넛셸
이언 매큐언 지음, 민승남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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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여기 한 여자의 몸속에 거꾸로 들어있다.”

 

이 발칙한 말을 누가 할 수 있단 말인가? 추상하고 추론하는 자의식으로 충만한 태아, “나는....있다.” 라는 자기 존재를 알리는 소설의 가공할 첫 문장부터 호기심으로 지적 흥분을 고조시키지 않는가? 소설은 이처럼 처음부터 마지막 한 문장에 이를 때까지 미학적 유희(遊戱)의 세계를 유영케 하며, 결코 여기서 나가지 못하게 만든다. 소설의 내러티브는 마치 영원한 전희(前戱)만 있는 쾌락의 정원 같기만 하다. ‘매큐언의 섹시한 이야기 솜씨가 그야말로 유감없이 발휘된 예술적 모방의 극치라 해도 거리낄 것 없을 것이다.

 

삶이 시작되기도 전에 이런 고통을 겪다니, 부당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어머니 트루디의 지속적인 염분 섭취로 고통스러워하는 태아의 철학적 항변이다. 그러곤 역경은 우리에게 의식을 강요했고,....그렇게 경험된 감각들은 자아창조의 시작점이다.”라고 너스레를 떤다. 양수 속에 들어있는 나는 어머니의 행동으로 반영되는 존재의 세계에서 들려오는 언어, , 색깔, 모양,,,,을 듣고 추상하고 사색하며, 게다가 탯줄을 목에 걸어 자살을 감행하는 행동까지 한다. 물론 어머니 배의 예기치 못한 눌림에 의해 좌절되기는 하지만.

 

또한 이렇듯 가끔은 예기치 않은 파동으로 벽에서 귀가 떨어져 듣지 못하기도 하지만 는 음모의 속닥거림을 엿듣게 된다. 진실하지 못한 트루디, 나의 어머니는 아버지 동생인 클로드를 욕망한다. 클로드와 공모하여 아버지를 살해하려는 트루디. 삼촌과 어머니의 계획을 아버지에게 알려야 하지만, 존재와 비존재의 경계에선 태아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겠는가.

 

사랑이 식고 결혼이 무너지면, 그 첫 희생자는 기억이지....(중략)...그래서, 난 망각의 바람에 맞서 진실의 작은 촛불을 켜고 그 빛이 얼마나 멀리까지 닿는지 보고 싶어.” 태아의 아버지, 존 케언크로스가 아내에게 찾아와 재결합의 호소를 하지만, 어머니와 삼촌은 부동액 에틸렌글리콜을 그가 좋아하는 스무디에 믹스해 독살의 실행을 마무리하기 위한 계획으로 머리가 바쁠 뿐이다.

 

그리곤, 트루디, ‘의 어머니는 더러운 돼지우리로 내려가 멍청한 연인과 오물 속에서 뒹굴며 똥과 황홀경 속에 누워 집을 훔칠 계획을 세워서 착한 남자에게 끔찍한 고통과 굴욕적인 죽음을 안겼다.” 'To be or Not to be', 존재와 비존재를 망설이던 그 모든 전환과 수정, 오해, 통찰의 실수, 자기소멸의 시도, 수동적인 슬픔 끝에결정을 내린다. “이제 그만, ....” 삶의 세계로 나갈 것인지, 아닌지를.

 

소설의 내러티브는 바로 이 결정을 위한 과정의 기록물이다. 삶이란 것이 살아낼 가치, 의미가 있는 것인지, 결국 검지의 길게 자란 손톱으로 양막(羊膜)을 찢고 세상으로, 거친 물질계의 장벽을 헤치고 삶의 세계, 존재의 세계로 나간다. 의식을 가질 한 번의 확실한 기회를 갖기 위해서. 그 결과의 세계, 내러티브의 마지막은 혼돈이다. 비록 혼돈이 이 세계의 정의이지만 가 동경하던 의식의 세계는 매혹적인 것이기에.

 

이언 매큐언이 쓴 햄릿21세기 판본은 이렇듯 'To be'에 방점을 둔 다른 결과에 이른다. 그러나 정신분석에서 말하는 전이(transference)’를 떠올리게 하는 내러티브와 플롯은 텍스트는 기존의 내용을 대체하기보다는 새롭게 추가하는 과정을 통해서, 진실의 위상이란 곧 완결 없는 텍스트라는 사실을 예증한다고 했던 프로이트를 상기하게 된다. 내러티브들의 다양한 종결과 열린 상태, 이것이야말로 정신과정의 역동성 아니겠는가?

 

모두에서 기술했듯이 소설이 온통 전희(前戱)처럼 느껴진 이유가 여기에 있었던 것 같다. ‘피터 브룩스정신분석과 이야기 행위에서 섹슈얼리티(sexuality)에는 앎을 향한 충동, 모든 종류의 지식적 행위의 기반이라고 할 수 있는 역동적인 호기심이 포함되어있다.” 라고 썼다. 이보다 섹시한 소설이 어디에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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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7-06-18 2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넛셸>에 많은 기대를 하고 읽었는데
예전 작품만 못하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역시 비청출어람인가 봅니다. 햄릿도 다시
읽어 보려고 빌렸네요.

비의식 2017-06-20 13:44   좋아요 0 | URL
전 자궁속 존재의 ‘결정‘에 대한 궁금증으로 내내 고조되어 있었거든요. 작품 전체의 구조적 측면에서 발단-전개 따위는 모두 없어진 느낌이었습니다.

이를테면 애무만 잔뜩 있는, 그런데 탁월한 기술로 말이죠, 일종의 페티시즘이라 할까요? 결정적인 것이 없어서 맥 빠질수도 있고, 또는 이것자체가 좋은 것일수도 있어서, 독자들마다 다소 상이한 느낌을 가질 수 있는 것 아닌가 생각됩니다....
 
저체온증 에를렌뒤르 형사
아르드날뒤르 인드리다손 지음, 김이선 옮김 / 엘릭시르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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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나는 우선 당신조차 알지 못하는 그 아픈 무의식의 밑바닥까지 어루만지는 글을 쓰고 싶다.

마침내 당신의 상처 입은 마음 속 깊은 그곳까지 닿을 수 있도록

                             - 정여울 (2017.5.20.자 중앙일보 24삶의 향기 에서)

 

 

작품 전체에 배경이 되어 흐르는 아이슬란드의 삼림과 호수들, 눈보라 몰아치는 황야는 삶에서 다른 어떤 것보다 고독을 귀하게 여기는 형사 에를렌뒤르의 기억과 자취와 조응하여 어떤 시원적인 쓸쓸함으로 내면에 젖어든다. 그래서인지 이 쓸쓸함과 고독이라는 삶의 개별성이 던지는 무기력에 대항하는 한 인간의 집념과 분투가 전면을 지배하는 이 소설에 스미듯 감정적 동조가 이루어진다. 아마 우리네 내면의 근원에 침전해있는 무언가를 깨우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한 여성의 주검이 신고(申告)되고, 부검결과조차도 일반적인 자살과 다른 특이점이 없어 범죄사건으로 인식할 여지가 없는 사건에 형사 에를렌뒤르는 개인적인 수사에 전념하기로 한다. 남겨진 사람들, 상실의 처절함에서 자기 삶을 잃어버리고 고통 받는 그들의 라는 질문에 답을 주기위해서, 그들에게 잃어버린 시간’, 삶의 시간을 돌려주기 위해서 동료들의 비난어린 시선에도 불구하고 수사에 착수한다.

 

소설은 이렇게 범죄사실을 추적하는 과정으로서가 아니라 아무도 의문을 갖지 않고 의문을 가져서도 안 됐던덮어졌던 사건들의 진실을 쫓아 삶의 의미를 되찾기 위한, 간절한 물음의 짐을 내려주기 위한 답변을 향한 과정이 된다. 실종 된지 30년 남짓 지난 아들에 대한 수사정보를 묻기 위해 형사를 찾는 노인, 노란색 자동차와 함께 사라진 딸의 흔적조차 찾지 못해 애태우는 부모가 짊어진 질문이 그것이다. 또한 소년 시절 아버지와 함께 양()을 찾기 위해 나섰다 눈폭풍에 잃어버린 동생 베르귀르의 오지 않을 재회를 꿈꾸는 에를렌뒤르의 상처가 더해져 그들의 인생을 영원히 앗아간 공허감, 그 어두운 공동(空洞)에 똬리를 틀고 있는 진실에 접근하려는 용기이다.

 

표제인 저체온증자살과 실종’, ‘죽음과 사후세계라는 소재와 함께 이 작품의 본질을 관통하고 있는데, 이 세 개의 묶음 단어들은 서로 교호(交互)하면서 사건의 진실에 접근하는 단서이기도 하며, 인간의 영원한 불가능의 질문이기도 하고, 우연이라는 삶의 설명할 수 없는 기이함과 불예측성의 언어이기도 하다. 목 맨 시체로 발견된 여성 마리아의 남편인 발드빈이 의대생 시절 동료대학생을 대상으로 임사(臨死)실험에서 사용한 얼음물이 담긴 욕조의 죽음의 냉기이며, 휘몰아치는 눈에 덮여 차갑게 식어갔을 에를렌뒤르의 동생 베르귀르의 죽음이기도 하다. 또한 삶과 죽음의 경계를 가르는 혼돈의 순간, 삶의 현실을 왜곡시키는 내면의 음울한 무게이기도 하다.

 

소설은 이 엄중한 냉기의 실체를 마주하려는 용기와 이를 통한 삶의 복원에 대한 희구(希求)의 발걸음이다. 프랑스 문학자였던 죽은 어머니와 사후세계에 대한 알림의 징표인 생전의 약속인 프루스트의 소설책,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서재의 바닥에 펼쳐진 채 발견된 어느 날, 삶의 황폐함에 허덕이던 여자는 자신의 인생을 온통 짓눌러왔던 고통의 실체를 마주하기 위해 사후의 세계를 건너보기를 희망한다. ‘마리아를 옥죄던 아버지의 익사사고에 대한 죄책감, 그래서 그녀가 마주하려했던 인물의 정체는 그야말로 이 소설의 백미일 것이다. 대반전, 그것이다.

 

마치 무거운 짐이 떨어져 나간 기분이었다. ....(중략)...호수에서 일어난 모든 일에 대해, 그녀는 들으려는 사람들에게는 누구에게나 그 일에 대해 말 할 것이었다. .....그녀는 눈을 뜨고...” P398 에서

 

삶의 뒤틀림, 혼돈, 침잠한 내면, 그리고 쓸쓸한 풍경들의 파노마라 속에서 펼쳐지는 상처받은 모든 인간에게 받쳐지는 이 위로의 찬가는 드리워진 죽음의 그림자조차도 마주하는 삶의 용기로 나아가게 한다. 반면에 삶에서 우리가 풀어야 문제가 없다면 더 이상 삶에 연결되어 있다고 느끼지 않게될 것이라는 말처럼 우리를 고뇌에 빠뜨리는 무수한 삶의 문제와 의문들은 삶의 의미가 되어 돌아온다. 동생이 영원히 잠들었을 고향의 하르스카피 산’, 고요한 자연의 품으로 안기는 발걸음을 재촉하는 형사 에를렌뒤르의 모습에서 잃어버렸던 삶의 시간을 되찾으리라는 비로소의 안식이 느껴진다. 평화로운 삶의 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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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 잔혹사 - 한국 현대사의 가려진 이름들
홍석률 지음 / 창비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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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서와 권위에 가려진 참말의 민중의 역사, 보이지 않았던 진실의 역사가 우리에게 다가온다. 민중이 깨어날때 비로소 민주주의는 진정 민중의 것이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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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터 보쟁글스
올리비에 부르도 지음, 이승재 옮김 / 자음과모음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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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나는 아무것도 후회하지 않았고, 슬그머니 다가온 막바지 상황이든, 현실에 대한 끝없는 조롱이든, 관습과 시계와 계절에 대한 주먹감자든, 남들의 수군거림이든, 어느 하나 후회하지 않았다." - P136 에서

 

우리는 누구든 자신들만의 '이야기'를 산다. 내 삶의 이야기, 지독하게 공부해서 일류대학에 가고 좋은 직업을 가지고 멋진 배우자와 함께 자식낳고 여유롭게 살다 가는 것 따위의 흔해빠진 이야기에 매몰된 그런 삶이 아닌 나만의 배역, 그래서 내가 온통 미쳐버릴 수 있는 그런 이야기를 산다는 것 말이다. 정말 이런 나만의 이야기를 살아본 적이 있는지 이 소설을 읽는 내내 자문하게 된다.

 

미친듯이 춤을 추는 여자, 남자는 현실이 존재하지 않는듯한 달콤한 광기를 발산하는 그녀가 자신의 운명임을 느낀다. 그녀의 광기를 먹여 살릴 것은 바로 자신이라고. 남자의 이야기는 이렇게 써진다. "그녀는 내 삶을 영원한 난장판으로 만듦으로써 내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데 성공했다." 소설은 남자와 여자 그리고 그들의 아들, 한 가족의 삶, 바로 그네들 "광란의 오페레타'의 기록들, 인생의 무대에서 배역을 마음껏 즐기는, 의미로 가득한 연기를 해 낸 후 무대에서 퇴장한 여자와 남자의 이야기이다.

 

그 이야기는 파티와 춤, 그리고 그네들의 삶에 배경음악처럼 '니나 시몬''미스터 보쟁글스'가 흐르고, 진실보다 항상 나은 작은 거짓말들이 광채를 발하는 순간들의 역사이다. 이 광채의 실체는 사랑이리라. 절대적인 내 편, 작은 거짓과 자신을 은폐하는 수단으로 멀쩡함이란 책략을 사용하는 인습에서 벗어난 광기, 삶에 대한 적극적인 자유의 모습 그것일 것이다. 그래서 엄마는 뒤집힌 글자를 쓰는 아이에게 말한다. "어머니는 내 거울 글씨를 아주 좋아했고 ~ (중략) ~ '정말 놀라워요. 매일 내 이름을 거울체로 써주면 좋겠어요! 이런 글씨체는 보물이에요. 황금만큼 귀한거니까요!'"

 

또한 아이와 가족의 동거자인 일명 아가씨(쇠재두루미)와의 소통에 어려움을 겪는 아이에게 "아드님, 아가씨와 손과 눈과 마음으로 말하세요. 남들과 소통할 때, 그것만큼 좋은 방법은 없어요! " 새와 소통하려는 것, 미친듯이 춤을 추는 것, 생명인 꽃을 팔고 돈 받기를 거부하는 것....이 미친 짓인가? 아니면 생명과 존재에 대한 사랑인가? 광기는 사랑과 아주 많이 닮아있지 않은가?

 

그런 엄마가, 아내가 발작을 시작했다. "몇 년에 걸친 파티와 여행과 기벽과 기상천외한 즐거움을 보낸 지금 나는 아들에게 모든 것이 끝이고, 매일 병실에서 헛소리를 하는 엄마를 바라보아야 하며, 엄마는 정신병자이며, 우리는 엄마가 영원히 잠들 때까지 얌전히 기다려야 한다고 어찌 설명해야 할지 몰랐다." 그러나 이 고통의 시간조차 그네들로부터 사랑을 떠나지 못하게 한다. "말도 안 되는 이 상황에 발길질을 한 방 먹여야죠!" 그래서 아빠는 "이성(理性)이라는 녀석의 엉덩이를 걷어차는 것 외에 달리 방법이 없다고" , 정신병원에 지내던 엄마를 탈출시키기 위해 아들과 기막힌 유괴탈출극을 감행한다.

 

이 연극은 마지막으로 오직 아들을 깜짝 놀라게 해주고픈 엄마와 아빠의 거짓말이다. 거짓말은 때론 크기를 측정할 수 없는 사랑이 그 실체이곤 한다. 이쯤에 책장을 잠시 덮어두어야 하는 문장들에 이른다. 가슴이 짓눌리는 듯한, 진실과 이별, 사랑의 본질과 마주할 때의 그 아릿한 통증과 뜨거워진 눈시울 때문이다. 격한 감동? 그저 내 미흡한 표현력이 별다른 어휘를 찾아내지 못한다. 그 문장을 그대로 옮겨놓는 수밖에...

 

"나는 이게 끝이라는 걸 알았고, 이제야 엄마가 내 침대에서 했던 말이 무슨 말인지 이해했다. 그래서 나는 울었고, 펑펑 울었고, 어둠 속에서 눈을 뜨지 않았던 내가 원망스러워 울었고, 또 엄마가 말한 해결책이 자신이 사라지는 것임을, 우리와 이별하는 것임을, 골방에서 비명을 질러대며 우리를 더 이상 괴롭힐 일도, 당신의 끝없는 집착과 비명과 소란을 더 이상 감당 할 일도 없도록 훌쩍 떠나는 것임을 일찍 깨닫지 못한 내가 원망스러워 울었다. 난 그냥 모든 걸 너무 늦게 깨달아서 울었다. 단지 내가 눈만 떴다면, 엄마에게 대답을 했다면, 같이 자자고 손만 잡았다면, 엄마가 미쳤든 안 미쳤든 멈마가 좋다고 말했다면 엄마는 분명 이렇게 하지 않았을 것이고,..... P160 에서

 

이제 여자와 남자는 삶의 풍성한 의미와 사랑을 남긴 채 무대 아래로 퇴장한다. "엄마없는 새날을 원치 않았고, 그걸 받아들일 수 없었다. 아빠는 덧창을 닫고 새날을 묵혔다." 그리고 가족의 삶이 빼곡하게 적힌 아빠의 작은 수첩만이 쓸쓸히 아이를 기다린다. "터무니 없는 일이지만 삶이란 종종 그렇다는" 것을 알린채. 치열하게 자신들만의 삶을, 배역에 몰두하고, 온통 사랑인 존재를 남긴채. 삶의 의미란 사랑이 아니냐고, 스스로 배반해야만 역설적으로 살아남는 그런 삶이 아닌 광란의 오페레타 그것이라고. 삶의 이야기는 이렇게도 써진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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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의 정치저술가인 로베르트 미지크에 의하면, 공통감각(Common Sense: 상식)이란 자연처럼 본능적이고 직관적인 앎의 형태로우리네 머릿속에 들어선 세상을 보는 흔한 방식이며, “철학적, 이론적 성찰의 산물이 시간의 퇴적을 통해 동시대 대다수의 공통된 생각이 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그의 저서 좌파의 생각은 어떻게 상식이 되었나는 수많은 좌파적 사상들이 오늘 어느 한 측을 대변하는 이념으로서가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당연히 알고 있으며, 지지하는 것이 되었는가를 추적하는 과정이다. 결국 이 추적의 여정을 통해서 세상을 변화시켜보려는 생각의 단초(端初)를 제공하는 것이라 하겠다.

 

 

1. 깨어있는 인간만이 세상을 변화시킨다

 

좌파의 생각을 말하면서 마르크스의 인용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의 사상의 많은 부분들이 오늘 우리들 삶의 양식을 이해하는 기초가 되고 있다. 미지크는 거의 공공재산이 된 마르크스 사상이라고까지 표현하고 있는데, 이를테면 소외’, ‘자본주의 경제 모순과 같은 것들은 좌우를 가리지 않고 사용하는 공통의 언어라 할 수 있다. 그럼 이렇게 모두가 알고 있는 상식이라면 이것을 새삼 되뇌는 것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 그는 이렇게 답변하고 있다.

 

독창적이고 탁월한 이론을 통해 이전에는 결코 떠올리지 못했던 생각에 도달한다. 생각과 이론은 우리의 머릿속에서 우리가 계속 깨어 있도록 하며, 우리가 타락하고 무뎌지는 것을 막는다. 생각을 통해 인간은 세상을 변화시키려는 마음을 품고 움직인다.”

 

이제는 공통감각이 된 사상들을 추적하면서, 공통감각은 결코 경직되거나 고정되어있지 않으며, 오히려 지속적으로 변화하는 것임을 확인하고, 이로써 우리는 우리들의 삶을 조직하고 구성하며, 내면에 이주해 들어오는 것들에 대한 비판과 이해를 통해 더 나은 세상을 상상하고 행동할 수 있으리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생각이란 것을 하자는 것이다. 이 생각의 모험 속에서 생각지 못했던 것들을 비로소 생각하는 시간이 되리라는 것이다.

 

선거를 앞둔 시기는 물론 우리 사회의 정치, 언론, 경제 등 지배적 조직들이 뱉어내는 말 들을 보면 과연 생각’, 즉 고뇌와 비판, 충분한 이해를 위한 노력과 사유가 전제된 언어라고 판단하기에 불편한 것들이 지나치게 난무하고 있다. 최근 우리사회에도 생각 없음(無思惟)’의 또 다른 표현이기도 한 반지성과 관련한 관심이 싹트고 있는 지점에서 공통감각이 된 마르크스로부터 시작하여 그람시, 아도르노, 벤야민, 라캉, 샤르트르, 보부아르, 주디스 버틀러, 하버마스, 푸코, 들뢰즈에 이르는 대()사상을 통해 보다 나은 세상을 함께 고민하는 기회가 된다.

 

스스로 생각하는 일을 멈춘 바로 지금의 우리네 정치사회는 조금만 알아보면 간단하게 그 천박성과 거짓이 드러날 주장들이 마구 구사되는 현실임을 목도할 수 있다. 이러한 행위의 목적은 사회나 특정 세력을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복무케 하기 위함이다. 근거가 빈약하거나 전혀 사실과 다른 내용으로 자기주장을 내세우고, 그래서 그것이 사람들에게 선입견을 부여하기만 하면 집단 사이에 벽을 세워 고정된 정체성을 구조화할 수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또한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이 부실한 반지성적 주장에도 불구하고 이를 믿어버리는 생각하지 않는 대중이 있어서이다. 해방이후 70여년이 지난 오늘에까지 수구 세력들은 여전히 빨갱이라는 전형적인 반지성의 용어로 계급과 집단 분열의 책략을 구사하는 것은 하나의 사례가 될 것이다.

 

깨어있지 못한 대중은 이러한 반지성의 권력에 기만당하고 만다. 지금의 우리 현실이 바로 그러하지 않은가? ‘그람시가 말한 헤게모니는 좌파의 용어였지만 이젠 극우 수구세력들이 더욱 악용하는, 아니 거의 대대수의 사람들이 아는 공통감각이지 않은가? 한 사회의 지배적 세계관의 자리를 잡기위한 이 투쟁의 핵심, 정치 투쟁은 사상에 대한 헤게모니, 세상에 대한 자발적인 이해를 차지하기 위한 투쟁이기에 이러한 반지성은 더욱 활개를 친다. 생각하지 않는 대중은 불행과 파탄이 다가서고서야 진실을 알려고 한다. 기차가 떠나고 난 뒤의 그 애처로운 발길의 한심함과 같다.

 

2. 담론 세계의 진실

 

이렇게 맹렬한 지적 정열로 타자를 압도하여 헤게모니를 장악하려는 사람들을 보면 이내 그 깊이 없고 천박한 지성을 발견하게 된다. 아마 TV화면에 등장하는 셀 수 없이 많은 토크 프로그램들 중 어느 하나만 아주 잠깐만 보더라도 이내 정말 무지(無知)하기 그지없는 담론을 떠벌이며 아는 체하는 아무런 의미 없는 공허한 소비임을 확인 할 수 있다.

 

이 프로그램들에 등장하는 패널, 즉 담론의 발화자들은 누구인가? 토론되는 해당 분야의 진정한 전문가, 다시 말해서 담론의 내용에 대해 충분한 연구와 자료가 축적된 사람들 간의 토론인가? 그저 교수거나, 변호사거나, 유명 연예인, 부를 축재한 사업가이거나 하면 인생살이 전반에 대한 인정받는 발화자가 되어 전혀 지성적이지 않은 반지성의 지적 열변을 토할 권리를 획득한 것처럼 행동한다. ‘미셸 푸코는 이처럼 특정한 발화자를 선택하는 것은 일종의 권력 행위이며, “말하기는 곧 투쟁이다. 그래서 담론은 권력효과를 만들어낸다.”고 지적하기도 한다.

 

이렇게 표방되는 앎(지식)이란 것이 과연 진실이고 진정한 지식으로서의 의미를 지니고 있을까? 많은 사람들은 그저 즐기고 잠깐 공감하는 것뿐이라고 답변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담론은 사회관계 전반을 관통하는 강제되고 강제하는 의미 총체로서 역할을 하기에 선입견을 만들고, 이념간의 집단을 분리하며, 계층을 분할하는 결과를 야기하기도 하며, 이미 권력의 영향을 받는 구조에서 생성된, 차별을 두는 특유의 의사소통인 이 담론의 효과는 부인될 수 없는 것이다. 반지성이 활약하기에 기막히게 좋은 환경이다.

 

푸코가 말한 담론의 속성을 이해하게 되면 마르크스의 한 문장을 연결하게 된다. “사회의 물질 권력을 차지한 지배계급은 동시에 지배적인 정신 권력도 차지한다.” 여기에는 진실이나 진리라는 말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 지배적인 사상이나 생각이란 것은 그저 사회적 관계라는 부식토에서 자라난다.”는 것뿐임을 지적하는 일종의 공통감각이다. 이제 우리들은 안다. 그 주류적인 담론들이나 기득권을 가진 수구세력들의 많은 언어들이 가짜, 허위, 거짓이라는 것을.

대중의 지성이 깨어있어야 한다. ‘파농은 말했다. 사회적 맥락에서 주변화 되고 상처받기 쉬운 계층인 서발턴말을 하지 못한다.”. 사회적 약자인 대중인 그들 개인의 어느 누가 말하더라도 중요한 위에 있는 어느 누구도 귀를 기울이지 않는 것이 실제적 현실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권력을 지니지 못한 우리네 대중은 알아야 한다. 그 사회적 진실의 체계를, 그리고 생각해야 한다. 스스로 생각하는 지성을 갖추어야 한다. 그래야 불의와 불합리와 불평등의 세계를 개선할 수 있다.

 

3. 비판, 그리고 개선

 

불평등한 사회에 사는 사람들은 자신이 행복하다고 말하는 경우가 드물고 이웃이나 동료를 믿지 않는다. ...사회적 소외, 악화된 사회관계, 문화적 계층 하락, 존중의 상실은 불평등이 심한 사회에 만연 한다. ...(중략)... 많은 사람들이 날마다 멸시와 굴욕에 방치되는 사회는 부패한다.”

 

로산나 로산다의문을 품고 살았다.”고 말했다. 세상에 분명한 것은 없다. 네모난 지구는 둥근 지구로 바뀌었다. 진실은 변화한다. 그래서 비판해야 한다. 그저 반대하기가 아니라 객관적인 방식의 해부, 개념에 대한 분석, 전제 근거와 비난에 대한 분석, 숙고와 이해를 객관적으로 분석하는 것으로서의 비판을. 마치 대선후보자의 토론에서 등장하는 비판은 잘하지만 실제로 어떻게 개선시킬지 대안은 있나?’라고 빈정댈 수 있다. 그러나 비판할 내용을 만들어내는 일은 지극히 어려운 일이며, 꼭 필요하다. 결코 비판은 부정성만을 지니지 않는다.

 

비판으로 인해 세상은 숨김없고 꾸밈없는 상태에 놓이게 되며, 이로써 사람은 더 나은 세상을 설계할 수 있게 된다. 계몽의 변증법에서 아도르노일단 확고하게 알고 명확하게 규정하면 올바른 것, 더 나은 것을 모아놓은 색인 목록이 된다. 비판의 부정성에는 늘 긍정성이 들어있다.”고 말했다. 맹목적 믿음처럼 세상을 불행하게 하는 것은 없다.

 

오늘날 거의 모든 좌파의 사유는 혁명을 계획하지 않는다. 가능하지도 않거니와 대중에게 실익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비판의 결과, 더 나은 세상을 위한 점진적이고 끊임없는 개선이 더욱 행동적이고 인간을 위한 길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마르크스가 말하던 프롤레타리아라는 동질적 계급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은 세계에 와있다. 문화적 환경이 매우 다른 여러 하위환경으로 이루어진 다양한 집단의 사회가 되어있다. 이제 이상에 서서히 접근하는 것으로 만족하여야 함을 우리는 안다. 결단코 멈춤은 없는 그러한 개선을 향해서.

 

일찍이 인간의 소외는 인간으로부터 시작된다.”마르크스는 통찰했다. 좌파의 이론이라서 고려할 가치가 없는 말이었던가? 이젠 우리네 공통감각이 되어있는 말이다.

발터 벤야민브레히트를 이렇게 평가했다고 한다. “절대 환상에 빠지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숨김없이 신봉한다.”. 현실, 사회관계를 벗어나 세상을 바꿀 수는 없다. 현실에서 벌어지는 무수한 현상들에 깊숙한 비판과 이해, 그리고 사유가 있어야 한다. 반지성적 현실에 대한 자각이 어느 시기보다 필요한 때다. “오직 동의한 사람들만이 세상을 변화시킬 기회를 얻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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