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리노 멜랑콜리 채석장 그라운드 시리즈
장문석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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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어느 시기보다 지금의 한국 사회는 담론 빈곤의 시대로 여겨진다. 논쟁은 사라지고 자기와 다른 상대는 아예 존재치 않다는 듯이 퇴행적이고 독단적인 행태가 그 바보같은 얼굴로 모든 언로(言路)를 잠식하고 있다. 이 유아적 독재는 세계를 깊고 넓게 이해할 수 없기에 고작 얄팍한 전략과 기술적 술수의 말()아닌 자기만의 옹알이를 하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소통이 불가능한 시대가 열리고, 바로 지금을 사는 인간들의 삶을 지탱하는 깊은 뿌리에 대한 그 어떤 논의도 실종되고 있다. 파쇼들의 발흥, 그리고 독재는 이렇게 시작된다.

 

이탈리아 북부 도시 토리노의 멜랑콜리를 말하는 이 책은 어쩌면 이 결여(缺如)의 뿌리를 역사적 성찰을 통해서 드러내고자하는 작업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가져 본 적 없는 대상의 상실로 인해 느껴지는 슬픔이 멜랑콜리다. 자기 마음대로 하기 위해 다른 견해를 가진 존재들을 제거하여, 자기에 순종하는 인간들만 있는 세계를 파쇼 체제라 부른다.

 

파시즘이 일방통행하지 못했던 도시, 산업자본주의와 노동계급의 헤게모니 투쟁, 그리고 세계화 신자유주의를 겪으며 온갖 이데올로기의 상흔을 지니고 있는 토리노를 맴도는 멜랑콜리는 현재의 한국 사회를 휘감아 도는 멜랑콜리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바로 이 책은 이 멜랑콜리, 그 결여와 실패를 직시하여 현재를 인정하기 위한 애도 작업이다. 이 과정을 통과함으로서, 즉 결여의 뿌리를 이해함으로써 비로소 미래로 걸음을 내딛을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1970년대와 80년대의 한국의 정치권력 집단을 파쇼라 불렀다. 권력자의 의지와 다름은 곧 징벌의 대상이었으며, 사회 구성원은 권력에 순종하여 일사불란하게 움직여야 하는 전체주의적 독재가 지배하는 사회였다. 강렬한 자기 집착의 권력, 이들은 타자를 품을 수 없었으며, 자신들의 이익과 쾌락에 대한 그 어떤 상실도 참아내는 방법을 알지 못하는 집단이었다.

 

개인들의 소소한 자율적 행위조차 감시와 간섭, 체포와 감금, 고문의 대상이 되었으며, 인간의 존엄성이란 실체는 부인되는 사회였다. 이 비참한 사회에서 벗어나기 위해 민중들은 세대를 이어가며 30여년의 오랜 고통스러운 저항의 과정을 통해 타자를 자신의 품에 안는 법을 권력에게 가르쳤으며, 상실감을 인내하고 인간의 한계에 의연해지는 법을 인식, 체화토록 했다. 오늘날 우리들이 체감하는 인간의 삶에 대한 이러한 이해의 성숙과 인간 존재에 대한 존엄성과 자유에 대한 고양된 앎은 이렇듯 수많은 희생의 결과라는 토대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 지난 시절에 대한 복기(復碁)는 잃어버린 과거에 대한 단순한 노스탤지어가 아니다. 지금 한국 사회에서 벌어지는 극단적 갈등을 새롭게 바라보기 위해서, 그래서 개인의 일상적 자유와 이 자유를 지키기 위한 조건을 생각해 보기 위해서이다. 어떤 개인의 소박한 자유는 엄청난 가시적 행위로 갑자기 억압받는 것이 아니다. 경제적 여유의 점진적 축소, 일자리 질의 악화, 다가온 위기에 스스로 대처할 힘의 부족, 언어에 대한 자의적 해석에 의한 보이지 않는 규제 감시와 압박 등처럼 언제 내몰렸는지 알지 못하는 사이에 그것은 개인들의 숨통을 조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지금 한국인들은 삶의 불안정성이 급작스레 증가하고 있다고 아우성이다. 경제적 부담의 가중은 정치적 순응의 강제와 직접적 연관성을 갖는다. 20세기 초 근대성의 물결 최()일선 통로였던 이탈리아의 북부 변방도시 토리노를 주목하는 것은 무수한 이데올로기의 각축장으로서 이를 수용하거나 갈등하며 그네들이 겪은 삶의 역사가 남기고 있는 실체들의 발견이 곧 우리의 현실 반성의 거울이 되어 줄 수 있는 까닭이다.

 

저자는 자유를 말한다. 이 자유는 물론 '개인들의 소박한 사적 자유(liberty;작은 자유)'의 가치를 소중하다고 말하고 있지만, 이 자유를 지키기 위한 자유의 전제, 작은 자유를 가능토록 하는 '큰 자유(freedom)'의 중대함을 또한 말하고 있다. 그것은 리버티가 위험에 빠질 때 등장하는 추상적 자유, 진정한 자유, 권리로서의 자유를 보장하는 자율성의 자유를, 위기의 순간에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힘으로서의 자유를 가리키고 있다.

 

혁명적 자유에서 혁명이 자유를 넘쳐서는 안 되고,

혁명적 자유는 일상적 자유를 돌볼 수 있어야 한다.” - 205

 

저자는 이러한 자유의 역사를 토리노라는 한 지역의 고유한 특성을 토대로 자본과 노동의 대립, 파시즘과 토리노 지식인들의 비타협적 비판의식을 역사적 맥락에 의한 이념적 계급적 관점을 넓혀 시선의 편협을 극복한 이해로서의 가치판단을 주장하고 있다. 이 역사적 과정에 등장하는 경제적 주체로서 피아트 자동차의 경영집단과 노동운동의 계급적 투쟁, 파시즘에 대한 양심적 거부의 지적 기반의 실체들의 실천적 행위에서 발견되는 자본의 내적 투쟁을 탐사함으로써 이들 무수한 갈등과 충돌 속에서 프리덤의 개념이 창출되고, 바로 토리노가 이 큰 자유의 요람이 되었음을 제시하고 있다.

 

저자는 피아트의 창립자이자 경영주였던 아넬리를 이념 중립적 자본가로 내세움으로써 포드주의의 대량생산 체제의 도입으로 성취한 경제적 부흥, 파시즘에 대한 저항, 새로운 이념형 공장(링고토 공장)으로서 사회주의 문화 모델, 생산자 문명의 신질서 창출이라는 미화된 자본의 이상, 즉 작은 자유는 큰 자유의 희생이 될 수 있다는 의미를 씌운다. 이러한 이해의 기반에서 피아트는 자본주의와 파시즘을 동일하게 해석되는 것을 지지할 수 없는표상이라 주장한다. 여기에 20세기 반파시스트의 대표적 지식인 고베티근대자본주의의 고독한 영웅으로 등장시키기까지 한다.


 


자유주의자였음에도 고베티의 나쁜 부르주아에 대한 가차 없는 비판은 계급적 차원을 비롯한 민족적 차원의 승화된 투쟁이었다면서 그람시와 그의 긍정적 접근을 민족적-민중적 차원의 투쟁이었음을 부각하고, 이러한 토리노의 지적기반이 산업도시 토리노를 상징하는 피아트의 경영 이념의 뿌리였음을 간접적으로 시사하기도 한다.

 

사실 이 민족적이라는 언어와 노동과 자본의 계급투쟁을 반파시즘이라는 시대적 산물의 출현에 대한 저항으로 희석시켜 민족적 민중적 투쟁으로 확대하는 논리는 동의하기 어려운 논증이다. 특히 민족이라는 영토적 환상, 자신들만의 순수한 혈통적 공동체는 자신과 다른 것과의 섞임은 불순과 타락이라는 바보같은 통념으로 이어지고, 타자를 배제, 폭력의 대상자로 낙인 찍는 배타주의라 할 수 있다. 고베티, 더구나 그람시를 민족주의자와 엮어 노동계급의 저항을 민족주의를 저해하는 행위로 바라보게 하는 시각은 어쩌면 의도된 반노동적 관점으로 이해될 수도 있다. 저자가 예시하듯 피아트의 생산 확장에 따른 남부지역 노동자의 유입에서 그네들이 겪게 되는 차별과 배제는 이러한 민족주의가 지닌 태생적 한계, 그 위악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을 단지 노동자 계급 내의 위계적 차등이나 차별의 문제로 인식하는 것은 곧 민족주의에 매몰된 당대 토리노 지식 엘리트들의 한계로 보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피아트가 이탈리아 국가경제의 30%를 차지할 만큼 국가 권력이 무시할 수 없는 경제적 권력을 지니고 있을 때, 저자가 말하는 권력과 기업자본의 틈새로서 독립성은 가능할 수 있으며, 또한 실제 현실적인 현상이기도 하다. 이것을 경영주체인 자본가의 리더십이나 이념적 자율성으로 이해하는 것에는 무리가 있다. 1969년의 뜨거운 가을로 표현되는 노동자 파업을 노동자의 방임적 노동적 해태(懈怠)로 인식하고 있는데, 이를 관료화된 노동자와 남부에서 유입된 신진 노동자의 갈등과 충돌의 산물로 읽어내며, 이러한 노동계급의 갈등을 방치하고 경영집단의 새로운 질서 상상’, 즉 자동화 및 생산 분산화 등 노동 체제의 변혁 도모를 야기한 책임이 노동계급에 전가되고 있는 인상을 받게 된다.

 

특히 공장을 벗어난 시내 집회, 행진으로 나타난 1980년 토리노 4만인 시위는 노동계급에게 조종을 울린 검은 화요일로 기록되고 있는데, 노동자 투쟁에 염증을 느낀 시민들이 가세한 반 노동투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경영집단이 노동 권력에 대한 우위를 점하게 된 사태인데, 저자가 기록하고 있듯, “4만 인 행진이 피아트의 주도면밀한 계획 아래 이루어졌음을 암시한 피아트 최고경영진 가루초의 말처럼 자본이 계급투쟁을 주도한다는 사실만 입증할 뿐이다. 이 사건의 중요성은 노동계급의 문화적 패배와 권력 투쟁에서의 패배를 상징한다는 말처럼 대중적 자기 계급 인식에 대한 위기성을 두드러지게 보여준 사태로서 바라보게 한다.

 

이러한 부분적 시선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나는 저자의 자유주의적 관점과 사회주의적 입장의 동행 가능성에 대한 제의, 그 연구 노력에 공감한다. 특히 고베티의 도시라 불릴 만큼 토리노의 지성을 대표하는 고베티의 자율을 해독함으로써, 자유주의=중간계급(유산자), 사회주의=노동계급이라는 획일적이고 전통적인 통상적 인식, 다시 말해서 냉전적 진영 논리의 거부로서 지향의 발견은 오늘의 우리네에게 중대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복종과 순응, 무기력과 절충성이 지배하는 온갖 기회주의에 대항해 진정 품위있는 이탈리아를 추구했던 비판적 용기, 기성 규범에 대한 수동적 순응적 수용을 벗어나 스스로의 법()을 세우는 자율적 노력의 주창은 바로 지금 한국 사회의 구성원인 우리 민중들에게 요구되는 가치일 것이다.

 

차이와 모순을 두려워하지 않고, 또 체계와 원칙에 집착하지 않고

서로 다른 것들을 아우르는 대범함이 필요하다.” -217

 

작지만 강했던 토리노의 옛 사보이아의 귀족적 고귀한 전통이 파시즘의 반동적 보수적 민족주의에 대한 비판적 거부가 가능토록 했음은 소위 니체가 말하는 힘에의 의지, 곧 내적 강인함, 탁월함의 고귀성을 읽도록 한다. 아마 저자의 견해에 대해 오독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자유주의자 고베티와 사회주의자 그람시의 계급 갈등에 대한 공감적 유대가 가능했듯, 서로 다름의 섞임, 배타성이라는 편협과 부정성의 극복은 동일자의 순수성이 아니라 다른 것들이 서로 밀고 들어가 뒤섞이면서 새로운 변화의 개체로 재탄생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인간의 대상화, 사물화, 상처 입은 인간과 사회에 대한 짙게 드리워진 멜랑콜리는 아마 저자가 말하는 대범성, 용기라는 애도의 과정이 필요한 것일 게다. 오늘 우리 한국 사회가 빠져있는 갈등과 충돌, 그 적대의 수렁에서 빠져나오기 위한 사유로서 20세기 험난한 이데올로기 실험장이었던 토리노의 이 역사적 탐사는 귀중한 전범이 되어 줄 수 있을 것이다. 본성상 인간의 세계는 멜랑콜리 할 것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 적막한 정서를 떨쳐내기 위해 발버둥치는 것 또한 본성일 것이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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