식에 자신을 맞추어야 하는 고통을 수용함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게 된다. 결국 라는 존재의 정체성이란 우리가 사회 속에서 살아가기 위해 불가피하게 만들어 낸 가면과도 같다. 그런데 나라는 실체는 정작 그 가면 뒤에 감추어져 있는 어떤 주체이기에 이 분열된 는 문득 문득 자신이 낯설어지며, 그 간극으로 고통과 불안을 느낀다.

 

타자라는 이 수상쩍은 책을 읽던 중 정말 우연치곤 기이하게 The Call이라는 가수들의 콜라보(Collaboration) 음악 프로그램에서 태민×비와이가 부르는 <피노키오>라는 노래 말이 들려왔다. 아마 대충 이런 가사였던 것 같다.

 

너로 향한 내 거짓이 내겐 익숙해, I wanna be wanna be,

하얀 웃음너머 검은 거짓말들을 꼭 진실인척 진심인척 난 나를 꾸며,

더 깊숙하게 숨어버린 진심, 이러다가 진짜 내 모습마저 사라질 듯 해.....”

 

노래를 부르는 이 젊은 가수의 호소에는 무대에 올라 타인에게 보이기 위한 자신의 꾸밈에 익숙해져 있음을 자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곤 그 꾸밈, 가면의 삶이 정작 자신의 실체가 소멸될 것 같은 불안을 느끼게 하고 있음을 노래한다. ‘, 이건 진정한 내가 아닌데, 진짜 나의 삶을 살고 싶어라는 소위 사회구조라는 대타자(大他者)에 저항함으로써 분열된 주체의 통합, 온전한 를 되찾고 싶다는 무의식적 외침의 반영일 것이다.

 

이 책은 이렇게 결핍을 겪는 주체, 주체 내부의 상처와 마주하기, 미완의 나를 총체적 나로 끊임없이 지향하기, 실패가 불가피한 나를 만나는, 지속적인 진자운동을 통해서 타자(분열되어있는 내 안의 타자들)를 동일자(the same)로 만드는 무한한 과업의 수행을 이야기한다. 정체성으로 가는 여정의 다양한 논의들이 제시되고 그것들의 철학적 혹은 논리적, 그리고 성적 함의를 살펴보는탐색의 과정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정신분석, 젠더연구, 비교문학, 현대철학를 대표하는 7인의 라깡주의 석학들이 사회구조에 대항한 주체의 저항 가능성 등을 어떻게 이론화하는지에 토대를 두고, 부분적이나마 국내 출간되지 못한 라깡의 여러 세미나의 내용들을 통해 정체성과 동일화에 대한 심층적인 논의를 엿볼 수도 있으며, 강박의 망상적 실재를 이해하게도 되고, 혹은 성차에 대한 오랜 논쟁적 논의를 지닌 페미니즘의 이론적 무기를 발견할 수도 있게 해준다.

 

따라서 소개되고 있는 담론의 주제와 관련하여 읽는 이에 따라 그 실천적 관심은 무궁무진 할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 책의 서장을 여는 슬라보에 지젝의 대타자의 권위에 복종하려는 열정적 애착에 대한 주디스 버틀러의 비판으로서 라깡 해석은 그야말로 압권이랄 수 있다. 이를테면 버틀러는 대타자에 저항하려는 원초적인 복종은 상상계에서 이루어지기에 상징계인 실재에서 무력하며, 그럼으로써 열정적 애착을 봉쇄해버린다. 결국 주체는 사회구조에 대항 할 수 없는 형국이 되어버린다. 그러나 지젝은 열정적 애착이란 근본적 환상이며, 이것을 가로질러 무화시키고, 주체적 결핍을 겪도록 하는 것, 즉 무력감은 원초적 열정적 애착의 필요를 자극하는 탈애착(dis-attachment)이라는 틈새를 일컫는 또 다른 이름으로 해석함으로써 저항의 자유가 가능한 주체를 복원해낸다.

    

 

 

이 논의는 진정한 여성’, 그리고 진정한 행위의 개념으로 이어지는데, 페미니즘 이론가들에게는 매력적인 이론 기반을 제공하는 부분이 될 것 같다. 고전 느와르와 90년대의 신 느와르에 등장하는 팜므파탈의 형상을 비교함으로써 남성적 정체성이 스스로를 주장하기 위해 필요한 내재적 위협으로 창조해낸환상에 머물지 않고, 이 환상을 수면으로 끌어내 남성적 게임을 완전히 수용하고 남성을 게임에서 완전히 패배시키는 대타자 위협의 효과성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예시되는 존 달John Dahl의 영화 마지막 유혹 The last seduction의 주인공 린다 피오렌티노의 한 장면 -피오렌티노는 남자를 연인으로 받아들이기 전에 직접 남자의 바지 지퍼를 열어서 그 안에 손을 넣고 그의 상품을 점검한다. 그녀는 나는 보지 않고는 어떤 물건도 사지 않아요.’라고 말한다. 이후 그녀는 어떤 식으로든 그와는 따뜻한 인간적 접촉을 거부한다.” - 은 팜므파탈 역시 남성적 환상의 실현이라는 유령적 아우라를 의도적이며 잔혹하게 떼어버리는 진정한 여성이라는 행위의 형상으로서 선명하게 각인된다.

 

한편 페미니스트 기획의 유효성 측면에서 뉴욕주립대() ‘마리나 드 카네리의 논문 일자에 균열내기: 주인, 노예 그리고 아내헤겔주인-노예의 변증법에 대한 페미니즘 진영의 비판 혹은 찬양에 스며있는 오류 지적을 통해, ‘본질의 단일성을 회피하면서 인간 존재의 총체성을 사유하기 위해 일자(一者)의 균열을 도입하고, 여성을 총체성의 필수적 기능으로, 또한 치유할 수 없는 남성의 불안에 깃든 증상으로 설명해내기도 한다.

 

또한 덴마크 아루스대() ‘커스틴 힐드가르환상으로서의 성과 증상으로서의 성은 일종의 논리 수학을 통해 남성은 여성에 대한 환상을 통해서만 보편적이 될 수 있다.”는 즉, 성차(性差)는 모순적임을 증명해 내는데, ‘중간 항 배제의 법칙을 인정하지 않는 직관주의의 논리는 아마 이 책의 신선한 지적 매력을 증폭시키는, 더욱이 라깡의 그 유명한 명제인 성관계란 없다.”의 남성이 말하는 여성적 본질 없음의 의미를 확인할 수 있는 흥미로운 주제를 관통하고 있기도 하다.

 

모두(冒頭)의 아이돌이 부른 노랫말로 회귀하면서 맺어야 할 것 같다. ‘동일화(同一化)’의 이야기다. 어느 순간 주체인 청년이 대타자인 사회대중의 응시에 담긴 거울상에서 자신의 이미지를 진정 발견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자신이 지금까지 살았던 정체성이 강탈되었다는 동일화의 오류임을 자각하는, 불안의 정서가 나타났다는 것일 게다. 이러한 양상에 완전히 일치하는 정신분석적 해석이 있다.

    

대타자의 응시가 집요하고 고집스럽게 반복됨으로써 변장한 주체는 자신이 붙들려있는

동일화의 자리에 불가피하게 놓이게 된다. 다시 말해 대타자의 욕망의 대상으로 포박당했으니

이제 더 이상 자신이 욕망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콕 집어낼 수 없어졌다.”

 

아마 태민×비와이의 노래 속에 등장하는 의 처한 상황이 이것일 것이다. 꾸며낸 정체성에 자기 동일화를 거부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 그 인식에 이미 자기 존재의 위협에 저항하는 힘이 있음을, 그의 건강한 정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럼에도 대타자의 욕망이 되는 일을 그만둘 수는 없을 것이다. 이를 이겨내기 위해서는 오직 대타자가 그에게 의미가 되는 상태가 중지되지 않아야 한다. 대타자가 의미를 상실하는 때 그는 새로운 주체에 직면하여야 할 것이다. 아마 이것이 우리네(인간 존재)의 운명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러면서 인간적 성장을 해 나갈 터이다.

 

150여 쪽 남짓의 책이지만 읽는 이에게는 1천여 쪽을 읽는 것처럼 인내와 힘겨움을 요구하는 그리 녹록치 않은 글이다. 오늘과 같이 무수한 가면, 증폭되는 내 안의 타자에 몸서리치는 환경에서 어떻게 온전한 나를 축조해 나가야 하는지를 발견하게 해 주는 풍성한 의미로 가득함을 발견하게 된다. 무의식의 주체를 다각적 층위에서 탐사함으로써 개인의 내면을 아우르고 보다 윤리적 행위가 가능한 존재로 발전하는데 귀중한 초석적 사유의 시간이 되어주는 저작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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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이 발표되고 두 달 만에 독서시장에서 자취를 감추었다가 1년여가 지나고 나서 작품에 대한 진짜 반응이 일기 시작했다는소위 역주행을 시작한 독특한 이력을 지닌 작품, 게다가 무려 32년간 지금도 실재하는 모스크바의 화려하기 그지없는 메트로폴 호텔에 감금 생활이라는 플롯은 소설모스크바의 신사(A Gentleman in Moscow)』를 꽤 흥미롭게 바라보게 한다.

 

 

소설은 서른세 살의 알렉산드로 일리치 로스토프백작이란 인물이 공산주의혁명이 성공한 러시아에서 과거 프롤레타리아 혁명 동조의 시를 쓴 이력으로 인해 목숨을 부지하고, 종신 연금형 선고로 인해 호텔을 벗어날 수 없다는 지점에서 시작된다메트로폴은 수준높은 최고의 화려함을 자랑하는 시설인데, 체제의 건재함, 풍요를 대외에 과시하기 위해 잔존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이러한 공간적 배경이 소설적 매력인 것은 특별함이 용납되지 않는 공산주의가 장악한 호텔 밖의 사회와 극명하게 대조되는, 동시대이지만 안과 밖이 서로 다른 시간이 흐르고 있다는 점이다.  “현실의 한 가운데 있음에도 그 혹독함을 비켜간 장소에서 벌어지는 이야기이며또한  모든 사람들이 드나드는 장소가 한 사람에게는 세상의 축소판일 수밖에 없다는 설정이 발산하는 관음증적 관심의 유발이랄 수 있다.

 

 

그래서일까? 로스트프라는 한 인간이 겪어내야 할 삶의 면면을 강렬하게 보고 싶어지는 마음이 들끓게 된다. 그것은 아마 인간과 시대의 변화에 대한 관찰자이자 참견자이며, 환경과 인간의 지배관계에 대한 세심한 응시가 될 것이다여기서  숨길 수 없는 내면의 빛을 지닌 사람들의 이야기라는 이 소설의 압축적인 문장은 더더욱 소설의 서사적 역량을 기대케 한다.

 

 

"자기만의 동굴에 갇혀 『오디세이』를 읽음으로써 자신이 지닌 가능성을 실현하는게 아냐.

사람은 거대한 미지의 세계를 향해 발을 내딛음으로써 자신의 가능성을 실현하는 거야." 

- P 608 中에서

 

 

그런데 이 매혹적인 작품의 뒤늦은 평가만큼이나 국내에 이 작가에 대해서도 그리 알려진 것이 많지 않다작가  에이모 토울스(Amor Towles)’는 그의 대표작인 Rules of Civility (2011)2013년 국내에 우아한 연인이라는 제목으로 소개된 적이 있으나 지금은 그나마도 절판된 것 같다또한 그의 작품으로 Rules of Civility와 이번에 번역 소개되는 A Gentleman in Moscow (2016)만 알려져 있지만 2013년에 Eve in Hollywood가 발표되기도 했다.

 

    

 

 

그는 미국 매사추세츠 보스턴에서 1964년 출생했으며, 예일대를 졸업하고 스탠포드대에서 영문학 석사를 받았으며, 아내 매기(Maggie), 딸과 아들을 둔 가장으로서 맨해탄 그레머서 파크에 살고 있다. 1991년부터 2012년까지 뉴욕에서 투자전문가로서 일해 오다 지금은 전업 작가로서 소설 집필에 전념하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 문학적 성취에 더해 상업적 성공까지 거둔 에이모 토울스의 소설은 국내 독자들에게도 뜨거운 호응을 얻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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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8-06-23 15: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처음 반역된 게 아니었군요. <우이한 연인>이 또 언제 번역됐었군요.
그런데 이게 또 언제 절판이 되었을까요? 별로 알려진 것 같지도 않은데...

무려 700페이지가 넘네요.
그렇지 않아도 출판사에서 읽겠다고 하면 한 권 보내주겠다는 걸
어렵게 거절했네요. 읽으면 리뷰를 꼭 써야하는 거라 좀 부담이 되서...
읽으면 좋을텐데, 700 페이지는 저로선...흐흑~
나중에 한 번 읽어봐야겠어요.

비의식 2018-06-23 17:10   좋아요 0 | URL
서사를 이끄는 힘이 대단해서 분량이 문제되지 않을 것 같아요.
기회가 닿으실 때 읽어보세요. 혹 에이모 토울스의 열혈 독자가 되실지도....^^
 

 

나는 화장대 거울 앞에 앉았다. 거울 (....) 지금까지 한 번도 나는 거울에서

벗어나보지 못했다. 햇빛을 반사해 나를 되쏘았다.”   P 32에서

 

 

거울, 소설은 내 안의 타자에 관한 이야기다. 불멸의 무용수로 불렸으나 서른여덟의 은퇴가 임박한 발레리나, 제인의 얼굴에 대한 이야기이도 하다. 누군가의 얼굴, 그 속에 숨겨진 타자의 욕망을 응시하는 것은 은밀한 쾌락을 동반한다. 화장대 거울, 수영장의 잔잔한 수면, 무용연습실 사면의 거울, 여기에는 자신의 욕망, 혹은 숨기고 싶은 무언가의 형상이 있다. 그래서 제인은 공들여 화장을 한다. 어떤 흔적도 드러나지 않게, “모든 기억과 무관한 얼굴이 되어서야 거울 앞에서 벗어난다.

 

절박한 욕망이 지은 나라”, 싱가포르에서 영국 여인에 의해서 키워진 여자. 잃어버린 어린 딸(제인)을 대신해 입양된 임선경은 제인이 되어, 제인으로 보이기 위해 자신의 감정을 숨기고, 자신의 욕망을 감추고 제인이 입었던 무용복과 발레슈즈에 자신을 맞추었다. 더 이상 임선경이라는 이름은 없다. 철저하게 타인에게 보이기 위한 존재로, 그들에게 인정받기 위한 존재가 되기위해 자신을 억압해온 국립무용단 프리마돈나가 있을 뿐이다.

 

퇴락하는 무용수가 될 수 없어 절치부심하는 제인에게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이라는 유명 안무가의 작품에 설 수 있는 기회가 찾아온다. 하지만 그가 제안하는 작품은 그녀의 내면 저편에 수장시켰던 쾌락과 고통의 금지되었던 기억을 불러내려한다. 억눌렸던 욕망의 반동, 틈새가 없는 쾌락의 향연, 태초의 암흑이었으며 자기 몸의 경계선이 지워지는 파멸 같은 춤에 새겨진 비극의 기억들을.

 

 

 [출판사 은행나무 블로그 內 이미지 편집 발췌]

 

언제나 기존의 규칙과 형식 안에서 완벽하고 안전하게 춤을 춰왔던제인에게 주물 같은 몸을 깨고 나와 자신만의 춤을 추게 했던, 처음으로 자기 몸의 주인임을 느끼게 해주었으며 지고의 욕망에 몸을 떨며 관습을 초월한 쾌락과 어둠의 심연이 뒤얽혀 있던 대학 무용과 시절의 은밀한 춤의 이야기다. 이것은 소설의 중추가 되어 온통 에로틱한 위반행위로 독자의 의식을 고양시키는데, 기존의 기준을 위반하고 제한을 타파하며 고통과 절정의 쾌락을 경험케하는 도발과 악의 내부의식이 제기하는 문제를 살피게 한다.

 

소설은 이처럼 에로틱한 물결로 가득 차있는데, 그 형식적 구성에 있어서조차 관능적이다. 이것은 제인의 은밀한 춤의 내용, “거대한 쐐기못. 거기에 매인 로프는 그들의 절박한 몸부림에 의해 어둠 속에서 느슨해졌다 팽팽해지길 반복하는 것과 일치하면서 그 강렬함을 증폭시킨다. 지연과 전진의 페티시즘, 소설의 결말, 앎에 대한 독자의 호기심 자극으로 가히 폭력적인 읽기로 내몬다.

 

그런데 이 반복의 페티시즘은 안무가 에 의해 더욱 강화된다. 제인의 기억을 들춰내고, 자아가 상실된 그녀의 껍데기뿐인 실체를 드러내며, 마침내 거울에서 이상화(理想化)된 타자를 바라보는 그의 모습에서 제인과 텐은 다름 아닌 거울상()임을 발견하게 된다. 즉 텐을 통해 제인의 적나라한 욕망의 세계를 다면적으로 들여다보는 것 같은 느낌을 갖게 된다.

 

소설은 이처럼 제인과 텐이라는 인격 뒤에 감추어진 타자의 이야기다. 무엇보다 개인의 욕망이 그녀와 그를 에고가 소외된 존재로, 즉 타인들의 응시와 관점에서 생긴 존재로 규정하는 비인격적 타자에 의해 정해진 불온한 인간의 모습을 비춘다. 억압의 사슬을 끊어내는 일이란 그리 용이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타자의 삶이란 얼마나 피상적인가. 생동감 넘치는 에너지를 거절했을 때 삶은 위태로워질 수밖에 없으리라일체의 감각과 지성을 깨우는 강력한 작품이다. 불현듯 이런 생각도 스친다. 혹 여성주의 물결과 함께 억압되었던 자기애와 욕망의 폭발적인 분출을 자극하려는 시도가 아니었을까 하는...

 

 

작품 평점 : ★★★★★

작가 소개 : 1983년 서울출생, 고려대 문예창작학과를 졸업.

            2015년 「아저씨, 안녕」으로 경인일보 신춘문예 당선.

            2017년 장편소설 『위안의 서』로 제3회 황산벌청년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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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테의 파우스트비극23, ‘성안의 안 마당에 이르면 파우스트는 중세기사로 변장하여 헬레나에게 압운시를 가르치는 관능적 쾌락의 정점에 달하는 장면이 있다. 고대와, 중세와 근대를 마구잡이로 널뛰며 도착한, 이 장면은 역사적 위치로부터 해방된 서로 다른 시대의 인물들과 양식들이 공존하는별난 세계, 소위 비동시대성(Non-Synchronism)’이라는 말을 설명할 때면 빈번하게 인용되는 부분이다.

 

비동시대성이란 많은 개인들이 같은 시대에 살고 있지만 문화적 또는 정치적 관점에서 볼 때 서로 다른 시대에 속한 사태를 일컫는다. 이러한 양태의 탁월한 사례로서 파우스트는 예외없이 등장한다. 이 개념이 떠오른 것은 바로 지금 우리 정치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커다란 파문을 바라보면서 문학의 기능을 새삼스럽게 생각게 된 탓이다. 한국사회는 엄청난 변혁기에 서있으며, 평화와 번영, 평등과 자연과의 공존 등 새로운 가치를 향해 있다. 대부분의 개인들은 더 이상 안보에 볼모가 되어, 불안과 경쟁, 성장과 차별의 수구적 경향에 머물기를 기대하지 않는다.

 

독일의 사상가인 에른스트 블로흐가 그의 저술 Heritage of Our Times, 1932에 쓴 문장은 마침 우리 사회에 벌어지고 있는 개인들이 지닌 시대성의 논파 그것만 같다.

    

모든 사람이 동일한 지금에 속해 있는 것은 아니다. (....) 오직 외적으로만 그렇다.

오늘 거리에서 이들을 볼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동시대에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것이 이들이 서로 같은 시간을 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늘 자(6.15) 뉴스를 보면 자유한국당 소속 의원들이 선거 참패에 따른 자성의 목소리가 여럿 소개되고 있다. “자유한국당은 새로운 가치와 민생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해서 몰락했다.”, 혹은 보신주의, 수구 냉전적 사고를 버리고 당 해체를 통해 다시 시작해야 한다.” 와 같이 자신들이 동시대의 가치지향에 동행하고 있지 못함을 비로소 발견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표현들이 진정이라면 한국사회의 미래는 아마 밝을 것이라 예견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동안 같은 한국사회의 구성원임에도 이처럼 비동시대성의 역행적 의식에 머문 집단들로 인해 너무도 큰 갈등의 피로가 누적되고 있었다. 국민들의 마음속에서 이미 떠난지 오래된 진영 논리에 사로잡혀 의식이 마비되어 있던 사람들이 이제 시대의 의식을 깨달았다는 것은 정말 다행이 아닐 수 없다.

 

니체 또한 선악을 넘어서에서 독일인들은 그저께의 사람들, 그리고 모레의 사람들이다. - 그들에게 아직 오늘이 없다.” 라며, 시대의 가치에 뒤쳐진 자신의 동족을 향해 외치기도 했으며, 프로이트는 끝이 있는 분석과 끝이 없는 분석(Die endliche und die unendliche Analyse)에서 원시 시대의 용(dragon)들은 실제로 멸종되었는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듯 수구적 가치의 망령이 여전히 발목을 잡아당기는 현실을 꼬집기도 했다.

 

혹여 나의 문화적, 정치적 의식이 현재의 가치를 깨닫지 못하고 이 사회에 비동시대성이 횡행하게 하는 존재가 아닌지 다시금 돌아보게 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헤르만 브로흐의 소설 몽유병자들에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 있다.

 

그에게 요하임과 루체나는 그들이 속한 시대, 즉 그들에게 살아갈 권리를 부여해준 시대에서

존재의 작은 단편들만 갖고 살아가는 사람들처럼 보였다. 그리고 더 큰 부분은 어딘가 다른 곳에,

 (....)이 세계가 각기 다른 세기에 속한 사람들로 가득 차 있지만 그래도 함께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에,

그리고 바로 그들이 동시대인들이라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이들이 불안정하고 서로를 합리적으로 이해하기가 어려운 것은 아마 이 때문이리라.”

 

문학 작품은 실로 많은 것들을 시사한다. 제한된 공간속에 공존하는 역사적 비동질적인 사회적, 상징적 형식들을 예리하게 통찰해 낸다. 우리의 문학작품들에서도 이러한 성찰들이 발견 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을 갖게 된다. 최근의 한국 소설들은 지나치게 현상적인 문제들에만 몰두하는 것 같다전환기에 선 나라들에서는 항상 세계적인 걸작이 탄생했다. 마침 우리도 그렇다. 지금 한국사회가 안고 있는 거대한 발걸음을 구성하고 있는 어마어마한 사유의 가치들을 모색하는 문학 작품들이 많이 써지기를 기대해본다. 이번 지방 선거에서 보여준 우리나라 사람들의 선택은 정말 멋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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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 21 가라타니 고진 컬렉션 16
가라타니 고진 지음, 윤인로.조영일 옮김 / 비(도서출판b)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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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라타니 고진의 저술 중 가장 대중친화적인 글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그리고 13조의 저술이다. ‘칸트의 실천철학을 중심으로 하는 윤리의 탐험, 일본인의 도덕관과 책임의식의 실체를 규명 연구하고, 인류사회의 지속가능한 순환적 사회의 구축을 위한 세계시민으로서의 사유를 환기시키는, 하나의 토대로 여럿을 알게 해주는 까닭이다. 궁극적으로는 윤리란 무엇인가라는 도덕성의 본질에 대한 성찰이지만 이 궁구(窮究)의 여정에 등장하는 일본인의 공동체의식이나 천황의 전쟁책임과 같은 제재(題材)들이 우리 한국인에게 시사하는 것들 탓에 이해에 구체성을 띠게 된다.

 

일본 내 사회적으로 커다란 파장을 일으켰던 적군파의 인질살해사건의 일화로 시작하는데, “도대체 책임이란 것에 회의적인 일본인들이 왜 열렬하게사건 가담자들의 부모에게는 책임을 추궁하는가 하는 의문이다. 여기서 소위 주체나 원리도 없는 사회도덕이라는 일본의 특수한 현상을 들춰낸다. 그 실체는 마을공동체라는 것으로 겉으로는 사이가 좋은 사회로 보이지만 단지 개인 자신들의 고립이 두려워서 모이는 것뿐이며, 그들 사이에 돈독한 우정이란 것이 존재하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우정이 존재키 위해서는 자기가 있어야하는데 바로 이 공동체라는 것에 자기가 없는 것, 즉 근본적으로는 이기적인데 자기(에고)도 없는 상태라는 것이다. 그래서 주체도 없는 이 모호한 공동체가 도덕적 책임을 추궁하는 것이 관련도 없는 부모에게 책임을 묻는 기이한 현상으로 표출되는 것이지만 정작 도덕적 책임을 져야할 당사자의 주체로서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결과를 초래하고 만다고 지적한다. , 이 고찰은 주체의 자유가 도덕적으로 어떠한 위치를 지니는지 확인시켜주고 있는 것이다.

 

이로서 자유라는 관점에서 도덕을 인식하는 칸트의 실천윤리에 대한 담론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지는데, 우리가 어떤 행위를 할 때 과연 자유의지라는 것이 진정 존재하여 선택하는 것인가에 이르면 그 자유는 이내 불확실해진다. 마치 다양한 선택을 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어디까지나 인과성에 의해 강제되는 것을 인지하지 못할 뿐이며, 따라서 인간의 행동은 모두 원인에 의해 결정되고 자유 따위는 없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자유로운 주체가 아닌 인간은 책임이 없다는 결과가 되고 만다.

 

여기서 칸트는 자유는 결코 이처럼 자연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자유를 인식하고자하는 의지, 바로 자유로워지라!”는 지상명령으로 비로소 자유가 가능한 것이라는 것이다. 이로서 도덕성은 선악보다는 오히려 자유의 문제이며, 자유 없이 선악이란 있을 수 없다는 의미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자연적, 사회적 인과성을 배제하고 오직 자유를 의지함으로써만 자유가 생겨나는 것이니, 실제로 자유롭지 않다고 할지라도 자유로웠던 것처럼 간주하는 것, 다시 말해 인생을 타인이나 주어진 조건 탓이 아니라 마치 자신이 만들어 낸 것처럼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일례로 우리가 어떤 의도를 가지고 행동한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전혀 다른 결과로 끝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그러나 그 때마다 내가 한 일이 아니라고 책임을 회피하지 않으며, 자신이 원인인 것처럼 생각하고 책임이 생기는 것과 같다. 이를 보다 진전시켜 생각해 보면 자유의지를 부정함으로써 자신의 의지가 아닌 것을 그렇게 믿는 것을 부정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을 이해 할 수 있다는 것으로, “자유 따위는 없다고 생각했을 때 비로소 윤리적(자유)인 행위가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한편 공동체의 도덕을 도덕으로, 세계시민으로서의 도덕을 윤리로 구분한 칸트의 세계시민(Cosmopolitan), 즉 공공적(公共的)으로 생각하는 의지를 지닌 시민의 상정은 인류가 진정으로 지향해야 하는 윤리의 도달점을 말한다. 즉 진실이지만 자기연대의 이익에 반하는 행동, (부정한 조직을 정의심과 용기로 공개할 경우 자신의 조직에서 배제될 것을 각오해야 한다.) 곧 세계시민으로서 행동하면 불행한 처지에 놓이게 된다. 조직을 위해 좋은 구성원, 가족을 위해 좋은 아빠가 되는 소위 사회도덕을 지키면 세계시민으로서의 도덕인 윤리를 지킬 수가 없게 된다. 이는 윤리적이라는 것은 바로 도덕성을 거스르는 것이라는 의미가 되고, 진정 윤리적이라는 것은 이처럼 자기와, 연대의 희생위에서 비로소 가능한 쉽지 않은 것이라는 것이다.

 

특히 영미(英美)계 윤리학의 중심사상을 이루는 타인에게 위해만 가하지 않으면 무엇을 해도 된다!”는 공리주의의 경우 이미 자기 원인적, 즉 자유가 아니라는 점에서 도덕으로 간주될 수 없으며, 더구나 공리주의에 기초를 두고 있는 현대자본주의가 분업과 교환이라는 타자를 수단으로 삼는 것, 즉 타자를 목적으로 대하는 것을 희생시키고 있으며, 공공적 합의라든가 사회적 계약과 같이 지극히 협소한 타자, 즉 살아있는 타자에 한정되어 미래의 타자를 고려하지 않는다고 비판된다.

 

()은 행복이라는 공리주의의 등식,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추구라는 신념을 고수하여, 현재의 생활수준을 유지하려 한다면 전()지구적 환경파괴, 에너지와 식량부족 등 비참한 사태가 초래되는 것은 불가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비참한 사태를 체험하는 것은 미래의 타자이며, 이들 미래 인간이 참여하지 않은 공리주의의 공공적 합의라는 것은 이미 도덕성을 결여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결국 우린 미래의 인간을 위해서 희생(생태계의 복원, 자원의 절제 등...)해야만 하는데, 이것이 바로 칸트가 말하는의무’, 윤리(실천)라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전후(戰後) 일본 천황의 형사적 책임에 대한 논의들을 통해 책임이라는 도덕적 의무를 성찰하고 있는데, 이는 한국이나 중국 등 주변국과 일본의 명쾌하게 해결되지 못한 과거사의 문제로 관심을 증대시킨다. 독일의 경우 전후 뉘렌베르크 재판을 통해 전범들에 대한 형사적 책임을 물음으로서 정치적, 도덕적 책임의 단계로 진전되었으나, 일본의 경우 천황의 형사적 책임을 묻지 않고 엉뚱하게도 일억총참회(一億總懺悔)’라고 국민의 책임으로 전가하여 전쟁 책임의 논의가 모호하고 불투명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결국 누구도 책임을 질 사람이 없고 모두가 피해자가 되어 버리는 무책임 체계가 되어버렸다고 지적하고 있다. 일본인들은 천황 대신 자신들에게 책임을 묻는 것은 어딘가 부당하다는 것이며, 이는 일본인이 과거사에 대한 반성이 부족한 이유가 되고, 도덕적 책임의 문제로 나아가지 못하는 원인이라는 것이다. 여기에는 지적 관심을 배제하는, 일종의 무관심(저자는 괄호에 넣는 것이라는 기발하고 유용한 표현을 하고 있음)을 통해 도덕을 보지 못하는 일본인들의 지적 쇄신과 책임의 요청이 있다하겠다.

 

사실 저자가 지적하듯이 우리들이 풍요로움과 물질적 욕망만을 추구한다면 현재의 자본주의체제에 대항할 이유가 없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자연환경의 리사이클 수준을 넘어서는 위기와 남북문제와 같은 양극화로 인한 갈등을 비롯한 숱한 윤리적 문제가 있다. 우리가 현재의 행복을 위해 미래의 인간에게 계산서를 돌린다면, 즉 그들의 자유를 박탈한다는 것은 윤리의 공공연한 부정과 파괴가 되어버린다.

 

아마 민족주의의 환기와 자국민의 행복을 위해 전쟁을 불사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칸트의 코스모폴리탄으로서의 윤리는 그래서 21세기 지속가능한 순환적 사회를 형성하는 우리 인류의 생존을 위한 모럴이라 하여야 하지 않을까? 칸트의 이성비판(순수이성비판, 실천이성비판, 판단력비판)을 누비며, 마르크스주의의 가능한 코뮤니즘의 이상에 이르기 위해 언급되는 도덕과 윤리에 대한 가라타니의 철학적 향연은 문학적 감상을 초월하는 재미에 빠져들게 한다. 칸트, 니체, 스피노자, 키에르케고르, 프로이트, 야스퍼스, 헤겔, 아도르노, 데리다 등을 종횡무진하며 자유와 이성, 도덕과 윤리를 수월한 언어로 대중에게 전달해주는 이 저술은 보편적 도덕 법칙에 대한 칸트주의의 실천철학 안내서라 하여도 무방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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