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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이 눕는다 - 김사과 장편소설
김사과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문득, 나는 왜 소설을 읽고 있는 것일까? 라는 의문을 떠올린다. 책 속에 고개를 본격적으로 처박아대기 시작한 것에는 분명 사연이 있었다. 소설 속 주인공 내가 표현하듯이 비록 희망이나 행복 같은 것을 찾아 볼 수는 없으나, “나는 그 안에서 안전”할 수 있다는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그 시간만큼은 세상의 흉물스러움이 직접 닿지 않았으며, 더구나 그곳에서는 같은 시선과 고민을 발견 할 수 있고, 어떤 해코지나 위협도 내게 미칠 수 없음을 알기에 평온을 누릴 수 있었다.
책에 코를 박고 가능한 직접의 그 추레함과 비루함들과 멀리하려 했던 나와 같은 인물을 우연히 소설 속에서 보게 되는 것은 기쁨이라기보다는 착잡함이 맞는 표현이 될 것이다.
주인공‘나’는 “근면하고 쾌활한 워킹 클래스”(일해야만 먹고사는 사람들)들이 성공이란 쾌락을 향해 어떠한 의구심도 없이 살아가는 것에 동화되지 못한다. 문학잡지에 소설한편을 발표한지 3년이 지났지만 더 이상 소설을 쓰지 못하는 그녀의 좌절은 이렇듯 끊임없이 물질에 경도된 사회의 공허하고 형식적이며 빈약한 정신세계를 어쩌지 못함에 있다. 게다가 한계라는 단어의 의미를 상실한 듯 세상은 온통 욕망이란 관념 덩어리로만 치닫고 있으며, 이를 이탈하는 존재는 정신병자가 되던, 고립되던, 생존의 가능성이 희박하게 되어있다.
그래서 한 없이 걷고 또 걷지만 그 발걸음을 멈출 수 없었던 것은 좀체 세상에서 삶의 이유를 발견 해 낼 수 없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런 그녀의 앞에 나타난 청년,‘풀(草)’은 고결한 삶의 방식을 담고 있을 것만 같은 영혼으로 다가온다. 단지 먹고살기 위한 약간의 일과 그냥 그려야 하기에 그림을 그리는 그의 세상에는 어떠한 두려움도 들어설 자리가 없어 보이기까지 한다. 하지만 공업고등학교를 졸업한 독학의 무명 화가인 풀이 그리는 그림은 제아무리 재능 있는 작품이라도 위선과 가식으로 들어찬 자기들만의 리그로 구성된 세상에선 아무것도 아닐 밖에 없다.
세상은 저네들의 견고한 성에 작은 흠집이라도 될까하여 아름다움으로만 무장된 진실이 비집고 들어오거나 그러한 삶의 방식으로는 결코 존재토록 내버려 두지 않는다. 이 사회의 가치인 성공의 쾌락을 향한 기차에 동참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다. “아름다운 것들을 계속 볼 수 있다면”그림을 계속 그리고 싶지만 세상은 그렇게만 살 수는 없게 조직되어있다. 이러한 곳에서‘나와 풀’은 사랑을 통하여 서로의 존재에 대한 목적을 확인하지만, “사랑 속에서 행복하게 굶어 죽지 못하고 자꾸 배가 고파서 짜증이 나는” 모순과 부조리함이 삶의 속성이고 진리임을 회피할 수 없음만을 알게 될 뿐.
“끝없이 이어지는 지금 이순간만을 바라보겠다는 약속”이 사랑이라서, 풀을 묶어두려 하지만, 삶은 나를 배반할 수밖에 없다. 삶은 돈을 요구하고, 풀은 그 돈을 벌기위해 나가야한다.
이 소설은 이렇듯 한 편의 부조리극을 보는 듯하다. “안전한, 그러나 적당히 겁에 질린 평균적인 현대인”,그 가엾은 영혼들에게 보내는 진혼곡일지도.
회화공모전 입선으로 찾아간 갤러리에서 외려 전시된 그림보다는 차려진 파티음식이 맛있는 그 터무니없는 허위의 공간과 군상들, 바로 그러한 삶의 본질이 역겨워서 갤러리를 난장판으로 휘젓고, 초대된 한 문학시상식장에서‘나’의 도발은 어쩜“생생하게 살아있음”을 확인하는 행위였을 것이다.
세상과의 타협이란 말이 적절한지는 모르겠지만, 끝내 더 이상 아름다운 것들을 볼 수 없게 되면, 도저히 타협할 이유를 찾아낼 수 없다면 선택 할 수 있는 길은 단절 말고 무엇이 있을 수 있을까?...거스를 수 없는 거대한 질서의 흐름에 대항하는 자유의지가 치뤄야 하는 댓가란 참혹한 삶의 위협이라 것을 인정해야만 하는 것일까?
이처럼 너무도 원초적이고 본질적인 질문을 하는 이 소설은 감각적인 스토리와 문장에도 불구하고 지독한 곤혹스러움을 남긴다. 구역질나지만 매혹적인 이 세계의 아이러니, 바로 그것이 이유가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