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사람들의 비밀스러운 삶 디 아더스 The Others 10
사이먼 밴 부이 지음, 공보경 옮김 / 푸른숲 / 2012년 8월
평점 :
절판


슬픔, 외로움, 이별, 추억, ... 그리고, 미처 알지 못하지만 사랑인 것들. 우리들 마음 저 깊숙이, 아니 의식의 저편에 묻어 둔 감정들. 이것들에게 문득 가만히 다가가게 하고, 꺼내게 하는 향기와 꽃과 바다와 눈과 비, 어느 공원과 쇼윈도 속의 마네킹이기도 하며,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과 사물들이 있을 것이다. 그 마주함의 찰나(刹那)가 영겁(永劫)의 시간이 되는 그런 순간이 있을 것이다. 절로 가슴속에 환한 미소가 퍼져나가는 그런 시간들. 이 소설집은 내가 구사할 수 있는 형용의 한계를 훌쩍 넘어버리는 이야기들이다. 그 아름다움, 슬플만큼 아름답다는 말이 어법에 맞는지 모르겠다. 내 몸과 마음이 이야기의 흐름에 젖어드는 것을 방해하고 싶지 않을 뿐이었다고 한다면...

 

눈 감고 내 마음에 끝없이 들려주고픈 19편의 장단(掌短)편 소설들이 발산하는 맑디맑은 아름다움이 눈을 떠버리면 속절없이 날아버릴 것만 같아 책을 덮고 가슴에 올려둔 채 가만히 누워있기조차 했다. 첫 번째 수록 작품인「작은 새」의 여백의 여운 같은 이야기의 사물들과 행동들 - 카프로니의 시집, 아르헨티나 지도, 와인병의 동전들, 침대 밑 운동화 - 에 내재된 감사와 존중의 사랑, 그 고아함에 다시금 첫 페이지의 문장으로 돌아갔었으니 말이다.

 

결여, 결핍, 상실, 그리고 이별과 죽음. 이 명사들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고 있지만, 지나치게 지적으로만 알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이것들에 잠재된 삶에서의 무수한 감정들을 헤아리고 있는 것인지 가만히 내게 되묻게 된다. 내가 지금 잃고 있는 것, 그 결여가 바로 이것일 수도 있음을. 아내와 지키지 못한 소박한 여행의 약속이, “그 구두 정말 멋져요” 라고 사랑스런 눈길을 보내던 연인의 진심이, 기차 매표원이 그리다 구겨버렸던 유리창 너머의 이름 모를 여인이, 구두 수선공이 되고픈 어느 소년의 사과 한 개가, 결코 이해받지 못할 여인들의 질투가, 자식을, 아내를 잃은 남자의 고통이, 어느 가난한 남자에게 몰래 전해진 케이크가, 귀가 들리지 않던 아내의 죽음이, 이 모든 것들에서 나는 사람은 상실을 매개로 결합된 존재일 밖에 없음을 보게 된다.

 

상실을 매개로 결합된 사람들임을 깨닫는 순간, 수술대 위에 누운 아내의 결핍을 이해하게 되고, 두고 온 구두를 간직하고 있는 옛 연인의 아픔과 비로소 소통할 수 있으며, 쇼윈도 마네킹이 아니라 구겨진 스케치 속의 여자와 차갑게 얼어붙은 눈 내리는 달 빛 속에서 꼬옥 안을 수 도 있을 것이다. 또한 임자 없이 무성하게 자란 사과나무는 분명 사랑하는 사람이 심었을 거라는 소년의 순박한 대답에서 비루하기만 했던 구두수선공의 삶이 풍부해지고, 질투와 시기로 거북해하던 아내가 제 옆자리의 쿠션을 톡톡치며 남편을 바라보는 그 시선만으로도 사랑은 말없이 풍성해지는 것이다.

 

추운 겨울 누군가 몰래 내준 케이크가 “손을 뻗는 대신 두 손으로 제 얼굴을 감싸고 자그마한 손가락 사이로 살짝 케이크를 내려다보는” 아이의 모습에서 더없는 최고의 선물이 되고, 청각장애 아내의 그 결여의 사랑에서 나치 장교인 아버지를 떠난 유태인 어머니와 아버지의 공허함, 상실의 추억을 사랑할 수 있게 된다. “인생은 소소한 사건들이 모인 박물관 같다.”는 소설 속 한 문장에서, 과거의 편린들, 추억이 발설하는 왠지 아득한 슬픔같은 아름다움의 느낌이 되살아난다. 그래서인지 나는 갑자기 추억에 닻을 내린 채 조금은 뒤쳐져 있고 싶어진다. 그것들에서 내가 미처 알지 못했던 이별과 상실의 이면에 있었던 감정들을, 사랑들에게 작은 목소리로 사랑을 진정 알지 못했음을 혼자 웅얼댄다.

 

그리고 내 의식의 오솔길을 따라 내면에 은닉되었던 자아와 마주하려는 시도를 해 볼 용기를 내 본다. 누구나 비밀일 밖에 없는 이야기가 있다. 그 꼭꼭 숨겨져 있던 이야기가 마음에서 나오기 시작할 때 우린 그것에서 아름다움과 사랑을 느끼게 된다. 진정함이란 이런 것일 게다. ‘비로소 드러나는 사랑’, 정말 삶의 의미 같은 사랑이란 무엇인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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