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신주의 감정수업 - 스피노자와 함께 배우는 인간의 48가지 얼굴
강신주 지음 / 민음사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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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한‘감정’이란‘의식’의 표면에서 이루어지는 관념이다. 의식은 우리 모두 자기 의지에 따라 조절하고 통제할 수 있다. 만일 여기에 자연발생적인 즉, 무의식적인‘정서(emotion)'라는 관념까지 감정(feeling)에 포함시키게 되면 얘기는 달라진다. 결코 의도에 따라 통제할 수 없는 영역이 존재하게 된다는 점이다. 어쨌든 이 책은 17세기 철학자 스피노자가 그의 저서 『에티카』3부 「감정의 기원과 그 본성에 관하여」에서 정의한 48가지 감정들에 기초하여 당신은“감정의 주인으로 살고 있느냐”고 자극하면서 감정의 지배자, 의도적 조절자가 될 수 있다고 선언하고 있다.

 

이 강렬한 선언적이고 계도적인 주장은 한 번 믿어보자는 확신을 갖게 한다. 내 감정의 주체자로서 혹 손상되거나 미흡하고 결여된 어떤 유형의 감정을 스스로 회복하고 채워 넣을 수 있다면 그 보다 내 삶을 위해 가치 있는 일이 어디 있겠는가 하는 심정에서 말이다. 그리고 제일 먼저 만나는 “어떤 타자가 나의 삶의 의지를 꺾으려 할 때 발생하는 감정”인 ‘슬픔’ 때문에 자기에 대해 정당한 것 이하로 느끼는‘비루함’이라는 감정을 위해 인용된 ‘투르게네프’의 단편소설「무무」의 주인공인 농노‘게라심’을 통한 삶의 주체자로서 자기존재의 정당성, 즉 자유와 자긍의 세계로의 전환을 접하게 된다. 걸출한 문학 작품 속에서 숨 쉬는 인간의 심리와 행위 유형으로부터 자기 치유와 구원의 가능성을 연결하는 유려한 사유의 문장이 이렇게 짝을 맞춰 감정의 구체적 기능과 작동을 드러내고 알려 주는 것이다.

 

타율적 노예라는 슬픔의 감정은 비루함으로 인간을 시달리게 하지만 이와는 달리 자발적으로 노예 상태에 빠지는 것은 기쁨이 된다. 사랑이라는 감정의 발현이기 때문이다. 사랑은“인간이 더욱 작은 완전성에서 더욱 큰 완전성으로 이행할 때 발생”하는 감정인 ‘기쁨’을 수반하는 것이기에 그렇다. 서구 문명에 경도된 남편을 위해 전족을 벗어던지는 여인 궤이란의 고통스러운 변신을 가능케 하는 사랑의 얘기로서‘펄 벅’의 소설『동풍 서풍』으로 전달해주는 감정의 본질에 대한 성찰 또한 의지의 산물이라는 점에 동의하게 된다. 이렇게 48가지의 감정들이 토니 모리슨, 솔 벨로, 존 파울즈, 이언 매큐언, 조르지 아마두에 이르는 48명 대문호의 문학작품들과 어울려 각각의 감정들의 속성과 더욱 충만한 삶의 주체자로서 관철시킬 수 있는 행동기준을 안내한다.

 

그런데 몇 가지 주목되는 감정이 있다. 내가 인식하고 있던 감정의 개념이 불명확하고 그 본질을 오해하고 있었던 것들의 발견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슈테판 츠바이크의 소설 『초조한 마음』에 등장하는 장애인 여성 에디트에 보인 호프밀러 소위의 ‘연민’이라는 감정의 본질이 그 첫째이다. 연민이란“자신과 비슷하다고 우리가 상상하는 타인에게 일어난 해악의 관념을 동반하는 슬픔”이란 것이다. 연민이 기쁨이 아니라 슬픔이라는 것이다. 사람은 슬픔을 회피하고 기쁨을 쫓는 것이 본연의 욕망이고 인간본질 그 자체라는 스피노자의 공준에서 본다면 유익한 감정이 아니라는 것이다. 더구나 연민의 감정 뒤에 숨겨진 정체는 약자를 도울 수 있다는 강자로서의 자부심, 약자가 약자로서 계속 되는 순간까지만 유지되는 기만이 은폐되어 있다는 점에서 사실의 왜곡, 지혜롭지 못한 감정일 수 있다는 새로운 이해라 할 수 있다. 조심스러운 감정이다. 누군가에게‘연민을 느낀다’는 짐짓 공감어린 사랑이라 생각하며 뱉어내는 표현을 하던 자신을 반성케 하는 대목이다.

 

둘째는‘겸손’의 감정이다. “인간이 자기의 무능과 약함을 고찰하는 데서 생기는 슬픔”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어떤 한계에 부딪친다. 사회라는 조직세계에서 살아가는 나로서는 항상 손위 사람을 피할 길이 없으며, 그들 앞에서 겸손의 미덕을 모른 체 할 수 없다. 물론 기쁘기만 한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내 자신의 무능을 고찰하는 것은 아니다. 백화점 사장 무레의 돈이 여점원 드니즈로부터의 사랑을 획득하는 수단으로서 무력했다는 에밀 졸라의 소설『여인들의 행복백화점』의 연결은 물신주의의 피폐함에 무리하게 조응시키려 했던 어색함 마저 느껴진다. 물론 유사한 감정으로 ‘공손함’이라는 것이 있다. “사람들의 마음에 드는 일은 하고 그렇지 않은 일은 하지 않으려는 욕망”이라고 한다. 이것을 공동체에 대한 공포가 드리우고 있는 짙은 그늘이며, 자신의 욕망을 부정하는 행위라고 설명하고 있다. 개인주의의 팽배, 공동체 의식의 실종, 이것은 사적 자유와 공동체의 갈등을 첨예화시키고 있다. 자기 욕망의 부정으로만 내몰 것은 아니지 않을까? 감정의 획일적인 이해와 치우침이 아닌 균형이 지금은 더욱 필요하지 않을까?

 

마지막으로 ‘확신’이라는 감정이다. 무언가 의심스러운 관념이 있었지만 그것을 제거할 수 있었기에 드는 기쁨의 감정이다. 즉 의심을 품었던 상처가 내재된 감정이라는 의미이다. 표면적인 감정의 전제가 된 감정인 의심, 그 소심함과 우유부단함의 정체를 알게 되었으니, 주변의 일희일비에 그리 내둘릴 일도 아니다. 쿨(cool)한 것이 정신 건강에 좋다는 말이 이것일 게다.

결국 이 모든 감정들의 본질과 작동방식을 욕망의 윤리학자인 스피노자를 되살려내어 문학작품들을 통해 감정의 주체자로서, 삶의 주인으로서 살아가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사랑과 기쁨, 그리고 슬픔이라는 감정을 중심으로 유쾌하게 빚어내고 있다.

 

그러나 모두에서 말했듯이 의식에서 이루어지는 감정이 아닌 자연적인, 무의식에 기초한 정서나 직관까지 감정이란 정의에 포함하고 있어 인간의 본질을 의식의 작용으로만 이해하려는 합리론적이고 이성적인, 특히 기계적인 접근처럼만 보여 거부감을 지울 수 없기도 하다. 더구나 이러한 인식의 토대하에 ‘나’라는 개인의 주체성에만 초점을 맞추다보니 갈수록 타자에 대한 무관심과 개인주의로 인한 분열로 인한 갈등의 심화를 외면한 나르시시즘의 강화로만 보이는 것도 부정하기 어렵다. 물론 저자의 논지가 주류적 담론, 지배적 권력 등의 폭력에서 개인의 자유와 민주적 감각을 일깨우려는 의도임을 읽을 수 있지만 시대정신과는 다소 괴리가 있는 과거의 관념적 분류와 정의의 답습으로 야기되는 오류와 편협을 피할 수 없게 된 것이 아닐까?

 

17세기 네덜란드의 철학자인 스피노자가 비록 ‘직관적 체험’을 중시하고 전체론적 관점에서 인간의 정신과 행동을 관찰했다고는 하지만 직관을 오늘날 우리들이 알고 있는 ‘무의식’과는 연결짓지 못했던 것 같다. 그래서 의식과는 무관한 자연발생적인 '정서(emotion)'를 다분히 의식적인 차원의 '감정(feeling)'과 혼동하여 인식하고 있는 듯하다. 직관은 일종의 ‘감’이고, 의도적인 행위의 산물이 아니다. 정서 또한 감정과 같이 무언가를 좋고 나쁘고를 따지거나 선악과 같은 가치판단을 하는 관념이 아닌 내외환경에 의존하여 저절로 발생하는 것이다.

 

감정과 정서를 이처럼 장황하게 서술하며 구분하고자하는 이유는 ‘나’라는 주체의 의지에 의하여 통제할 수 있는 것인가의 질문에 이르게 하기 때문이다. 무의식을 의도한데로 통제한다는 사람은 한 번도 본적도 만난적도 없거니와 사실 어떻게 그것에 닿는지 알 수 없는 까닭이다. 의식에 의존하는 감정과는 달리 무의식에 의존하는 정서는 의도적으로 조절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결국 이 구분을 전제하지 않으면 통제할 수 없는 것을 통제할 수 있다고 하며,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다고 하는 자칫 오만이자 궤변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소개된 48가지의 감정을 모두 자기 통제하에 두고 의도적으로 조절할 수 없다고 낭패해 할 일만은 아닐 것이다. 다만, 저자의 충고(advice)처럼 의식에서 이루어지는 감정만큼은 스스로 성찰해 볼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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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에 용기가 되어준 한마디
정호승 지음, 황문성 사진 / 비채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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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충일함에 대한 욕망, 그래서 꽈악 움켜쥐었던 주먹을 비로소 펼치고, 채움이 아니라 빈 공간을 새겨두게 되는 빈손과 여유의 이해, 삶에 위로의 힘이 되어 주는 시적 정취 물씬한 에세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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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해 인간 - 내 인생 좀먹는 인간들에게 휘둘리지 않고 살아가는 법
베르나르도 스타마테아스 지음, 변선희 옮김 / 알키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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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른 사람들로부터 온전히 자유롭다는 것은 위대하면서 어려운 일이다.”

 

사람으로 태어나면서부터 우리들은 가족이란 사람의 무리 속에 소속된다. 그리곤 자기 의사와는 무관하게 다른 사람들과의 접촉이라는 현실에 발을 들여 놓을 수밖에 없으며, 학교에 진학하고, 직장 또는 여타의 사회집단에서 삶을 영위하게 된다. 그러나 우린 어떤 사람의 시선이나 간섭에서 벗어나 오직 혼자만의 공간과 시간에서 가장 커다란 평온과 안녕, 자유를 느낀다. 나만의 고유한 존재감과 자존감으로 충만하고, 의도한 꿈의 성취를 이어갈 때 삶은 뿌듯한 생기와 의욕으로 채워진다.

 

나의 고유한 자유와 다른 사람과 함께 살아가야 하는 현실에서 빚어지는 각종 규제와 억압, 관계성의 균형을 유지하는 것은 결코 수월한 일이 아니다. 사회라는 인간 구성원들과 장치들이 개인의 삶과 조밀하게 얽혀있어 어떠한 형식으로든 삶의 운명에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더구나 사람과 사람이라는 인간관계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형상들 - 경쟁과 질투, 험담과 불평불만, 언어폭력과 거짓말, 자기도취와 권위, 그리고 독점의 욕망 등 - 은 서로를 괴롭히고 고통에 내몰기 일쑤이며, 어느 일방은 피해자가 되어 자기 삶은 실종되고 망가져 삶의 종복(從僕)이 되는 시련으로 아파한다.

 

책은 바로 이 지점에 놓여있다. 타인의 삶의 자유를 방해하는 혹은 구속받는 사람들에 대한 실체를 규명하여 자기만의 고유한 삶의 특성을 잃어버리지 않고, 자신의 인정과 만족을 찾을 수 있는, 즉 자기 운명의 온전한 주체자로서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여 주고 있다. 특히 제목처럼 “유해인간”이라는 타인의 인생에 하등 도움은커녕 인생에 훼방과 고통만을 야기하는 다종의 인간 유형들을 분석함으로써 그들로부터 벗어나는 방법론들을 적시하여 굴종과 포기에서 당당한 인생의 주인이 되어 온몸으로 느낄 수 있는 행복의 전망으로 안내한다.

 

오늘 우리들은 그 어느 시대보다 인간관계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극심한 경쟁을 부추기는 물신사회의 토대에서 허접하기 그지없는 협의의 물적‘성공’에 온 몸을 내던지도록 강요당하고 있다. 그래서 타인을 험담하여 끌어내리고, 질투를 마치 건강한 욕망처럼 정의하고, 나르시시스트라는 자아도취자나 이익관계만이 최우선되고 타인의 조종에 능숙한 냉정한 인간이 우월한 존재라고 떠들어 댄다. 이것은 점점 관계성을 허물고 소통을 단절시키며 자존감이 손상된 인간을 양산한다. 인문적 성찰이라고는 전혀없는, 지적으로 성긴 인간들이 둘러 앉아 뒷담화를 공론화시키는 매스미디어와 이 사회에 깊숙이 침윤된 속물근성은 물론이요, 아이들의 교실, 직장, 단체 어디든 거짓과 험담과 질시, 안일과 구태가 건강한 정신을 지닌 사람들의 내면을 망가뜨리고 있다.

 

자신의 출세를 위해 부하와 동료의 감정과 성취를 방해하고, 자신에게 종속시키기 위해 권위와 언어폭력, 거짓말과 험담을 아무런 수치심도 없이 무심하게 저지르는 인간들이 너무도 많다. 또한 끊임없이 훈계하려들고 노이로제적으로 예민함을 발산하며, 타인을 관찰하며, 충동적이고 무책임하며, 자신의 자존감만이 중요하다고 여기는 사이코패스들이 넘쳐난다. 자신에게는 관대하나 타인에게는 잔인한 인간들, 이 찌질이들, 진상들이 이 사회를 가득 채워가고 있다. 나 역시 혹여 다른 사람에게 이러한 인간으로 인식되는 것은 아닐까? 책은 독자 스스로 현재의 자신을 점검할 수 있는 체크리스트로 자신의 반영(反影)을 파악 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다. 나 또한 여타의 유해인간처럼 타인의 인정이나 명성의 추구, 편의에 따라 움직이고 있는 것은 아닌지를. 그래서 인식하지 못한 채 타인의 삶을 훼방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말이다. 그리고 유형별 유해인간이 내 삶에 개입될 때 어떻게 그것에 대처 하는 것이 지혜로운지 그 처방을 알려주고 있다.

 

“나는 내 고유한 특성까지 잃어버리면서 타인에게 만족을 주고 싶지는 않다.”오직 내가 손수 뿌린 씨앗을 수확할 때까지 나만의 인정과 만족에 초점을 맞추고 성실하게 내 인생의 주인으로서 나의 꿈을 방해하는 그 어떤 감정적 훼손에 휘둘리지 않는 내면의 작업에 충실히 임하는 것이 곧 내 인생, 행복과 자유로 충일된 운명이 될 것이다. 유해인간들이 토해내는 그 질투와 험담과 폭력, 조종과 권위, 불평의 뒤에 숨어있는 불안과 피상성, 무지와 편협성, 변덕과 공격성이라는 추레함에 덜미를 잡히지 않기 위한 조촐한 이 인생 안내서는 오늘을 사는 우리들의 거울이라 하여도 될 것이다. 왜 타인의 표현과 성취에 그토록 집착하는가? 왜 타인을 그 자체로 인정하지 못하는가? 왜 자신에게 집중하지 못하는가? 타인을 공박하기보다는 그에게 미소를 보내주자. 타인을 조종하고 훈계하려 들기보다는 자신을 먼저 둘러보자. “너는 네 자신의 인생을 만들어라. 나는 내 자신의 인생을 만들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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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면 뒤에서 인문 서가에 꽂힌 작가들
루이자 메이 올콧 지음, 서정은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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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에 여성의 성적 태도와 경향이 오늘의 것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깊은 자각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또한 무의식의 발견 이전에 충동과 억압과 같은 정신의 원형을 통찰하고 있다는 점에서 생각지 못한 신선함의 충격을 선사하는 작품집이라 할 수 있다.

「가면 뒤에서 ; 또는 여자의 능력」이라는 중편소설과, 3편의 단편소설로 구성되어 있는데, 환각제 해시시의 복용을 통한 억제된 무의식의 해방으로 사랑의 결실을 이룬다는 단편,「위험한 놀이」를 제외하고는 이미 시작된 여성들의 사랑과 섹슈얼리티에 대한 남성 중심의 전통적 가치관으로부터의 탈출과 그 혼란이란 주제를 흥미롭게 다루고 있다.

 

영국의 사회학자 ‘앤서니 기든스(Anthony Giddens)’가 ‘낭만적 사랑’이라고 명명한 여성들의 탈가부장적 사랑으로서의 결혼관을 떠올리게 되는데, 남성의 권위에 종속된 수동적 여성상으로부터 자기 의지라는 적극적 선택으로서의 사랑과 이를 토대로 한 결합으로의 진화라는 여성의 근본적 지위의 변화를 읽게 된다는 것이다. 사실 이것만으로 작가의 시대적 통찰력 운운하는 것은 경망스럽기 까지 할 것이다. 정작 놀라운 것은 단편 「수수께끼」에 등장하는 남장 여자인 ‘노엘’ 이자 ‘모니카’의 섹슈얼리티의 현대성이다.

 

이것은 남성과 여성이라는 성의 이분법을 넘어 성적 다양성의 사회로 나아가는 경계가 흐릿해지는 오늘의 성적 경향에 이르며, 번식의 책무를 벗어난 현대의 섹슈얼리티, 당대로서는 급진적이랄 수 있는 여성의 성적 해방을 시사하고 있다는 점이다. 결국 이 소설집은 사랑, 섹슈얼리티, 결혼이란 언어를 통해 성(性)으로서의 여성을 탈피하고 이들에 균형을 부여하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중편 「가면 뒤에서 ; 또는 여자의 능력」은 가정교사 ‘진 뮤어’가 코번트리라는 귀족가문에 입주하여 신분과 부의 상승을 위해 벌이는 사랑의 권모술수를 스토리로 하고 있다. 가난한 젊은 여성의 계급도약을 위해서는 혼인이 최고의 수단이다. 진 뮤어는 자신의 목적 성취를 위해 철저한 이중의 얼굴로 위장하여 코번트리 가문의 계승자인 장남 제랄드와 차남 네드를 철저히 유린한다. 한편 제랄드와의 혼인을 위해 여전히 전통적인 여성상에 머물러있는 루시아라는 여성에게 보내는 진 뮤어의 메시지는 냉혹하다. 남성들이란 에피소드적이고 열정적인 자기중심적 사랑을 할 줄 밖에 모르는 족속이라는 것이다. 봐라! 제랄드는 나에게 빠져있지 않는가! 그러나 진 뮤어는 코번트리가의 또 다른 귀족인 제랄드의 삼촌과 은밀한 결혼을 성사시킨다. 더 이상 열정이나 남성적 권위에 종속되는 여성의 삶이란 없다고 선언하는 것이다.

 

그리고 단편 「어둠 속의 속삭임」에 이르면 상속녀인 ‘시빌’이라는 소녀의 재산을 빼앗기 위한 삼촌의 강압적 구속에서 벗어나려는 고통스런 감금과 탈출의 서사를 통해 전통적인 남성 권위와의 혹독한 투쟁을 은유하고 있다. 나아가서 단편 「수수께끼」는 자신의 신변 보호를 위해 남장을 한 여성 ‘노엘(모니카)’의 이면에 있는 사랑의 진면목 읽기에 실패한 필경사 ‘클라이드’로부터 전통적인 섹슈얼리티에 머물러 있는 남성의 관념과 진화된 여성의 그것과의 간극을 보여 준다. 이것은 오늘의 우리들에게 중요한 시사(示唆)를 던져준다. 여전히 전통적인 남성적 권위의 주변을 맴도는 남자들이 여자들의 진화된 성적 태도를 쫓아가지 못하고 있음으로 인한 갈등, 폭증하는 이혼의 실상에 도사리고 있는 문제의 본질을 해독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남성에게만 이 갈등의 책임을 물을 수만은 없다. 성의 번식으로부터의 자유가 도래한 현대사회가 여성의 성적 자유와 섹슈얼리티의 다양화는 물론 경제적 자유까지 부여했다고 해서 누천 년 인류 역사이래 남성의 원형에 새겨진 본성을 하루아침에 벗어던질 것을 기대하는 것은 마치 오랜 진화의 산물로서 새겨진 본능과 현대성의 괴리를 보이는 무수한 인간적 양상을 부인하는 것처럼 무지한 이해가 될 것이다. 여성들은 남성의 이러한 후진성을 보듬어 줄 수 있어야 하는 것 아닐까?

 

마지막에 수록된 단편 「위험한 놀이」는 프로이트의 무의식이나 칼 융의 아니마(아니무스)를 연상케 하는 선도적 작품이다. 또한 위선으로 포장된 사랑의 은폐가 환각제를 빌어 그 포장을 걷어냄으로서 진실을 드러내게 한다는 것은 남성에 대한 여성의 성적 자신감에 대한 발현이기도 할 것이다. 아무튼 19세기의 여성 작가로부터 여성의 섹슈얼리티 변천, 그 진면목을 발견하는 것은 기대치 못한 즐거움을 준다. 남성들이여! 여성은 19세기부터 무려 2세기 이상을 충동과 열정, 권력으로서의 성이 아니라 친밀감과 신뢰와 즐거움으로서의 성으로 진화했음을 알아야 할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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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루 인문 서가에 꽂힌 작가들
베시 헤드 지음, 이석호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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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 합리주의의 폭격을 받은 문명은 한결같이 의식의 오만한 권위에 올라타 모든 것을 지배하고 통제할 수 있다는 듯이 행동한다. 그리고 정서나 감성은 이성에 의해 취약하고 불안한 낡은 것으로 치부되고 매사를 이익인가 손실인가를 가늠하기 위해 계산대에 들이민다. 그래서 무엇이든 구분하고, 범주화하여 구별짓기를 하고, 분리한다. 분리된 것들은 의미화되어 차별되거나 배제된다. 인종(人種)이란 것 역시 이러한 차별을 위한 구별짓기이다. 백인은 유색인종을, 황인은 흑인을, 흑인은 또다시 자신들을 범주화하여 생김새와 흑색의 밝고 어두운 정도에 따라 차별을 한다. 여기엔 눈에 보이는 감각의 세계, 오직 의식이라는 것만 존재한다. 합리주의 이성의 세례는 이처럼 표피적이고 감각적인 의식의 세계만 떠오르고 정서와 감성, 내면의 깊은 목소리인 무의식, 즉 인간의 몸에 태곳적부터 새겨진 지혜와 소통의 고리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완전히 소통의 고리를 상실하지 않은 인류가 있다는 것을, 여전히 토템이 살아있고, 인류 의식의 원형인 미신과 신화가 숨 쉬고 있는 아프리카(africa)는 축복의 땅이라 해야 하지 않을까? 물질문명의 교만한 시각에서 아프리카는 누추(陋醜)와 비루함이겠지만 손상되지 않은 정신의 세계, 의식과 무의식의 교통을 할 줄 아는 사람들의 풍요로운 영혼에 어찌 비교할 수 있겠는가!

“그 생각은 땅 속 깊은 어딘가에 줄을 대고 있다가 하나의 해답을 얻어 다시 그의 심장으로 돌아왔다.” 이 같은 소설의 제목인 족장 ‘마루’의 생각은 바로 이것의 존재함을 보여준다. 온전한 전체의 사고를 할 수 있는 자, 그를 족장이요, 왕이며, 신이라 하는 것은 당연하다. 모두가 자신들의 원형을 잃어버렸을 때 그 대지의 음성을 들을 수 있으니 어찌 신비롭고 경이롭지 않을 수 있겠는가.

 

소설은 바로 이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 감각과 감성의 분리지대를 흐른다. ‘마사르와’라 불리는 부시먼에 씌운 주류 흑인들의 편견과 차별의 인종분리 언어, 자신들과 다르게 생긴 또 다른 흑인종에게 부여한 노예, 일종의 불가촉천민이란 굴레의 언어이다. 주류 인종인 보츠와나족들에게 마사르와 여인의 주검은 자신들 가축의 죽음보다 못하다. 방치된 사체와 그 옆에 꼬물거리는 어린 여아는 백인 목사의 부인에 의해 거두어진다. ‘마거릿 캐드모어’, 이 여인은 환경결정론, 인간은 본디 빈 서판(blank slate)으로 태어나 주변 환경(교육 등)의 여하에 따라 다양한 인간으로 성장할 수 있다는 신념을 어미를 잃은 어린 마사르와 소녀에게 투사한다. 오만한 이성의 논리로.

 

소녀는 자신을 양육한 마거릿 캐드모어란 이름을 물려받고, 학업에서 뛰어난 성취를 거두어 한 지방의 교사로 부임한다. 그러나 그녀를 기다리는 것은 마사르와란 천민, 보츠와나인의 가축과 같은 노예가 선생이란 것을 수용하지 못하는 세계이다. 편협과 이기심으로 무장한 교장, 장학사 등은 그녀를 조롱하고 멸시하며 쫓아낼 궁리를 하지만 마을의 족장 후계자이자 토템 가문의 여식인 동료 교사 ‘디켈레디’의 호의 속에 자리를 지탱한다. 영국 유학까지 하고 온 재원인 여성, 디켈레디와 마르사와인 마거릿은 이렇게 교우(交友)한다. 귀족과 노예의 우의, 하늘과 대지의 만남, 둘은 서로를 닮아간다. 균형, 그 소통의 연결로 복원으로.

 

그러나 두 여인이 사랑하는 이는 마을의 난봉꾼 ‘몰레카’이다. 디켈레디는 몰레카의 사랑을 표현할 수 있지만, 마사르와인 마거릿은 건널 수 없는 강이 놓여있는 인종차별의 지대에서 마음속 연인으로 담고 있을 뿐이다. 한편 마거릿을 대면한 몰레카는 어떤 여인으로부터도 느낄 수 없었던 지고한 여성성에 매료되어 그녀의 정복을 호시탐탐 노리고, 디켈레디의 오빠인 마을의 지도자인 ‘마루’ 역시 그녀를 영혼의 동반자, 시대착오적인 인종차별의 편견을 극복하고 새로운 시대를 열어나갈 반려자로 삼기위한 내밀한 작업에 들어간다.

 

마루와 몰레카, 오랜 친교를 쌓아온 친구지만 한 여인을 두고 갈등은 증폭된다. 마사르와라는 편협한 차별의식에 고착된 사람들의 세계를 진정 변화시킬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 편견과 맞서 고통스러운 투쟁을 지속시킬 수 있는 용기 있는 자, 저 어두운 심연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그것과 소통의 결과를 의식의 세계에서 실현 할 수 있는 온전한 정신의 세계를 지닌 자가 마거릿의 진정한 연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마거릿의 꿈과 상상이 펼쳐진 그림들, 끊임없이 마음의 음성을 주의 기울여 듣고, 마음이 대지와 지상을 부양하는 형상 등 무의식의 세계와 소통하는 문장들은 이제 이것에 다가가는 방법조차 알지 못하는 우리들에게 그 잃어버린 지대의 복원이 지니는 의미에 다가가게 한다. 정서와 감성이 이성과 조화와 균형을 이루는 세계, 타자가 배제된 세계가 아니라 나와 네가 공존하는 세계, 의식이 무의식과 교호하는 세계를 향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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