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절한 파시즘 - 민주주의적 폭력은 어떻게 나타나는가
버트럼 그로스 지음, 김승진 옮김 / 현암사 / 2018년 10월
평점 :
절판


  

자유의 모양새를 유지하는 복종만큼 완벽한 복종은 없다.

의지력 자체를 사로잡는 것이기 때문이다.”

                                - 장 자크 루소 에밀

 

 

내 젊은 대학시절은 꽤나 우울한 세상이었다. 18년에 걸친 독재자의 죽음이 있었고, 곧 이어 또 다른 군인에 의한 쿠데타로 독재정권이 들어서던 시기였으니, 매양 거리에 나서 백골단이라 불리는 폭력 경찰진압대의 곤봉에 두들겨 맞으며, 그들이 쏘아대는 최루가스에 시달리는 나날이었으니 말이다. 군부 파쇼정권과 그들의 정당성을 옹호하는 이론 개발가들인 소위 지식엘리트라 자처하는 어용(御用)집단의 파렴치는 민주와 자유의 파괴에 저항하는 민중을 잠재우기 위한 억압과 압제의 폭력을 그칠 줄 모르고 행사하던 극악한 시절이었다. 이런 내게 파시즘은 잔악한 폭력과 동의어로 새겨져 있다.

 

역사의 시간은 흘러 민주화된 정권이 들어섰지만 파쇼정권에 기생하거나 득세했던 기득권 세력들은 여전히 권력을 잃지 않은 채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들은 부의 축적과 권력의 항상적 유지를 위해 민중의 인권을 비롯한 기본권의 침해는 물론 부의 착취에 이르기까지 교활함과 21세기의 세련된 기술들과 같은 지적 수단을 동원하여 거침없는 행보를 한다. 그리고 오늘, 전 지구적 차원의 자본주의는 놀라운 테크놀로지의 발전과 첨예하게 양극화된 부의 최상층부에 집중되어있는 거대하게 축적된 재화의 힘을 통해 예전의 거칠고 노골적인 폭력을 행사하지 않고 서서히 점진적으로 자신들의 권력과 부를 보다 많이, 영구히 축적하고 유지하기 위한 방편을 사용할 줄 안다.

 

1. 친절한 파시즘이란

 

이 책은 바로 이러한 가히 예술적 경지에 이른 기득권 세력들의 전체주의화 하는 보이지 않는 힘에 대한 민중의 깨어난 시선을 촉구하는 저술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알지 못하는 사이에 잠식되고 있는 시민의 자유와 권리의 협소화, 나아가 사회적 소외와 노예화에 이르는 끔찍한 세상을 마주하지 않기 위한 진정한 민주주의에 대한 각성을 외치는 책이기도 하다.

1980년에 출간된 전체주의화되고 있는 현대 선진 자본주의 사회의 비판과 결코 잃어버릴 수 없는 민주주의의 가치에 대한 위대한 저작이 이제야 국역되어 소개된 것은 많은 아쉬움을 일깨운다.

 

이 안타까움은 오직 탐욕스럽게 개인의 재화 축적과 권력의 향유에만 몰두했던 10년 남짓의 사회적 퇴행기간에 대한 박탈감 때문이다. 또한 자유와 민주주의 모양새를 하고 기득권이 허용하는 한계 안에서 보상과 인센티브, 위계의 상승과 같은 자아 부풀리기를 통해 조용히 스며들어 예속과 잃어가는 자유를 인식하지 못하는 압제 사회로의 점진적인 이전을 추진했던 거대기업-정치권력 집단의 친절한 가면 뒤의 민낯을 때늦게 보게 되었다는 이유 때문이기도 하다. ‘친절한 파시즘이란 이렇게 보이지 않는, 위장된 채 개인의 의식에 스며들어 복속시키는 혹독한 부-권력의 체제이다.

 

기득권의 항구화에 도전하는 모든 개인과 집단은 불온한이라는 딱지가 붙는다. 한국사회의 기득권 세력들은 이를 빨갱이’, 혹은 종북세력’, ‘좌파라는 상징어를 통해 왜곡된 이미지를 덧씌워 적대감을 표현한다. 사회의 모든 정치경제적 의사 결정은 최상층의 울트라 리치(최고의 부-권력 계층)가 한다. 그리고 이들을 떠받치며 상층부에 머물려면 누가 비용을 댈지를 잘 알아 모시고, 울트라 리치의 탐욕을 정당화하고 실현시키는 실용적, 실질적, 실증적 면에 통달한 소위 지식엘리트에 진입하여야 한다. ‘울트라 리치가 허용하는 범주 내에서자유와 보상을 누릴 수 있다. -권력의 최상층과 상층의 기득권은 이렇게 구성된다.

 

그런데 소수의 기득권 상층부가 항구화하기 위해서는 중하층의 기득권 세력을 이용해 절대 다수인 민중을 통제 관리 할 수 있어야 한다. 중간관리자급 관료집단, 고급장교급 군인집단, 중견, 대기업의 임원급 간부....등등 중하급 기득권 집단에 상층부로의 위계이동이라는 작은 통로와 울트라 리치의 이익실현 이바지에 대한 보상과 인센티브로 세력을 구축한다. 여기에 소속되지 못한 뜨내기들조차 자신들이 기득권 계층이라는 환상에 사로잡혀 태극기를 흔들며 태생적으로 보수적일 수밖에 없는 부-권력의 상층부에 맹목적인 충성을 불태운다. 획일화되고 극도로 편협한 사고로 우민화된 이 계층들은 무솔리니 파시스트의 하급 전위대원들의 모습이 중첩된다. 태극기를 흔들며 애국자인 체하지만 실상은 법치의 원칙을 뒤흔들어 태극기를 모욕한다. 민주주의 근간을 훼손하는 친절한 파시스트의 하수인임을 자각하지 못하고 말이다.

 

2. 세련된 오늘의 파시스트 - 구조적 폭력의 비가시성

 

-권력의 최고계층은 기득권 세력의 이 같은 유지와 병행하여 다수의 민중에게 역시 당근을 던진다. 각양각종의 복지자금, 후원, 자원봉사기금으로 빈곤을 유지할 정도만큼의 선심을 쓴다. 이제 멍청한 보수 골통들을 제외하고 세련되고 지적인 보수 인물들은 이러한 복지정책이 최상층의 기득권, 즉 자신들에게 이익이라는 것을 안다. 참여정부의 뒤를 이어 다시금 권력을 차지한 기득권 세력의 정점에 있던 이명박 정권이 제일 먼저 착수한 것이 종합편성채널이라는 TV방송사를 대기업들에게 선심 쓰듯 나누어준 것이라 할 수 있다.

 

울트라 리치의 이익을 더욱 제고하고, 최상층 기득권 세력인 자신들의 정당화를 대변할 창구를 전혀 폭력적인 방식을 취하지 않고 획득하는 최고의 수단이었으니 말이다. 더구나 매체는 민중에게 새로운 예속의 질서를 인식하지 못하는 새에 슬며시 습관화시키는 기막힌 도구역할까지 수행한다. 이들은 음식의 질펀한 관능적 세계를 펼치고, 드라마의 절반이상은 폭력적인 세계의 모습과 부의 권력화에 대한 반복적인 학습을 은연중에 종용한다. 컬트와 광기, 노골성과 적나라함에 열광하는 야만의 세계를 판타지화한다.

 

소비자 광고는 끊임없는 계획적 구식화를 통한 신제품 소비를 북돋운다. “충족되는 필요가 소비자의 필요가 아니라 자본과 권력의 축적을 추구하는 울트라 리치의 필요임을 소비자 민중은 알지 못한다. 오히려 가치관, 신념, 태도에 영향을 미쳐 새로운 필요를 인식하지 못하는 낙후된 구시대적 견해라고 비난하기까지 한다. 이렇게 부풀려진 자아와 오를 수 있으리라는 지위의 추구에 현혹되어 기득권에 충성한다. 모두에 인용한 장 자크 루소의 말이 입증되는 현실이다.

 

아마 이렇듯 겉으로 드러나지 않아 비가시적이기에, 버트럼 그로스는 유령이라는 표현을 썼을 것이다. 이 책의 핵심이랄 수 있는 2부인 친절한 파시즘이라는 유령은 그래서 독자인 우리들에게 11개의 장()에 걸쳐 고전적인 파시즘의 거친 폭력성을 띠지 않으며 서서히 민중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훼손해가며 최상의 기득권 세력인 자신들의 부와 권력을 확장하는 오늘의 정치, 경제, 문화 사회적 현상들과 유형들을 적시하고 있다.

 

민주적 장치들을 겉 장식으로 하며 세련되게 민주주의를 훼손하는지, 나아가 반기득권적 대통령을 무력화시키는 거대기업들의 연대를 통한 국가경제의 농락은 물론 예방적 쿠데타에 이르기까지 바로 지금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는 기득권 세력들의 행태를 생생하게 볼 수도 있다. ‘슬라보예 지젝이 그의 저서 폭력이란 무엇인가에서 논파한 눈웃음 지으며 뱉어내는 정중함과 자선의 이면에 축적된 구조적 폭력이라는 비가시적, 근본적 폭력성을 떠올리게 된다.

 

통상 겉으로 드러난 폭력을 주관적 폭력이라 하고, 드러나지 않은 비가시적 폭력을 상징적 폭력구조적 폭력이라고 정의하고 있는데, 상징적 폭력이란 언어 자체에 들어있는 것으로 언어가 의미세계를 대상에 부과하는 형식이며, 구조적 폭력이란 경제, 정치체가 정상적으로 작용함으로써 나타나는 파국적 결과이다. 즉 정상적인 상태에 내재하는 폭력이어서 정상을 혼란시킴으로서 두드러지게 가시화되는 주관적 폭력과 달리 보이지 않는 폭력이다. 바로 친절한 파시즘의 본질에 가닿는다.

 

버트럼 그로스가 책에서 인용하는 조지 오웰1984에 등장하는 신어(新語) 정책처럼 대중통제의 방편으로 언어를 훼손시키는 미래 전체주의 사회의 모습을 빗대어 오늘날의 신화, 전문용어, 직설화법이라는 삼중언어의 현상을 통찰해 내는 것은 지젝의 상징적 폭력 그것이라 할 수 있다. 새로운 바벨탑을 계속 세워 바벨탑 사이의 소통을 어렵게 만드는 것은 기득권의 효율적인 전략이다. 이렇게 대다수의 반기득권 집단인 민중들은 자신들이 획일화된 전체주의 세계속으로 깊숙이 들어가고 있는 것을 인식하지 못할 뿐 아니라, 이 기득권의 세계가 난공불락의 요새라는 무기력과 불가능성에 굴복하여 그 제한된 범주, 즉 기득권이 세워놓은 질서에 열중하는 것이 곧 성취요 성공이라 맹신한다.

 

3. , 우리, 민중은 어떻게 해야 하나

 

그렇다면 어찌해야 할까? 이 모든 기득권적 질서라는 부-권력 네트워크의 부당성과 예견되는 불합리와 부정성에도 불구하고 너무도 공고하게 이루어진 이들의 커넥션을 끊어내는 것은 그 복잡성과 역사성으로 인해 불가능에 가깝게 보이기만 한다. 결국 민주주의의 얼굴을 한 기득계층의 점진적인 과두 권력 사회의 유령들을 파괴하고 민중의 민주주의적 가치를 훼손당하지 않기 위한 절대적이고 기막힌 대응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일까? 아니면 무력하게 다가올 역사적 미래에 순응하며 제 살 길을 찾는 것, 기득권적 질서에 편입되기 위해 안달하며, ‘올더스 헉슬리가 예견했던 멋진 신세계의 자유와 행복이 교환된 전체주의 계급사회, 그 디스토피아로의 발걸음만이 가능한 것일까? 최상층의 기득권세력들의 의사결정, 다시말해 지금 이 사회에서 벌어지는 무수한 담론들에 무관심한 것이야말로 최선의 선택일까?

 

책의 3, ‘진정한 민주주의는 유령, 친절한 파시즘이라는 구조적, 상징적 폭력에 대항하기 위한 시민적 자세와 태도, 인식에 대한 제언을 담고 있다. 결정적인 방법론이란 없다. 다만 우리는 기득권에 훼손되고 휘둘리지 않는 민주주의를 지켜낼 수 있다는 것이다. 친절한 파시즘의 냄새가 우리 후각을 자극하고, 이미 파시즘이 도래했다고 외치는 것부터가 시작일 수 있으리라는 것이다. 우리 문학작품에는 이처럼 거대권력 네트워크의 부정과 불의를 민중에게 알리는 호루라기 부는 소설이 있다. 소설가 공지영도가니에서 그리곤 근작인 해리에서 친절한 파시즘이 뿜어내는 악취, 민중의 자유와 권리를 파괴하는 기득권 네트워크를 향해 지속적으로 경고음을 울린다. 그저 한 사람부터 깨어나기 시작하면 된다. 반지성주의가 넘쳐난다. 무관심과 무지가 찬양되는 대중매체의 불온성에 자신도 모르게 서서히 익숙해지고 자신들의 자유가 완전히 파괴되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에는 이미 너무 늦을 것이다. 미지근한 물이 든 비이커에서 유영하는 개구리가 점진적으로 달구어지는 열을 인지했을 때는 너무 늦은 것처럼.

 

바로 지금 부-권력의 끈끈한 커넥션을 지닌 어떤 언론 매체를 보더라도 기득권의 이익에 봉사하지 않는 기사를 발견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임의로 선택한 한 신문의 제목 기사들을 추려보면 정말 놀랍기 그지없다는 것을 알아차릴 것이다. 중소기업을 살리기 위한 경제정책인 협력 이익 공유제에 대해서는 기업판 최저임금제 우려”, 미국의 일개 컨설팅업체의 국가경쟁력 예견표를 인용하여 마치 그것이 사실의 모든 것인 양 한국만 국가전략 안 보인다”, 청년 일자리 예산에 대해서는 생색내기 공염불”, 현 경제정책에는 유연한 노동시장 정책이 없다고 비난하면서(기업 해고자유를 말함) “40년 전 유럽좌파의 실패를 뒤따르고 있다고 비난하는 반기득권 정부 정책기조를 비난하고 있다. 하나의 신문 전체가 이처럼 거대 -권력의 기득권 이익에 봉사하는 기사로 도배되어있다. 이것이 우리사회에서의 친절한 파시즘의 얼굴이다.

 

아마 이 역작은 오늘, 우리 대중들에게 정작 깨어나야 할 지성과 인식이 무엇인지 깨우쳐 줄 것이다. 우리와 우리의 미래 자손들이 마음껏 그네들의 자유와 평화를 만끽하며 그 어떤 불의한 세상의 폭력에 방치되지 않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각성하는 참 기회가 되어 줄 것 같다. 아마 407반기득권적 대통령 무력화 시키는 법에 이르면 1980년에 출간된 이 저술이 놀라우리만큼 2018년 한국사회를 말하고 있다는 것에 경악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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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가 우선적으로 당신과 마찬가지로 인간이라고 믿어요.

나는 모든 일에 대해서 스스로 생각하고 설명을 찾아야 해요.”

                                                                        - 인형의 집에서

 

 

결혼과 성 역할을 둘러싼 허위와 기만을 폭로함으로써 근대 여성해방운동의 불씨를 당겼던

헨릭 입센의 희곡 인형의 집이 주체적 인간으로서의 여성상을 위해 다시금 소환되었다.

    

 

오는 11월 예술의 전당 개관 30주년 기념행사의 일환으로 3막으로 구성된 인형의 집이 연극무대에 오른다.

희곡의 줄거리는 널리 잘 알려져 있듯이 남편에 종속된 존재로만 여겨졌던 가정주부인 노라

한 인간으로서 홀로 서기위해 집을 떠난다는 이야기이다.

페미니즘의 열기가 지속되고 있다. 민음사에서 예술의 전당 에디션으로 출간 예정된

인형의 집21세기 지금 입센의 메시지를 환기하는 의미 있는 기회를 일깨워 주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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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석영’ 선생은 한국문학에 노동과 빈곤의 문제를 시작으로

민초의 시선을 통한 역사의 심원한 통찰과 인간 체온의 따뜻함이라는

보편적 진리를 확인케 해준,

또한 날선 비판과 고발의 용기를 가르쳐 준 우리문학의 거인이시죠.

 

추천작품: <오래된 정원>, <여울물 소리>, <낯익은 세상>, <강남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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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하찮은 존재에 불과하던 유인원이 어떻게 지구 행성의 주인행세를 하게 되었는지 인류의 과거를 두루 더듬었던 사피엔스에 이어, 영원불멸의 삶을 희구하며 궁극적으로 신이 되고자 하는 인간 종()의 미래를 탐사하며 오만함에 고양되어있는 인류를 향해 마지막 경고의 메시지 같았던 호모데우스로 인간 미래에 대한 논의에 많은 인간들의 시선을 모았던 유발 하라리(Yuval Noah Harari)’교수가 인류의 현재를 위한 교훈을 내놓았다.

    

 

새로이 출간된 책은 21 Lessons for the 21st Century,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이라고 해석하면 될 듯하다.  과거와 미래를 말하고 이제 화급한 현재를 얘기한다. 이로서 그의 '인류' 3부작이 완결된다.

    

 

 

하라리 교수의 눈에 비친 오늘의 인간들은 여전히 자신들의 직면한 일상에 허우적대느라 인류의 미래라는 거대 담론에 무관심한 종으로 보였던 것 같다. 그렇다고 이 어리석은 인간들에게 혐오와 멸시의 질책을 보내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런 우리들에게 배울 수 있기를 바랄 뿐이라고 말한다. 다만, 인류의 중차대한 운명, 당면한 곤경들에 대한 보다 진지한 참여와 사유의 기회가 되도록 돕고자 하는 것이 목표라 하고 있으니 말이다.

 

 

사실 우리 모두는 다급하게 처리해야 할 것들에서 놓여나질 못한다. 그래서 인류의 미래가 자신에게 부당하게 결정되었다고 뒤늦게 호소해보아야 역사는 냉정하다. 바로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우리 인류가 직면한 문제라는 것이 진정 무엇인지를 그래서 알아야 한다. 하라리는 뭄바이 빈민촌에서 두 아이를 기르느라 분투하는 홀어머니의 관심사는 다음 끼니다.” 라고 말한다. 즉 눈앞에 닥친 끼니의 문제가 지구온난화나 자유민주주의위기 같은 것보다 훨씬 다급할 것이라는 얘기다. 그런데 이 관심 밖의 일로 인해 뭄바이 빈민촌에서마저 살 수 없는 곳이 되면생존의 뿌리마저 상실하는 결과에 직면하게 된다. 21 Lessons ... 은 바로 이 당면한 곤경의 상이한 면들을 다루고 있다.

 

 

전 세계 사회를 규정하고 지구 전체의 미래에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높은 주요 힘들을 살펴보는 이 교훈 선집은 현재의 우리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자극되어야 하는지를 깨닫게 해주는 고귀한 방향등이 되어 줄 것 같다. 최소한 명료한 전망을 얻을 수는 없을지언정 우리의 미래를 위한 핵심 질문이 무엇인지는 알아차리게 해 줄 터이다.  20188월 영문판의 출간과 서문이 소개되자 독자들의 탄성어린 찬사가 이어지고 있다리말판도 동시에(9.1 예정) 출간될 예정인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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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의 회화나 드로잉 작품들을 보노라면,

'조르주 바타이유(Georges Bataille)'의 죽음의 다른 이름인

'에로티즘'의 현현을 보는것 같은 느낌을 받곤한다.

  

특히 황금비()로 변한'제우스''다나에'에게 젖어드는 상징적 작품인

 <다나에; Danae>의 그 열락의 표정은 자아(自我)의 경계가 사라지고 존재의 연속성이 구현되는 순간,

바로 신성한 그 무엇을 느끼게 한다.

 

 

  

한편, 우리말로 굳이 번역하자면 '물뱀'이라고 표현될 밖에 없는

 <물뱀;Water Snakes>연작중  <Water Snakes II> 또한 그 몽환적 표현에 넋을 잃고 한참을 들여다 보게 하는데,

오색의 화려한 선율이 넘실대고, 생명의 절정이자 죽음의 심연인 황홀의 경지가 그곳에 있는 것만 같아,

그림 앞에서서 한동안 몽상에 깊이 빠지게도 된다.

 

 

 

"모순과 역설은 에로티즘의 본성 앞에서 인간의 본성일 것이다.

연속성의 열락을 희망하고 때로는 불연속성의 고독을 희망하기도 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지혜롭게도 또는 음험하게도 모순되는 두 항의 양립을 모색하는 발칙한 존재"이다.

 

- 조르주 바타이유에로티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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