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데라토 칸타빌레 (구) 문지 스펙트럼 19
마르그리트 뒤라스 지음, 정희경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1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극히 제한적인 직접의 묘사와 어떠한 설명 혹은 해명도 없는 소설이다. 인물의 실체는 오직 독자의 해석력과 추론능력에 의존하고, 그래서 기술되지 않은 공백은 독자가 메워나가야 할 몫이다. 이 과정 때문에 인색하다 할 정도로 간략한 문장은 상상의 느낌으로 엄청난 이야기로 불어나고, 그것이 매혹하는 힘을 갖게 되는 소설이다.

 

“복도 쪽으로 열려 있는 출입문께에 그림자 하나가 나타나, 어슴푸레한 침실을 더 어둡게 만들 것이다. 안 데바레드는 헝클어진 현실의 금발을 손으로 가볍게 쓸어 넘기리라. 이번엔, 그 여자도 사과를 할 것이다. 대꾸가 없을 것이다. ”

 

이 문장은 부정(不貞)을 품은 여인의 심리와 이를 알아챈 남편의 고통스런 관용을 묘사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그림자의 실체나 대꾸의 주체에 대한 어떠한 묘사도 없고, 사과의 객체를 설명하는 내용이 없지만 책을 읽는 이로써 그 의미의 여백을 채워 나가게 하는 묘미가 있다.

 

소설의 시작도 이와 같이 밑도 끝도 없는 상황의 묘사에서 시작된다. 피아노 레슨 장면, ‘모데라토 칸타빌레’를 두고 아이와 아이의 엄마, 그리고 피아노 선생의 공허하고 짜증스런 대화가 반복된다. 여자의 비명소리가 들리고 여자는 소리의 현장으로 다가선다.

 

운집한 사람들, 경찰차와 경찰들, 피를 흘리고 쓰러져 있는 여인, 여인의 입가에 흐른 피에 아랑곳 없이 옆에 누워 미친 듯이 절규하는 남자의 모습을 목격하게 된다. 이 외에 이 상황에 대해서는 어떤 설명도 없다. 그러나 죽음에 이를 만큼의 어떤 지고의 사랑이 빚어낸 극적 결과라는 이미지를 그리게 된다. 이 모호한 이미지가 소설을 끌고 가는 모티브이기에 아이의 엄마, 소도시 유력 사업가의 아내인 ‘안 데바라드’의 내면을 휘저은 것이 무엇인지 우린 극히 간결한 이 묘사에 내재될 수 있는 의미들을 부여하고 해석하는 상상의 읽기를 하게 된다.

 

이 작품에 대한‘마르그리트 뒤라스’, 작가 본인의 말처럼 억제된 표현, 거울의 반사 같은 간접적 묘사를 할 수밖에 없었음을 이해하게 되면 억압되어 절제된 문장들이 숨기고 있는 관능에 몽롱하게 빠져들게 된다. 아이의 피아노 레슨에 보호자로서 동행하는 행위조차 더 없이 상류층의 현숙한 여인이 반복적인 일상의 단조로움을 벗어나기 위한 방편이었음을 알게 되면 피를 흘리며 쓰러진 연인을 안고 얼굴을 부비며 울부짖는 남자가 여자에게 죽음으로 완성된 사랑으로 스며든 것으로 이해했으리라는 짐작을 가능케 한다.

 

사랑 때문에 죽음을 택함으로써 그 욕망이 일상성으로 진부화되는 것을 막는 완전한 사랑의 재현으로 내면화 된 것이다. 여자의 일탈적 욕망은 그녀의 거주지인 상류층이 있는 지역의 반대편에 있는 노동자들의 거리와 그곳의 카페로 발걸음을 하게하고, 그곳에서‘쇼뱅’이라는 남자와 함께하게 된다. 이 만남의 주제는 죽은 여자와 그녀를 애타게 부르며 절규하는 남자의 이야기에 할애된다. 삶과 죽음이 서로 스며들 정도의 완전한 사랑의 얘기로. 두 사람은 이 가공된 절대적 사랑의 시공 속으로 몰입되어 간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현실의 실제적인 재현으로 연결되지는 않는다. 다만 사랑하는 사람에게 죽기를 원할 정도의 사랑이란 무엇인지를 체험하려는 방식으로서 수행 될 뿐이다. 이렇게 지독할 만큼 절제된 감정은 오히려 가공할 정도의 엄청난 격렬함, 미칠 듯한 간절한 무엇이 되어 잠자던 감성을 깨운다.

 

결국 본능의 욕구란 것을 억제하고 엄격하게 통제하여 가리겠다는 우리들의 위선과 기만은 이 소설이 취하고 있는 간결함과 직접적 묘사의 회피와 여백 가득한 공상적 재현의 사랑이란 내용을 통해 역설적으로 더욱 드러나는 결과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리곤 절대적 사랑이란 이처럼 환상 속의 것으로만 완결되어 현실에서 과연 도달 할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절제미의 진수를 보여주는 사랑과 욕망의 공백 가득한 몽상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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