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래그먼트 - 5억년을 기다려온 생물학적 재앙!
워렌 페이 지음, 하현길 옮김 / 비채 / 2009년 9월
평점 :
품절


이 작품을 읽는 중에도 후속 작이 기대될 정도였다고 하면 허풍이 될까? 아니 이 작가라면 그런 기대를 해도 된다는 생각을 품어도 허물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과학 소설로서 현재의 누적된 과학의 성과를 이 만큼은 소화해야 될 것이란 신뢰를 갖게 된다. 진화론을 기반으로 유전공학, 분자생물학, 식물학, 동물학, 지질학 등에 대한 탄탄한 이론적 초석위에 현실 가능한 완벽한 허구가 창작되어있다.

 

엄밀한 과학적 추론이 창조해 낸 소설의 세계는 가히 매혹적이다 못해 숭배하고픈 심정이다. 이 소설은 인간 종(種)의 신성화, 생태계를 마음대로 주물럭거리면서 이제는 “유전 공학으로 직접 생명 코드를 파괴하고”, 게다가 “수십 억 년에 걸쳐 만들어진 진화회로를 배배꼬아서 역병처럼 환경을 통해 순식간에 창궐될 수 있는 유전적 붕괴 상태로 내몰고” 있을 정도로 오만해져 있는 인간 지성에 대한 경고의 메시지를 고립된 독자적 진화의 생태계로 이끌어 진지하게 숙고케 하고 있다.

 

동,식물학자를 태우고 세계 자연 생태계의 탐험을 주제로 한 리얼리티 쇼프로그램, ‘시 라이프(Sea Life)'를 촬영하는‘트라이던트 호’는 200여 년 전 영국 전함이 발견했다고 알려진 당시 선장의 이름을 딴 ‘헨더스’섬에 상륙한다.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았던, 혹은 거부되었던 미지의 섬, 카메라맨, 과학자들, 쇼프로그램의 스태프들이 상륙하자 곧 지금까지 지구 생태계에서는 접하지 못한 괴생물체들의 공격을 받고, 처참하게 몰살된다. 여성 식물학자‘넬 덕워스’와 카메라 맨 단 두 사람만이 죽음의 섬에서 탈출하는 데 성공한다. 갑각류와 포유류가 뒤섞인 것 같은 엄청난 크기의 괴생물체의 잔혹한 공격과 무참하게 죽음을 맞는 대원들의 모습이 실시간으로 방송되고, 이는 곧 미국 정부의 정보차단 조치와 함께 항공모함을 비롯한 대규모 군사작전과 NASA를 비롯한 최고의 과학자들을 파견한 조사로 이어진다.

 

순간적으로 방영되었던 헨더스 섬에서의 생물체와 인간의 죽음을 한낱 쇼로만 여기던 과학자들은 현지에서 마주한 존재들이 완전히 다른 별개의 진화 세계를 구축한 생명체들임을 인식하게 된다. 이 전혀 새로운 생명체들의 섬, 암수 한 몸으로 절지동물과 갑각류, 그리고 규정할 수 없는 모습을 하고 무한 번식을 하는 미지의 생명체들과 섬의 지질학적 조사에서 5억 년 전‘고대륙 파노티아’의 한 조각이 분리되어 완전한 고립 속에 독자적인 진화과정을 겪은 것으로 판단한다.

이 생물체들은 오직 무한한 공격성만을 지니고 있다. “모든 것들이 모든 걸 먹는”, 포식자가 피식자이며 피식자가 포식자인 무한 파괴의 생태계이다. 식물은 낯 과 밤의 환경에 따라 광합성과 동물의 포식이란 이중적 양태를 보이고, 동물들은 태어남과 동시에 번식하며, 태생 중에도 번식하는 가공할 순환체계를 가지고 있다.

 

소위 지구상의 유일한 지적 생명체라고 자부하는 인간들은 “성공적인 생태계는 협력을 지향하고 강탈을 피하는 방향으로 진화한다.”고 자신들의 이성이 자유의지를 통제할 정도로 인간 자신의 고귀함을 신뢰한다고 하지만, 과연 이 말이 과학적 진실을 내포하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사실 논쟁이 끊이지 않는다. 그러나 5억년 동안 지구상의 다른 어떤 세계와의 교류도 없이 단절되어 고립된 새로운 생태계인 헨더스 섬은 이러한 과학적 가설들을 여지없이 산산조각을 내버린다. 인간의 조잡한 오만과 편견, 수많은 과학적 주장들은 폐기되어야만 하는 것이 되고 만다. 협력이나 공존은커녕 무한한 살육전이 반복되는 생태계가 5억 년 간 진화를 거듭하며 온전한 생태계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오직 공격과 포식을 위한 행위를 위해 진화한 섬의 이름을 딴‘헨더스 쥐’, ‘헨더스 원반 개미’, 인간의 몇 배 크기인 거미 모양을 한‘스피거’등은 지구상의 가장 날렵한 동물인 ‘몽구스’조차도 순식간에 갈가리 찢어발긴다. 지구상 어떤 치명적 식물이나 동물도 헨더스 생태계의 생물과는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결론에 이르고 정부와 과학자들은 인류를 멸종시킬 수 있는 헨더스 섬의 생태계를 완전히 파괴할 것을 결정하기에 이른다. 이처럼 스토리는 긴박하게 흐르고, 헐리웃 영화와 같은 감각적 이야기의 구조가 더해져 인류의 과학적 오만과 인간의 어쭙잖은 지성에 대한 진중한 물음들이 심각하다거나 무겁지 않게 전달되는 것 또한 이 작품의 미덕중의 미덕이랄 수 있다. 타고난 이야기꾼이란 생각이 들 만큼 재미에 빠져든다.

 

그러나 표본조사를 위한 엄중한 괴생물체들의 사체를 수집하고 임박한 섬의 파괴를 위해 철수 하던 중 식물학자‘넬 덕워스’와 동물학자인‘제프리 빈스뱅거’, ‘대처 레이먼드’ 등은 지적 생명체를 발견하게 되고, 이것은 인류에게 중대한 질문을 던지게 한다. “지적인 존재가 하나뿐인데도 이 지구가 간신히 버티며 살아가고 있는데, 그런 종이 하나가 더 생긴다.”면 과연 인류를 비롯한 기존의 지구 생태계는 지속될 수 있을 것인가? 아니면 위대한 인간의 지성이 스스로 종말을 회피할 정도로 겸허해 질 수 있을 것인가? 의 딜레마이다. 헨더스 섬의 완벽한 생태계가 포유류인 인간과는 전혀 다른 구각류의 형태를 지닌 지적 생명체를 탄생 시킨 것이다. 자신의 과거를 알고 미래를 계획하며, 선택 할 줄 아는 생명체, 그러나 그렇기에 인류에게 더 위험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소설은 이들을 파멸에서 구해 인간과 동승한 채 생존한 것으로 장면의 막을 내리지만, 과연 이것으로 끝나지는 않을 것 같다. 이 소설의 남녀 주인공인 넬과 제프리가 다시금 등장하는 『pandemonium(가칭; 지옥의 수도 혹은 대혼란』이란 작품의 출간이 예고되고 있는 것을 보면, 성급하지만 국내의 동시 출간도 기대하게 된다.

 

이렇듯 소설에는 화려한 지적 성찬이 그득하지만 단연 눈길을 끌었던 과학적 가설이 있다. 모든 생명체의 수명은 그것들의 세대 간 교배 가능 기간의 대략 두 배라는 이론이다. 즉 세대 간의 교배를 방지하도록 모든 타이머 스위치가 장치되어 한 유전 계통은 건강한 상태로 남아있는 기간을 통제한다는 것이다. 무한 번식을 하는 종은 수명이 그만큼 짧아진다. 반대로 교배를 할 만큼 성숙하기 위한 기간이 오래 걸리는 생명체는 그에 따라 수명이 길어 질 것이다. 소설 속 지적 생명체인 일명 ‘헨드로’들은 수명이 수백 년 이상으로 묘사되며, 따라서 개체의 수도 극히 적고 독자적인 생활을 한다. 인간 수명을 연장하는 것이 우리가 고이 지켜온 상당히 많은 사회적 관습에 대한 도전이 될 것이라는 가설이다.

 

이러한 흥미진진한 진화생물학의 추론들을 비롯한 과학적 상상력이 이 작품 전반의 지적 구조를 풍성하고 탄탄하게 한다. 2002년 작고한 진화론의 거장인‘스티븐 제이 굴드’와 다윈의 적자로 자타가 인정하는‘리처드 도킨스’의 진화론의 증거들이 완성도 높은 소설로 재구성되었다고 해도 부족함이 없을 정도이다. 사이언스 스릴러이자 액션 어드벤처의 진정 최고 수준의 작품이라 불러도 무방하지 않을까?...읽는 내내 절로 수많은 몽상과 상상의 세계로 인식의 지평을 넓혀나가게 한다. 자연 위에 군림하는 인간의 지적 교만에 대해서, 인간의 이성과 지성이라는 것의 조잡함에 대해서, 진화론적 증거들이 말하는 생명체의 기원에 관해서, 생명체 수명의 수수께끼에 대해서,...소설 한 편이 이 만큼 인간, 인류의 본성에 대해 진지한 생각을 갖게 했다면 위대한 것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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