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 물고기
J.M.G. 르 클레지오 지음, 최수철 옮김 / 문학동네 / 1998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문명의 야만성에 대한 고발이라고 하여야 할까? 순수함에로의 귀환이라고 하여야 할까? 사회적 약자에 대한 세상의 추악함이 이 보다 절실하게 표현 될 수 있을까?

어린 소녀에게 가해지는 세상의 무차별적 위협과 억압, 강제, 추행은 끊임없는 도피를 종용한다. 이러한 지속적이고 극한적 삶만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때, 나는 내 존재를 계속 유지해 낼 수 있을까?

 

난, 검둥이 계집애, 내 부모가 누군지, 나의 이름이 무엇인지, 내가 어디에 살고 있었는지 모른다. 단지, 다섯 살 인지 여섯 살 무렵의 어느 날 누군가에 의해 자루에 갇혀 낯선 곳에 옮겨졌다는 어렴풋한 기억만 있을 뿐이다.

할머니보다는 마님으로 불리기를 원하는 ‘랄라 아스마’, 나의 주인인 노파는 나를 ‘라일라’로 부른다. 라일라는 몸종이자 벗이자 손녀처럼 키워진다. 그러나 라일라의 어린 몸을 탐하려는 노파의 아들과 폭력과 욕설의 겁박으로 위협하는 며느리가 있는 이 끔직한 세계는 노파의 죽음을 계기로 탈출로 이어지고, 작은 인연만이 존재하던 거리의 여자들, 공주님들이 사는 곳으로 도피한다. 그녀에게 열려 있는 세상이란 다시금 삶의 건강한 기회가 기다리는 땅과는 너무나 멀다.

노파의 며느리 ‘조라’의 추적으로 공주님들과의 그나마 자유로운 세계는 사라지고, 조라의 끔직한 폭압에 묻힌 구속의 노예로서 살아간다. 잠시의 자유의 기회처럼 보인 백인가정으로의 가정부로 대여되지만, 이곳에도 강자인 백인남자의 성적 탐욕의 시선을 피하기 어렵다. 세상은 어린 소녀가 감당하기에 벅찬 가혹한 환경일 뿐이다. 그녀의 생존적 도피는 의지가 아니라 그저 열려 있는 방향일 뿐, 선택이 랄 수 없다. 강자들의 문명 넘어 강을 건너면 소외된 사람들의 열악한 환경이 펼쳐진다. 문명의 야만적 질서가 뿔뿔이 내몬 거리의 공주, 그녀를 보살펴 주던 언니들의 만남으로 작은 위안이 된다. 그곳에는 삶이 없다. 질병과 가난과 죽음만이 도사리는 그 열악한 곳으로부터, 조라의 위협적 추적이 있는 곳을 떠나야한다. “호시탐탐 노리고 뒤쫓고 그물을 치는 그 모든 사람들로부터”...

라일라의 성장한 의식은 프랑스로의 밀입국을 결정하고, 바다를 건너, 에스파니아의 험한 산맥을 넘어, 꿈의 도시 파리로 들어가지만, 그녀를 기다리는 이방인으로서의 지위는 또 다른 소외와 불안의 세상 이상이 아니다. 어느덧 성숙한 여성의 몸으로 거주증을 획득하기 위해 복싱에 몰두하는 연인에게 몸을 열지만, 그녀의 세계는 냉정한 현실사회의 이해와 아프리카 초원과 강을 내달리는 근원으로의 회기를 꿈꾼다. 거주증 없는 불완전한 지위의 여린 흑인 소녀에게 내민 손길은 여지없이 추악한 탐욕만을 드러내고, 프란츠 파농의 『자기 땅에서 유배당한 자들』을 전해주던, 그리고 세네갈의 강변 과 초원을 이야기하던 하킴의 할아버지 엘하즈는 그녀에게 죽은 손녀 마리마의 여권을 남긴다.

이 인간으로서 최초의 실존적 지위가 주어지는 행위는 자못 가슴을 에리듯 파고든다. 어디에도 그녀가 살아갈 바다가 없다. 라일라는 자신을 거친 물살에 이리저리 표류하는 한 마리의 가녀린 물고기라 생각한다. 그녀의 표류는 마리마란 실존의 존재가 되어 미국으로 표류한다. 그녀는 노래를 부르고, 그녀의 노래는 저 멀리 검은 자루에 실려 떠나기 전 “영겁의 시간 전에”,“말라붙은 소금처럼 새하얀 거리, 부동의 벽들, 까마귀 울음소리” 들리던 아득한 세계로 향한다.

“나는 당신에게 주문을 걸었네, 검은색은 내 진정한 연인의 머리카락 색이네.”

서구의 감추어진 사악한 탐욕과 위선, 문명이란 얼굴의 야만성, 세상의 이중적이고 기만적인 모습, 세계화에 감추어진 인종과 지역의 소외라는 얼굴이 아프리카의 당당한 정체성으로 환원되고, 그 아스라한 태고의 소리들이 있는 곳, 그녀가 떠내려 온 검은 대륙으로 돌아왔을 때, 비로소 황폐해진 소녀의 의식은 평온을 찾는다.

잔잔한 서정적 운율이 감아 도는 듯 한 포근한 감성이 내내 맴도는 작품이다. 다분히 저항적이고, 문명의 어두운 왜곡을 질타하고 있지만, 순수함으로의 회귀로 안내되는 여정에서 풍요로운 아름다움, 라일라의 밤!, 그 검은 마법에 매혹된다. 탁월한 문학이다. 소설이 빚어낼 수 있는 선의 극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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