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의지, 그 환상의 진화
프란츠 M. 부케티츠 지음, 원석영 옮김 / 열음사 / 2009년 2월
평점 :
절판


‘자유의지’에 대한 논의의 실효성은 인간 삶에 대한 믿음의 근원을 휘저어 그것의 유무에 따라 완전히 새로운 가치체계를 수립하여야 하는 것과 같은 혼돈의 문제를 안고 있다는 점에 있다. 과연 인간은 자유롭게 자신의 의지를 행사하는 것일까? 이 물음에 대해서는 일말의 회의(懷疑)조차 갖지 않았으며, 오히려 어떠한 외부의 조건이나 억압으로부터도 양보할 수 없는 인간 최후의 가치이자 존엄성에 대한 방호막이라 여겼던 나에게는 황당하기조차 한 것이었다 할 수 있다.

내가 어떤 사고나 행동을 하는 것이 내가 의식적으로 의도한 결정의 결과가 아닐 수 있다는 의혹은 ‘나’라는 존재에 대한 궁극적이고 본원적인 불신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내가 오늘 그녀(그)와 데이트 약속을 하기위해 전화번호를 누르는 것이 나의 주체적인 의지의 발현이 아니라는 말인가? 바로 이 저술은‘아니다!’라고, 단지 자신을 보호하여 생존 가능성을 높이기 위한 환상에 불과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즉 마치 자신의 의지에 의해 스스로의 행동을 결정한다는 환상이 진화에 의해 선택된 인간 종(種)의 형질일 뿐이라는 것이다.

여기에는 인간을 정신과 육체로 분리하는 이원론적 오류, 인간의 뇌에 정신과 영혼이라는 별개의 장치가 육신과는 분리되어 따로 존재한다는 데카르트식 발상에 여전히 사로잡혀 있는 함정이 있다는 것으로 근본주의적 종교관을 지닌 사람들 이외에는 오늘의 우리들은 모두 동의하는 지식이다. 결국 인간의 정신이란 것은 뇌의 화학적, 물리적 반응의 결과와 분리된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는 인식이다. 일례로 만일“우리가 심장, 간, 소변을 의식적으로 조종해야 한다면 우리는 몇 분 안에 죽고 말 것이다.”라는 지적처럼 우리의 기관들이 자율적으로, 즉 우리가 의식 및 의지라고 부르는 것과 독립적으로 작동하지 않는다면 인간이란 종은 아마 오래전에 자연선택에서 배제되었을 것이라는 점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인간은 왜 이러한 환상을 진화의 과정에서 키워나갔을까 하는 의문을 갖게 된다. 단지 뇌의  반응 결과에 불과한 것을 자기의지의 결과로 인식하는 것처럼, 인간이 도저히 통찰 할 수 없는‘설명의 곤경’에서 출현한 신(神)과 종교라든가, 인간에게 미리 허락된 수명이 한정된 것이라면‘이 세계’가 아니라‘저 세계’에서 계속 살수 있다는 환상은 인간 생존에 있어 전적으로 유용한 것과 같다는 것이다. 
 

어쨌거나 이 저술의 핵심 논지는 인격체로서의 인간과 그의 인격을 어떻게 정의할 것이냐의 여부는 “뇌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우리의 자의식, 욕망, 기대, 기쁨, 두려움, 공포, 꿈은 결국 진화에서 인류를 오늘날의 인류이게끔 만들어준 기관으로부터 나온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현대의 신경생물학적 지식의 배경에서 정신현상은 뇌와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으며, 바로 뇌의 표현 혹은 뇌의 발현에 불과하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자유의지의 이념은 우리 뇌가 만든 것이며,‘자유의지’가 독립적 실재라고 가정할 만한 어떤 불가피한 근거도 없다는 것이다. 사실 이 저술의 주장을 전개해나가기 위해 인용되고 등장하는 철학과 과학을 종횡 누비며 증거하는 이야기들은 지적 재미의 백미라 할 수 있다. 책에 붉은색 밑줄을 긋다보면 전체가 붉은색으로 변할 정도가 되어버리니 말이다. 재미있는 인간 사고의 모순 례를 하나 소개하면, “‘나’의 다리가 아프다”라거나 “‘나는’ 두통이 있다”라고 우리는 말한다. 이는 생각하는 나와 다리 또는 두통을 느끼는 두뇌가 분리되어 존재한다는 표현이다. 어떻게 나와 다리가 다를 수 있을까? 즉 “다른 모든 기관이 복종하는 사고와 느낌과 의지의 중심지인 상위의 ‘나’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이원론적 사고의 예인데, 인간은 이처럼 자신을 기만하는 거짓 프로세스를 진화시켜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의식이란 뇌의 특정한 물리적, 화학적, 생리학적 과정에 완전히 속박되어 있다는 것인데, 여기에 책임이란 도덕적 의무의 논리를 들이댈 수 있는가하는 중대한 문제가 발생한다. 만일 살인자가 단지 뇌의 속박에 의해 다르게 행동할 수 없었음을 주장하고 이를 인정할 수밖에 없다면 오늘 대다수의 인류사회가 수호하는 형법은 물론 사회의 기간시스템을 유지할 도리가 없을 것이다.
일례로“소녀를 강간하고 죽인 살인자가 자신은 어떤 자유의지도 갖고 있지 않았고, 자신의 행동은 유전자와 뉴런과 호르몬에 의해 결정된 것일 뿐”이라 항변한다. 그럼 살해당한 소녀의 아버지는 살인자를 똑 같은 이유로 살해 할 수밖에 없었다고 강변할 것이고 이는 살인의 연속으로 이어질 것이다. 소위 ‘피의 복수’가 계속 될 것인데, 우린 무슨 근거로 책임을 물을 수 있을까? 자유의지 없음을 그것은 단지 진화적 유익론에 의한 환상이라고 주장하면서 어떻게 이를 해결할 것인가? 우리의 도덕관과 법제도를 지탱하는 논리가 설 수 있는 토대가 없지 않은가?

그러나 이를 뒤집으면 인간은 다른 사람에 죽임을 당하지 않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살인자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지만 그들로부터 살해당하지를 원치도 않는다. 그래서“우리는 제재를 통해 그 자신이 요구하지 않을 어떤 것도 요구하지 않는다”는 인간사회에서 공동생활을 하는데 필수불가결한 도덕을 발전시켜왔다는 것이다. 이러함에도 역시 인간이 야기하고자 하지 않았던 일에 대한 처벌은 여전히 인간의 무기력을 완전히 설명하지 못한다. 결국 인간의 뇌는 여전히 원시적 단계에 머물러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며, 자유의지라는 실용적인 환상의 그늘이 해소되지 않았음을 반증하기도 한다.

그러함에도 자유의지는 단순히 우리가 삶을 꾸려나가는 데 도움을 주는 가설에 불과하지만, 온갖 종류의 트릭을 적용해 의미없는 우주에서 우리 존재의 무의미성을 잊게끔 해준 것에 대해 행복하다고 말해도 좋을 듯싶다는 저자의 자유와 존엄성의 저편을 그리는 긍정의 희망을 지니기도 한다. 이 저작은 사람의 이해와 관계에서 빚어지는 현상들, 사회제도와 도덕적 규범, 나아가 정치와 문화의 현상들을 만들어내는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한 다각적인 모습을 성찰케 해주고, 보다 겸허하게 우리, 아니 나의 존재에 대해 사유하는 시간이 되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미래의 인간사회와 제도의 방향을 새로이 궁구(窮究)케 하는 계기와 기반을 제공하기도 하며, 진화론의 계통발생사적 인간 본성에 대한 지적 탐구도 가능케 하는 진화론적 과학철학의 진수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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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en 2012-01-24 02: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흥미롭고 멋진 글 잘 읽었습니다. 필리아님의 글을 쭈욱 읽다보니 문득 찰스 다윈의『종의 기원』에 나오는 '심리학'에 관해 언급한 한 대목이 떠오릅니다.
* * *
먼 미래에는 ······ 여러 가지 분야가 개척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심리학은 개개의 정신적인 힘이나 가능성의, 점차적인 변화에 의한 필연적 획득이라는 새로운 기초 위에 세워지게 될 것이다. 인간의 기원과 역사에 대해 광명이 던져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