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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렌지와 빵칼
청예 지음 / 허블 / 2024년 7월
평점 :
‘탐욕스럽게 허겁지겁 읽어나갔다’며 이 소설이 압도적 몰입으로 이끄는 작품이었다는 감상평에 절반만큼 현혹되어 집어 들었다. 물론 나머지 절반은 의심을 지닌 채 말이다. 나는 이 소설의 마지막 쪽으로 책장을 넘겼다. 지금까지 하지 않았던 이상 행위를 한 것인데, 그곳에 무언가 주인공의 심적 또는 행위의 도달지점이 있으리라는 기대였던 것 같다.
“그는 내 손목을 세게 쥐고, 끔찍한 눈으로 목도하고 있었다. 칼을 박아 넣으려 하는 사랑의 민낯을. (...) 날에 얼굴이 비쳤다. 울고 있는데도 웃음이 나왔다.” -170쪽
이 히스테릭한 양면성의 장면을 뇌리에 가둔 채 읽기 시작했다. 유치원 교사 오영아가 있다. 그녀는 한 원아의 폭력으로 다친 피해 원생들을 달래고, 발악적 비명을 질러대는 가해 원아로 인해 매일이 고통스럽다. 아이를 한 대 쥐어 패고 싶지만 참아야 하고, 피해 원생들의 항의하는 부모의 분노를 가라앉히는 일까지 도맡아야 한다. 또한 오랜 친구는 그녀에게 세상의 당위에 대한 정의를 주장하며, 작은 어긋남조차 일상의 수행에서 실천되지 않음을 지적한다. 그녀는 그 올바름에 그저 수긍하는 것이 선의이며 갈등을 초래하지 않는 것이 친구와의 우정을 유지하는 것이라 인내한다.
어질고 배려심 깊은 연인과 미래를 계획하는 것은 사랑의 열정이 없어도 그의 선한 의지를 거절하는 것은 도덕적 배신이라 여기고 순응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자신을 채근한다. 그러나 이 모든 수용과 수긍에 내면의 목소리를 억압하여야 하는 것에 답답함을 느낀다. 마음껏 분출되는 감정과 의지에 따라 자신을 표현하고 싶다. 억압에서 자유, 해방을 향한 마음을 옥죄며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 고통스럽기만 한 것이다. 그녀는 이를 도덕적 선의 길이고, 이 억압을 일탈하는 것은 부도덕, 즉 악이라 여기는 것 같다. 결국 그녀는 심리상담소를 찾는다.
나는 이러한 도덕적 선악을 전제로 한 이후에 서술되는 일탈의 행위를 반면교사로 하여 비로소 선악의 조화, 혹은 중립지대를 오가는 것이 마치 삶의 기술이라는 깨달음에 이르는 주인공의 서사가 오히려 너무 판명하여 도덕적 회색지대의 모호함을 희구했다는 주인공의 태도가 기만적으로 보이기까지 했다. 주인공 오영아가 세상을 판단하는 생각이 여러 곳에서 드러나는데, 마일로로 불리기를 악착스레 외치는 문제아 은우의 엄마가 운영하는 에코 비건 빵집 나루터와 일방통로 길을 사이에 두고 마주한 염가의 상품을 파는 25마트의 대비라던가, 심리상담소에서 대뇌피질 시술 이후 타자의 절망과 폭력성의 쾌락에 자기를 내어주는 행위처럼 오직 세계를 이분법적으로 분별하는데 능숙한 사람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공공을 위하는 만족, 그것이 희생시키는 사적인 행복이야말로
도덕이라는 쾌락이 가진 양면이었다.” -118쪽
주인공이 자기감정 해석에 커다란 오해를 하고 있다고 여겨진 이유이다. 발설하고 행위하고 싶지만 상황과 타자와의 관계에 따라 자기 내면의 원초적 반응을 억제하여 초래 될지 모를 갈등을 사전에 차단하는 것은 결코 도덕적 행위 때문인 것만은 아니다. 조금만 상상 실험을 해봐도 우리는 짜증나지만 타인을 위해 자리를 내어주어야 하는 무수한 경우를 그려낼 수 있다. 그것에는 인간애라던가 관대함, 도덕적 이성의 발휘 여지가 없는 그저 타인이 함께 있음으로 인해 야기되는 삶을 살아가는 존재에게 강제된 의무인 것이다. 우리들은 현존하는 존재들에 대해 알지 못하고 의식하지 못하며 이러한 관계의 의무에 강제되고 있다. 유치원 교사 오영아는 자신의 본능적 반응의 억제를 마치 ‘도덕적 소비’처럼 여기는데, 결코 그러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승객으로 가득찬 만원버스에 새로운 승객이 오르면 욕지거리를 속으로 삼키며 작은 공간을 어쩔 수 없이 내어주는 것처럼, 타인들과 맺는 관계는 이 불가피한 자기 공간의 일부 포기이다. 여기 어디 도덕적 미덕이 존재하는가.
직장에서 상사의 무례한 부탁이나 곤란할 일의 회피, 저의가 불순한 동료의 행위 등을 무난하게 참아 내거나 거절하지 않고 맡는 경우에 이것에 대체 어떤 도덕적 미덕이 있을까? 직장이 자신의 생계나 성취의 불가피한 과정, 혹은 타자들의 불편한 시선을 회피하기 위한 자기애나 자기 이익을 위해서이지 도덕적 소비와는 거리가 너무 멀다. 친구와 연인과의 관계에서도 일방적인 수용과 순응성은 상실이나 외로움의 회피와 자기감정의 보호를 위한 것이지 무슨 도덕적 소비가 개입하고 있다는 것인지. 더구나 세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상들이나 인간들의 관계는 도덕적 이성의 실현과는 연결지점이 거의 없다시피 하다. 아마 인간 대부분의 행위는 밀집한 버스 내에서 벌어지는 짜증나는 의무의 연속이고, 그것은 바로 다른 존재가 내 옆에 있음으로 인해 발생하는 우발적이고 우연한 문제일 뿐이다. 즉 우리는 이러한 사회적 의무를 의식하지 못하면서 살아가는 존재들일 것이다.
소설에 이런 문장이 있다. “짐승 같은 웃음 아래 가라앉은 다른 지점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112쪽)”, 타인이 불행을 맞아 송두리째 삶이 무너지는 것을 목도하며 쾌감에 절어 웃음을 터뜨리는 자신에게 그 심연에 웅크리고 있는 또다른 본성을 묻는 목소리일 것이다. 그리곤 시술 이전의 자신이 억제했던 목소리와 행위를 도덕적 소비로 해석하면서 “미래의 연속적 행복을 스스로 박탈하는 어리석음이었나.”라고 사적 행복과 공공을 위한 만족의 두 가지 양면적 쾌락을 문제 삼는다. 그리곤 “도덕적으로 산다는 건 사실,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멋진 회피였다.(135쪽)” 고 결론을 내린다. 나는 은우의 엄마가 오영아에게 하는 말이 오히려 진실에 가까운 목소리로 여겨졌는데, “사회적으로 용인된 가치만 추구하는 것, 당신은 그걸 지키기 위해 스스로를 부단히 통제했고, 그 기능이 무척 발달한 여자였습니다.(146쪽)” 라는 지적이다.
기성의 질서와 제도, 가치에 대한 순응과 이에 대한 부정이나 의문의 필요성이 절단된 교육에 길든, 아니 기막히게 훈련된 세대들은 소위 시민적 소양이라는 도덕성, 타인의 시선에 대한 두려움만을 내면화한 것 같다. 그렇기에 사회적으로 승인된 가치에 따라 행동하는 것을 ‘도덕’이라 생각하는 오해를 하는 것은 어쩌면 불가피한 귀결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이 주인공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아프고 속상하다.
사회적 시선에 붙들려 억제된 자기의지를 해방코자 하는 그 고통스런 바램은 도덕적 일탈과는 결코 같은 것이 아니다. 그건 존재의 당연한 욕구인데 기성의 세상이 그것을 극단적으로 왜곡시켜 놓았기 때문일 것이다. 에필로그에서 “부끄러운 여자, 추한 여자는 태어나는 게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라는 주인공의 자각이 절실한 시절이다. 이 만들어짐의 외피를 인식하는 것, 그 지점으로부터 존재는 자유로워 질 것이다. 관계와 상황의 불편함과 짜증남은 도덕의 미덕이나 소비와 무관한 우리의 사회적 의무에서 발생하는 지극히 자연스런 감정이다. 그것에 어떤 심각한 의미를 부여하게되면 삶이 궁색하게 되고, 정작 괴물로 둔갑하게 되기까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