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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인 다이닝 ㅣ 바통 2
최은영 외 지음 / 은행나무 / 2018년 3월
평점 :
이 작품 선집의 기획 의도는 “계속 살아가겠다는 자신과의 약속”으로서의 요리 행위에 대한 것이라고 한다. 7인의 작가가 써낸 질 높은, 참 맛의 식사 모두에 입맛이 맞으면 좋겠지만 사실 이런 욕심은 과욕에 그친다. 물론 입이 짧은, 익숙한 것들에 다스려진 내 탓도 있겠지만.
황시운이 쓴 「매듭」의 한 자극적인 이미지는 다른 어떤 작품보다 그 인상을 깊게 남긴다. ‘펄펄 끓는 육수에서 격렬하게 꿈틀대는 낙지의 몸부림’이란 문장이 빙벽등반 추락사고로 사지가 마비된 남편 윤을 거두어야 하는 여자의 신산(辛酸)한 삶의 모습에 비추어져, 잊고 지내던 통증이 확 되살아났기 때문이다. 이 장면을 바라보는 아이는 그 살아있는 것의 고통에 엄마의 옷자락 뒤로 숨어들기도 하지만, 그 고통의 몸부림을 싱싱한 생명력이라고 탄성을 내지르며 환호하는 사람들도 있다. 마지막 안간힘을 쓰는 사람들, 그 격렬한 움직임에 대해 진정 내가 아는 것이 있기나 한 건지...
이처럼 지극히 현실적인 살아감의 감각을 깨우는 것과는 달리 삶의 인간적 형태에 대한 물음을 하는 김이환의 「배웅」은 요즘의 주관심사이기도 한 ‘생명’의 의미를 반추하게 한다. 기술이 인간을 초월하는 순간을 말하는 특이점의 시대, 신체를 버리고 영혼(정신)을 저장하여 영원히 존재하겠다는 그 기술중심주의 세계에서 자신들만의 종교적 공간에서 살며 오롯이 육체의 죽음이란 길을 걷는 사람들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소설이다. 그런데 이 공간은 폐쇄 공간이 아니라 자신의 의지에 따라 언제든 ‘도시’라 불리는 포스트휴먼의 사회로 나아가 영혼 저장의 영원한 존재의 믿음을 선택할 수도 있다. 흥미로운 것은 이들 중 ‘요한’이란 인물이 도시로 가기로 결정함에 따라 일종의 송별모임에 달콤한 맛의 상징인 ‘초콜릿’의 등장이다. 아마 신체의 감각을 일깨우려는 상징이겠지만, 이것 또한 생체의 존속을 위한 기계적 알고리즘의 하나에 불과하다는 기술자들의 낙관론에 의하면 너무 하찮은 저항 같기만 하다. 어쨌든 우리네 젊은 소설가들이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측면에서 문제 제기의 작은 출발처럼 보인다.
어쩌면 이 작품집을 가장 강렬하게 각인시키는 작품이라 할 수 있는 최은영의 「선택」은 슬그머니 내 기억에서 사라져버린 것에 대한 추궁처럼 들려 괜스레 회피하고 싶은 충동을 일으키게 한다. KTX가 우리 사회에 등장할 때 초고속으로 달리는 기술의 우월감에 도취한 권력의 귀족성이 잉태한, 부자연스러운 희생양이 되어버린 여성 승무원들의 비도덕적 해고에 도사린 우리들의 무지를 환기시키고 있다. 올(2018년) 5월이면 그 투쟁이 시작된 지 12년이 되는 것 같다. 2년 뒤 정규직 전환을 약속했던 채용공고를 무시하고 위탁계약자에게 책임을 떠넘김으로써 저항하던 근로자들을 무더기 해고했던 사회적 참변으로 기억되는 사건이다.
“우리는 옳다고 해서 이기고, 옳지 않다고 해서 지는 세상에 살고 있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강한 쪽은 어떤 경우에도 모든 것을 잃지 않습니다. 그러나 약한 쪽은 최소한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전부를 걸어야 해요.” (P 25)
고작 이러한 불의에 공감할 수 있다는 자위의 내적 만족에 머물면서, 외부에서는 이러한 부당함에 노출된 채 그저 당하고 좌절하는 이들에 아무런 위안도 되지 못함을 안다는 것은 정말 수치스러움이 밀려와 눈을 질끈 내려 감게 된다. 인간이 같이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 mille-feuilles nabe, 밀푀유나베 ]
여성주의의 거센 물결은 이 선집에도 그 모습을 드러낸다. 윤이형의 「승혜와 미오」인데, 퀴어 여성인 승혜의 한없는 자기 왜소화라는 갇힌 내면을 뚫고 나오기를 응원하고 격려하게 하는 소설이다. 육식을 거부하는 연인 미오를 위해 채식의 식단을 준비하던 승혜가 이웃 여자의 도움요청에 따라 그 집 아이를 위해 사뭇 과시적인 소고기를 넣은 밀푀유나베를 만드는 장면은 정말 아름다운 것은 이런 것이야! 라고 말하고 싶어지게 한다. 폐쇄된 껍질을 깨고 나오는 이 땅의 모든 승혜에게 박수를.
끝으로 마음을 한없이 푸근하게 해줬던 이은선의 「커피 다비드」의 소회로 마무리하여야겠다. 독특한 향취와 맛을 지닌 원두와 커피에 어느 섬마을 사람들의 저마다의 이야기가 상응하여 펼쳐진다. 고기잡이를 나섰던 사랑하는 남편을 여읜 여인네의 애틋한 그리움에서, 시집온 인도네시아 여인의 순박한 적응의 장면, 9급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하는 23살 아가씨의 예쁜 질투와 섬사람들의 투박한 일상의 이야기, 그리고 아들의 출소 만기 전에 죽음을 앞둔 해녀의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마셔보는 핸드 드립 커피에 얹어진 소박하고 애절한 이야기까지 동화적 아름다움으로 더럽혀진 마음이 세탁되어 마치 어린아이의 마음이 되는 듯한 가뿐함을 느끼게 해준다.
소설, 문학의 힘이란 참으로 대단하다. 이처럼 일상의 진부함에 빠져 허우적대느라 쉽게 망각하고, 혹은 외면하거나 무시하며, 알지 못했던 것들을 되찾게 되거나, 새로이 알게 되며, 어떤 비로소의 자각이 생기게 하여 현실 세상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혀주니 말이다. 이 선집은 그야말로 ‘질 높은 식사’, ‘참 맛의 식사’를 충분히 제공해 주었다고 해야겠다. 한없이 편협해졌던 내 시선에 양질의 영양분이 흡수된 느낌이다.